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 .M─ (66/101)

9 .M─

레이가 저택으로 들어간 후 10분을 흘려보냈다. 나는 핸들을 톡톡 때리며 담배를 두 개비 태웠다. 지끈한 흥분이 전신으로 퍼졌다.

이거 참 재미난 우연인데…….

지그시 웃으며 의자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레이는 꿈에도 생각 못할 것이다. 실은 오늘 나도 여기에 올 예정이었다. 코트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냈다. 소렐의 가면무도회 초대카드였다. 업무를 위해 극비리에 입수한 것이었다.

휴대전화는 계속 잠잠했다. 레오파드와 쿠퍼헤드는 아직 이곳으로 오는 중인 듯했다.

그래도 오늘의 내 연출 콘셉트가 ‘조용히, 평화롭게’라서 다행이었다. 요란하고 잔혹한 죽음은 가이거의 전매특허였다. 가식이라면 가식이지만, 나는 잔인하고 무자비한 스네이크로서의 내 면면을 레이에게 더는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이제껏 들켜 버린 추악한 얼굴만으로도 충분했다.

가방에서 가면과 망토를 꺼냈다. 무대배경이 가면무도회인 것도 신의 보우였다. 오늘 업무에서 무도회장 잠입은 필수였다. 맨얼굴로는 레이의 눈길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나는 망토를 걸치고 가면을 썼다.

그런데 설마 레이가 젊은 새끼들과 노닥거리진 않겠지.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열이 확 솟구쳤다. 물론 그럴 리 없었다. 레이 성격상 구석에 처박혀 물만 꼴깍꼴깍 마셔댈 것이 뻔했다. 그리고 귀족들은 사교계의 정식데뷔 절차를 거치지 않은 사람에게는 말도 걸지 않고 무시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 관례가 없었다면 나는 절대 레이를 이 자리에 내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틀림없이 온갖 젊은 연놈들이 레이에게 몰려들었을 테니까.

자, 지금은 일단 업무에 몰두해야 할 때.

나는 핸들을 톡톡 치며 담배를 깊이 빨았다.

민카 얀케리 남작. 이번 상영작의 주연배우였다. 그는 근래 칼 바르디와 급속도로 가까워지며, 푸셔 일파의 여러 인사를 소개해주는 뚜쟁이 노릇을 자청했다.

나는 담배 끝에서 점멸하는 불꽃을 응시했다.

푸셔는 마넨에 비해 세간의 평가가 박했다. 마넨을 따르던 무렵에도 드리아스넨과 레빌즈에 비해 주목을 받지 못했다. 오죽하면 별명이 ‘늙은 아이돌’이겠는가. 나와 부장들도 레이…… 아니, ‘령’을 취조하지 않았다면 푸셔를 얕잡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칭찬에 인색하기 짝이 없는 령이 유일하게 호평한 인물이 푸셔였다.

―때를 기다릴 줄 알고 영리하며 속을 드러내지 않는다. 백 번 생각하고 한 번 행동하는 신중파지만, 일단 마음을 먹으면 추진력과 대담성이 뛰어나다. 마넨의 후기지수 중 가장 크게 될 재목이다. 후임 로터스가 될 것이 확실하다.

령의 예측은 멋지게 적중해, 반신반의하던 우리를 머쓱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리나의 등장 후 지금까지, 푸셔는 왕비와 정부를 저울질하며 어느 쪽에 붙을까 숙고했다. 그러다가 최근 드디어 칼을 포섭하려 행동에 나섰다. 얀케리의 뚜쟁이 노릇도 기실 푸셔의 지시에 따른 행위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수요일 오전, 보고서 한 부가 내게 올라왔다. 푸셔의 조카딸이 칼에게 덤벼들고 있는데, 칼도 싫어하는 기색은 아니라는 내용이었다.

공교롭게도 바로 그날 오후 나는 알토넨의 집무실에서 칼과 마주쳤다. 덕분에 마음을 굳히고 주저 없이 프리 프로덕션 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오늘, 큐 사인을 보냈다.

나는 싱긋 웃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괜찮았다. 벌써 전면전을 벌일 의향은 없었다. 오늘 밤은 옐로카드만 산뜻하게 날려줄 참이었다.

