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L.
춥다…….
흰 태양이 떨어지는 초저녁이었다. 하늘은 건조하고 시렸다. 황량한 바람이 희디흰 자작나무숲을 관통하며 흐느꼈다. 바람소리가 창문의 색 바랜 커튼으로 눈물처럼 스며들었다.
자작나무는 커튼을 여미다가 문득 손짓을 멈추었다. 멀리서 뾰족이 솟은 궁전 지붕이 선명하게 보였다. 지붕의 회색 빛깔이 낫으로 변해 심장을 찌르는 듯했다.
이따금 생각했다. 이 탑은 눈앞의 저 자작나무숲처럼, 모든 이들에게 내버려져 서늘히 시들어 가는 자줏빛 붓꽃정원 같은 존재가 아닐까 하고. 여기서 고단하게 숨 쉬는 어떤 이도 함께 망각된 게 아닐까 하고. 그래서 아무도 이 탑에는 눈길을 주지 않는 것일까 하고.
며칠 전부터 눈이 외롭게 쓰러져 내렸다. 혹한으로 탑의 우물이 꽁꽁 얼어붙었다. 하지만 오늘은 목욕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유모가 눈을 모아서 목욕물로 데워 놓겠노라며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자작나무는 책장을 넘기며 생각에 잠겼다.
눈으로 목욕하는 왕비…….
왠지 웃음이 나왔다. 바깥의 저 뾰족한 회색지붕 아래에 있는 여인들은 온몸에서 벼룩과 비듬이 들끓겠지……. 목욕과 거울 쳐다보기 외에는 소일거리가 없는 나와 달리, 저들은 매일매일 무도회에 참석하고, 정인과 연애편지를 주고받고, 색색의 아름다운 꽃으로 식탁을 채우고, 공단 드레스를 맞추느라 목욕할 겨를도 없을 테니까.
바람소리가 거칠고 쓸쓸했다. 낡은 커튼이 교수대에 목을 늘어뜨린 죄인들의 해진 수의자락처럼 펄럭거렸다. 자작나무는 창문으로 손을 뻗었다.
아…….
나는 눈을 떴다. 조용했다. 낡은 커튼이 창문을 스치는 소리도, 밤보다 더 황폐한 바람소리도 연기처럼 가셔 있었다.
오랜만의 자작나무 꿈이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가슴을 아리게 하는 꿈이었다. 분노를 유발시키는 꿈이었으면 차라리 좋았을 것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전화벨 소리가 아까부터 요란했다. “여보세요.” 하며 전화를 받았다.
―왜 이렇게 전화를 늦게 받습니까.
“잠깐 자느라고. 그런데 메사라야말로?”
―하하. 그냥 생각나서요.
“요즘 직장이 한가한가 보네요.”
―어떻게 알았습니까. 이러다가 직장이 문을 닫으려나 싶을 만큼 일이 없습니다.
메사라의 넉살에 나는 웃었다. 통화를 더 나눈 후 전화를 끊었다. 울적했다. 자작나무 초상화가 부서진 그 날부터 지금껏 내내 이 꼴이었다. 열흘간 축 늘어진 애벌레로 지냈다.
“한심하다, 한심해.”
기분전환 겸 차를 한잔 우렸다. 설탕을 잔뜩 붓고 스푼으로 휘적휘적 저었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자작나무 초상화가 찢어졌다. 넝마로 변했다.
소렐 씨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자작나무를 참살한 왕실이 자작나무의 초상화로 배를 불린 것은 고인에 대한 모욕이었다. 암만 그래도 넝마로 만들어 버리다니.
초상화는 하나뿐인 유품이었다. 귀중한 역사유산이기도 했다. 그러나 자작나무 초상화는 영원히 복구 불가능하며, 바느질 외에는 그림을 이어붙일 방법이 없다는 것이 전문가의 소견이었다. 악동 소렐 씨는 어제 보석 석방되었다. 구치소 앞에서 프리버드 회원들이 소렐 씨의 목에 화환을 걸어 주고 열화와 같은 갈채를 퍼부었다고 한다. 평민들 사이에서 소렐 씨는 영웅으로 부상했다.
