소설리스트

17 .M─ (74/101)

17 .M─

크룩 부부에게 케이크와 과자를 얻어 집으로 돌아갔다. 문을 여는 순간 의아해졌다. 레이가 텔레비전을 보며 박장대소하고 있었다. 눈시울을 훔치다 못해 데굴데굴 뒹굴다시피 했다. 저 우울의 황제가 저토록 폭소를 터뜨리다니, 흔치 않은 일이었다.

나는 케이크와 과자 접시를 탁자에 놓으며 레이 옆에 앉았다.

“아니, 무슨 프로그램이기에 그리 웃어요?”

“그, 그게. 아하하.”

레이가 손가락으로 브라운관을 가리켰다. 사회자가 무거운 표정으로 「이거 정말 큰일입니다.」 하며 정면을 쏘아보았다.

―자신의 전생이 자작나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저분을 포함해 현재 386명입니다. 《전생을 찾아라》 프로그램이 막을 올린 후, 유명인의 환생체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매회 숱하게 찾아왔지만, 이번만큼 많은 사람이 몰린 적은 처음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을까요? 전문가의 소견을 들어 보죠.

크으…….

또 눈의 여왕이냐.

절로 혀를 찼지만, 레이가 워낙 즐거워하는 통에 얌전히 있었다.

전문가가 말했다.

―간단합니다. 관련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자작나무가 마녀혐의로 체포당한 때도 한밤중이라, 그 외모가 초상화로 처음 알려질 만큼 그녀를 접한 자들은 극소수였거든요. 요즘 사람들에게는 자작나무가 탑에서 빈궁하게 살았던 사실이 잘 알려져 있지만…….

화면에 자작나무 초상화가 나왔다.

―16세기에는 달랐습니다. 자작나무의 초상화를 그렸던 궁정화가 소렐의 회고록이 출판된 뒤에야, 왕비의 궁핍한 유폐생활이 대중에게 알려졌죠. 그전까지는 궁정사람들마저 자작나무가 그래도 왕비니까 탑에서 그럭저럭 넉넉히 지냈으리라고 잘못 알았다고 합니다. 초상화의 화려한 옷차림도 오해를 사는 데 한몫했고요.

―그렇군요! 어쨌든 후보들 중 한 분만 삼십만 탈란텐의 상금을 가져갈 수 있습니다. 다음 회는 데이탄즈 편입니다. 자작나무와 달리 남아 있는 기록이 많은 만큼, 데이탄즈 후보는 현재 열일곱 명뿐이군요. 그럼, 자작나무 유력후보들을 살펴보겠습니다.

구슬픈 바이올린 선율을 배경으로 눈의 여왕 유력후보들이 주르륵 나왔다. 다양했다. 머리가 훌렁 벗겨진 중년남자를 위시하여 연예인 지망생이 분명한 라틴계 섹시가이, 심지어는 엄마 손을 잡은 남자아이까지 각양각색이었다. 「외로웠어요」, 「아팠습니다」, 「명예를 되찾고 싶습니다」를 남발하며 닭똥 같은 눈물을 똑똑 흘렸다. 아주 가관이었다. 이어서 다음 방영분 예고편이 나왔다.

장엄한 오케스트라 연주와 함께 장발머리 왕이 칼을 휘두르며 말을 타고 적진을 질주했다. 영화의 한 장면인 듯했다. 왕이 장발머리를 휘날리며 「나를 따르라! 용기를 잃지 말라!」하고 맹렬히 부르짖었다. 《구국영웅, 데이탄즈! 무적의 왕, 그리고 현재는?!》 자막과 함께, 반짝반짝한 안경을 쓴 남자가 나왔다.

―적진을 돌파할 때마다 두려움이 치달았습니다. 그때마다 백성들을 떠올리며 용기를 냈죠.

