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 ─L. (73/101)

16 ─L.

온화한 인상의 의사 앞에서 나는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30분째 이러고 있었다.

메사라는 밖에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외출하자며 나가더니 여기로 직행했다. 괜찮다고 아무리 말해도 막무가내였다. 상담부터 받아 보라며 진료실로 등을 떠밀었다. 어젯밤 꿈 이야기를 했던 것이 역시 실수였다.

의사가 “솔직하게, 무엇이든 털어놓으라”고 했다. 그럴 수는 없었다.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현대인’ 메사라는 큰 충격에 빠질 터였다. 의사는 내게 장기간 입원치료를 강권할지도 몰랐다.

한참 고민하다가 인형눈알을 달던 때의 고달픔을 늘어놓았다.

“오랫동안 단순노동작업만 하다 보면 머리가 멍해지면서 나 자신이 누군지도 모를 때가 종종 생겨요. 내 이름을 테디 아리사로 헷갈릴 때도 있지요.”

의사는 현대적 상식에 기초한 내 답변에 흡족해하는 표정이었다.

병원을 나와서 근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메사라는 식사 도중 “앞으로 일주일에 세 번 내원하십시오.” 했다. 말투며 온몸에서 풍겨 나오는 태도가 완강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웃고 말았다.

“그럴 필요 없는데. 그런데 당신은 왜 진료를 받았어요?”

“뭐…….”

메사라가 냅킨으로 입술을 닦았다. 어딘지 허둥대는 분위기였다.

“현대인들 대개가, 어느 정도는……, 이런저런 정신병을 앓고 있다고 하니까요. 겸사겸사해서 나도 상담 받았습니다. 별거 아닙니다.”

“혹시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 때문?”

“그럴 리가요. 일은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메사라가 잘라 말했다. 나는 물 잔을 들며 메사라를 살펴보았다. 그건 아닌 듯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메사라는 현재 골칫거리에 직면한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최근 집에도 제대로 들르지 않을 리 없었다.

혹시 왕비 건에 내가 느낀 불길한 직감이 들어맞은 걸까.

메사라에게 왕비 건을 말하려다가 관두었다. 메사라가 같은 남자가 호락호락 당할 리 없었다. 사실 내가 걱정해야 할 쪽은 메사라에게 대적하는 무리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작업이 꽤 많이 진척이 된 것 같더군요. 어제 원고를 좀 훑어봤는데 방대한 분량에 놀랐습니다.”

“하지만 출판사가 원고를 사 줄지 의문인걸요. 전문가나 이 분야의 권위자가 쓴 책이 아니라서 원고 내용에 의심을 할 것 같아요. 같은 내용을 다룬 책도 많고.”

“그렇군요. 내가 괜한 이야길 꺼냈네요.”

메사라가 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재빨리 내게서 시선을 돌리는 행동이 야릇했다. 말실수했다고 생각해서 저러나. 하지만 난 아무렇지 않은데.

한동안 술만 마시던 메사라가 불쑥 말했다.

“그런데요, 레이. 전에도 물어봤지만 말입니다. 레이의 취향 말인데요.”

“취향?”

“기억 안 납니까? 예전에 내가 병원에서 레이의 남자취향을 물어봤잖습니까. 첫눈에 찌르르한 느낌이 오면 그게 취향이라고, 어떤 타입을 좋아하냐고 물었잖아요.”

“아아. 그랬죠.”

“그때 첫눈에 찌르르하기는커녕 변태들만 만났다고 레이가 답했지요. 나를 포함해서…… 나더러 매너가 비교적 좋은 변태라고 말하기도 했고. 하하하. 어쨌든, 갑자기 궁금해져서요.”

“뭐가요?”

“레이는 첫눈에 찌르르하게 꽂힌 남자는 없었다고 했잖습니까. 그럼 반대로 찌르르하리만치 싫은 용모라든가, 체격이라든가 그런 남자는 없었는지 궁금해져서 말입니다. 그러니까, 불호 타입이요.”

질문을 던지는 메사라의 눈빛이 어딘가 날카롭고 싸늘했다. 남자와 관련된 질문이라서 그런가.

