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M─
파티수행 스케줄로 간만의 야근이었다. 사교계 데뷔 한 달 만에 칼 바르디가 파티를 연 것이다. 부친상을 고려하면 구설수에 오르리만치 시기가 빨랐다. 왕국관례상 통상적으로 부모상을 치른 귀족은 최소 석 달은 파티를 열지 않았다.
“본부장님, 이만 나가 봐야 할 것 같은데.”
레오파드가 말했다. 나는 빌어먹을 가면을 쓰고 일어섰다. 쿠퍼헤드가 운전대를 잡고 레오파드와 나는 뒷좌석에 앉았다. 알토넨이 탄 자동차를 앞세우고 뒤따라갔다.
감이 안 좋았다. 이번 파티는 일명, 《마약방지 캠페인》 이후 2주간 미술 전시회나 돌아다니던 칼이 다시 사교계에 몸뚱이를 비비려는 징조였다. 나는 의자 가장자리를 톡톡 두들겼다.
레오파드가 이쪽을 곁눈질했다.
“지나치게 경계하는 것 아니야? 이리나의 숍 오픈을 기념하는 파티라잖아. 어차피 부모상을 당한 미혼귀족은 3년간은 결혼도 못해.”
“법적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
“그렇긴 한데, 이리나가 늙고 못생긴 크루거와 얼마나 오래 가겠냐. 적당히 보석이나 뜯어내다가 차 버리겠지. 칼도 누이동생이 왕의 돈으로 옷 사고 보석 걸치는 쪽이 낫다고 생각해서 내버려 두는 것일 테고. 설마 왕비 자릴 노리겠어.”
레오파드의 말은 대다수의 견해와 일치했다. 그러나 또 몰랐다. 왕의 정부란 정객들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으레 이용해 온 도구 아니던가.
나는 혀를 차며 쿠르부아지에를 잔에 따랐다.
“그런데 왕을 상대하기도 바쁠 여자가 웬 숍 오픈이야. 업종이 뭐래?”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걸. 한 번 입고 내팽개친 옷이 아까워서 낸 의상숍 아닐까. 이리나가 입다 버린 팬티만 해도 5분 안에 동날 테니까. 벌써부터 팬티에다가 코를 처박고 자위를 해댈 고관대작 나리들이 눈에 성하군.”
쿠퍼헤드가 핸들을 꺾으며 후후후후후후, 음흉하게 웃었다. 안타깝게도 게이인 나와 레오파드에게는 전혀 효력이 없는 음담패설이었다. 이쪽의 냉담한 반응에 쿠퍼헤드가 어깨를 으쓱 올렸다.
“그런데 스네이크. 하나 물어봐도 돼?”
“음.”
“칼 어때? 게이로서 흥미 안 당겨? 남자가 봐도 대단한 미남이잖아.”
“별로.”
나는 심통하게 대꾸했다. 칼은 내 취향에서 동떨어진 근육질 미남이었다. 게다가 시끄럽고 시건방졌다. 문란한 플레이보이 시절에도 내 나름의 섹스철학은 있었다. 나는 취향 아닌 상대와는 절대 잠자리를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일단 입맛부터 안 당겼다.
“흐흠, 그렇군. 그럼 레오파드는 안 꼴려?”
쿠퍼헤드의 말에 레오파드가 흐흐흐, 하고 웃었다.
“귀족나리 똥구멍이라면야 누구든지 영광이지.”
크으…….
내 저럴 줄 알았지.
나는 혀를 찼다. 이쪽도 도리 없었지만 저쪽도 못 말리기는 매한가지였다. ‘스노우 화이트’에서 상대를 구하기 어려워질 무렵, 레오파드가 “급한데 저놈이라도 데려가서 하자”며 지목한 상대들이 눈앞을 스쳤다. 간달프처럼 긴 수염을 늘어뜨린 영감부터, 이목구비가 살덩이에 파묻힌 거대한 뚱보를 포함, 온몸을 퍽큐 문신으로 도배한 레게머리 펑크족까지, 내가 어안이 벙벙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정말이지 똥구멍이면 닥치지 않고 박아대는 녀석이었다. 뭐, 덕분에 구레나룻을 손쉽게 처리해서 좋긴 했다만.
