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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M─ (72/101)

15 .M─

왕실주재 파티였다. 오늘도 왕은 오른쪽에는 이리나를, 왼쪽에는 칼을 끼고 시시덕거렸다. 얀케리의 사망 이후 한동안 조용했던 칼은 근래 다시금 온갖 연회장을 쏘다니기 시작했다. 면상이 아주 쌩쌩했다. 작자는 전생에 한 떨기 인동초였던 듯했다.

간이 배 밖에 나온 자식.

나는 짜증을 삭이며 칼을 노려보았다.

오늘 오전, 오르키스 폰타네 의원이 이쪽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왕이 지하철 건설예산을 빼돌려 이리나에게 보석을 선물한다더군. 지하철 건설사업은 문신귀족 마켈라 경이 최고책임자인데, 최근 그가 무능력한 일처리로 푸셔의 눈 밖에 난 사실은 본부장도 잘 알 거요. 이참에 바르디 공작에게 붙을 심산인지, 왕이 지하철 건설예산에 손대는 것을 눈감아 줬다고 들었소. 평민의원단은 힘이 없으니 본부장이 알토넨을 통해서 왕을 설득해 주길 바라네.」

이걸 신작으로 한번 상영해 볼까.

애매했다. 칼이 적극적으로 가담했다면 모를까, 그건 아니라서 터뜨려 봤자 이쪽이 얻을 건수는 적었다. 부장들은 당분간 칼을 지켜보자고 했지만, 예감이 나빴다. 왕은 시골출신답게 성정이 순박해서 검소하게 생활하던 터였다. 그랬던 그가 정부를 들인 뒤 삽시간에 사람이 변했다.

이리나가 걸친 보석들을 훑어보았다. 눈어림으로도 1,700만 탈란텐은 되어 보였다. 파티의 꽃은 통상 몸에 걸친 보석의 값어치로 판가름 났다. 이리나는 근래 2주간 파죽지세였다. 그 탓에 최근 왕비는 건강을 핑계로 파티에 내리 불참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요사이 파티에서 귀족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이리나에게 손바닥을 비비느라 여념 없었다.

갑자기 레오파드가 내 옆구리를 툭 쳤다. 회장 입구에서 왕비가 위풍당당하게 들어서고 있었다. 그것도 푸들 두 마리를 거느리고.

파티에 애완견을 데리고 행차하는 귀부인은 드물지 않았지만, 왕비가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조금 의아했다. 뭐, 귀엽기야 하다만.

왕비의 몸집이 꽤 통통했다. 임신 때문에 요즘 폭식한다는 정보를 접했는데 사실인 모양이었다. 왕비의 표정은 예상 밖으로 좋아 보였다. 귀족들의 예를 받는 내내 싱글거렸다. 왕이 “가브리엘, 몸이 안 좋다더니 여긴 웬일인가.” 하고 체면치레용 인사를 던졌다. 왕비가 후후훗, 하고 웃었다.

“어제 선물로 받은 이 귀여운 아가들 때문이지요. 아가들 산책도 시키고 대신들과 인사도 나눌 겸해서 잠깐 들렀습니다. 아가들 어떻습니까?”

“오, 사랑스럽소. 각기 다른 색깔로 귀를 물들여서 몹시 귀엽구려.”

“한데 몹시 멍청해서 요즘 제 골치를 단단히 썩이고 있답니다. 혈통은 좋은 애들이 어쩜 이리도 똥오줌을 못 가리는지! 참, 아가들 이름을 말해 주는 걸 잊었군요. 핑크색 귀를 한 아가는 크루고, 빨간색 귀를 한 아가는 이리오라고 합니다. 사랑스럽지 않습니까?”

왕비가 만족스럽게 말했다. 왕이 “뭐, 뭐라고.” 하며 백짓장이 되었다.

단번에 연회장이 웃음바다로 변했다. 모든 귀족이 배꼽을 잡고 폭소를 터뜨렸다. 눈물을 닦아내는 이들도 속출했다. 나를 비롯한 부장들까지 부르르 몸을 떨 정도였으니 말 다한 것이다.

왕비가 연회장 한복판으로 링을 휙 던졌다.

“자, 크루고! 이리오! 얼른 물어오너라!”