그를 필두로 눈의 여왕 유력후보들보다는 지능적으로 생긴 사기꾼들이 줄줄이 등장했다. 「미친 듯이 말을 몰았습니다. 팔에 꽂힌 화살을 발견한 때는 전쟁이 끝난 뒤였죠」, 「왕비를 희생한 건 어쩔 수 없는 용단이었습니다」 하고, 얼굴색 하나 안 바꾸고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픽픽 웃음이 나왔다. 절로 구레나룻이 떠올랐다. 나는 지프 구석에 처박혀 허옇게 뜬 면상으로 벌벌 떨던, 용맹한 샤이칸 아리사의 ‘환생체’를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하하하.”

레이가 눈물을 닦았다. 나는 케이크를 덜어서 레이에게 건넸다.

“이거라도 먹으면서 보죠. 크룩 부인의 요리 솜씨는 대단하거든요. 저녁식사는 레이도 함께했으면 한다고 부인이 말하더군요.”

“음, 그래요.”

레이가 케이크를 받아먹으며 웃었다. 생크림이 묻은 입매와 반달같이 접힌 눈가에 그만 아랫도리가 확 달아올랐다. 레이가 생크림을 혀로 핥았다. 레이에게는 별생각 없는 행동이겠지만, 도리 없는 이쪽은 사정이 달랐다.

당장에 깔아 버리고 싶었다. 확 덤벼들어 옷을 모조리 벗기고 싶었다. 좆을 처박고 질질 싸 버리고 싶었다. 열흘간 바빠서 섹스도 제대로 못한 나날이었다. 들끓는 욕구가 엄청났다.

그러나 참아야 했다. 인내해야 했다. 가까운 곳에 각종 변태도구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이런 위험천만한 환경에서 레이에게 덤벼들면 어떤 짓을 저지를지 나도 상상할 수 없었다. 자칫하면 짐승취급 받고 레이에게 또 차일지도 몰랐다.

뭐…….

그래도 가볍게 만지는 정도는 괜찮겠지.

레이의 상의로 손을 슬쩍 넣었다. 레이가 움찔했으나 제지하지는 않았다. 그의 가슴을 애무하며 아마빛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묻었다. 레이가 신음하며 내 가슴으로 등을 밀착시켰다. 반응이 생각보다 적극적이었다. 레이도 그간 제법 굶주렸던 모양이었다.

나는 텔레비전 볼륨을 낮춘 후 레이의 옷을 벗겼다. 우유 향내가 풍겨오는 몸에 전신을 포개며 부드럽게 애무했다. 그가 내 손길을 원하는 것이 즐거웠다. 심이 솟은 유두를 만지작거렸다.

“좋아요?”

내가 묻자 레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텔레비전의 나지막한 소음을 배경 삼아 레이와 나체로 엉켜 있는 이 시간이 좋았다. 유두를 자극해 주며 생각에 잠겼다.

오늘, 왕인지 뭔지 하는 새끼를 알아보고자 레이에게 유도 심문을 던졌다. 놈의 면상부터 캐물었다. 한참 고민하던 레이는 눈짓으로 허공을 더듬었다. 그건, 구체적인 누군가를 떠올릴 때 흔히 나타나는 반응이었다.

답이 나왔다. 왕인지 뭔지 하는 놈은 머리 꺼멓고 인상이 날카로운 새끼였다.

다음에는 레이의 연애경험을 캐물었다. 왕인지 뭔지 하는 새끼에게 레이가 마음 주고 몸 줬다가 잔인하게 버려졌다면, 레이의 대답에서 분명 어떤 실마리를 뽑을 수 있으리라 계산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내 예상을 빗나갔다. 아예 산산조각으로 부수어 놓았다. 내가 첫사랑이라고 말했다. 행복감과 창피함이 반반 섞인 표정으로.

그건 참말이었다. 진실이었다. 거기에는 나조차 멍해져서 꼼짝도 못했다.

이건 또 뭘까. 모순 아닌가. 어쩌면 괴로운 나머지 레이가 기억을 일부 상실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방어작용의 기제로 기억의 망각이 발생한 것이다.

망각…….