그나마 레오파드가 애인 기준만큼은 까다로워서 다행이었다. ‘재봉과 요리, 프라모델 조립에 능숙하고, 각종 화제를 위트 있는 화술로 토론하고, 연인이 울적해하면 감미로운 플루트 연주로 위로해 주고, 조용하고 착하고 이해심 많고, 남자 경험은 적지만 잠자리에서는 대담하기 짝이 없는, 절세미인 마조히스트’를 구하겠노라고 얼토당토않은 야망을 불태웠다. 안 그랬으면 옛날에 부장들의 똥구멍까지 노려대 직장이 발칵 뒤집혔을 것이다.
나는 레오파드를 흘끗 곁눈질했다. 차창 밖을 지나가는 젊은 남자들을 훔쳐보며 아랫도리를 벅벅 긁고 있었다.
저러다가 노총각으로 늙어 죽지.
나는 고개를 저으며 쿠르부아지에를 마셨다. 바르디 공작가의 저택이 저만치서 보였다. 성에 가까운 웅장한 저택이었다. 지금은 식물인간으로 변신해 버린 울프삭 경을 따라 여러 번 들락날락한 곳이라 별다른 감흥은 들지 않았다.
앞에서 알토넨이 자동차에서 내렸다. 부장들과 함께 그를 호위해서 본관으로 들어갔다. 별생각 없이 회장으로 들어서다가 멈칫했다. 전신으로 한기가 내달렸다.
이…… 무슨.
눈앞에 레이들이 바글바글했다. 정확하게는, 레이가 애지중지해 마지않는 뭉크코트를 걸친 주술사들이 곳곳을 음침하게 거닐고 있었다. 오싹했다. 누군가가 레이를 한가득 복제해서 여기다가 풀어놓았나, 하는 터무니없는 착각까지 할 뻔했다.
그만큼 저 코트는 백인(百人)을 일색(一色)으로 탈바꿈시키는 기묘한 재주가 있었다. 나 못지않게 뭉크코트에 몸서리치는 부장들도 옴짝달싹 않고 있었다.
“제기랄. 직장생활 11년 만에 맞는 최고의 스릴이로군.”
옆에서 팔콘이 나직이 투덜거렸다. 나는 급히 정신을 차리고 알토넨의 뒤를 따라갔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는 분명했다. 오늘 우리는 저 뭉크코트들에게 털끝 하나 닿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해리! 왔어요? 오늘도 호위병들과 함께네?”
이리나가 알토넨을 껴안으며 뺨에 키스했다. 시커먼 팬더곰 눈 화장에 고딕풍 블랙드레스를 입고 검은 레이스장갑을 끼고 있었다.
“저들은 뭐지? 이야, 이거 으스스한걸. 영화에나 나올 법한 마법사 같잖아. 귀족파티에서는 처음 보는 광경인데.”
알토넨의 말에 이리나가 웃었다.
“마법사 같은 게 아니라 마법사예요. 이번에 여는 내 숍은 위치Witch숍이에요. 오픈파티를 기념해서 이름난 주술사들을 초대했죠. 여기 참석한 귀족들에게는 무료로 점을 쳐 주니까 한번 받아 봐요. 파티도 자주 열 예정이니까 꼭 참석해 주고.”
“이거 특이한데. 이리나에게 이런 취미가 있을 줄은 몰랐어.”
“특이하긴요. 여자들이 주술을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남자들은 보통 이런 쪽에는 관심이 없어. 그리고 나는 가톨릭 신자인 데다가 공무에도 바빠서 말이지.”
가톨릭 신자이자 전 로터스 마넨이 열광적인 주술 마니아였다는 사실을 알토넨이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좌우간 좆같았다. 복제 레이들이 뿔뿔거릴 줄 알았으면 알토넨의 파티 참석을 절대 허락하지 않았을 터였다.