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정신 차려라, 레이 아리사. 그곳에 간 의도가 뭐였더냐. 완전한 정리 아니었더냐.
그림을 보자마자 나는 깜짝 놀랐다. 다름 아닌 초상화의 갈라지고 벗겨진 자국 때문이었다. 사람의 발길이 끊긴 껌껌한 다락방에 가득 들어찬 거미줄처럼, 수없이 갈라진 자국이 초상화를 채우고 있었다. 600년의 세월이, 이제는 낡은 고서의 글귀에만 남은 지난 시간이, 그 화폭에 고스란히 파여 있었던 것이다.
정말 낡았다…… 하고 중얼거릴 찰나였다. 도끼가 자작나무를 강타했다. 예고 없이 찾아드는 죽음처럼, 찰나에 무너뜨렸다.
그러니까 정신 차려라, 레이 아리사.
찻잔을 식탁에 올려놓은 후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캐슬마인 부인이 티켓을 두 장 선물 받았다며 그림 전시회를 보러 가자고 한 터였다. 나는 옷을 갈아입으며 재차 뇌까렸다. 정신 차려, 레이 아리사.
정신 차려.
초상화는 사라졌다. 초상화를 가득 덮은 갈라진 자국처럼, 생생한 이 기억도 시간이 조금씩 마모해 줄 것이다. 레이 아리사의 든든한 무신경이 해결해 줄 것이다. 반드시 그래야 했다.
오랜만에 주술사 코트를 걸쳤다. 멋쟁이 메사라는 이 오래 묵은 외투를 ‘뭉크코트’라고 부르며 매우 질색했다. 왜 싫어할까. 온몸을 감싸는 데 안성맞춤이고, 때가 타도 눈에 잘 안 띄며, 겨울한풍에도 든든한 실용만점의 옷인데.
“아니, 대체 그 옷은 뭐야? 세상에! 꼭 중세시대 마녀 같잖아.”
캐슬마인 부인도 기겁했다. 중세시대 마녀라.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틀린 말은 아니지.
캐슬마인 부인의 차를 타고 출발했다. 갤러리가 위치한 33번가는 고층빌딩이 즐비한 신시가지였다. 전시회도 은회색 빌딩 6층의 아트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었다. 썩 도움은 안 되겠지만, 그림 구경으로 기분을 전환하며 원고도 구상해 볼 생각이었다.
평일인 데다가 폭설 탓인지 관람객이 뜸했다. 갤러리를 반쯤 돌 무렵, 캐슬마인 부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캐슬마인 부인이 통화를 하다가 사색이 되었다.
“레이, 이를 어떡해. 갑자기 남편이 복통을 일으켰다지 뭐야. 미안하지만 나는 급히 병원으로 가야 할 것 같아. 자긴 천천히 구경하고 돌아가요.”
“이런, 미안하긴요. 제가 죄송하지요.”
“걱정 마. 이 양반 엄살이 좀 심해야지. 그럼 나중에 봐.”
캐슬마인 부인이 갤러리를 빠져나갔다. 나는 다시금 갤러리를 돌기 시작했다. 집이야 전철을 타고 가면 그만이지…… 하며 느긋이 그림감상에 열중하다가 전시회장 끝에 당도하고서야 지갑 생각이 났다. 황급히 코트 주머니를 뒤졌다. 이런 낭패가.
황망했다. 전철요금에도 모자라는 동전 몇 개만 달랑 들어 있었다.
“기가 막힌다, 참 기가 막혀.”
한숨을 푹푹 쉬며 갤러리 내 공중전화로 갔다. 메사라에게 사정을 설명한 뒤 데리러 와 달라고 부탁했다. 메사라가 “나온 김에 밖에서 저녁을 먹고 얼음 축제도 구경하죠.” 하고 말했다. 두 시간만 기다리라며 전화를 끊었다.
세월아 네월아 시간 보내기가 주특기인 레이 아리사에게는 두 시간이야 금방이었다. 갤러리에서 내려와 1층 라운지 의자에 앉았다. 커다란 분수대와 멀티비전만 덩그러니 존재하는 삭막한 공간이었다. 멀티비전에서 뉴스가 나오는 중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공중파 뉴스였다.