크루고와 이리오는 말똥말똥 눈알만 굴렸다. 왕비가 눈초리를 세웠다.

“이런! 크루고, 이리오! 아직도 말귀를 못 알아듣느냐! 특히 크루고, 너! 얼굴도 못생긴 것이 이렇게 멍청하다니! 엉덩이를 좀 맞아야겠구나!”

왕비가 크루고의 엉덩이를 찰싹찰싹 후려갈겼다. 개가 깨앵깨앵 구슬프게 울었다. 귀족들이 숫제 까무러쳤다. 나도 미칠 것 같았다. 파티 수행질 8년 만에 배꼽을 잡고 뒹구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 위기상황이었다.

이 난장판 속에서 바르디 남매와 왕만 고요했다. 왕비의 원맨쇼를 넋을 놓고 쳐다보고만 있었다. 특히 칼의 면상이 아주 볼만했다. 헤비급 챔피언에게 한 방 먹고 정신이 나가 버린 듯한 얼굴이었다.

왕비가 물밀 듯이 몰려오는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회장의 테이블에 앉았다. 의심할 바 없이 오늘 파티의 꽃은 왕비였다. 단 두 마리의 푸들로 1,700만 탈란텐어치의 보석을 납작하게 깔아뭉갠 것이다. 역시 마넨의 딸다웠다. 남자편력이 심각하긴 했지만 머리가 좋고 정세에도 밝았다.

뭐, 저 정도면 든든한 아군이군.

어제의 적이 오늘의 아군이 된 셈인가. 어차피 이 바닥의 생리가 그랬다.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이 이를 증명했다.

왕비가 깃털부채를 부치며 푸셔의 인사를 받고 있었다. 푸셔는 필요하다면 왕비의 발가락도 쭉쭉 빨아 줄 기세였다. 온갖 귀족들도 왕비에게 말을 걸며 아부를 떨었다. 반면 왕과 바르디 남매 주변은 빙판처럼 썰렁했다. 불과 20분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광경이었다.

나는 피식 웃다가 주춤거렸다. 왕비의 안색이 이상했다. 이상하다고 느낀 순간 왕비가 뒤로 쓰러지고 있었다. 파티장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왕비의 초록색 비단드레스 아래로 선지피가 줄줄 흘러 나왔다. 왕도 낯이 새파래져 일어섰다. 왕보다 먼저 달려간 사람은 칼이었다. 큰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왕비를 훑어보더니 언성을 높였다.

“뭐 하고 있나! 얼른 의사를 부르지 않고!”

오페라 테너처럼 울림 좋은 목소리였다. 칼이 왕비를 들쳐 업고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그동안 나는 움직임 없이 서 있었다. 세차게 뺨을 맞은 기분이었다.

나쁜 예감이 이거였나.

직감했다. 칼의 짓이었다.

“미안합니다. 오늘은 야근을 할 예정이니 먼저 자요.”

레이와 통화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스타우트를 잔에다가 들이붓고 들이켰다.

이거 꽤 재미난걸.

부장 회의실로 갔다. 문을 잠그고 빌어먹을 가면을 내던졌다. 파티 수행에 동행한 부장들 모두 표정이 개판이었다. 왕비의 주치의는 우리가 포섭한 자였다. 일단 주치의의 연락을 기다렸다.

새벽 한 시에 전화가 왔다. 주치의가 의학적 소견을 지루하게 늘어놓더니 결론을 밝혔다. 독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부장들은 크게 실망한 기색이었다. 기대에 부풀어 우리 연락만 기다리고 있던 이스트에덴 편집국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나는 채찍으로 책상머리를 톡톡 쳤다.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왕비가 쓰러지자마자 칼이 독살을 시도했다고 확신하고 시나리오까지 전부 짜 놓은 터였다. 그렇건만 독이 아니다? 우연이다?

타이밍이 실로 절묘했다. 대외적 체면 때문에 이리나는 3년간 결혼하지 못했다. 반면 왕비는 현재 임신 중이었다.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문신귀족들 입장에서는 왕비를 밀어 주는 쪽이 득이었다.