“여, 해리.”
칼이 다가와 알토넨과 악수를 나누었다. 능청이 대단했다. 얀케리의 죽음으로 이쪽을 꺼릴 법한데 그저 느물느물했다. 나는 코웃음 치며 칼을 쏘아보았다.
오늘 얼마나 까불지 한번 지켜봐 주지.
칼과 알토넨이 시시껄렁한 잡담을 늘어놓았다. 미술 전시회나 돌아다녔다, 무슨무슨 책이나 읽었다 등등 떠들어댔다. 문득 칼이 이쪽을 흘끗 곁눈질하더니 싱긋 웃었다. 일순 목덜미가 찌르르 울렸다.
저 새끼가.
“하나 물어봐도 됩니까? 여기서 스네이크가 누군지? 채찍을 들고 있지 않으니 제가 알아볼 수 없군요.”
우리는 일절 반응하지 않았다. 알토넨이 사색으로 변해 “갑자기 그건 왜 묻는데.” 하고 말했다. 칼이 시가를 빨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별건 아니고. 여동생이 이번에 여는 숍이 유명 주술사들과 함께하는 것이거든. 덕분에 여기 저택에 주술사들이 자주 들락거렸는데, 그 와중에 내가 재미난 이야길 주워들었어. 다름 아니라 네 보좌관들이 주술에 흥미가 많다는 거야. 특히 스네이크 말이지. 해리 너, 여태 몰랐어?”
바로 감 잡았다. 나는 42번가의 이름난 주술사들을 직접 취조했다. 그것을 누군가가 칼에게 나불거린 것이다.
“처음 듣는데. 울프삭 경께서 미신을 매우 싫어해서 가이거와 경찰을 시켜 주술사를 대대적으로 탄압한 적은 있었지만. 그 탄압도 1년 전에 해제했고, 보상조치로 주술사들의 세금도 대폭 감면해 줬어. 이제 와서 그 일을 들추는 이유를 모르겠군. 이러려면 나를 초대하지도 말았어야지.”
알토넨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역시 쓸 만한 허수아비였다.
칼이 하하핫, 웃으며 알토넨의 어깨를 찰싹 때렸다.
“정색은!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을 뿐이야. 어쨌든 주술사들이 말하길, 이름난 실력파들을 한곳에 모아서 스네이크가 직접 취조했대. 그것도 ‘령’이라는 베일에 싸인 주술사에 관해서 물었다더군. 재미있지 않아? 주술에는 조금도 관심 없어 보이는 사내가 주술사를 찾다니 말이지.”
칼이 시가 연기를 천천히 내뿜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령이라는 주술사를 찾긴 했나요? 듣기로는 령은 정체를 철저하게 숨기고 다녀서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하던데.”
우리는 반응하지 않았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스네이크는 울프삭 경의 지시를 따랐을 뿐이겠지. 내가 알기로 스네이크는 주술에 무관심한 사람이야. 그리고 경고하는데, 내 호위병들에게 한마디도 걸지 말아 줘. 업무원칙상 이들은 나 외의 어떤 귀족과도 말을 섞지 않아. 자꾸 이러면 무신귀족의 명예를 흠집 내려는 의도로 받아들이겠어.”
알토넨이 불쾌한 낯으로 말했다. 진짜로 화가 난 기색이었다.
칼이 머쓱하게 머리를 긁었다.
“이것 참 민망하네. 그쪽의 업무원칙을 몰라서 한 행동이니 이해해 줘. 악수도 그렇고…… 그쪽 정말 살벌하군. 하긴, 재포니카의 호위병들은 무신귀족의 권위를 상징한다는 이야기는 나도 들었어. 하하핫!”
“알았다니 됐어. 네가 아직 왕국 법도에 어두우니까 이쪽도 이해해야지.”
