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 ─L. (65/101)

8 ─L.

“무도횝니다, 무도회. 그런데 뭉크코트라니요. 절대 안 됩니다.”

메사라가 펄펄 뛰었다. 어젯밤 가면무도회 티켓을 보자마자 단박에 험상궂은 표정을 짓더니, 오늘은 딴판으로 흥겨워했다. 아침부터 온갖 옷을 꺼내며 난리를 쳤다. 나는 시큰둥하게 콧잔등을 긁었다.

“그림 구경하러 가는 자리잖아요. 무슨 옷을 입든 상관없을 텐데요.”

“어쨌든 명색은 무도횝니다. 가면무도회에 뭉크코트를 입고 가다니, 장례식에 빨간 구두를 신고 가는 격이나 마찬가집니다. 흠, 이건 어떨까요. 레이에게는 흰색도 어울리는군요.”

“점심 때 이웃과 바비큐를 먹기로 했잖아요. 냄새 배일 텐데요.”

“골라 놓고 가면 되죠. 얼른 입어요. 옷을 골라야 구두와 가면도 맞출 수 있습니다.”

메사라의 완강한 요구에 할 수 없이 옷을 입었다. 당혹스러웠다.

“이건 귀족들이나 입는 옷이잖아요.”

열광적으로 박수를 퍼붓는 메사라에게 결국 한마디 했다. 귀족들이 남녀 가리지 않고 즐겨 입는 옷. 즉, 로브였다. 로브에도 여러 종류가 있었지만, 가장 인기 있는 디자인은 몇 겹으로 겹쳐 제일 위로 오는 겉옷이 등 뒤를 질질 끌게끔 하는 가운 형식이었다. 보석을 반드시 걸쳐야 허전해 보이지 않을뿐더러 옷감도 많이 들어갔다. 허영과 사치의 상징이었다.

그렇건만 메사라는 이런 옷과 보석들을 내게 자주 선물했다. 처음에는 거절하다가 이것도 나름대로는 부의 재분배려니, 하고 지금은 관둬 버렸다. 저런 옷과 보석들을 제작하고 파는 사람들은 평민들이니까.

“이런 옷은 입고 갈 수 없어요.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볼 거예요.”

“이상하게 쳐다보긴요. 로브는 귀족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파티 예복으로 평민들도 많이 입는걸요. 레이도 이참에 한번 입어 봐요. 실컷 사 놓았는데 썩히기 아깝잖습니까.”

메사라는 보석상자에서 목걸이까지 꺼내 내 목에 걸어 주었다.

“옷이 흰색이니까 이것으로 포인트를 주는 게 좋겠군요.”

“……이거 얼마짜리예요?”

“싸구렵니다. 그리고 어차피 이 보석에 주목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메사라가 진지하게 말했다. 이번에는 나도 속지 않았다. 그래도 목걸이 줄에 달린 보석이 하나뿐이니 오십만 탈란텐까지는 안 갈 듯했다.

그 사파이어 목걸이만 생각하면 소름이 돋았다. 무엇보다 나는 메사라의 재물이 썩 탐탁잖았다. 뇌물로 쌓은 부 아닌가.

나는 마넨 경의 부정축재도 질색했었다. 마넨 경의 비자금액은 왕국 역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국민들에게 현재 마넨이라는 명칭은 스크루지와 더불어 돼지 혹은 욕심꾸러기로 통하는 관용어였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가진 자의 의무였다. 그러나 지금의 메사라는 비전을 갖춘 정치인이 아니라 사악한 음모의 제왕일 뿐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섬뜩했다. 옛 시대, 최고의 권세를 떨친 왕이 귀족의 폭정이 극을 달리는 현대로 귀환했다……. 그것도 평민 신분으로 돌아왔다. 어디까지나 우연의 일치겠지만, 그래도 역시 기묘했다.

정말로 운명이란 것이 존재하여 메사라를 저 자리까지 끌어올렸다면.

그렇다면 그는 최소한 지금보다는 나은 길을 가야 하지 않을까. 많은 이에게 도움이 되는 악당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이것은 나의 바람일 뿐이었다. 선택은 전적으로 메사라의 몫이었다.