“음.”

나는 미간을 모았다. 불호 타입이라.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만한 취향을 갖출 만큼 남자에게 관심을 기울인 적도 없었다. 게이의 길을 밟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우연과 충동의 결과물이었다. 사실 내가 이렇게 게이가 된 계기도 메사라 때문이었다. 메사라와 나눈 섹스에서 처음으로 엑스타시라는 것을 경험했으니까.

헌책방에서 한 두 번째 섹스가 그 시초였다. 이런 말은 차마 못 하지만, 메사라의 접근을 뿌리치지 못한 이유에는 그게 좋아서인 것도 있었다. 막판에는 모질게 나올 것을 뻔히 알면서도, 당장 몸이 녹아나는 데는 도무지 버틸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골똘히 돌이켜 보았지만 역시 그만큼 싫은 타입은 없었다.

“그럼 메사라는 어떤 타입이 싫은데요?”

메사라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전에도 말했을 텐데요. 털북숭이. 그리고 체격이 커다란 놈.”

그런가. 하지만 나도 털은 많은데……. 머리털도 털은 털이니까.

나는 뺨을 긁으며 다시 고민에 빠졌다. 굳이 싫은 타입이라면 하나뿐이었다. 데이탄즈.

“검정머리가 싫어요.”

“흐흠. 검정머리라. 그리고?”

“인상이 지나치게 차가운 얼굴도 별로. 까만 눈동자에 찢어진 눈매는 싫어요. 선이 뚜렷하고 날카로운 얼굴은 무섭잖아요. 싫은 스타일을 꼭 집는다면 그런 얼굴이 호감이 안 가는 인상이죠.”

“내가 인상만큼은 부드러워서 다행이군요. 그런 이유로 전에 앞머리를 내리라고 했습니까.”

“그건 그냥 앞머리를 내리는 편이 더 어울린다는 뜻이었어요.”

“이거, 외출할 때만은 꼭 앞머리를 내려야겠군요. 아무튼 잘 알았습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찢어진 눈매, 날카로운 인상. 그런 얼굴이 레이에게는 비호감이다―. 하하하. 하하.”

메사라가 연거푸 웃었다. 이상할 만큼 몹시 유쾌하게 웃었다.

덩달아서 나도 웃었다.

“그런데 나도 궁금하네요. 털이 많거나 체격이 큰 사람을 싫어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어요?”

“흐음?”

메사라가 와인잔을 내려놓았다.

“취향에 꼭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런 놈들에게는 아래가 당기지 않을 뿐이죠. 뭐, 솔직히 그런 놈들은 더듬기보다는 패 주고 싶은 생각이 먼저 들지요. 이른바 침대보다는 링 위에서 대면하고픈, 권투시합을 하고 싶은 충동부터 느끼게 하는 타입인 거죠.”

너무도 메사라다운 발언이었다.

“그랬군요. 게이는 남자라면 가리지 않는 줄 알았어요.”

“푸하하! 레이는 그럼 아무 남자에게나 관심이 갑니까?”

메사라가 실소를 터뜨렸다. 나는 “그건 아니죠.” 하며 어색하게 도리질했다.

“그런데 레이. 궁금한 게 하나 더 있어요.”

“뭔데요?”

“좀 쑥스러운 질문인데. 뻔뻔한 질문이기도 하고. 하하하.”

“쑥스럽고도 뻔뻔하다? 특이한 질문이네요. 말해 봐요.”

“입 밖으로 꺼내기 뭣해서 이제껏 못했는데, 그럼 용기를 내서 말해보지요. 내가 첫사랑인가요?”

“……네에?”

무심결에도 목소리가 올라갔다. 그만 낯이 화끈거렸다. 첫사랑이냐니.

내가 첫사랑인가요, 라니.

메사라가 저런 질문을 던질 줄은 몰랐다. 황당하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했다. 우리가 처음 만난 당시 내 나이를 감안하면 저런 의문은 품지 못할 텐데 어째서…….