알토넨이 누그러진 기색으로 말했다. 칼이 “사과하는 김에 내가 파티장을 안내하지.” 하며 알토넨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들 뒤를 따라가며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당장 칼에게 덤벼들어 혀가 배꼽까지 늘어질 때까지 목을 졸라 버리고 싶었다. 눈알을 뽑고 손가락 마디마디를 꺾어 버리고 싶었다.
하필 령에 관해서 캐묻다니.
괜찮았다. 덕분에 칼은 부장들에게 경계심을 샀다. 그동안 나 홀로 비수를 가느라 제법 외롭던 참이었다. 일명 ‘령 사건’은 가이거 최고의 블랙파일이었다. 악수금지를 업무원칙에 포함한 것부터 빌어먹을 가면과 흉물스러운 제복코트를 유지하는 수칙까지, 령 사건이 우리에게 끼친 영향은 그야말로 막대했다.
흥, 자기 발로 무덤에 뛰어든 셈인가.
예상을 뛰어넘는 너구리였다. 웬만한 귀족들은 우리와 눈빛만 마주쳐도 오줌을 싸대는 판국이건만 칼은 면전에서 스네이크를 찾았다. 직감했다. 언젠가는 대형사고를 칠 새끼였다.
“그런데 주술사들은 복장이 다 저래? 분위기야 그럴싸하다만.”
알토넨이 뿔뿔거리는 뭉크그림들을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칼이 말했다.
“아니. 주술사라고 아무나 저 코트를 입을 순 없다고 해. 저 코트는 대대로 물려 입는데, 자신은 유서 깊은 스승에게서 배운 뛰어난 주술사임을 나타낸다고 하더군. 주술에 관심 많은 사람은 저 코트만 봐도 보통 주술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본다는 거야. 그래서 손님을 끌고 싶은 주술사는 돈을 주고서라도 저 코트를 구해 입거나 혹자는 위조코트를 만들어서 입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호오. 그럼 여기 있는 주술사들 전원이 대단한 실력파라는 뜻인가.”
“그렇지. 검증된 주술사들이 한곳에 모인 셈이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레이는 이런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주술사들이 착용하는 일종의 유니폼이려니 지레짐작해서 취조할 때 질문하지 않은 우리 탓도 있었지만, 역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기가 막혔다. 저 말은 곧, 레이는 자신이 ‘뛰어난 주술사’라는 사실을 첫 등장부터 숨김없이 드러냈다는 뜻 아닌가.
내게 예언을 해 준 마녀가 기억났다. 연애전문으로 이름을 떨친다고 자랑했었다. 그게 허풍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쩐지 그놈의 구슬, 지나치게 영롱하다 싶더라니…….
수확이 없지는 않았다. 복제 레이들 때문에 놀라긴 했으나 이 파티에 오길 잘했다는 판단이 들었다. 제2, 제3의 인물이 또 마넨처럼 주술을 이용해 모사를 획책할 가능성을 고려해야 했다. 저 칼 바르디부터 주술에 근접해 있지 않은가.
“해리, 구경만 하지 말고 점이라도 보지 그래? 종교에 얽매이지 말고 한번 즐겨 봐. 연애점 어때?”
“난 유부남이야. 유부남이 연애점을 보려면 이혼전문 변호사를 찾아야지.”
알토넨과 칼이 시시껄렁한 대화를 나누며 걸어갔다. 유난히 사람이 많이 모인 어느 테이블 주변에서 걸음을 멈췄다.
“여긴 왜 이렇게 사람이 많지.”
알토넨이 중얼거리자 칼이 웃었다.
“회장 입구에서 팸플릿을 안 받았나 보군? 저 주술사의 가슴께에 달린 작은 흰색 리본 보여? 저건 모든 것을 꿰뚫어 줄 수 있다는 뜻이야. 여기 모인 주술사들 중에서도 최상급에 속한다고나 할까. 주위를 잘 둘러 봐.”