옷을 고른 후 캐슬마인 부부의 집으로 향했다. 점심식사를 하는 내내 “돌아온 탕아”, “돌아가신 부모님께서 이 모습을 보셨다면” 등등의 소리로 귀가 따가웠다. 메사라는 친구와 함께 작은 동양무술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얼굴색 하나 안 바꾸고 거짓말했다.

캐슬마인 씨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일반 스포츠 센터가 전망이 더 좋지 않을까. 아시다시피 이 왕국은 워낙 동양적인 전통이 짙어서 동양 문화에 흥미를 가지는 사람들이 오히려 적은 편 아닌가.”

“좋은 지적입니다. 사실 친구와 저도 다른 길을 모색 중입니다.”

메사라가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대답했다. 캐슬마인 씨가 “음, 역시 그렇지.” 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보고 있자니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연기력이 정말 대단하다…… 하는 생각만 했다.

저녁 8시에 소렐 씨의 저택으로 출발했다. 소렐 씨의 저택은 수도에서 한참 떨어진 교외에 있었다. 초상화 공개가 자정 예정인데 11시에야 도착했다. 정문을 통과하고도 20분을 더 달린 끝에 본관이 드러났다. 바로크 양식의 웅장한 저택이었다. 초대카드가 한 장뿐이어서 메사라는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미안해요. 무리한 부탁해서.”

“그동안 집에만 있느라 레이도 많이 심심했을 텐데요. 늦어도 한 시에는 끝날 테니 나는 그때까지 근처 술집에나 가서 시간 때우면 그만입니다. 눈의 여왕 초상화를 실물로 보는 기회인데 잘 놀고 와요.”

메사라가 내게 가면을 씌워 주었다. 나는 심호흡했다. 사람이 많은 곳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나로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도 혼자였다.

저택 안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순간 숨이 막혔다. 관중들이 사납게 고함치는 콜로세움 한복판에 홀로 내동댕이쳐진 기분이었다. 섬세한 아라베스크풍 문양이 봄철 들꽃처럼 실내를 수놓고 있었다. 작은 인물들, 괴물들, 정교한 식물들이 푸르고 노랗고 붉은 색으로 뒤섞여 기괴한 질서를 빚고 있었다. 눈이 아찔하리만치 화려했다.

넋을 놓고 있는 내게 시종이 “카드를 주십시오, 손님.” 했다. 나는 급히 정신을 차리고 카드를 건넸다. 시종이 “이 복도를 죽 가셔서 회랑을 건너면 연회장입니다.” 하며 한쪽을 가리켰다. 나는 허겁지겁 회랑으로 이동했다.

늦게 도착해선지 연회장으로 향하는 복도는 인적을 찾아볼 수 없이 괴괴했다. 느릿느릿 걸어가며 복도에 걸린 그림과 태피스트리들을 감상했다. 미술책에서만 구경한 작품이 즐비했다. 지금 누리는 이 눈 호강만으로도 이곳에 오길 잘한 듯싶었다.

긴 회랑 건너편의 활짝 열린 문에서 화사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한결 가벼워진 기분으로 연회장을 향해 걸어갔다. 회장으로 들어선 순간이었다. 하마터면 무릎이 꺾일 뻔했다.

이, 이럴 수가…….

몹시 넓고 높은 연회장이었다. 거대한 오페라 극장을 방불케 하는 규모였다. 수백 개의 양초가 가득 꽂힌 샹들리에들이 회장을 달구었다. 붉게 타오르는 회장 가운데서 사람들이 노닐고 있었다. 남녀 가리지 않고 화려한 의상을 걸치고서, 입가에 띤 은은한 미소는 깃털 부채로 가린, 수많은 귀족들이.

혹독한 추위에 얼어붙은 양 나는 꿈쩍도 하지 못했다. 초대 손님들이 모두 귀족이었단 말인가. 방송에서도 이런 말은 없었다. 귀족들이 이 가면무도회의 초대 손님들일 줄 알았더라면 여기 올 엄두도 내지 않았을 것이다.

