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L.
편지를 우체통에 넣었다. 수신처는 왕비 관련 프로그램을 방영한 방송국이었다. 굳이 내가 아니라도 문제를 지적할 사람들이 있을 듯했지만, 편지는 보내는 편이 속 편할 것 같았다. 편지를 부친 뒤 택시를 타고 마트로 향했다.
이틀간 왕비 건에 골몰했다. 방송에서 본 왕비의 식탁은 서로 궁합이 맞지 않는 식재료로 조리된 음식들이 많았다. 장기적으로 가면 왕비의 건강에 이상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었다. 현재 왕비가 임신 중임을 감안하면 간단히 넘길 수 없는 문제였다.
위험한 음식을 교묘히 먹여 왕비나 후궁의 유산을 유도하는 것. 동서양 고금을 막론하고 너무도 흔한 수법이지.
그럼, 범인은 누구인가.
내가 세운 가설은 두 개였다. 첫째, 내가 정쟁에서 관심을 거둔 동안 신진세력이 부상했다. 왕비의 유산으로 이득을 볼 수 있는 어떤 집단.
둘째는 가이거였다. 출산 뒤 왕비가 세를 회복할 가능성을 경계하여 메사라가 왕비의 요리사를 매수했다.
내 생각에 첫째일 확률이 제일 높았다. 거기에 주저 없이 99퍼센트를 걸 수 있었다. 가이거일 확률은 낮았다. 가이거는 뛰어난 정보조직이었다. 왕비의 남자편력을 뻔히 아는 그들로서는 매스컴을 통해 불륜사진을 터뜨리는 쪽이 훨씬 수월했다.
어쨌든 내가 이 건에서 취할 수 있는 조치는 여기까지였다. 나머지는 왕비의 운에 달린 일이었다.
택시에서 내려 마트로 들어갔다. 내일 점심에 이웃들을 초대해 작은 파티를 열 예정이었다. 오늘 오후부터 메사라와 함께 파티를 준비하기로 한 터였다. 구입해야 할 물품이 태산이었다. 목록의 물품을 모두 구입한 뒤 육아용품 코너로 향했다.
어제 소니아가 전화로 임신을 전했다. 태몽으로 보아 딸이 분명하다며 “선물해 줄 거죠, 자기?” 하며 들볶았다. 그렇잖아도 식물자료집이 필요해서 조만간 42번가의 헌책방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때 소니아를 만나 선물을 건네주면 될 것 같았다.
뭘 골라야 할지 감이 안 잡혀서 어느 부인을 졸졸 따라다니며 똑같은 것으로 족족 집었다. 선물을 대충 추려 에스컬레이터로 향했다. 몇 발자국도 못 가 주춤주춤 뒷걸음쳐서 되돌아왔다.
“어…….”
나는 미간을 모았다. 서적코너 진열대의 주간지 표지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소위 ‘할리우드 배우 씨’였다. 주간지를 들어 넘겨보았다. 표제가 ‘칼 바르디 공작, 전격 연예계 진출!’이었다.
고(故) 카이자 바르디 공작에게 작위를 물려받으며 사교계에 전격 데뷔한 칼 바르디 공작의 질주가 눈부시다. 빼어난 용모와 매너로 귀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도 모자라 조만간 피아노 앨범을 취입하고 연극에도 출연할 예정이라고 한다. 독일 체류 때부터 공작은 각종 콩쿠르를 휩쓴 전도유망한 실력파 피아니스트이자, 프로극단에서 주연으로 활약한 연극배우이기도 했다. 이로써 본격적인 예술계 진출이……
“소위 헐리우드 배우 씨가 아니라 진짜 배우 씨였네.”
얼떨떨하게 중얼거렸다. 기사 뒤로 공작의 화보가 줄지었다. 이랬으니 내게 외국 살다 왔느냐고 물었구나 싶었다. 주간지를 진열대에 되돌려 놓고 카트를 다시 밀었다.
바르디 공작가문…….
나는 카트를 밀며 생각에 잠겼다.
칼 바르디의 선친 카이자 바르디는 정쟁에 뛰어들지 못했다. 파티 때문이었다. 왕국에서 정쟁이란 곧, ‘파티를 견디는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오리만치 파티는 정쟁의 주요 무대였다. 귀족들에게 무도회와 사교모임, 살롱, 티파티, 축제는 종교나 다름없었다.