아울러서 최근 칼에게도 적들이 제법 생긴 형국이었다. 무신귀족들은 물론이요, 젊은 놈이 여동생을 앞세워 지나치게 설친다고 문신원로들에게도 밉보였다. 이런 살벌한 분위기에서 그저 헤벌쭉한 사람은, 왕궁에서 벌어지는 사랑은 연극놀음에 불과하다는 만고의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이리나에게 푹 빠져 있는 멍청한 왕뿐이었다.

왕비는 이 모든 정국을 꿰뚫어 보았다. 그래서 일부러 파티에 푸들들을 데려와 왕과 이리나를 조롱한 것이다.

이런 시점에서 왕비가 유산했다?

유산에만 그치면 다행이었다. 나는 의자에 등을 파묻으며 부장들을 훑어보았다.

“왕비는 현재 위독한 상태라는군.”

침묵이 회의실을 감돌았다. 다들 말을 잊은 표정이었다. 나는 탁자를 톡톡 두들겼다. 왕비가 사망한 이후의 정국을 곰곰이 헤아려 보았다.

뻔했다. 푸셔는 칼과 손잡을 것이다. 크루거는 왕실역사상 최악의 추남이었다. 통상 야심만만한 귀족여인들은 왕의 정부가 되길 염원했지만, 크루거의 면상은 그 야심조차 꺾어놓으리만치 심각한 수준이었다. 이리나가 등장하기 전까지, 귀족들 대다수가 크루거는 왕국 역사상 정부를 두지 못한 최초의 왕이 될 것이라며 비웃던 터였다.

인즉 왕비가 사망하면 문신귀족들이 추대할 왕비후보는 한 사람뿐이었다. 이리나였다.

부모상을 치른 귀족은 3년간 결혼은 못 하지만, 약혼은 가능했다. 못생긴 왕은 3년을 기다려서라도 이리나를 왕비로 맞아들이리라. 칼은 이리나를 발판으로 핵심외척으로 부상할 것이다.

나는 생각 끝에 결론을 내렸다. 왕비의 유산이 우연이든 아니든 하나는 분명했다.

칼에게 쓴맛을 보여 줘야겠군.

나는 레오파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내일 센타우레아 파크 시계탑 앞으로 11시까지 나와. 옷은 최대한 평범하게 입도록 해.”

이틀 뒤 조간에 마켈라 경의 추문이 톱 헤드라인으로 실렸다. 남자정부의 집에서 살해당한 것이다. 직접적 사인은 교살. 아울러서 칼로 인한 수백 개의 자상으로 주검상태가 잔혹의 극치를 달린다고 했다.

유력용의자는 전직 프로레슬러 출신의 남자정부이며 현재 잠적 중. 독점욕이 강한 남자정부와 관계를 정리하려는 마켈라 경 때문에 최근 둘 사이에 다툼이 잦았다고, 마켈라 경의 또 다른 남자정부가 증언했다. 가톨릭 신자로 명망 높은 유부남 마켈라 경이 남자정부, 그것도 전직 프로레슬러 출신의 남자정부를, 그것도 모자라 전직 권투선수 출신의 또 다른 남자정부까지 두었다는 뉴스는 매스컴의 블루칩으로 급부상했다. 단물이 신물 될 때까지 보도할 태세였다.

이튿날 폰타네 의원이 보낸 선물상자가 내 업무실에 도착했다. 상자에는 은제 회중시계가 들어 있었다. 왕비는 고비를 넘기고 쾌유 중이었다. 왕은 내내 왕비의 머리맡을 지켰다. 당분간 왕실주재 파티도 열지 말라고 왕실시종장에게 명령했다.

칼은 마켈라 경 사망 후 2주간 고요히 은거했다. 이번에는 전시회 구경도 안 나갔다.

소리 안 나게 조심해서 집으로 들어갔다.

열흘간 정신없이 바빴다. 공무를 처리하고 새 인물들을 포섭했다. 알토넨과 세력 확장을 위한 파티를 돌아다녔다. 칼 감시팀도 3배로 늘였다. 일거수일투족 감시는 물론이거니와 칼의 주변 인사들도 샅샅이 파악했다. 제아무리 깨끗하다고 소문난 칼이라도 뒤져 보면 먼지가 나오리라 확신했다.