메사라가 그토록 로브를 강요한 이유를 지금에야 깨달았다. 귀족들의 동태를 샅샅이 수집하는 그가 이 자리를 모를 리 없었다. 바로 그래서 내게 로브를 억지로 입힌 것이다. 귀족들이 모이는 자리에 주술사 코트를 걸치고 갔다면, 어마어마한 시선들이 빗발쳤을 테니까.

“기가 막힌다, 참 기가 막혀.” 하고 중얼거리는 내게 시종이 다가왔다.

“손님. 자리를 찾고 계십니까.”

내가 우물쭈물하자 시종이 “따라오시지요.” 했다. 얼떨결에 시종을 따라 한 테이블에 갔다. 다섯 명의 젊은 사내들이 테이블에 앉아서 속삭이고 있었다. 시종이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하고는 떠나버렸다.

망할 놈의 머리카락 때문인지 사내들이 이쪽을 빤히 주시했다. 나는 어색하게 미소 짓다가 자리에 앉았다. 사내들이 금세 시선을 거두고 다시금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분위기로 보건대 동년배 문신귀족들 같았다. 대화의 태반이 무도회를 성토하는 내용이었다. 음식이 형편없다는 둥, 시종들이 불친절하다는 둥, 길게 불만을 토로했다.

나는 음료수만 홀짝거렸다. 이런 화려한 무도회더러 보잘것없다니, 갈수록 쭈그러드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이쯤 되자 메사라가 왜 귀족 파티를 질색하는지 뚜렷이 알 것 같았다. 나는 메사라가 파티를 좋아하리라 추측했었다. 그렇지 않다는 사실은 동거를 하고 나서부터야 알게 되었다.

―저는 귀족들의 파티놀음을 전혀 좋아하지 않습니다. 지루하거든요. 허영과 가식은 암만 그럴듯하게 치장해 봤자 따분하기만 할 뿐이죠. 그따위보다는 길거리 축제나 이웃과의 점심자리가 훨씬 재미나지요.

허영과 가식이라.

나는 피식 웃었다. 그에게서 이야기를 듣는 내내, 기분이 묘했었다.

생각을 몰아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면에도 불구하고 유명인사는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연회장 끝에 휘장으로 가려진 연단이 보였다. 따로 배치된 기자석에서는 기자들이 웅성거리며 현장을 메모하고 있었다.

귀부인들은 경쟁하듯 회장 중앙에 모여 춤추고 있었다. 담홍색과 분홍색, 푸른색의 드레스와 보석들이 펄럭거렸다. 동화 속 불행한 공주들이 저 귀부인들을 본다면, 요정에게서 받은 호두를 슬그머니 낡은 치맛자락 속으로 숨겨버릴 듯했다. 내게 목걸이를 걸어 주며 “어차피 이 보석에 주목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한 메사라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의자에 등을 기대다가 멈칫했다. 회장으로 두 남녀가 들어서고 있었다. 타인에게 그다지 흥미를 품지 않는 나조차 잠깐 한눈을 팔 만치 그들은 눈에 띄었다. 외모와 옷차림이 압도적으로 화려했다.

누굴까……. 낯선 인물들이었다. 한 달 가까이 정쟁에서 관심을 거둔 사이에 여러 인물들이 새로 등장했구나 하는 생각만 들었다.

나는 남녀에게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이젠 내가 알 바 아니지.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배는 안 고팠지만 이런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처음 먹어 보는 캐비어였다. 명성에 비해 맛은 별로였다.

“여어, 너희는 이 자리냐. 이 가면무도회 어째 좀 이상하지 않아?”

“어, 이제 왔어? 이리나는 어디에 놔두고?”

“걔야 벌써 춤추느라 정신이 없지. 인사나 하러 왔다.”

주변이 떠들썩했다. 나는 무심코 고개를 들다가 멈칫했다. ‘화려한 두 남녀’의 바로 그 사내였다. 사내와 꽤 친한 듯 테이블에서 흑발의 귀족 사내가 일어서며 반색했다. 흑발 귀족이 빈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잠깐 이야기나 하고 가지. 더는 올 사람도 없을 것 같은데.”

“하하핫. 그럴까.”