‘파티를 견디는 것’. 다시 말하면, 어마어마한 양의 음식과 와인을 먹고 마시고, 까다로운 격식과 예법을 능숙하게 차리고, 제아무리 화나는 일이 있어도 입가에 항상 미소를 띠고, 위선과 거짓말, 가식에 꿋꿋이 버티는 것.
카이자 바르디는 그 모든 것을 감당하지 못했다. 선천성 당뇨병 때문이었다. 지병만 아니었으면 카이자 바르디는 정쟁에서 빼어난 능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령으로서 내가 채집한 결과는 그러했다.
그런 남자의 아들이라서 눈썰미가 날카로웠나.
카트에서 물건들을 꺼내 계산을 치렀다. 쇼핑바구니를 들고 공중전화 부스로 갔다. 어쨌든 부러웠다. 빼어난 용모와 예술적 재능, 재력과 작위를 태생부터 모두 갖춘 남자라니. 가진 것이라고는 망할 놈의 머리카락밖에 없는 겁쟁이와는 천지차이 아닌가. 문득 메사라가 이렇게 보잘것없는 나를 왜 사랑할까 하는 의문이 새삼 들었다.
오늘 한번 물어볼까.
전화박스에 동전을 넣으며 피식 웃었다. 메사라가 퇴근길에 여기 들르겠으니 연락하라고 한 터였다. 신호 세 번 만에 메사라가 받았다. 방금 도착했다면서 마트로 들어가는 중이라고 했다.
―거기 전화박스 앞에 서 있는 레이가 보입니다.
뒤돌아보니 메사라가 이쪽으로 오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와 함께 짐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자동차 트렁크에 짐을 실은 다음 조수석에 탔다.
“어? 이건 웬 게이잡지예요?”
나는 안전벨트를 차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평소에는 담배꽁초가 수북한 비닐봉지만 굴러다니던 차 안에, 오늘은 웬 게이잡지가 대시보드 위에 오롯이 놓여 있었다. 이런 쪽에는 눈썰미가 모자란 나조차 바로 잡지의 정체성을 알아보았다. 「토끼소년」이라는 잡지명칭도 노골적이었지만, 무엇보다도 표지에서 토끼 귀를 한 남자가 바나나를 핥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메사라가 히터를 켜며 말했다.
“점심을 먹고 서점에 들렀는데 볼만한 책이 없더군요. 그러다가 이 잡지가 눈에 들어왔는데 화보가 굉장히 취향이었습니다. 퍽 매력이 넘치기에 사 봤습니다.”
“무슨 화보인데요?”
“하하, 한번 찾아봐요. 이 잡지는 수위가 가벼워서 썩 부담스럽지 않을 겁니다.”
메사라가 유쾌하게 말했다. 나는 잡지를 한 장씩 넘겨보았다. 메사라가 이런 잡지를 보다니, 하는 놀라움이 들었다.
게이가 게이잡지를 보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메사라가 이럴 줄은 몰랐다. 메사라의 이미지가 그랬다. 뭐랄까, 닳고 닳은 변태답게 게이잡지 따위에는 콧방귀나 뀔, 그런 인상이었다. 실제로 집에서도 게이잡지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었다.
퍽 매력이 넘치는, 그것도 굉장히 취향에 맞는 화보라. 얼마나 훌륭하기에 메사라가 저토록 극찬할까…… 하며, 페이지를 찬찬히 넘겼다. 잡지 명칭처럼 화보 모델 대부분이 예쁘장한 용모였다. 내심 겁냈던 적나라한 성행위 사진은 전혀 없었다. 메사라의 말대로 가볍게 볼 만한 수위였다.
핑크빛 거실에서 모델들이 나체에 알록달록한 에이프런만 두른 채 웃고 있었다. 타이틀은 ‘에이프런 스페셜’. 가끔 헌책방에 들어오는 성인잡지에도 이런 유의 코스튬 사진은 곧잘 등장했던 기억이 났다.
스트레이트나 게이나 성적 상상력은 거기서 거기로군.
메사라의 변태적인 성벽에 부합하기에는 이건 지나치게 건전했다. 나는 페이지를 훌훌 넘겼다. 해변 백사장에 나른하게 누운 누드들이 펼쳐졌다. 플레이보이지처럼 예술성에 주력한 화보였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예술성은 짙어졌다. 아무래도 이 잡지의 지향점은 외설이 아닌 예술인 듯했다. 특히 마지막 화보가 뛰어났다.