이것만 생각하면 울적할 뿐이었다. 레이가 실성해 있던 일주일이 기억났다. 내게는 다시없이 달콤한 시간이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레이에게 “저도요.” 하고 대답을 들었다. 함께 춤을 추었다. 달콤한 여행도 누렸다. 죽는 순간에도 잊지 못할 소중한 시간이었다.

“표정이 왜 그래요?”

레이가 내 뺨으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요?”

고개를 갸웃거리던 레이가 다시 내 뺨을 쓰다듬었다. 나도 레이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새삼 씁쓸했다. 역시 레이는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망각의 장막으로 가려진 시간 속에서, 지금처럼 이렇게 우리는 마주 보고 드러누워 서로 뺨을 만지작거렸다. 바로 이 소파에서.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밤이었다.

쇼핑한 옷을 레이에게 입히고 함께 빙글빙글 춤추다가 소파에 쓰러지다시피 드러누웠다. 그리고는 긴 시간 서로를 응시하며 말없이 뺨을 쓰다듬었다. 레이의 표정이 형용할 수 없이 부드러웠다. 웃으면 접히는 특유의 반달 눈매와 입가의 미소까지, 하나하나가 나를 사로잡았다. 내 영혼까지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 모든 추억이 레이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먹장구름에 가려지는 태양처럼, 홀연히. 비에 젖어 사그라지는 장작 연기처럼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왜일까. 대체 어떤 잔인한 일을 겪었기에 레이가 기억의 망각증세까지 겪게 되었을까. 의문과 노여움만 들끓을 뿐이었다.

침착하자…….

쓰디쓴 생각은 그만하기로 했다. 간만의 휴가였다. 내일까지는 무조건 즐겁게 놀 예정이었다. 레이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오늘의 수확(?)을 돌이켜 보았다. 이것만 생각하면 기분이 날아갔다.

‘네. 첫사랑이에요.’

첫날밤 레이를 안았을 때 초짜라고 직감하기는 했다. 그러나 왕인지 뭔지 하는 새끼를 감안하면, 기실 그건 오랜만에 해서 조임이 강했던 것이었다. 어쨌든 정황을 종합할 때, 나는 레이에게 최소한 두 번째 사랑은 된다는 결론이 나왔다. 두 번째 사랑.

성적 문란함이 극에 달한 유럽 국가에서, 스물여덟 살의 금발미인에게, 두 번째 사랑, 두 번째 남자. 나는 어깨를 으쓱 올렸다.

이만하면 행운아지.

정말이지 좀스러웠다. 레오파드도 무릎 꿇은 난잡한 플레이보이 주제에 연인의 과거에는 신경을 곤두세우다니. 여자들이 내 뇌를 들여다본다면 축구공으로 굴려 버리자고 주장할 것이다.

대뜸 엉뚱한 궁금증이 들었다.

“저기, 레이. 그럼 여자하고는 언제 처음 해 봤어요? 42번가에서 줄곧 살았으니까, 꽤 일찍 경험했을 것 같은데.”

어디까지나 별생각 없이 던진 질문이었다. 그러나 순간, 레이의 입가에서 잔잔한 미소가 확 사라졌다. 눈까지 크게 부릅떴다. 온몸으로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이었다.

이윽고 레이가 고개를 푹 숙이더니, 시트를 머리끝까지 천천히 끌어 올렸다. 그러고는 침묵했다. 말 안 해도 나는 다 알아 버렸다.

“뭐, 나도 여자하고는 한 번도 안 해 봤습니다.”

내 정성 어린 위로에도 레이는 대답이 없었다. 끝까지 없었다.

저녁 늦게까지 레이와 함께 소파에서 뒹굴거렸다. 텔레비전을 보며 박장대소하기도 했다. 《전생을 찾아라》가 오컬트 전문케이블의 간판프로임을 오늘에야 알았다. 이 프로에서 탄생한 유명인물의 환생체만도 176명이라고 했다. 진짜가 가려질 때까지 논스톱으로 생방송하는 콘셉트였다. 왕국의 기나긴 겨울이 많은 사람에게 죄를 짓는 듯했다.