왕실 소식이었다. 왕비가 근래 뭘 입고, 뭘 먹는지 시시콜콜 늘어놓고 있었다. 매혹적인 흑발에 재기발랄한 왕비는 마넨 경의 실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기가 높은 왕실의 꽃이었다. 국민과 매스컴도 왕비의 스타일을 즐겨 좇았다.
아나운서가 왕비가 요새 즐겨 먹는 요리를 설명했다. 게 요리였다. 왕실 요리사가 특별히 개발한 요리인데 여기에 푹 빠져 요즘 즐겨 먹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게라니. 왜 하필 저런 식재료를 썼을까. 왕비는 단 것을 매우 좋아하는데.
화면이 왕비의 식탁을 죽 훑었다. 점차 기분이 이상해졌다. 식탁에 차려진 음식들을 지켜볼수록 숨이 가빠졌다. 목이 졸리는 듯한 갑갑함에 나는 후드를 젖히고 가슴을 두들겼다.
깊이 생각하지 마, 레이 아리사.
넌 이제 정쟁과 연을 끊었어. 관심을 주면 안 돼. 안 돼.
제아무리 뇌까려도 소용없었다. 이미 두뇌는 제 스스로 회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바로 결론이 나왔다. 나는 잠깐 멍하게 있었다. 공중에서 찬물이 쏟아지는 듯했다.
설마 그런…….
아니, 아니야. 왕비는 부친의 실각으로 정계에서 영향력을 잃어버렸어. 내가 지나치게 넘겨짚었는지도 몰라.
하지만, 만에 하나…….
“저기, 죄송합니다만.”
갑자기 누군가가 내 어깨를 쳤다. 생각에 골몰하던 터라 나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 사내가 서 있었다.
낯선 얼굴이었다. 누굴까…… 하며 나는 황급히 후드를 뒤집어썼다. 사내가 하하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저 모르겠습니까? 암만 가면을 벗었다지만 이거 서글픈데요.”
“아아.”
나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목소리를 들으니 알 것 같았다. 소위 ‘할리우드 배우 씨’였다. 가면을 썼을 때도 이목구비가 뚜렷했는데 맨 얼굴은 한층 미남이었다.
사내가 내 옆에 앉으며 미소 지었다.
“머리카락 때문에 알아보았지요. 이렇게 길디긴 황금빛 머리카락은 평생 마주치기 힘든 구경거리 아닙니까. 그런데 열흘 만에 또 마주치다니, 이거 보통 인연이 아닌 것 같습니다. 여긴 무슨 일로?”
“수채화 전시회 때문에 들렀습니다.”
성의 없이 대꾸하며 시계를 곁눈질했다. 메사라가 지금 이 꼴을 보면 유혈이 낭자해질 듯했다. 내게 행패부린 변태를 백주대로에서 성기를 짓뭉개 살해하리만치 메사라는 병적으로 질투심이 강했다. 다행히 메사라가 도착하기까지는 시간이 다소 남아 있었다.
사정 모르는 사내가 해맑게 웃었다.
“6층에서 열리는 수채화 전시회 말인가요? 반갑네요, 저도 그 전시회를 보러 왔거든요. 홍보가 잘 되지 않은 전시회라서 관람객이 뜸하던데 용케 오셨네요. 그림에 관심이 많은가 봐요?”
“그냥 이웃 부인이 같이 가자고 해서 따라왔습니다.”
“호오. 친구가 많은가 봅니다. 혹, 그 부인이 옷과 목걸이를 빌려준 친절하신 분인가요?”
사내가 담배를 한 개비 뽑으며 내 옆구리를 툭 쳤다. 나는 “그건 아닙니다.” 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내가 눈초리를 가늘게 뜨며 나를 뜯어보았다.
“……실례지만 정말 오래된 코트 같네요. 사실은,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평범한 사람이라고 그쪽이 말할 때 저를 놀리려고 괜히 한 소리라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그러고 있으니까 분위기가 딱 음산한 마녀 그 자체네요. 누가 상상하겠습니까. 이런 으스스한 코트 안에 금발의 정령이 감쪽같이 숨어 있다고 말이죠, 하하핫!”