메사라가 저런 의심을 품을 만큼 내가 섹스나 대화에서 서툴렀나. 아니면 또 병적인 질투심의 일환일까. 갖은 생각이 드는 한편으로는 창피했다.

첫사랑…….

오늘 메사라는 좀 이상했다. 평소 수다를 잘 떨고 자주 질문을 던지는 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오늘은 뭔가가 달랐다.

메사라의 질문에 대답한다면 물론 “예”였다. 이 사실을 그에게 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메사라가 처음이었다. 내 첫사랑은 포우 메사라였다.

첫사랑도 첫사랑이지만, 사실 나는 여자와도 성관계를 맺지 못했다. 순결을 중요시하는 이슬람이나 동양권 국가도 아닌 유럽에서, 그것도 여자가 아닌 남자가, 무려 스물여섯 해 늦겨울까지 연애는커녕 섹스조차 해 보지 못했다. 창피해서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이야기였다.

메사라가 “내가 첫 번째 섹스 상대입니까.” 하고 묻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랬다면 쥐구멍을 찾았을지도.

“네. 첫사랑이에요.”

나는 낮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시야에 닿는 메사라의 손이 미동도 하지 않았다. 황당해서 그럴까. 당연히 황당할 터였다. 새삼 창피해져 뺨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랬군요.”

한참 후에야 메사라가 입을 열었다. 비로소 나는 용기를 내 고개를 들었다.

생각에 잠긴 낯으로 술잔을 입가로 가져가던 메사라가 불쑥 말했다.

“기쁘군요. 전에도 말했지만 당신도 내게 첫사랑이니까요.”

“…….”

나는 입을 열지 못했다. 뭔가 아연했다. 물론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메사라에게 다시없는 상처를 가하게끔 내몰아 버린 그 말을.

그러나 이 말만은 꼭 하고 싶습니다. 사랑합니다. 당신은 제게 처음입니다. 이런 감정은 처음입니다.

헤어져 있던 동안 내가 얼마나 많이 그 말을 곱씹었는지 메사라는 모를 것이다. 첫사랑……. 그런 의미로 해석한 적은 없었다. 단 한 번도.

그저 나를 깊이 사랑한다는 뜻으로만,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열렬하게 사랑한 적은 없었다는 의미로만 받아들였다. 오만하게 넘겨짚어, 메사라에게 내가 최고의 사랑이라면 모를까, 최초의 사랑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 부분에서는 일말의 가능성도 헤아리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상대가 메사라이기 때문이었다.

넉살이며 단정한 외모며 난잡한 섹스며 메사라는 경험이 넘쳤으면 넘쳤지 모자라 보이지는 않았다. 솔직히 연애를 백만 번은 해 본 남자로 보였다. 하물며 메사라는 나보다 두 살 연상이었다. 그런 메사라에게 내가 첫사랑이려니 하고 어찌 상상이나 하겠는가. 이건 지극히 상식적인 발상이었다.

메사라가 싱긋 미소 지었다.

“그때 장난치지 말라며 당신이 화냈죠. 내가 당신에게 신뢰감을 주지 못했나 봅니다. 물론 당신을 만나기 전에는 문란한 플레이보이이긴 했습니다만. 뭐, 다 지나간 이야기지요.”

“……정말로 사랑을 한 번도 안 해 봤단 말인가요.”

“네. 당신이 처음입니다.”

메사라가 대답했다. 단호하게.

그래도 멍했다.

“연애를 단 한 번도 안 했다는 뜻인가요.”

“아무하고나 하룻밤만 즐겼지요. 그런 게 연애라면 연애라고 부를 순 있겠군요.”

사랑해. 당신은 내게 처음이야. 이런 감정은 처음이야…….

데이탄즈의 말이 귓가를 스쳤다. 레이 아리사는 그 말도 일말의 의심 없이 거짓으로 치부해 온 터였다. 이 역시, 상대가 데이탄즈였기 때문이었다.

그럴 리 없어.

나는 입술을 짓깨물었다. 적어도 데이탄즈는 아니었다. 데이탄즈만큼은 어불성설이었다. 자그마치 15년이나 자작나무를 찾지 않았을 만큼 레비탄을 사랑하지 않았던가. 결정적으로 자작나무가 가면무도회에서 똑똑히 목격한 것이 있었다.