밤이 깊어질 때 크룩 부부 댁으로 향했다. 싱싱한 시금치를 곁들인 스테이크가 나왔다. 식사를 즐기고 거리로 나섰다. 퍼레이드가 절정을 달렸다.

갖가지 가면과 망토, 드레스를 걸친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레이와 함께 손을 잡고 천천히 거리를 걸었다. 문득 저만치서 빨간 꽃을 파는 소녀들이 눈에 띄었다. 무심히 지나치는 객들을 붙잡으려 애쓰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피식 웃었다.

이거 그때 생각이 나는걸…….

레이와 처음 축제를 즐긴 그 날 밤이 기억났다. 그때 레이는 한 방향을 가리키며 손짓했다. 그곳에 지금처럼 빨간 꽃을 파는 소녀들이 호객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꽃을 사서 하나씩 나눠 쥐고 거리를 걸었다.

돌연 생뚱맞은 충동이 들끓었다. 실은 예전부터 품어온 망상이 하나 있었다.

망할 주술사 같으니.

이리나의 숍 오픈 파티 이후 품게 된 망상이었다. 그날 어찌나 울적한지 새벽녘까지 잠도 못 자고 천장만 노려보았다. 딴생각이 든 때는 며칠 뒤였다. 돌이킬수록 열이 치올랐다. 아니, 오기가 솟았다고나 할까.

레이는 뻔뻔스런 나를 용서하고 받아들였다. 그 뒤부터 지금껏 우리는 잘 지내고 있었다. 그럼 그럭저럭 된 것 아닌가. 그렇건만 어디서 일면식도 없는 양반이 불쑥 튀어나와서 자격 없네, 헤어져야 하네, 악담을 퍼부어 대다니. 자기가 대체 뭐라고 참견이란 말인가.

그때부터였다. ‘의식’을 치르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를 치켜든 때는.

레이를 곁눈질했다. 레이는 퍼레이드 구경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나는 슬그머니 레이를 이끌고 보석점으로 향했다. 레이가 양미간을 모았다.

“또 보석?”

“아이쇼핑이나 하죠. 이 보석점이 훌륭한 제품이 많은 곳으로 유명하거든요. 레이도 아무거나 골라 봐요.”

“나는 그다지…….”

레이가 곤란한 기색으로 우물쭈물했다. 신경 껐다. 사실 여기에 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의식’에 꼭 필요한 것을 구입하기 위해서였다. 다름 아닌 반지였다.

그간 내가 레이에게 선물한 보석 대부분이 목걸이였다. 목걸이가 레이에게 어울리기도 했지만, 내 관심사가 목걸이에 집중되어 있던 이유도 한몫했다. 직업상 주먹을 자주 쓰고, 장갑도 항시 끼고 다녀야 했기에 반지는 흥미 없는 품목에 속했다. 그러나 오늘은 반지였다.

뻔하지 않은가. 연인 사이에 치르는 제일 기본적인 의식이 반지 나눠끼기였다. 어째 닭살이 돋긴 했지만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이것부터 시작해서 연인들이 갖추는 형식적인 절차는 족족 밟아 버릴 셈이었다.

괜찮았다. 첫 삽을 뜬 이상 끝까지 갈 작정이었다. 나는 어중간한 것을 싫어했다. 그리고 이런 것도 연인 사이에서나 나눌 수 있는 재미였다. 이 깊은 뜻을 레이는 알까 몰랐다. 나는 레이에게 의미심장한 눈길을 던졌다.

“흐흠. 어떻습니까, 레이. 오늘은 색다르게 반지나 구경할까요? 반지 말입니다, 반지. 반지요. 하하하하하하.”

“메사라 좋을 대로 해요.”

센스 꽝의 황제다운 대답만 돌아왔다.

하여간에 눈치 없기는…….