금발의 정령. 민망한 표현이었다.
“아름답다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습니다만.”
“외모 기준이 무척 높은 분이로군요. 이런 머리카락이 아름답지 않다면 제 머리카락은 돼지털이게요. 그런데 작은 가게를 운영한다고 말씀하셨죠? 혹시 거기가 42번가에 있습니까?”
“그건 어떻게 아셨죠.”
무심결에도 음성이 높아졌다. 사내가 “어떻게 알긴요.” 하며 내 코트 후드를 뒤로 젖혔다. 그 바람에 머리카락이 밑으로 우수수 쏟아졌다.
“이 코트 때문에 알아봤지요. 주술사들이 주로 입는 코트잖습니까. 주술사들이 보통 42번가에서 거주한다기에 짐작해 봤지요.”
“특이하네요. 남자귀족분이 주술사 코트를 알아보다니.”
나는 다시 후드를 뒤집어쓰며 말했다. 사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실은 제 여동생이 주술에 관심이 많아서요. 겸사겸사 알게 되었습니다.”
“아아, 어쩐지…….”
“한데 이 시간에 일은 안 하고 여긴 웬일이십니까? 동행은 어딜 가고?”
“이 즈음에는 불황이 심해서 가게를 닫아요. 같이 온 부인은 갑자기 남편분이 아프셔서 저보다 먼저 떠났어요. 저는 하필 지갑을 놔두고 온 통에 차비가 없어서 친구가 데리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죠.”
“드라마틱한 스토리네요. 그럼 지금은 주술사 일만 합니까? 그런 코트를 걸칠 정도면 보통 주술사는 아닌 듯한데요.”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뇨. 주술사 일도 안 한 지 오래되었어요.”
“그럼, 그냥 노는 건가요?”
“놀진 않아요. 보통 이 무렵엔 인형눈알 달기나 조화 만들기, 봉투 붙이기 같은 부업을 하면서 먹고살아요.”
“……그렇군요.”
사내가 눈을 깜박거리며 말했다. 황당해하는 기색이었다. 내가 들어도 점입가경의 답변이긴 했다.
사내가 “그런데 나이가?” 하고 말했다. 나는 “나이요?”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초면에 나이를 묻다니 다소 이상했다. 보통은 통성명부터 하지 않는가.
독일식 예법인가…… 하면서 “스물여덟이요.” 했다. 사내가 깜짝 놀라며 “스물여덟이요?” 했다. 목청이 아주 컸다. 그 반응에 내가 더 놀라 버렸다.
“네? 네……. 스물여덟인데요.”
“겉보기에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요. 아무리 많아 봐야 열일곱, 열여덟으로 보여서 말입니다. 이야아, 이거 굉장한 동안인데요. 부럽네요.”
“부러워할 필요 없어요. 예전에 담배 살 때 불편하기만 하던걸요.”
“하하핫, 갈수록 의외네요. 담배까지 피워요? 그렇게 아기 같은 얼굴로? 이거 진짜 재미있군요. 구경 좀 시켜 주시죠?”
사내가 내게 담뱃갑을 들이밀었다. 아기 같은 얼굴이라는 표현에 어이가 없었지만, 마침 기분이 울적한 참이었다. 한 개비 뽑아 피워 물었다.
사내도 담배를 한 개비 뽑아 들며 말했다.
“그쪽이 자작나무에게 관심이 많은 모양입니다. 그 까다로운 소렐 씨가 그쪽에게 가면무도회 티켓까지 줄 정도면 말입니다. 혹시 주술도 자작나무를 본받아서 배웠습니까?”
하마터면 실소를 터뜨릴 뻔했다.
“암만 자작나무에게 관심이 많아도 그렇지, 그 엉터리 주문 외워대는 것까지 본받았다간 고객에게 해만 끼치게요. 그냥 우연히 이 길로 들어섰을 뿐입니다.”
“……호오.”
사내가 담배에 불을 붙이다가 멈칫했다.