그 말대로 색색의 리본을 단 주술사들 중에서도 흰색 리본을 단 주술사들 주위만 인산인해였다. 알토넨이 “호오.” 하며 휘파람을 불었다.
“최상급 주술사라……. 그럼 나도 한번 볼까.”
칼과 알토넨이 줄을 서서 기다렸다. 주술사가 점괘를 말할 때마다 객들의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분노하는 이도 있고 뛸 듯이 기뻐하는 이도 있었다.
“어서 오시지요, 손님. 무엇을 알고 싶으십니까.”
어느새 주술사 앞이었다. 회색 지팡이를 든 영감이었다. 알토넨이 재미있어 하는 기색으로 주술사를 응시했다.
“글쎄…… 앞으로 정계에서 내 행보가 어떨지 알아볼 수 있겠는가.”
“기다리십시오.”
주술사가 지팡이를 떨며 중얼거렸다. 알토넨이 “풉.” 하고 웃었다. 중풍환자같이 지팡이를 한참 떨어대던 주술사가 불현듯 동작을 정지했다.
“건방지게만 굴지 않으면 만사형통이십니다, 손님.”
사람들이 어이없어하며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하얗게 질려 버린 알토넨만 얼어붙어 옴짝달싹못했다. 나는 픽픽 웃었다.
실력깨나 있는 주술사로군.
허수아비에게 건방지게 굴지 말라니, 정곡을 찌르는 점괘 아닌가.
알토넨에 이어서 칼이 나섰다.
“그럼 내 연애점 좀 봐 줘.”
“기다리십시오.”
주술사가 지팡이를 긴 시간 떨어대더니 입을 열었다.
“힘든 사랑을 하고 계십니다. 괜히 욕심 부리지 말고 순리대로 사십시오.”
사람들이 오오, 하며 탄성을 터뜨렸다. 칼이 “거 진짜 족집게네.” 하며 머리를 긁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저놈이 언제 쥐도 새도 가이거도 모르게 연애질을 하고 있었지.
힘든 사랑? 유부녀나 유부남에게 반하기라도 했나. 하하하, 설마 신부나 수녀를 짝사랑하기라도? 이거 재미있는걸.
쏠쏠한 정보였다. 이러다가 나도 주술에 빠지는 거 아니야, 하고 중얼거리다가 멈칫했다. 언제부터인가 주술사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빌어먹을 가면이 신기해서 저러나, 하다가 곧 생각이 바뀌었다.
나였다. 주술사는 분명 나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 바람에 좌중의 시선이 이쪽으로 몰려들고 말았다. 파티수행 8년에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다. 경계심이 확 치밀었다. 왜 하필이면 나를 쳐다보지. 저 영감이 설마 내 정체를 알아차리고?
주술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창피한 줄을 모르는구려, 청년. 사람을 그토록 짓이기고도 달라붙는다니 말이오. 흐느끼는 소리가 들립니다. 양심이 있으면 당장 때려치우시오. 당신에게는 그 사람을 취할 자격이 없습니다.”
단도로 온몸을 난도질당하는 느낌이었다. 저건…… 레이와 내 관계를 말하는 것 아닌가.
폭풍우가 내 전신으로 부딪쳐오는 듯했다. 죽음의 사신마저 뒷걸음칠 것 같은 냉기가 발끝에서부터 올라왔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한 어귀만이 내 귓가를 맴돌았다.
당신에게는 그 사람을 취할 자격이 없습니다.
쿠퍼헤드가 내 옆구리를 툭 쳤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주변의 사람들이 ‘가이거의 저 깡패가 도대체 무슨 사악한 짓을 저질렀기에’하는 눈초리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알토넨의 낯에 노기가 떠올랐다.
“입방정이 지나치군. 네놈이 뭘 안다고 감히 이래라 저래라야!”
소리 지르면서 주먹으로 테이블을 쾅 쳤다. 주술사가 움찔했다. 칼이 알토넨을 진정시키며 “저 주술사는 내보내.” 하고 시종에게 명령했다.
알토넨이 칼의 손을 확 뿌리쳤다.