결과는 어긋났다. 완벽하게.

암만 털어도 먼지 한 톨 안 나왔다. 부장들도 어이없어했다. 재규어가 “이거, 우리가 엉뚱한 놈 잡는 거 아냐?” 할 정도였다. 물론 그럴 리 없었다. 어린아이조차 귀족을 다른 말로 하면 뭐냐고 물으면 “돼지” 혹은 “변태”라고 답할 것이다. 이건 상식이었다.

결국 대원들을 독일로 출장 보냈다. 칼과 관련한 정보는 하나도 놓치지 말고 수집해 오라 지시했다. 우리의 노골적인 서슬에 칼도 오금이 저렸던 모양이었다. 엊그제 뜬금없이 알토넨에게 전화를 걸어 왔다. 재포니카 선출회에서 알토넨 지지연설을 해 주고 싶다며 친근하게 굴었다.

칼의 지지연설 따위는 손톱만큼도 필요 없었지만, 푸셔와 칼의 야합을 방지하는 차원에서 제의를 수락했다. 내친 김에 기자회견까지 오늘 열었다. 기자회견장에서 칼은 우리에게,

“이런 자리까지 수행입니까. 충성심이 대단하네요. 앞으로 잘 지내봅시다.”

라고 말하며, 반짝거리는 흰 치아를 드러내고 웃었다. 내 손이 본능적으로 권총을 찾았다. 사람 많은 곳인 덕에 목숨을 부지한 줄은 알기나 할까, 저놈.

힘차게 만세포즈를 취하는 알토넨과 칼 뒤에서 나와 부장들도 함께 주르르 선 채 기념촬영을 했다. 부장들이 최근 제일 두려워하는 일이 기자회견 다음날 신문 펼쳐보기였다. 근래 기자들은 공식석상에서 기념촬영을 할 때마다 알토넨의 뒤에 우리가 죽 늘어서 주길 강경히 요구했다. 알토넨이 허수아비임을 눈치 챈 것이다. 최근 진보언론도 가이거 관련기사를 질금질금 써대는 형국이었다.

빌어먹을 가면에 꼴사나운 제복코트를 걸친 우리 꼴이 또 며칠간 매스컴을 오르내린다고 생각하니 좆같았다. 부장들은 가면과 제복 디자인이라도 바꾸자며 간절히 호소했다. 하여간 열흘간의 중노동 끝에 휴가는 냈다.

집안이 컴컴했다. 레이는 서재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저 모습을 보자니 마음이 복잡했다. 열흘간 자정을 훌쩍 넘겨 집에 들어오기 일쑤였다. 그동안 함께 대화를 나눈 시간이라고는 아침식사를 할 때뿐이었다.

레이에게 카디건을 덮어 주고 책상을 훑어보았다. 메모지와 노트가 흩어져 있었다. 그간 바빠서 레이의 원고도 보지 못한 터였다. 노트를 들어 천천히 넘겨보았다. 악필이되 정리는 일목요연했다. 내용의 방대함도 놀라웠다. 자료집의 도움을 감안해도 얼떨떨했다. 레이의 지식이 이토록 해박했단 말인가.

조심스럽게 레이를 들어 침실로 옮겨 눕혔다. 잠깐 그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누가 봐도 멍청이로 단정할 금발미인이었다. 잠자는 레이를 긴 시간 응시하고 있자니 느낌이 묘했다.

하하하.

이런…….

기가 차서 웃어 버렸다. 막 스친 생각에 어이가 없었다. 이래서 여자들이 남자라는 족속을 욕하는 것이다. 일순간 레이가 겉보기 그대로의 멍청한 금발미인이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했다. 내게만 기대는 백치라면 좋았을 텐데, 하고 뇌까리고 말았다. 이런 자신이 어처구니없었다. 끔찍하게 엿 같았다.

알고 있다. 이 백치미 떨어지는 용모 안에는 기실 치밀한 회색 뇌세포가 존재했다. 누구보다 대담하고 냉정한 주술사 령이 숨어 있었다. 그런 것도 모르고 인간쓰레기라서 인형눈알이나 달고 살지, 하고 비웃었던 내가 진정한 멍청이였다.