단언할 수 있었다. 그 말은, 유혹을 바른 독사과였다.

“얼떨떨해하는군요. 하하, 내 이미지가 당신에게 굉장히 난잡한 녀석으로 박혔나 봅니다. 하긴, 부정할 수 없긴 하지요.”

메사라가 웃으며 술을 마셨다. 나는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그런데 나도 의외입니다. 레이 같은 사람에게 고작 나 같은 녀석이 첫사랑이라니 말입니다. 헌책방에서 일할 때 유혹이 꽤 쏟아졌을 것 같은데요.”

“그런 건 없었어요. 유혹은커녕 손님들은 얼굴을 찡그리기 일쑤였고 심지어 이웃들마저 나를 멀리했는걸요.”

“이런, 그렇게 생각했다니 재미있군요. 그 금발에는 놀라서라도 얼굴을 찡그리겠지요. 누가 봐도 혹할 만한 외몬데.”

나는 웃고 말았다. 아무래도 메사라의 눈에는 내 얼굴에서 빛이 쏟아지는 모습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흔히 말하는 콩깍지가 씐 듯했다.

“이만 나가지요.”

메사라가 일어섰다. 여전히 얼떨떨했지만 나도 따라 일어섰다.

며칠간 눈이 내리지 않아 오랜만에 제 색깔을 찾은 거리가 색색으로 빛났다. 축제 때문에 거리가 시끌시끌했다. 가면을 쓰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쏘다녔다. 메사라는 계속 말이 없었다. 나도 입을 다문 채 그의 보폭에 맞춰 걷기만 했다. 아직도 멍했다. 몽롱한 기분이 도통 떠나지 않았다.

이 감각의 원인은 역시 메사라의 발언 때문인 듯했다. 그것 외에는 없었다. 첫사랑. 최초의 사랑. 그것이 시작된 때를 떠올려보았다.

웃겼다. 엉망이었다.

나는 어둑한 구석자리에 앉아 있었다. 담배연기가 탁하게 오감을 더듬는 허름한 술집이었다. 내 앞에 놓인 칵테일글라스에 건너편의 두 사내가 비쳤다. 그들이 뚱한 눈초리로 이쪽을 흘끗거렸다.

한참 뒤에야 한 명이 내게 말을 걸었다. 메사라의 친구였다. 나는 그의 제의에 응하고 일어났다.

호텔로 가는 내내 메사라는 말이 없었다. 룸미러에 비치는 나를 이따금 쳐다보는 것 같았지만, 확실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호텔에 도착했다. 난생 처음으로 발을 디딘 호텔은, 그것도 낯선 두 사내와 섹스하고자 문을 열고 들어온 룸은 따스한 아이보리 빛깔이었다.

그 빛깔이 시선에 닿는 순간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몰려오는 후회에 나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사내들에게서 등을 돌린 채 우물쭈물하며 시선만 불안하게 돌렸다.

문득 내 머리카락을 누군가가 만지작거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뒤돌아보았다. 여태껏 침묵만 지키던 금발 남자였다. 그가 손을 떼며 이쪽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어이없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왜 저럴까 하는 표정 같기도 했다.

물끄러미 응시하던 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리고는 말했다.

「옷 안 벗어요?」

옷 안 벗어요?…….

그것이 메사라가 내게 던진 첫 말이었다. 태연하고도 능글맞게, 옷 안 벗어요? 하고.

그런 메사라에게 나는 어떤 인상을 받았던가. 저런 말을 얼굴색 하나 안 바꾸고 내뱉다니…… 하며 황당해했다.

그때는 조금도 예감하지 못했다. 어찌 예감하겠는가. 그저 뻔뻔하기만 한 저 사내가, 덜덜 경련하는 손으로, 내 어깨를 꽉 잡고서, 떨림이 범벅된 음성으로, “사랑합니다.” 하고 속삭일 날이 오리라고. 그것도 고작 넉 달 뒤에.