얀케리는 못생겼되 가슴만은 애드벌룬같이 커다란 정부를 대단히 총애했다. 두 달 전, 우리는 얀케리의 정부를 포섭하며 든든한 협조를 약속받았다. 그 약속대로 정부는 일부러 사흘 전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오늘 밤 수도로 돌아와 얀케리와 함께 소렐의 가면무도회에 참석했다.

담배를 비벼 끌 무렵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쿠퍼헤드였다.

“음. 뭐냐.”

―정부에게서 막 연락이 왔어. 방금 얀케리와 연회장에 자리 잡고 앉았다더군.

“너흰 어디까지 온 거야.”

―지금 정문을 지나쳤어. 참, 정부가 말하길 자기들은 연회장 우측 가장자리 네 번째 자리에 앉아 있다고 했어.

“음.”

전화를 끊고 담배 한 개비를 뽑아 물었다. 담배가 필터까지 닿을 무렵, 저만치서 쿠퍼헤드와 레오파드의 차가 헤드라이트를 빛내며 들어섰다. 나는 차에서 나와 저택으로 향했다.

업무 시작이었다.

느긋이 연회장에 입장했다. 온갖 귀족들이 빛이 닿는 곳곳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얀케리는 정부가 알려 준 그 자리에서 노닥거리고 있었다. 나는 백포도주를 천천히 마시며 표적의 동태를 주시했다.

얀케리가 정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으며 낄낄거렸다. 정부가 문득 테이블 밑으로 핸드백을 건넸다. 얀케리가 좌중을 조심스럽게 둘러본 뒤 슬그머니 일어섰다.

나는 백포도주를 내려놓았다. 휴대전화를 들어 “시작해.” 하고는 연회장을 나섰다. 정보대로 소렐의 저택은 복도가 넓고 길었다. 그리고 침침했다. 드문드문 놓인 촛대의 양초가 어둠을 희끄무레 밝혔다. 은밀한 작업을 벌일 만한 작은 방도 많았다.

나는 여유 있게 복도를 걸어갔다. 5분 뒤, 휴대전화가 메시지를 알리며 진동했다. 생각보다 빨랐다. 《연회장에서 열다섯 번째 방, 다섯 번 노크할 것》.

열다섯 번째 방으로 가서 다섯 번 노크했다. 쿠퍼헤드가 문을 열었다. 벽에 편안히 등을 기댄 레오파드가 “싱겁게 끝났어.” 하며 팔짱을 꼈다. 그 말대로 얀케리는 이미 맛이 간 상태였다. 흰 창만 남은 눈에 코피까지 줄줄 흘렸다. 허벅지와 무릎에는 코카인 가루가 흥건했다.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 꼴을 감상했다. 제법 볼만했다.

얀케리는 정키였다. 이건 일명, ‘령의 노트’를 입수하기 전까지는 가이거도 캐내지 못한 정보였다. 마약상 친구를 둔 정부는 얀케리에게 마약을 공급하는 대가로 정부 자리를 유지했다. 얀케리가 가슴 외에는 도통 매력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못생긴 정부에게 목을 맨 이유가 바로 마약이었다.

‘령의 노트’에 기록된 바로는 얀케리는 하루에 최소 두 번 코카인을 흡입하지 않으면 미치는 작자였다. 그랬으니 사흘간 쫄쫄 굶주리느라 얼마나 괴로웠을까.

나는 장갑 낀 손으로 백색가루를 한 움큼 쥐었다. 그것을 허공을 향해 확 날렸다. 낡고 껌껌한 침실로 희디흰 백색가루가 눈꽃처럼 총총히 흩어졌다.

내일 아침 푸셔와 칼은 한 통의 편지를 받게 될 것이다. 말을 탄 죽음의 사신이 낫을 들고 황무지를 노니는 그림이 그려진 편지였다. 발신자는 ‘마약방지위원회’.