“자작나무가 엉터리 주문을 외워댔다고요? 그건 어찌 알았습니까.”
“그건…….”
나는 움찔했다. 자작나무가 엉터리 주문을 외워댔다는 사실은 레이 아리사만 알았다. 상당히 날카로운 사내였다. 웬만한 이는 지나쳐 버릴 사소한 말을 바로 찍어내다니, 플레이보이 같은 외양과 판이했다.
잠시 고민하다가 해석을 빙자한 해답을 가르쳐 주기로 결정했다. 나는 의자 가장자리를 느릿느릿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레비탄이 순산한 것만으로도 엉터리 마법임을 알 수 있죠. 저주술은 형상을 매개로 작용하는 동종주술이나 모방주술을 흔히 사용합니다. 그런 주술에는 반드시 상대방의 머리카락이나 손톱 같은 신체 일부가 필요하죠. 그러나 탑에 갇힌 자작나무는 레비탄의 머리카락 한 올도 얻을 수 없었을 겁니다.”
“호오.”
“다른 방법으론 전문마녀에게 거액을 주고 흑미사를 올리는 것이 있는데, 자작나무에게 그만한 돈은 없었을 테고요. 민간에 떠도는 엉터리 주문이나 동원하는 것이 고작이었겠죠. 그랬기에 수사관들은 탑에서 주술도구를 끝내 찾아내지 못한 겁니다. 자작나무에게 필요한 주술도구는 세 치 혀밖에 없었으니까요.”
“흥미롭네요. 하지만 자작나무의 죄는 왕이 덮어씌운 누명이라고 사가들은 확신하던데요? 뭐, 그쪽 견해도 퍽 신선하긴 하네요.”
“신선한가요.”
나는 쓰게 웃었다. 사내가 담뱃재를 털며 말했다.
“어쨌든 재미있네요. 그나저나 그쪽은 꽤 영리해 보입니다.”
“영리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멍청하게 생긴 건 잘 알아요.”
“하하핫, 이거 진짜 직설적인 분이십니다. 그런데, 저기.”
사내가 싱긋 미소 지었다. 나는 “네?” 했다.
“자리를 옮기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계속 떠드니까 좀 추운데요.”
사내가 지갑에서 몇 장의 수표를 꺼내 내 코트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이 정도면 섭섭하지 않겠죠? 봉투 붙이고 조화 만들면서 힘들게 돈 버느니 이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그쪽도 처녀는 아닐 테고.”
“…….”
나는 천천히 담배를 비벼 껐다.
수표를 사내의 코트포켓에 도로 꽂아주고는 일어섰다.
“저를 오해하셨군요. 이만 가겠습니다.”
사내의 낯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럼 조심해서 돌아가십시오, 귀족나리.”
“잠깐, 그럼 이름이라도…….” 하는 사내를 확 뿌리치고 빌딩을 빠져나왔다.
길을 걸어가며 불쾌감을 삭이려 노력했다. 졸지에 길거리 남창 취급을 당한 셈인가. 그래도 보통 사내는 아닌 듯했다. 정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 능력을 꽤 발휘할 것 같았다. 어쩌면 이미 뛰어들었을지도.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전신으로 한기가 스며들었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관심 두지 마, 레이 아리사.
이제 정쟁은 네 길이 아니야.
태양이 먹장구름에 떠밀리고 있었다. 일광이 눈발 사이로 숨어드는 초저녁이었다. 신시가지 빌딩 너머로 아스라이 보이는 성당의 탑이 은은한 종소리를 울렸다. 곧, 도시의 모든 종들이 울리기 시작하며 온 주변이 종소리로 들어찼다.
까닭을 알 수 없는 우울함이 몰려왔다. 왜일까. 멀리서도 황금색 지붕을 빛내는 저 비올라 성당 때문일까. 아니면, 이제는 사라져 버린 초상화 때문일까.
비올라 성당…….
나는 저 성당이 싫었다. 아주 싫었다.
가슴 한구석이 으스러졌다. 무자비한 말발굽에 심장이 짓밟히는 듯한 감각이 치달았다. 나는 눈길을 내리깔고 걸음을 옮겼다.