사내가 자리에 털썩 앉았다. 시가 연기를 쉴 새 없이 뿜으며 거드름을 피워대는 행색이 폼 잡는 할리우드 배우를 방불케 했다. 사내와 귀족들이 대화를 나누었다. 한심하고 지루한 내용 일색이었다.

“그런데 이쪽은 동행이야?”

대뜸 사내가 이쪽을 흘끗거리며 말했다. 남자 귀족들이 “아니.” 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포크로 쟁반만 헤적거렸다. 이쪽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사내의 눈초리가 거북했다. 한참 나를 뜯어보던 사내가 싱긋이 웃었다.

“말수가 매우 적으시네요……?”

나는 고개를 숙였다. 사내가 눈을 가늘게 뜨며 시가 연기를 천천히 내뿜었다.

“그거 아십니까? 연회장에 들어서자마자 이 테이블이 눈에 확 띄었습니다. 바로 그 아름다운 금발 때문에 말이죠. 목에 건 그 붉은 루비 목걸이가 빛을 잃을 만치 눈부시더군요, 하하핫! 그런데 외국에서 살다 오신 귀족인가 봅니다?”

사내의 말뜻을 잠깐 뒤에야 이해했다. ‘나 같은 유명인을 못 본 척 하다니, 너 외국에서 살다가 왔구나?’였다. 겉뿐 아니라 속까지 할리우드 배우였다.

“아닙니다. 귀족에게는 별반 관심이 없어서 그쪽을 몰라봤군요. 그리고 저는 귀족이 아니라 평민입니다.”

“아, 네. 이런…… 이제 보니 남자분이시네요. 말을 안 걸었다면 착각할 뻔했습니다. 춤이나 한번 청해 볼까 했는데 수포로 돌아갔군요.”

사내가 시가를 빨며 능청스레 머리를 긁적거렸다.

“속 보이는 질문을 했군요, 하하핫. 제가 사실 독일에서 오래 살다가 최근에야 귀국했거든요. 그쪽도 저와 비슷한 줄 지레짐작했습니다. 어쨌든 그쪽, 보통 평민은 아니지요?”

“질문의 의미를 모르겠습니다.”

“무슨 의미긴요. 그쪽의 옷차림이며 목걸이가 고급스럽고, 귀족에게도 사뭇 덤덤해 보여서 말입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는 귀족들만 초대되었다고 아는데 그쪽은 평민인데도 여기에 참석하다니, 의아해서요. 혹 소렐 씨나 다른 높으신 분과 친분이라도 있는가 짐작해 봤습니다.”

요약하면 ‘당신, 부자인가요’라는 뜻이었다.

“이번에도 잘못 보셨군요. 저는 부자가 아닙니다. 높은 분들과 연줄도 전혀 없습니다.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평범한 사람이에요. 초대카드는 제 가게를 들른 소렐 씨와 자작나무 이야기를 하다가 얻었습니다. 이 옷과 보석도 친구에게 빌렸고요.”

“이거 참……. 자꾸 속 보이는 질문만 던진 셈이 되었네요, 하하핫. 그런데 알고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쪽을 훔쳐보고 있다는 거요. 평소에는 파티에서 제일 주목받는 사람이 제 여동생이었거든요. 그런데 오늘은 당신 때문에 주목을 못 받는 통에 토라졌지 뭡니까.”

“허풍이 지나치시군요.”

“이거 직설적인 분이시네요. 보기와 정말 다릅니다, 하하핫!”

사내가 시가 연기를 내뿜으며 크게 웃었다.

“그런데 그런 옷과 목걸이를 빌려줄 정도라면 보통 친한 친구가 아니겠네요. 빌려 입은 옷 치고는 사이즈가 그쪽에게 맞춘 듯이 딱 맞는데요? 목걸이도 그 금발에 매우 어울리고 말입니다. 통성명이나 하죠. 그쪽 성함이?”

그때였다. 연단석이 함성에 휩싸였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고 연단석의 휘장이 올라갔다. 나는 급히 일어섰다. 이 자리에서는 초상화가 잘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연단 가까이로 향했다. 마침내 눈에 들어왔다. 실물로는 처음 보는 자작나무 초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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