얀케리가 정키라는 사실은 정부만 제외하면 아무도 몰랐다. 가이거의 정보력도 실감시키고, 경고도 주고, 이른바 꿩 먹고 알 먹고였다. 무엇보다 이 가면무도회에는 푸셔와 칼도 참석했다. 등골깨나 서늘할 것이다. 하하하.

얀케리를 처리한 후 연회장으로 들어섰다. 쿠퍼헤드와 레오파드는 먼저 떠나라고 지시했다. 업무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으니 남은 시간 동안 레이나 감상하며 보낼 생각이었다.

초상화 공개가 막 시작된 참이었다. 소렐이 연단에 올라서고 있었다. 레이는 금방 눈에 띄었다. 연단 근처에서 아마빛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나는 인파에 적당히 섞여 레이를 구경했다. 레이의 옷차림 또한 나름대로 내가 정성들여 연출한 작품이었다. 그림의 완성도가 퍽 빼어났다. 나는 별 다섯 만점에 별 넷 반을 주며 흡족히 와인을 마셨다. 내친 김에 초상화도 구경하기로 했다.

흐흠…….

의외로 캔버스 사이즈가 작았다. 화집으로 볼 때는 잘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 기시감이 스쳤다.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고릿적 영화에 나온 올리비아 핫도근지 뭔지 하고 닮아 보였다. 섬세한 이목구비와 긴 생머리, 호리호리한 몸매 등이 여러모로 흡사했다. 그 왕놈은 어쩌자고 저런 미인을 소박맞혔을까. 정부가 엄청난 미인인가.

갑자기 빌즈 남작이 묘사한 그 왼팔이 생각났다. 나는 초상화에서 눈길을 거둬 버렸다. 하여간에 빌어먹을 스토리였다.

참석자들을 둘러보았다. 저만치서 알토넨이 보였다. 하품을 필사적으로 참으며 무신귀족 일파와 함께 서 있었다. 오른편에서는 칼을 위시한 한량클럽이 노닥거렸다. 푸셔는 아주머니 팬들에 둘러싸여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오늘도 변함없이 멋쟁이였다.

나는 픽픽 웃었다. 속내가 뻔히 보이지…….

저들의 머리통에서 굴러가는 소리가 내 귀에 짱짱했다. 뻔했다. 군주제 폐지론자이자 왕국 최고의 석유왕 소렐이 갑자기 가면무도회에 귀족들을 초대했다. ‘저 건방진 평민이 이제야 정신을 차리고 정계진출을 준비하는구나, 조만간 묵직한 쿠키상자가 도착하겠구나아아……’.

그런데 진짜 왜 초대했지.

소렐을 훑어보았다. 가면만 썼을 뿐, 행색이 통상적인 파티 차림새와는 심각하게 거리가 멀었다. 땟물이 쫄쫄 흐르는 스트라이프 티에 낡은 청바지를 입고 구멍 난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구멍이 어찌나 큰지 양말색깔이 여기서도 다 보였다. 길거리로 나가면 당장 동전깨나 쓸어 담을 꼬락서니였다.

“이 자리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사숙녀 여러분.”

소렐의 말에 형식적인 박수가 터졌다. 소렐이 좌중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안광이 어째 무진장 싸늘했다. 최소한, 귀족들이 잔뜩 기대하고 있는 ‘이제야 정신을 차리고 정성껏 쿠키상자를 포장하는 평민’의 눈빛은 절대 아니었다.

“모두 바쁘실 테니 짧게 이야기를 끝내겠습니다. 사실 저는 초대장을 보내면서도 반신반의했습니다. 저같이 악명 자자한 군주제 폐지론자 따위가 주최하는 파티에 어딜 고귀하신 왕족, 귀족 나리들께서 떼로 납시랴, 자존심이 있다면 절대 올 리 없지, 하며 제 아내와 돈내기까지 했죠.”

회장으로 삽시간에 냉풍이 몰아쳤다.

“오늘 밤 저는 아내에게 판돈을 모두 털리게 되었습니다. 놀랐습니다. 귀족 나리들의 고결한 자존심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니 말입니다. 하긴, 이 초상화 자체가 ‘푸른 피’, 아니, 돼지 피의 본질을 폭로하고 있으니 당연한 결과인가요, 껄껄껄.”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내 옆의 신사나리가 “뭣이 어쩌고 어째.” 하고 내뱉었다. 소렐이 히죽 웃었다. 면상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심술이 뚝뚝 떨어졌다.