그러나 이것만은 자신했다. 레이가 용모 그대로의 백치였더라도 나는 그를 깊이 사랑했을 것이다. 지금과 다름없이 열렬하게 사랑하고 아꼈으리라.

정말로 나는 레이가 멍청해도 상관없었다. 별별 시끄럽고 음흉하고 가식적인 놈들과 온종일 부대끼노라면 신경이 팽팽하게 곤두서기 일쑤였다. 레이는 드물게 나를 편안하게 해 주는 사람이었다. 겁 많고 우울하지만, 어려운 환경에도 비굴하지 않고 외려 고리타분하기만 한 그가 좋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분노가 솟구쳤다. 망연하기도 했다. 레이의 안에 깃든 령을 내가 극구 경계하는 근본 이유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건 남자들이 레이에게 던지는 눈길에 열 받아하는 것과 비슷한 감정이었다.

그것은 바로 질투였다. 레이의 총명함이 혹여 내게서 레이를 앗아갈까 두려워했던 것이다. 날개를 펼치고 비상해, 나를 버리고 떠날까 봐서.

의처증도 이 정도면 중증이다. 남자들 눈알도 모자라 애꿎은 뇌세포까지 질투하다니, 매일 밤 몰래몰래 레이의 팬티 검사를 할 날도 이제 며칠 안 남은 듯했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머리가 새하얗게 비었다.

이놈의 엿 같은 독점욕하고는…….

쓰게 웃으며 레이에게 시트를 덮어 주었다. 심각하게 도리 없는 녀석이었다. 레이보다 내 쪽이 빠른 시일 내로 정신과 상담을 받아야 할 것 같았다.

“음…….”

레이가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또 악몽에 시달리는 듯했다. 깨울까 하다가 관두었다. 몹시 괴로워하지만 않으면 나는 굳이 레이를 깨우지 않고 관찰해 왔다. 잠꼬대에서 그 왕인지 뭔지 하는 새끼에 관한 실마리를 얻기 위해서였다. 이제껏 거둔 단서라고는 변변찮았다. “꺼져.”라든가 “개새끼.” 따위의 욕설 아니면 “그만해.” 정도였다.

“음…… 으…… 으.”

레이가 시트를 잡아 뜯었다. 이내 느닷없이 비명을 지르며 격렬히 발버둥 쳤다. 전신을 타고 흐르던 피가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지금 이 모습은 레이가 병원에서 보인 증세와 똑같았다. 급히 레이의 어깨를 잡고 흔들며 뺨을 때렸다.

“레이! 레이!”

몇 번이고 소리쳤으나 발작은 멎지 않았다. 끔찍한 생각이 뇌리를 파고들었다. 이 증세가 앞으로 또 몇 달이나 끌까 하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그의 눈이 크게 뜨였다. 동시에 씻은 듯이 경련이 멎었다.

나는 옴짝달싹못한 채 레이를 응시했다.

“……레이. 괜찮습니까.”

그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바로 레이가 내 손을 확 떨쳐내며 “떨어져!” 하고 소리쳤다.

“떨어지란 말이야!”

나는 석상처럼 굳어 레이를 응시했다. 흐릿한 파란 눈동자에서 차츰차츰 초점이 잡혔다. 레이가 눈을 깜박거렸다. 고개를 흔들며 좌우를 둘러보기도 했다. 여기가 어딘지 어리둥절해하는 기색이었다.

저 모습에 온몸의 체온이 내려갔다. 일단 주방에서 찬물을 가져와 레이에게 건넸다. 레이가 물을 마시며 가슴을 두들겼다.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더는 모른 척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무슨 꿈을 꿨기에 그렇게 몸부림쳤습니까.”

레이가 멈칫했다. 잠깐 뒤 “뭐…… 그냥, 악몽.” 하며 우물쭈물했다.

“어떤 내용인지 궁금하군요.”

“기억 안 나요.”

또 거짓말이었다. 당장 한 방 후려치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잠에서 깬 지 십 분도 안 지났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기억날 겁니다. 그 많은 식물의 효능도 외우는 당신이 십 분 전에 꾼 꿈을 기억해내지 못할 것 같진 않군요. 말할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나는 인내심이 강하니까.”