왜일까. 불현듯 어느 그림이 떠오르는 까닭은. 늪에 빠지는 작고 검은 개……. 늪 위로 까만 머리만 간신히 드러나 있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동그란 눈으로 회갈색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직 개는 살아 있었다. 그러나 저 정지된 화폭 뒤로 흐르는 시간 속에서, 늪은 검은 개의 머리마저 무자비하게 삼켜 버릴 것이다. 그리고 잊을 것이다.

한 치 앞을 모르는 것이 인생이로구나.

거듭 웃음만 나왔다. 메사라가 이쪽을 흘끗 쳐다보았다. 왜 웃지, 하는 눈초리였다. 나는 그의 팔에 코끝을 파묻었다. 바람에 서늘히 식은 코트 감촉이 까칠했다. 메사라가 내 어깨를 끌어당겼다. 회색빛 그림자가 천천히 드리워졌다. 차가운 입술이 내게 닿았다. 스며듦은 안개처럼 어렴풋했다. 그 미미한 접촉이, 통곡같이 거대한 울림으로 나를 휩싸기까지는 삽시간이었다.

착각일까. 착각일지라도 좋았다. 우리에게 머무른 지금 이 시간이 영원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런 확신을 품고 말았다. 적어도 이 순간만은 사나운 황혼 아래에서 육신이 스러지는 그날까지 잊지 못하리라고. 붉은 흙더미도 이것만은 간직하리라고. 묘지 부근을 떠도는 굶주린 짐승의 울음소리도, 묘석의 견고한 침묵도, 이 기억만큼은 허물 수 없으리라고.

웬 감상이냐.

메사라에게서 입술을 떼어내며 고소했다. 최초라는 고백이 유발시킨 흥분일까. 그렇다면 한심했다. 민망한 기분에 나는 왼편의 꽃집을 가리키며 “저기 들어가요.” 했다. 꽃집에서 시클라멘 화분을 샀다. 나는 시클라멘을 좋아했다. 나비가 날개를 접은 형상이 독특하고 아름다운 겨울 꽃이었다.

메사라와 나란히 화분을 한 개씩 안고 거리를 걸어갔다. 화려하게 분장한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었다. 문득 신문 가판대가 눈에 띄었다. 얼떨결에도 “아니?” 하고 중얼거렸다.

신문 1면에 메사라들이 주르륵 늘어서 있었다. 정확하게는, 가이거 부장들이 주르륵 늘어서 있었다. 이게 무슨 영문일까. 내가 언론매체를 접하지 못한 두 달 사이, 정국이 어찌 돌아갔기에 가이거 부장들이 신문 1면을 장식하는 것일까.

메사라가 내가 바라보는 쪽으로 고개를 향하다가 멈칫했다.

“뭘 그렇게 봅니까.”

“어…… 나쁜 일이라도 있었어요? 왜 당신들이 저기에?”

나는 신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메사라가 “아, 뭐 저따위를 열심히 봅니까. 별거 아닙니다. 갑시다.” 하며 내 옆구리를 잡아끌었다. 끌려가면서도 나는 신문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자세히 보니까 메사라들 앞에서 손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는 두 남자가 있었다.

알토넨과 바르디 공작이었다. 실은 저들이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워낙 메사라들의 가면이며 복장이 무시무시한 탓에 주연배우들이 짓눌려 버린 것이었다.

바르디 공작이라……. 연예활동뿐 아니라 정쟁까지 참여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런데 문신귀족이 알토넨과 저러고 있다니, 야합 도모인가. 저 까다로운 메사라가 야합 파트너로 받아 줄 정도면 정쟁판에서 꽤 두각을 보인 모양이었다. 하긴, 내가 봐도 범상한 인물은 아니긴 했다.

“와, 굉장하네요. 저 앞의 주인공들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기들이 확 돋보여요. 보는 순간 깜짝 놀랐어요.”

“……그랬습니까.”

“네. 심각한 난시가 아니라면 누구든 놀랄 것 같은데요. 엄청나게 강렬해요. 물론 실제로 보는 쪽이 수십 배 으스스하지만.”

“그렇군요.”