“가야겠군. 이따위 주술놀음은 내 신앙에도 어긋나는 일이니까. 그리고 너도 이리나를 단단히 훈계하도록 해. 이따위 마녀숍이나 열다니, 평민의 모범이 되어야 할 귀족으로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봐.”
그러고는 주저 없이 회장을 떠났다. 알토넨을 뒤따라가는 내내 가슴 한구석이 고동쳤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으로 뒤엉켰다.
지프로 들어가서 일단 휴대전화를 들었다. 직속부하를 호출해 현재 주술에 몰두하는 귀족들을 파악해 리스트를 작성, 일주일 안에 올리라고 지시했다. 칼 감시팀도 두 배로 늘리라고 조치했다. 이리나의 마녀파티도 철저히 감시하라고 덧붙였다.
지시가 끝나자 알토넨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늘 일에 신경 쓰지 말라며 앞으로는 칼을 멀리 하겠다고 약조했다. 건방지게 굴지 말라는 주술사의 말뜻을 알아차린 것이다. 나는 “다음부터는 주의해 주십시오.”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의자에 등을 기대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기분이 진창바닥이었다. 귓가에서 자꾸만 주술사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당신에게는 그 사람을 취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 말이 옳다는 건 나도 안다. 내가 레이에게 저지른 행위가 어느 만큼이나 잔인한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레이와 헤어진 후 다시 구애할 엄두를 못 냈던 것이다. 지금 레이와 함께하는 것도 사실상 몹시 염치없는 짓거리였다.
레오파드가 룸미러에 비치는 이쪽을 흘끗 쳐다보았다.
“뭐…… 알고 그랬나. 알았으면 네가 그러지도 않았지. 상황이 고약하게 꼬였을 뿐이야. 그러니까 표정 풀어.”
물론 알고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도 참혹했다.
레이의 폐는 상당 부분이 손상되었다. 총탄이 폐를 관통한 여파였다. 평생 조심해서 살아야 했다. 내가 레이 앞에서만은 담배를 절대 피우지 않는 이유도 실은 이것 때문이었다. 레이는 이 사실을 몰랐다. 집에서만 거의 지내는 생활습관상 몸의 이상을 아직 깨닫지 못한 기색이었다.
주술사의 말이 옳았다. 양심 없는 짓이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다만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만큼 레이를 놓치기 싫었다. 놓칠 수도 없었다. 절대 불가능했다. 레이가 없는 내 시간은 상상할 수 없었다. 두렵고 무서웠다. 무덤 같았던 그 시간이 두려웠다. 산송장으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써늘한 숲속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망령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이것이 나라는 녀석이었다. 어차피 나는 태어날 때부터 양심이 없는 인간이었다.
왜일까.
오랜만에 이 의문이 뇌리에 되살아났다. 왜일까. 왜 우리가 그렇게 되었을까.
레이와 재결합하기까지 긴 시간 동안 내가 얼마나 이 의문에 골몰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왜 우리가 그렇게까지 끔찍한 구렁텅이로 추락했을까. 신의 변덕을 원망하고, 심술궂은 어느 누군가가 우리를 질투해 견고한 덫을 놓았나 추측해 보기도 했다. 내가 저지른 악행에 신께서 요구한 죗값일까 참회도 해 보았다.
온갖 물음표와 절망감이 떠다니는 머릿속이 곧 연옥이었다. 알 수 없었다. 의문에 몰두할수록 컴컴한 지하감옥을 헤매는 느낌만 맛볼 뿐이었다.
“지금부터 잘하면 그만 아니야.”
레오파드가 말했다. 나는 필터까지 닳은 담배를 비벼 끄고 한 개비를 또 꺼내 물었다. 그럴 생각이었다. 죽는 날까지 잘해 줄 생각이었다. 흙이 관 위로 뿌려질 그 순간까지 레이를 사랑할 생각이었다. 사랑하고 또 사랑할 작정이었다.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였다.
갑자기 울적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