나는 혀를 차며 진열대를 훑어보았다. 무난하게 사파이어 반지로 고를 생각이었다. 예부터 사파이어는 최고의 결혼예물로 손꼽히는 보석이었다. 레이의 생일선물로 사파이어 목걸이를 고른 이유도 이 상징성 때문이었다.

단골을 알아본 숍 매니저가 벌써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손님. 전에 주문하신 목걸이는 마음에 드셨는지요.”

“하하하, 네. 오늘은 세일론 사파이어로 가공한 반지들을 보고 싶습니다.”

“오, 반지라.”

숍 매니저가 나와 레이를 번갈아 보며 웃었다.

“이쪽에 있는 제품들이 세일론 사파이어 반지들입니다. 골라 보시지요.”

“흐흠. 모두 마음에 드는데……. 어떻습니까. 레이도 같이 고르지요.”

문득 레이를 쳐다보니 그의 얼굴색이 벌겠다. 나는 어라, 했다.

설마 눈치를 채서 저러는가. 하하하, 이제야 내 깊은 뜻을 깨달았나.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레이의 마음에 드는 반지로 끼고 싶습니다. 골라 보라니까요.”

짓궂게 말하자 레이가 고개를 푹 숙였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이었다. 그래도 관심 어린 눈길로 반지들을 훑어보는 모습이, 꽤 기쁜 듯했다. 나는 일부러 가만히 있었다. 저 열광적인 뭉크코트 마니아가 무슨 반지를 고를지 궁금했다.

“너무 비싸 보이는데”, “부담스러운데요”, 하며 중얼중얼 궁상을 떨던 레이가 한곳에 눈길을 고정했다. 날렵하게 링을 두른 빈티지 스타일의 반지였다. 나는 반지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흐흠…….

아름다웠다. 심플하면서도 품위가 넘쳤다. 센스 꽝의 황제가 고른 반지치고는 매우 훌륭했다. 웬일이지, 하고 감탄하다가 곧 깨달았다. 진열된 제품들 중 사파이어 캐럿이 가장 작았다. 레이 딴에는 제일 싸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나는 웃음을 꾹 참고 말했다.

“이게 마음에 듭니까? 이걸로 할까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이것과 똑같은 반지로 한 쌍 포장해 주십시오.”

운이 좋았다. 똑같은 반지가 없으면 내 것은 따로 맞춰야 했는데 딱 두 점이 있었다. 매니저와 직원들의 뜨거운 환송 속에서 보석점을 나왔다.

만월의 밤이었다. 카페 노천 테라스에 앉아 축제를 구경했다. 북과 피리 소리가 흥겹게 떠돌았다. 먼 곳에서 흰 불꽃이 꼬리를 그리며 치솟았다. 암흑을 날렵하게 뚫고 치솟은 그것이 삽시간에 펑 소리를 내며 터졌다. 들판을 어지럽히는 진홍빛 나비 떼 같은 형상으로, 축포가 봉우리를 활짝 터뜨렸다.

“와…….”

레이가 숨을 삼켰다. 어딘가에서 불어온 바람이 아마빛 머리카락을 심술궂게 흩뜨리고 떠났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술을 마셨다. 하하하.

이거 진짜 멋진걸…….

깊은 하늘 끝에서 달이 파리한 레몬 빛을 곳곳으로 쏟아부었다. 독하고 치명적인 매혹이 넘쳐흐르는 밤이었다.

“춤이나 출까요?”

“춤이요?”

레이가 화들짝 놀랐다. 나는 광장 한복판을 턱짓하며 말했다.

“네. 춤이요. 저기서 춤추는 사람들 안 보입니까?”

“……남자 둘끼리는 좀.”

“이런, 때가 어느 땐데 그런 고리타분한 말을 합니까? 괜찮습니다. 혹시 호모포비아들이 덤벼들면 나만 믿고 구경이나 해요.”