메사라의 걸음이 빨라졌다. 내가 직장을 언급해선지 표정이 딱딱했다. 나도 입을 다물고 그의 옆을 따라 걸었다. 메사라와 대화를 나누며 퍼레이드를 구경했다. 두 시간 남짓 걷자 피곤이 몰려왔다.

“메사라, 좀 쉬고 갈래요? 숨이 찬데.”

“네? 겨우 이 정도로?”

메사라가 대답하다가 우뚝 멈춰 섰다. 나는 노천카페의 테라스를 가리키며 “저기서 잠깐만 앉았다가 가요.” 하고 말했다. 메사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흐흠…… 그러지 말고 이만 집으로 돌아가죠.”

“벌써요? 퍼레이드도 구경 안 하고?”

“레이가 많이 피곤해 보여서요. 아, 차를 놔둔 곳까지 가려면 또 한참 걸어야겠군요. 일단 여기 앉아요. 내가 약을 사 올 테니.”

“네? 이 정도로 무슨 약을 먹어요?”

되묻는 나를 메사라가 억지로 의자에 앉혔다. 설마 했는데 진짜로 약을 사 왔다. 메사라가 “정력제입니다.” 하기에 어이가 없었지만, 이왕 사 왔으니 먹었다. 맛이 썼다.

예전부터 그러긴 했지만, 메사라는 내 건강에 지나치게 신경을 곤두세우는 듯했다. 지금처럼 약을 먹인 적이 여러 번이었다. 약물 복용이 잦으면 되레 안 좋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집의 구급상자에도 약이 가득했다.

내가 쉬는 동안 메사라는 탁자만 톡톡 두들기다가 말했다.

“흐흠, 레이. 퍼레이드 꼭 보고 싶습니까?”

“뭐…… 안 봐도 상관은 없지만, 오랜만의 외출이잖아요.”

“퍼레이드가 본격적으로 벌어지려면 저녁 열 시까지는 기다려야 하니 장소를 옮기죠. 적당한 장소가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축제를 기다리며 쉬기에도 괜찮을 것 같군요.”

“적당한 장소라니요?”

택시를 잡는 메사라의 뒤에서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대는 금물입니다. 썰렁하거든요.”

메사라가 현관문을 열었다. 나는 주춤주춤 실내로 들어갔다.

메사라의 또 다른 집…… 즉, 스네이크의 거처였다. 자작나무 때문에 기억이 사라지고 일주일 뒤 눈을 떴을 때, 내가 있던 그 집이기도 했다.

메사라에게 그동안 우리가 뭘 했는지 물어본 적 있었다. 그때 메사라는 애매하게 웃으며 “뭘 하긴요. 그렇고 그런 짓을 하며 놀았죠.” 하고 대답했다. 나도 더는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메사라 성격에 그렇고 그런 짓만 했을 것 같긴 했으므로.

실내를 둘러보았다. 흑백 위주의 모던한 인테리어에서 차가운 인상이 물씬 풍겼다. 우리가 동거하는 집과는 딴판이었다.

“솜씨가 좋네요. 직접 한 것? 관리하는 것도 꽤 힘들겠는데요.”

“전문가에게 맡겼습니다. 내 취향을 적극 반영시키긴 했지만. 청소나 관리는 메이드가 하고요.”

“네…….”

그만 나는 슬쩍 웃었다. 메사라의 형편없는 청소 솜씨가 생각났다.

“왔으니 구경이나 하지요. 볼 것은 별로 없지만.”

메사라의 안내를 받아 실내를 구경했다. 대저택이나 성을 선호하는 외국 부유층과 달리, 왕국에서는 기후조건상 풀장과 정원을 실내에 갖춘 고급 아파트도 인기가 많았다. 그러나 메사라의 풀장에는 물이 없었고, 정원도 폐쇄되어 있었다. 왜 이러냐고 묻자 메사라는 “바빠서요.” 하고 대답했다.

“이 집에서는 옷이나 갈아입고 잠이나 자는 게 전부였거든요.”