차로에서 검은 자동차들이 영구행렬처럼 줄을 지었다. 잿빛구름이 까마귀 떼를 이끌고 느릿느릿 흘러갔다. 축축한 안개 속에서 가로등 불빛이 거리를 밝혔다. 어둠이 쌀쌀한 숨결을 흘리며 눈을 뜨는 밤이었다. 불현듯 외로움이 전신을 파고들었다.
외로움이라니.
나는 무심결에도 피식 웃었다. 고독에 익숙한 내가 외로움을 느끼다니. 그새 길들여진 여우가 되고 만 건가.
길들여진 여우라…….
정말로 길들여진 여우가 되었을까.
그럴지도.
아직도 생생했다. 지금이라도 당장 내 주변을 둘러쌀 것만 같았다. 피리와 북 소리가 갈잎처럼 흩어지는 만월의 밤, 빨간 꽃을 파는 소녀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젊은 남녀들, 피까지 얼려 버릴 것 같은 한기가 새어 나오는 검은 감옥이. 어느 더운 여름밤, 횃불이 타오르는 광장에서 마주친 잔인한 왕도. 그의 독 발린 사과같이 달콤한 언어와 눈빛과 몸짓까지.
한심하다…….
나는 거듭 웃었다. 그러나 알면서도 공중전화 박스로 들어갔다. 동전을 넣고 번호를 눌렀다. 그만큼 그에게 걷잡을 수 없이 중독되어 있었다. 판자바닥을 삐걱거리는 구두소리와 문을 두들기는 난폭한 노크, 전신을 녹이는 온기와 눈썰매가 일으키는 생생한 바람에. 유쾌하고 다정하지만 한없이 이기적이고 잔인한 왕을, 끝내 갈망하고 말았다.
왕은 이번에도 사랑이라는 이름의 독사과를 내게 먹이고 말았다.
우뚝 솟은 빌딩의 전광판에서 붉은 빛이 불꽃처럼 치솟았다. 현란한 광고 문구가 어지럽게 춤췄다. 일순 도시 전체에 들어찬 종소리가 깨져 버리듯 뚝 멎었다. 나는 무심결에 전광판을 쳐다보다가 멈칫했다.
《2129년 2월, 새 향수가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2129년…….
순간, 헤아릴 수 없는 감정이 몰려들었다. 뭔가 멍한 것 같기도 했다. 한동안 전광판을 응시하던 나는 차도로 고개를 돌렸다.
냉기 어린 차도 멀리에서 불빛이 반짝거렸다. 헤드라이트 빛이 차츰차츰 커져갔다. 메사라의 차였다. 어딘지 그날과 비슷했다. 공중전화박스로 들어간 그때와.
나는 가까워 오는 불빛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길들여진 건 나만이 아니다…….
나도 포우 메사라를 길들였다.
문득 충동을 느꼈다. 그것은 성욕과도 비슷했다. 아니, 성욕이 분명했다. 메사라를 안고 싶었다. 그의 체취를 맡으며 단단한 가슴에 얼굴을 묻고 싶었다. 나도 모르게 한 발자국 내딛었다. 어느덧 떠밀리다시피 뛰어갔다. 차가운 비웃음 같은 바람이 내 뺨으로 부딪쳤다.
저만치서 차가 멈춰 서더니 메사라가 급히 나왔다. 달려오는 내게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곧 팔을 활짝 벌리며 웃었다.
“하하하. 웬일입니까. 갑자기 이렇게 달려오고.”
메사라가 품속으로 뛰어드는 나를 끌어안았다. 나도 그를 끌어안았다. 그의 셔츠에서 은은한 체취가 풍겼다. 담배냄새였다. 메사라가 내 코트후드를 뒤로 넘겨 머리카락 속으로 손가락을 파묻었다. 그의 입술이 내게 닿았다. 길게 키스를 한 그가 입술을 떼어냈다.
“눈발이 심한데 이만 들어가지요. 춥습니다.”
메사라가 내 손을 이끌며 차 문을 열었다. 나는 의자에 앉다가 사이드미러를 눈짓했다. 갤러리 빌딩에서 사내가 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