“아무튼 환영합니다. 두 눈 부릅뜨고 이 자리를 즐겨 주십시오. 이 그림, 정말 비싼 보물이거든요. 돼지들의 두목 아니랄까 봐 왕실에서 향후 200년간 세계 순회전시에서 발생될 이윤까지 계산해서 그림값을 부르지 뭡니까. 계약서에 사인하기 전에 저는 진정제를 복용해야 했죠.”

카메라플래시가 펑펑 터졌다. 기자들이 부지런히 메모하는 광경을 살펴보며 나는 웃음을 삼켰다.

어쩐지 이상하다고 했지.

재미난 쇼가 벌어질지도 모르겠군…….

“조용히이이이!”

소렐이 연단을 주먹으로 꽝 쳤다. 아동용 동화책을 쓴다는 양반의 주먹 크기가 헤비급 권투선수만 했다. 씩씩거리던 고관대작 나리들이 단박에 찔끔했다.

“좆같지 않습니까? 자작나무는 이 웬 아이러니인가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생전에는 자신을 푸대접한 왕실이, 자신의 초상화는 금광처럼 귀하게 대접했으니 말입니다. 사실 엄청난 모욕이지요. 자작나무를 참살해 놓고 그녀의 기록화로 배를 뚱뚱히 불린 격이니까요. 이 그림만큼 왕실의 뻔뻔한 탐욕을 그 무엇보다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증인은 없을 겁니다.”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가운데서, 플래시 터지는 소음과 기자들이 노트북 두들기는 소리만 요란하게 달려갔다. 소렐이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귀족들을 훑어보았다. 갑자기 연단을 난폭하게 걷어차며 고함쳤다.

“이 나라는 정화되어야 합니다! 이 그림도 이제 돼지들의 앵벌이 노릇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국민의 피를 빠는 돼지들은 물러가라! 군주제 철폐!”

고래고래 부르짖으며 그림 뒤의 휘장에서 뭔가를 휙 꺼내 들었다. 흡사 엑스칼리버 뽑아 들듯이 했다. 날이 번쩍번쩍한 도끼였다. 이쯤 되자 재미난 이벤트를 고대하던 나조차 어안이 벙벙했다. 설마.

도끼를 움켜쥔 소렐이 손바닥에 침을 찍 뱉었다. 그러고는 단숨에 그림을 내려찍었다. 수차례 내려찍었다. 쾅쾅 소리가 났다. 소렐이 “으흐하하하하하하!” 하고 웃었다.

보고 있노라니 내 전신이 얼어붙는 듯했다. 송곳으로 뒤통수를 후벼 파이는 것 같기도 했다.

“저 미치광이를 말려!”

“그건 국가적인 보물이오!”

“무슨 짓을!”

비명이 터졌다. 곳곳에서 귀부인들이 실신하며 뒤로 넘어갔다. 무도회장 스피커에서 운동가가 우렁차게 쏟아졌다.

「사람으로 태어나 모두가 평등할진대! 귀족들의 피를 밟고 우리는 진군한다!」

혈기 넘치는 귀족신사들이 무대로 뛰어 올라갔다. 올라가려 하는 데서 그쳤다. 벌떼처럼 몰려든 사진기자들로 연단석 주변이 아수라장이었다. 사진기자들을 간신히 밀치고 신사나리들이 연단에 올라섰을 때는, 이미 초상화를 넝마조각으로 만든 소렐이 보람차게 웃으며 이마의 땀을 닦은 뒤였다.

다음날 조간 1면에 소렐의 퍼포먼스가 특급 헤드라인으로 실렸다. ‘석유왕 소렐, 왕실 모욕죄로 긴급 체포되다!’

배경에는 기쁨에 찬 낯으로 눈의 여왕 초상화를 도끼질하는 소렐의 사진이 깔려 있었다. 그 탓에 내가 심혈을 기울여 연출한 상영작은 2면으로 밀려나 버렸다. 엿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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