타이틀은 《자본주의에 신음하는 사내들》. 폐허가 된 공사장에서 치아만 하얗게 드러낸 진흙투성이 남자들이 격렬하게 몸부림치고 있었다. 나조차 잠깐 흠칫할 만큼 강렬한 고통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그러면서도 묘하게 풍기는 섹시함이 매력적이었다. 성인잡지에 흔히 기대하는 도색 사진의 통념을 깨는 작품이었다.
이야, 멋진데…… 감탄하면서 화보를 감상하던 도중, 별안간 뺨이 따가워졌다. 고개를 든 순간 아연해졌다. 메사라가 어쩐지 조금 긴장한 기색으로 이쪽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왜 저러지, 메사라답지 않게. 내 감상이 궁금해서 저러나.
“어떻습니까. 내가 그 잡지를 산 이유를 이제 알겠습니까.”
메사라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나는 “네. 알 것 같군요.” 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 것 같았다. 메사라가 칭찬할 화보라면 하나뿐이었다. 고통에 일그러진 표정과 처절한 몸부림이 메사라 특유의 변태성에 딱 맞아떨어졌다. 나는 《자본주의에 신음하는 사내들》을 주저 없이 활짝 펼쳤다.
“이 정도면 당신의 극찬을 이끌어낼 만도 하군요. 나도 마음에 드는데요.”
메사라는 한동안 꿈쩍도 하지 않았다.
“……네.”
눈을 깜박거리며 대답했다. 잠깐 후 그가 어깨를 으쓱 올리며 말했다.
“의외입니다. 레이가 머드팩을 좋아할 줄은.”
“네? 머드팩이라뇨?”
나는 어리둥절해하며 되물었다. 메사라는 대답 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머드팩이라니 대체 무슨 의미일까. 나는 화보를 재차 들여다보았다. 벌거벗은 사내들이 진흙투성이로 까맣게 뒹굴고 있었다. 한참 뒤에야 혹, 내가 이런 진흙탕에서 뒹굴면서 섹스하는 것을 좋아하리라고 메사라는 추측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라고 곧 단정했다. 터무니없었다. 영리하고 눈치도 빠른 메사라가 그런 엉뚱한 착각을 할 리 없었다.
농담이겠지.
나는 잡지를 덮어 대시보드에 올려놓았다. 고등어를 핑계로 메사라를 끌어들인 정황이야 할 말이 없다고 쳐도, 이건 아니라고 보았다. 엊그제 메사라가 “고등어로 나를 유혹…….” 운운할 때 창피해서 미치는 줄 알았다. 메사라가 그 일을 그런 식으로 받아들였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추호도 상상하지 못했다.
유혹이라니. 첫눈에도 그날 나는 비 맞고 털이 빠져 귀가 축 늘어진 당나귀 꼴이었을 텐데.
그랬던 만큼, 나는 이제껏 메사라가 그날 일은 어디까지나 ‘들끓는 열과 순간적인 충동이 결합한 《앗, 실수》’였다는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으리라 짐작했었다. 철석같이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유혹이라니. 그래서 넣으라는 내 말에 거절은커녕 되레 “옷은 벗고 하는 게…….” 하고 되물었나. 군말 없이 덤벼들어 기운을 잔뜩 썼던 이유도 그 탓이었을까.
충격이었다. 하물며 ‘고등어로 유혹’했다니. 변태라서 그런가. 발상이 놀라웠다. 향수라면 몰라, 비린내 나는 생선을 유혹의 도구로 쓰는 사람도 있단 말인가. 메사라는 나를 대체 어떻게 보고 저런 생각을 서슴없이 하는 것일까.
나는 창문에 비치는 레이 아리사를 쳐다보았다. 변함없이 맹해 보였다. 성인채널에서 평균 3초마다 등장하는, 두뇌 무게는 1그램 같고 오로지 섹스 생각만 가득한 금발미녀들과 오늘따라 유난히 비슷했다.
메사라에게 내 어디가 좋으냐고 물어볼까 하다가 관두었다. 물어보나마나 대답은 뻔할 듯했다.
메사라는 머리카락을 꼽을 것 같았다. 틀림없었다. 그는 내 머리카락에 거의 병적으로 집착했다. 만지작거리는 것은 기본이요, 병원에서도 그랬지만 지금도 내 머리카락을 직접 감겨 주고 말려 주었다. 바쁜 날만 제외하면 어김없었다.
한편으로는 무서웠다. 혹여 내 안의 자작나무를 원하는 무의식의 발로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이 치고 지나갈 때마다, 나는 애써 뇌까렸다. 메사라가 사랑하는 것은 레이 아리사의 금발이라고. 레이 아리사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