머뭇거리는 레이를 끌고 춤추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다. 예전처럼 레이는 이번에도 내 발등을 여러 번 밟았다. 그래도 즐거웠다. 내 발등을 밟을 때마다 민망해하는 레이의 표정이 아주 웃겼다.

적당히 춤을 즐긴 후 멈춰 서서 반지 케이스를 꺼냈다. 문득 차디찬 냉기가 엄습했다. 얼어붙은 앙상한 손이 두터운 코트를 관통해 내 몸을 훑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만 아연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왜 이러지. 보석을 선물한 적이 한두 번도 아닌데. 반지를 나눠 끼는 자리라서 그런가.

잠깐 뒤 나는 느리게 입을 열었다.

“레이. 결혼반지를 왼손약지에 끼는 이유를 압니까.”

“아뇨.”

“고대 그리스인들은 왼손 약지의 혈관이 심장과 직결되어 있다고 믿었죠. 거기서 유래된 풍습이라고 하더군요.”

나는 레이에게 반지를 끼워 주었다. 레이가 왼손 약지에서 반짝거리는 사파이어 반지를 말없이 응시했다.

“내게도 끼워 주십시오.”

나는 반지를 내밀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레이가 내 약지에 사파이어 반지를 끼워 주었다.

나는 레이의 왼손바닥에 내 왼손바닥을 정확하게 맞춰서 들어 보였다.

“따라 해 봐요. 우선 가운데 손가락을 구부려요. 끌어안는 것처럼. ……네. 그리고 엄지를 떼서 좌우로 흔들어 봐요.”

엄지에 이어서 검지, 새끼손가락을 차례대로 떼어서 흔들었다.

“마지막입니다. 약지를 떼어 봐요.”

“……어?”

레이가 푸른 눈동자를 빛냈다. 약지가 떨어지지 않았다.

“떨어지지 않죠. 약지만은 아무리 애써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왼손약지에 반지를 낀다고요. 절대 떨어지지 말고 함께 살라는 의미죠.”

“그랬군요.”

레이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나는 레이를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속삭였다.

“사랑합니다. 영원히.”

“영원히……?”

레이가 반지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황금빛 속눈썹이 푸른 눈동자로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한순간 내 전신을 타고 흐르던 피가 얼어붙었다.

어째서 저런 눈빛을.

두려움이 몰려왔다. 온몸이 시취를 풍기는 송장으로 변해 버린 기분이었다. 지금같이 저렇게, 파란 눈동자가 텅 비어 버리듯 흐릿해질 때마다 무엇이 잇따르는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여러 차례 경험했다. 그건 바로 냉대였다. 망토 속에서 별안간 날을 드러내는 검처럼 튀어나와, 반드시 나를 베어 버렸다. 그것이 지금 또 형체를 드러낸 것이다.

왜, 어째서. 무슨 이유로 저토록 눈빛이 싸늘해진 것일까.

혹시 내 감정을 의심해서? 아니면 레이가 자신의 감정에 확신을 품지 못해서? 바로 응답하기엔 망설임이 들어서?

막막했다. 가슴 한곳이 날카로운 창에 찔린 양 욱신거렸다. 나는 뚫어지게 레이를 응시했다. 레이는 잠자코 반지만 내려다보았다. 그 얼굴에는 심해 같은 무표정만 깔려 있었다.

한참 뒤 그의 입술이 달싹거리듯, 열렸다.

“저도요.”

레이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레이 아리사는 포우 메사라를 영원히 사랑하겠습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레이 아리사는 포우 메사라를 영원히 사랑하겠습니다.’

말해 주었다.

레이도 내게 응답했다. 영원한 사랑을 다짐했다.

그 대답이 내 전신을 장악한 의심과 두려움을 단숨에 거두었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확신을 채워 넣었다. 정지한 피가 움직였다. 날 선 단도에 베인 듯한 심장, 꽉 움켜쥔 창백한 손아귀에 희열이 들어찼다. 나는 레이를 힘껏 끌어안았다.

“사랑합니다.”