노골적으로 취조하는 어투에 레이가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말하십시오. 얼른.”

한 번 더 말했다. 내가 들어도 목소리가 끔찍했다.

“그, 그러니까.”

레이가 내게서 시선을 피했다. 나는 손아귀에서 힘을 빼려 노력했다.

“그러니까?”

“……갇혀 있었어요. 어둠 속에서 횃불 하나만 힘없이 타오르는 차디찬 방에.”

“그리고?”

“남자들이 보였어요. 깃이 뾰족한 검은 두건에 눈만 드러낸 사내들이었어요. 그 형상이 너무도 음산해서 악마들 같았어요. 그리고 나는 알몸으로 사슬에 손발이 묶인 채 탁자에 누워 있었어요. 그런데 그 탁자는…….”

“탁자는?”

“날카로운 가시가 아주 많은 산사나무 가지로 뒤덮인 탁자였어요. 사내들이 내 어깨와 발목을 붙잡고 좌우로 거세게 문질렀어요. 그만하라고 아무리 비명을 질러도 그들은 대꾸도 안 했어요. 처음엔 느릿느릿 문지르다가 갈수록 박차를 가하고, 내가 한계에 이르면 멈추다가…… 기운을 회복하면 다시 시작하고…… 그것을 말없이 긴 시간 반복했어요. 어둠 속에서 내 비명만 벽에 부딪쳐 돌아왔어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참 뒤 그들이 나를 탁자에서 내려놓았어요. 눈앞이 희미한 와중에도 피로 흥건히 젖은 탁자가 보였어요. 피와 살점이 잔뜩 묻어 뭉개진 산사나무 가시들이……. 그들이 나를 놔두고 나가 버렸어요. 텅 빈 방에서 나는 울었어요. 뒤로 누울 수 없어서 엎드린 채로. 하고많은 사람들 중에서 왜 내가 이토록 잔인한 일을 당해야 하나 생각하며. 그 와중에도 웃기는 건…….”

레이가 씁쓰레 미소 지었다.

“거울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나는 거울 보는 것을 좋아했는데 지금은 거울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참…… 그 상황에서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는지…… 한심하게도. 그게 끝이에요.”

“네…….”

나는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더는 입이 열리지 않았다. 부메랑으로 머리를 베여 버린 양 사고회로가 동작하지 않았다.

“이만 잘게요.”

레이가 시트를 끌어 올렸다. 창백하고 고단한 낯빛으로 눈을 감았다. 그의 숨소리가 편해진 것을 확인한 후 나는 거실로 나왔다. 담배를 한 개비 꺼내 물었다.

산사나무 가지로 가득 뒤덮인 탁자라.

고문의 황제 스네이크도 이런 고문은 처음 접하는 종류였다. 레이의 말대로 과연 악몽이었다. 그런 건 악몽에나 딱 등장할 법한 고문이었다. 문제는 레이가 그런 악몽을 꾼 원인이었다.

레이의 몸에 몇 군데라도 찢긴 흔적이 남아 있다면 과거에 고문을 당했나 의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레이의 몸에 흉터라고는 내가 남긴 총상 하나뿐이었다.

산사나무 가시로 몸뚱이를 난도질했다……. 이 정도면 기상천외하기까지 한 수법이었다. 고문 수위를 세 단계로 분류해 놓은 가이거에서도 그런 수법은 사용하지 않았다. 1단계는 미국 CIA에서도 우수성을 호평 받은 ‘잠 안 재우고 장시간 세워 놓기’였다. 2단계는 물고문을 비롯한 소소한 린치 행위였고, 3단계가 전기고문 및 고양이 채찍 고문과 살가죽 도려내기였다.

3단계는 자백이 급한 경우나 보복살인 아니면 절대 사용하지 않았다. 간단한 물고문만 하더라도 수도세 지불이 뒤따르는 법이다. 고문 수위가 높아질수록 비용과 노력도 비례하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1단계에서 끝내는 것이 원칙이었다.

레이의 악몽에서 또 하나 의문이 있었다. 고문의 근본목적은 자백 취득이다. 그러나 악몽의 사내들은 가시가 무뎌질 만큼 고문을 가하고서는 정작 취조는 빼먹었다. 긴 시간 말없이 괴롭히기만 했다. 하기야 그 정도로 고문하면 누가 순순히 자백하지 않을까만, 그래도 고문이 끝나자마자 모두 훌쩍 나가 버린 행동은 매우 수상했다.

