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M─ (64/101)

7 .M─

수요일이었다. 알토넨과의 면담으로 오늘 업무를 마무리한 후 퇴근할 예정이었다. 시간이 꽤 지났건만 알토넨이 집무실에 들어올 낌새가 없었다.

짜증을 억누르며 케이스에서 목걸이를 꺼내 만지작거렸다. 3주 전 제작을 의뢰해 오늘에야 도착한 루비 목걸이였다. 태양처럼 타오르는 붉은빛깔이 레이의 금발과 잘 어울릴 듯했다. 길디긴 머리카락 때문에 레이에게는 액세서리 중 목걸이가 제일 어울렸다. 이번에도 옷을 모두 벗겨 놓고 직접 걸어 줄 생각이었다.

나는 나체에 목걸이만 걸친 레이와 섹스를 나누는 것이 좋았다. 힘껏 박으면 목걸이가 움직임에 맞춰 찰랑거렸다. 아주 자극적이었다. 상상만으로도 아랫도리가 뻐근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네.”

알토넨이 허겁지겁 집무실로 들어왔다. 나는 “아닙니다.” 하다가 멈칫했다. 알토넨 뒤로 칼이 유유히 들어서고 있었다.

기분이 확 구겨졌다. 피아노 연주가 유발한 신물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터였다. 다 떠나서 차기 재포니카(Japonica, 무신귀족계급 대표의원)의 집무실에 문신귀족이, 그것도 ‘포스트 외척’이 구둣발을 들이밀다니.

하물며 오늘 면담의 목적은 ‘오르키스(Orchis, 평민계급 대표의원)’ 폰타네 의원과 내가 은밀히 작당한 내용을 알토넨에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이런 자리에 칼 따위를 대동하고 들어섰다? 허수아비 주제에 벌써 코가 하늘을 찌르는 겐가.

알토넨도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오줌을 지릴 듯한 면상으로 “칼과 함께 전시회 가기로 했는데 시간이 애매해서.” 하고 우물거리며 분위기 회복에 안간힘 썼다.

“아, 그런데 그 목걸이는 뭔가? 조, 좀 구경해도 될까? 혹시 애인에게 주려는 것?”

나는 대꾸 없이 쾅 소리가 나다시피 케이스를 내려 닫았다. 알토넨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아니, 설마 진짜로 연인에게 주려는 선물인가?”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토넨이 입을 떡 벌렸다.

“이거 신기한데. 젊은 사람이니까 애인이 있는 건 당연하네만…… 가이거 부장들은 어째 연애나 결혼도 안 하고 살 이미지였거든. 그 악마가면 때문인가.”

엿 같았다. 바로 이래서 내가 빌어먹을 가면을 증오하는 것이다. 부장들 중에서 유부남만 셋이었다. 스물에 결혼한 재규어는 딸린 애만도 넷이었다. 더불어서 올해 유부남으로 입성할 것이 확실시되는 녀석들만 다섯이었다. 그 탓에 최근 레오파드와 쿠퍼헤드는 임자 물색에 안달복달하고 있었다.

“통성명이나 나누지요. 그쪽이 스네이크라고요?”

칼이 손을 내밀었다. 나는 반응하지 않았다. 악수 금지는 일명 ‘령 사건’ 이후 우리의 업무수칙으로 자리 잡았다.

“가이거 부장들은 악수를 하지 않아.”

알토넨이 얼른 설명했다. 칼이 흐흠, 하며 손을 거두었다.

“그렇군요. 악수도 하지 않는다라. 듣기론 해리조차 그쪽의 가면 벗은 얼굴을 보지 못했다고요. 채찍을 들고 있을 때만 스네이크를 알아본다고 하던데……. 보좌받은 지도 반년이건만 어찌나 과묵한지 본명도 아직 모른다고 들었습니다. 하하. 어쨌든 반갑습니다. 그림자같이 따르는 해리의 참모가 어떤 사람인지 꽤 궁금했거든요. 알고 있지요? 많은 귀족들이 그쪽에 호기심을 품고 있다는 거요.”

작자가 더럽게도 길게 주절거렸다. 나는 채찍을 까딱까딱 놀리며 알토넨을 노려보았다. 알토넨의 찌그러진 표정이 기요틴으로 걸어가는 사형수를 방불케 했다.

“그런 스네이크의 연인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군요. 이 정도는 물어도 실례는 되지 않을 것 같은데요. 하하핫.”