달빛이 아마빛 머리카락으로 다가왔다. 하얀 들꽃을 깨우는 4월의 일광처럼 조용하게. 그 고요한 움직임은 어두운 숲에 내리는 눈 같기도 했다. 나는 아마빛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달과 마법, 죽음의 여신 헤카테…….

헤카테는 보름달의 어두운 면이 드러난 밤에만 지상으로 올라온다고 했던가. 그녀도 우리만은 미소를 머금고 지켜보리라. 세상 어느 화려하고 웅장한 성당의 사제들도 내리지 못할, 황홀한 축복을 선사하리라.

나는 더욱 힘껏 레이를 끌어안았다.

“사랑합니다.”

몇 번을 해도 부족할 고백을 또 속삭였다. 그러고는 레이에게 키스하며 생각했다. 우리의 맹약은 그 옛날 처녀의 몸에서 피어난 꽃처럼 한없이 지속되리라고. 이슬이 맺힌 포도송이 같은 싱싱한 향기를 풍길 것이라고…….

엉뚱하게도 취기를 느꼈다. 뭘까, 이 느낌은. 맑으면서도 어질어질한 이런 감각. 죽음마저 몰아낼 듯 생생히 빛나는 저 달 때문일까. 아니면, 양귀비 향기보다 독한 이 행복감 때문일까. 아무래도 좋았다. 무엇 때문이든 상관없었다.

나는 레이에게서 입술을 떼어내며 미소 지었다.

“슬슬 눈이 쏟아지는데 쇼핑이나 하고 집으로 돌아가지요.”

거리를 죽 돌았다. 레이가 궁상을 떨어 대는 탓에 맘껏 돈을 쓰진 못했지만, 괜찮은 옷과 구두는 몇 점 구입했다. 레이에게 점수도 따고자 자선냄비에 거액수표도 수십 장 후하게 넣었다. 신나게 밤거리를 구경하고 쏘다녔다. 자정을 넘겨서야 아파트로 돌아갔다.

쇼핑백을 바닥에 내던지고 소파에 앉았다. 비로소 피로가 몰려왔다. 텔레비전을 켜자 변함없이 눈의 여왕들이 징징 짜고 있었다. 사회자가 피곤에 전 면상으로 「그래도 지금은 후보자가 여든두 명으로 줄었습니다.」하고 웅얼거렸다. 레이가 아하하, 웃으며 손뼉을 쳤다.

나는 넥타이를 풀며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꺼이꺼이 곡하는 여왕님들을 보자니 실소만 나왔다. 돈이 좋긴 좋구나.

―그럼 초대 손님들을 모시겠습니다. 전생을 믿는 여러 유명인사들과 눈의 여왕 역할을 세 번이나 맡은 명배우 아테나 밀러 양입니다. 힘찬 박수로 맞이해 주십시오.

쏟아지는 박수 속에서 게스트들이 등장했다. 나는 무심결에도 “어라.” 하고 중얼거렸다. 다름 아닌 칼이 보였던 것이다. 저놈이 저 자리에는 웬일로?

연예계 데뷔작업의 일환인가. 글래머 여배우만 빼면 하나같이 시든 오이처럼 생겨먹은 게스트들 중에서 발군으로 눈에 띄기는 했다.

나는 탁자를 톡톡 두들겼다. 칼이 하필이면 환생체 관련 프로그램에 납셨다? 구레나룻이 생각났다. 놈이 릴리즈에서 재빨리 자리 잡았던 주요 요인이 전생타령 아니던가.

이거 진짜 얍삽한 자식이네, 하고 투덜거리며 일어섰다.

“차라도 마시며 보죠. 레이는?”

“아. 나는 홍차요.”

차를 끓여 거실로 나갔다. 레이가 또 박장대소 중이었다. 밀러 양이 넉살을 떨고 있었다. 유명배우답게 밀러 양의 재치가 뛰어났다. 사회자는 물론이고 방청객들도 연신 폭소를 터뜨렸다. 덕분에 사교계의 기린아께서는 쓸쓸히 손뼉만 치고 계셨다.