그도 그랬겠네…… 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집에 온종일 드러누워 자작나무 가지로 중얼중얼 주문이나 외우면 끝이던 이쪽과 달리, 메사라는 길거리에서 시위대와 난투극을 벌이고 고위인사들을 암살하며 분주히 돌아다니느라 매우 바빴을 터였다.

“그나마 자주 들락날락했던 방이 이 서재지요.”

메사라가 서재 문을 열었다. 과연 서재 곳곳에 손때가 묻어 있었다. 추리소설과 갱소설이 가득 꽂힌 책장과 시디가 흩어진 오디오 주변에서 메사라의 흔적이 보였다. 책상에는 노트북이 있었다. 저기에 앉아 사립탐정처럼 줄담배를 피우며 음모에 몰두했을 메사라를 상상하자 기분이 묘해졌다.

“내 수집품을 보겠습니까.”

갑자기 메사라가 짓궂게 웃었다. 침실로 데려가더니 금고에서 검은색 박스를 하나 꺼냈다. 또 보석인가, 하던 예상은 어긋났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이, 이건 뭐죠?”

“뭐긴요. 은밀한 도구들이지요.”

메사라가 얼굴색 하나 안 바꾸고 대답했다. 과연 은밀한 도구였다. 바깥에서 함부로 내놓고 다녔다간 눈총이 빗발칠, 섹스기구들이었다.

메사라가 테이블에 기구를 척척척 늘어놓았다. 식탁을 세팅하는 듯한 그 동작이 몹시도 당당했다. 나는 그것들을 멍하니 응시했다.

수갑과 채찍을 비롯해 사슬로 이어진 쌍 집게, 각종 막대기들, 야릇한 디자인의 가죽팬티까지 별별 것이 다 있었다. 몇 개는 눈에 익었다.

“이거 알아보겠습니까. 당신에게 한 번 썼던 바이브인데. 반응이 제법 괜찮았다고 기억하는데요. 하하하.”

메사라가 선인장 모양 막대기를 들어 보이며 짓궂게 말했다. 낯이 뜨끈해졌다.

“바, 바쁘다면서 이런 건 용케 수집할 시간이 있었군요.”

“일과 사생활은 성공적으로 병립해야 한다는 것이 내 철학입니다.”

메사라가 태연히 대꾸했다. 어이가 없었으나 이해는 갔다. 하긴, 이런 남자였지. 처음부터 그랬다. 가이거 본부장 스네이크와 변태 포우 메사라를 철저히 분리하는 사람이었다. 마넨 경을 겨냥한 언론사 음모를 꾸밀 무렵에도 메사라는 변태기구를 챙겨 들고 나를 찾아와 기운을 잔뜩 쓰고 가지 않았던가. 정말이지 정력이 넘치는 남자였다.

메사라 특유의 사디스트 성향에는 저 왕성한 정력도 한몫하는 듯했다. 내가 스노우 화이트에서 만난 변태들 중에는 피학성애자도 있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수백 개의 계란이 든 커다란 양동이를 내 앞에 쿵 내려놓더니, 자신에게 그것들을 남김없이 던져 달라고 요구했다. 두 시간에 걸친 노동 끝에 양동이를 바닥까지 비운 다음, 나는 결론지었다. 사디스트 행위도 나름대로는 노동집약적 행위라는 것이었다.

이쯤 되자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도 들었다. 배워서 남 주나. 이 기회에 나도 마음에 드는 도구나 골라 보고.

어떤 의미에서는 확실히 신세계였다.

“이 쌍 집게는 어디에 써요?”

“유두를 집을 때 씁니다. 이른바 유두클립이죠. 남자는 유두를 잘 못 느끼기 때문에 이 도구로 길들여 줘야 합니다. 클립으로 민감하게 만든 뒤 훑어 주는 거죠. 당신에게는 필요 없는 도굽니다. 레이는 원래 젖꼭지가 민감하잖아요. 거기서 더 민감해지면 옷도 제대로 못 입을 걸요.”

나는 하마터면 손에 든 집게를 떨어뜨릴 뻔했다.

“이 괴이한 가죽팬티는 뭔가요. 섹시하게 보이려고 산 것?”