이 의문점을 설명할 답은 하나뿐이었다. 그 고문의 목적은 자백 취득이 아니었다. 오로지 사람의 몸을 망가뜨리기 위해, 고통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가해진 것이었다. 아주 섬뜩한 악의가 느껴졌다.

그리고 하나 더.

나는 담배를 비벼 끄고 한 개비를 또 뽑아 불을 붙였다.

거울이라. 거울 보는 것을 좋아했는데 거울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라.

이것도 의아했다. 레이는 거울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세수할 때도 건성으로 쳐다보기 일쑤였다. 나는 담뱃재를 털다가 멈칫했다. 냉기가 등골을 훑고 지나갔다.

일명 ‘고등어로 나를 유혹한 날’, 세수나 할 요량으로 나는 레이의 욕실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내가 무엇을 보았던가. 거울이 붙어 있어야 할 자리에 검은 자국만 남아 있었다. 그건 분명 일부러 뗀 흔적이었다.

대체 뭐지.

나는 담배를 길게 빨았다. 어쨌든 거울 부분만 빼면, 레이의 악몽은 길게 고민할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 손금 들여다보듯 해석이 아주 쉬웠다.

레이는 과거에 끔찍한 일을 당했다. 분명 그 왕인지 뭔지 하는 새끼에게. 그것이 악몽으로 형체를 바꿔 등장한 것이다. 꿈에서 레이는 알몸이었다. 그리고 사내들이 등장하여 레이를 괴롭혔다. 그렇다면 윤간일 확률이 높았다. 어지간한 행위에는 무덤덤한 레이가 지금까지 악몽에 시달릴 만큼 강도 높은 변태 짓을 동반한 윤간. 아주 끔찍하고 잔인한 윤간.

온갖 망상이 내 머리를 부수었다. 레이는 왕인지 뭔지 하는 새끼를 간절히 찾았다. 작자의 이름이 진짜로 왕일 리는 없을 터. 왕, 왕, 나의 와앙, 하며 받들어 모시리만치 레이는 놈을 뜨겁게 사랑했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실컷 몸 주고 마음 줘 가며 사랑했는데, 작자가 레이를 아주 더러운 방법으로 버렸다면……. 이를테면 친구들을 불러서…….

라이트크로스가 안면을 연거푸 강타한 느낌이었다. 핑그르르 타고 흐르는 분노가 숫제 화염덩어리였다. 자꾸만 눈앞으로 끔찍한 광경이 스쳤다. 그만하라고 외쳐도 오랫동안 말없이 레이의 몸을 망가뜨리는 사내들. 깃이 뾰족한 두건을 쓴 여러 명의 남자들.

아무런 말없이, 레이를 고문하는 사내들…….

이상하게도, 무엇인가, 오랫동안 감쪽같이 속아오다가 뒤늦게야 진실을 깨달아 버린 기분이었다. 뒤통수를 아주 강하게 맞은 듯한…….

어마어마한 살의가 온몸을 휩쓸었다. 덮쳐드는 기세가 해일 같았다. 벌떡 일어서서 거실을 빙빙 거닐었다. 진정이 되지 않았다. 태어나서 지금만큼 분노한 적이 없었다.

참다못하고 야구방망이를 들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허공으로 야구방망이를 미친 듯이 휘둘렀다. 가로수까지 쾅쾅 두들겼다. 가지를 덮은 눈이 우수수 떨어졌다. 가로수에 홈이 잔뜩 팬 후에야 야구방망이를 멈췄다.

결심했다. 칼 건이 마무리되면 제일 먼저 왕인지 뭔지 하는 새끼부터 잡아내기로. 좆 뿌리를 뽑아 질근질근 씹어 먹어도 시원찮았다. 두고 봐, 이 개새끼. 기다려라. 내 손에 잡힐 때까지 부디 건강하게, 눈 부릅뜨고 잘살아만 있어라.

어쨌든 내일은 레이를 끌고 정신과 클리닉에 가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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