한참 후에야 사회자가 칼에게 마이크를 돌렸다. 전생을 믿느냐고 묻자 칼이 냉큼 대답했다.

―믿는 정도가 아니라 전생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객석이 술렁거렸다. 나는 픽픽 웃으며 차를 마셨다. 별짓을 다 하네 싶었다.

하여간 귀족나리들이란…….

칼이 연거푸 거짓말을 나불거렸다. 자기가 연극의 달인이었다느니, 자기네 집안이 엄청난 상인집안으로 왕을 보필해 나라경제를 튼튼히 일궜다느니, 어쩌고저쩌고 씨불였다. 이제 보니 수치심을 팔아먹은 새끼였다.

나는 턱을 긁적거리며 일어섰다.

“레이. 나는 샤워나 하고 오겠습니다.”

“아, 그래요.”

샤워를 하고 돌아올 때까지도 칼의 거짓말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레이까지 입을 헤벌리고 텔레비전을 쳐다보았다. 공갈협박 분야에서 당당히 인정받은 프로인 내가 봐도 칼의 표정 연기는 제법 수준급이었다. 저러니까 브라질의 거짓말 대회에서도 정치가와 변호사의 참가를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칼이 울림 좋은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왕은 저를 매우 총애했습니다. 매일같이 서신을 교환해 수다를 떨었지요. 그중에는 은밀한 이야기도 많았어요. 그러나 왕은 여자문제만큼은 편지에 쓰질 않았죠. 그것만큼은 사생활의 마지노선으로 지키고 싶었나 봅니다. 물론 근본이유는 따로 있었지만요.

사회자가 「근본적인 이유라니요?」하고 물었다.

―그건 말해 드릴 수 없습니다. 이참에 한마디 하죠. 혹, 왕이 현생을 누리고 있다면, 그와 다시금 연을 이어가고 싶습니다. 사실 언젠가는 그와 꼭 만나리라 직감하고 있지만요, 하하핫.

―로맨티스트군요, 공작님.

―뭐, 이야기나 계속하죠. 저는 왕에게 재주 좋은 난쟁이와 광대들을 종종 바쳤습니다. 매 사냥 못지않게 왕은 난쟁이와 광대들이 펼치는 노래와 춤을 좋아했거든요.

―난쟁이와 광대를 가까이한 왕이 어디 한둘입니까. 공작님의 전생체가 누구였는지 더 궁금해지는데요.

―벌써 털어놓으면 재미없지요. 계속 이야기하죠. 이건 어느 기록에도 나오지 않는 이야깁니다만, 사실 왕은 문맹에 가까우리만치 문자에 서툴렀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편지마저 항상 측근이 대필해 주었죠. 친필 서명조차 본 이가 거의 없었습니다. 왕은 서명 대신 언제나 인장을 이용했거든요.

―문맹 왕이라……. 중세에는 문재가 부족한 왕이 드물지 않았죠.

―저는 왕의 서명을 본 극소수 중 한 명입니다. 왕의 서명은 매우 특이했어요. 이름 맨 뒤의 철자를 빼먹고 썼지요, 하하핫! 놀랍게도 왕은 자기 이름도 제대로 못 썼던 겁니다. 저 말고 왕의 서명을 본 사람이라면 사실상 왕비뿐이었죠. 왕이 친히 연애편지 형식으로 쓴 결혼요구서를 신부가 받으면, 그때부터 결혼준비에 들어가는 것이 당시의 왕실혼례 전통이었거든요.

돌연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레오파드였다.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다. 내일까지 전 부장들이 휴가였다. 그렇건만 이 시간에 갑자기 연락이라니.

“음. 뭐냐.”

통화버튼을 누르며 대답할 찰나였다. 쨍그랑 소리가 났다. 나는 고개를 바짝 치켜들었다. 아마빛 머리카락이 춤추듯 떨어져 내렸다. 레이가 가슴을 손으로 움켜쥔 채 쓰러지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