“구속구라고 합니다. 나는 한 번도 입어 보지 않았습니다.”

구속구라. 명칭의 어감이 몹시 가학적이었다. 저 메사라마저 한 번도 입지 않았다니, 뭔가 무시무시한 팬티인 듯했다. 용도를 물을 엄두는 나지 않았다.

“그런데 막대기들이 뭐가 이렇게 많아요? 하나만 있어도 족할 것 같은데.”

“막대기가 아니라 바이브레이터와 로터가 바른 명칭입니다. 사람마다 체구와 취향이 다르므로 다양한 사이즈와 성능, 디자인의 제품들을 구비해 놓았죠. 이쪽도 산업인지라 회사마다 매달 치열하게 아이디어 제품들을 쏟아냅니다. 신제품에 호기심을 품는 건 어느 분야의 소비자나 당연하지요.”

메사라의 거침없는 설명에 나는 “그렇군요.” 했다. 머리만 띵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오자 슬슬 학문적 호기심이 들었다. 이런 도구를 만드는 사람들은 어떤 기분일까. 디자인은 누가 할까? 대량생산 공장은? 혹시 수출도?

“채찍도 여러 개네요? 직장에서 들고 다니려고 이렇게 많이 산 것?”

“아뇨. 직장에서 들고 다니는 건 나우트Knout 채찍이라고, 길이 16인치의 생가죽 채찍입니다. 힘을 줘서 한 번만 때려도 살갗이 찢어지는 진짜 채찍이죠. 레이가 보고 있는 채찍들은 모두 섹스전용 제품입니다.”

“…….”

“솔직히 이런 건 채찍 흉내만 낸 장난감에 가깝지요. 기본적으론 사람 몸에 사용하는 도구들이라 이쪽 업계에도 관련법규가 엄연히 존재합니다. 나우트 채찍 같은 진짜 채찍은 섹스용으로 제조할 수도, 판매할 수도 없어요.”

“…….”

“제약회사에서 부작용이 많은 약을 팔면 소송당하는 것과 같은 이칩니다. SM 클럽에서도 지정된 도구들만 사용하게끔 법으로 정해져 있죠. 채찍 플레이를 악용한 살인사건이나 자해공갈을 벌이는 사기꾼들도 많거든요. 하하하.”

진정 신세계로구나.

진심으로 놀라워서, 나는 숨을 들이켰다. 채찍은 원나잇스탠드 시절, 메사라와 그 친구가 내게 허락받은 뒤 가벼운 구타를 가할 때 주로 사용한 도구였다. 그때 상처 하나 안 난 까닭을 이제야 알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양초가 없었다. 사디스트, 하면 양초와 채찍 아닌가. 하기야 양초는 슈퍼에만 가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그래도 혹여 섹스용으로 나온 특수 양초가 있을지도 몰랐다.

한번 물어볼까, 고민하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메사라가 “잠깐.” 하면서 침실을 빠져나갔다. 얼마간 뒤 돌아와서 말했다.

“옆집에서 지금 파티 중이라는데요. 얼굴이라도 비치고 가라며 성화가 대단한데 잠시만 다녀오겠습니다. 피곤할 테니까 레이는 쉬고 있어요.”

“괜찮아요. 놀다가 천천히 와요.”

“텔레비전이나 보고 있어요. 케이크라도 얻어서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메사라가 거실 소파에 시트를 펼쳐 주고 나갔다. 나는 텔레비전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동거하는 집의 작은 텔레비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커다랬다. 시트를 목까지 끌어올리며 리모컨을 눌렀다.

브라운관 가득히 한 대머리 아저씨가 등장했다. 비탄에 잠긴 낯을 소맷자락으로 훔치며 훌쩍훌쩍 울었다.

―……그때서야 저는 깨달았지요.

대머리 아저씨가 떠듬떠듬 말했다. 토크쇼 프로그램 같았다. 대머리 아저씨를 응시하는 방청객들이며 사회자의 표정이 무척 심각했다.

한참 뜸을 들이던 대머리 아저씨가 다시 말했다.

―저는…… 자작나무였습니다.

뭐, 뭐라구?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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