“말수가 매우 적습니다.”

그러니까 입 닥치고 얼른 나가 주길, 뉘앙스를 노골적으로 담아 내뱉었다. 깨끗이 무시하고 칼이 건너편에 털썩 앉았다. 알토넨은 이제 조용히 성호를 긋고 있었다.

“말수가 매우 적다라……. 호오. 심심하지 않습니까? 그쪽도 과묵한데 연인까지 말수가 적으면 좀 심심할 것 같은데요.”

“제 주변에는 시끄럽고 시건방진 녀석들밖에 없어서 말입니다. 연인까지 시끄러운 사람을 둘 필요는 없죠.”

“용모는요? 파티를 돌며 웬만한 귀부인이란 귀부인은 다 구경했을 테니 보통 미모는 아닐 것 같은데요. 섹시파? 청순파? 바스트 사이즈는 얼마? 괜찮습니다, 툭 터놓고 떠들면 뭐 어떻습니까. 남자들끼리 있으면 그렇고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까, 하하하하핫!”

칼이 시가 연기를 퐁퐁 뿜으며 내 어깨를 철썩 때렸다. 주먹에서 절로 핏대가 솟았다. 당장 저 시가를 빼앗아 놈의 눈알을 지져 버리고 싶었다. 하얗게 질린 알토넨이 “자자, 이제 나가자고.” 하며 칼의 어깨를 붙들고 바깥으로 이끌었다. 칼이 “아이, 참.” 하며 툴툴거렸다.

“이거 나도 얼른 애인을 구하든지 해야지 원. 하하. 그럼 다음에 봅시다.”

그러고는 빌어먹게도 윙크를 찡긋 날렸다. 시건방이 하늘을 찔렀다. 나는 알토넨에게 끌려 나가는 칼을 지그시 응시했다.

얼른 애인을 구하든지 해야지라…….

우연히 꺼낸 말치고는 퍽 공교로웠다. 그렇잖아도 오늘 드디어 칼의 여자관계가 보고서로 올라온 참이었다.

이거 재미있는걸.

석양이 녹아 가는 토요일 오후였다. 앞마당에 잔뜩 쌓인 눈을 치운 후, 집으로 들어갔다. 레이가 케이블 미술채널을 보고 있었다. 눈의 여왕과 관련 있는 자가 뉴스로 나오는 중이었다.

소렐이었다. 내일 눈의 여왕 초상화를 공개하는 가면무도회를 연다는 소식이었다. 레이가 미간을 모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저 아저씨.”

“네. 그날 바로 알아보았습니다. 소렐은 왕국 제일의 석유왕입니다. 극좌파로도 유명하죠.”

“그랬군요. 왜 말을 안 했어요?”

“눈의 여왕 초상화를 앞으로 실물로 보기 힘들다는 사실을 알면 당신이 슬퍼할까 봐서요. 소렐은 소장품을 대중에게 거의 공개하지 않기로 유명합니다. 내일 열리는 저 가면무도회가 아마도 눈의 여왕 초상화가 바깥으로 공개되는 마지막 자리일 겁니다.”

“그렇군요.”

레이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채널을 《앗, 실수》라는 인기 프로그램으로 슬그머니 바꾸었다. 눈의 여왕은 이제 지긋지긋했다.

사실 여태껏 나는 레이의 눈의 여왕 취미에 별반 생각이 없었다. 정쟁과 주술만 아니면 어느 취미든 대환영이었다. 심지어 레이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지루한 회고록까지 읽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 와서는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애당초 그 이야기를 믿지도,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건 엉터리 소설일 뿐이었다. 드라마로 볼 때도 기분 나쁜 스토리라고 생각했는데, 《푸른 피》에서 잠깐 언급된 내막을 접하고 나서부터는 더욱 싫어졌다. 적당히 아름답고 적당히 슬픈 그 비극은, 추악한 음모를 가린 가면에 불과했던 것이다.

브라운관에 시선을 고정하며 생각에 잠겼다. 왜일까. 레이가 저토록 눈의 여왕에 몰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짐작 가는 부분이 없지는 않았다. 레이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는 순간 감이 왔다. 감금이었다.

레이는 오랜 시간 감금되어 살았다. 구타에 굶기까지 했다. 다년간 온갖 놈들을 손수 혼쭐냈던 나는, 폭력이 인간의 정신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잘 알았다. 어쩌면 나를 매혹시키는 저 길디긴 머리카락도 학대의 결과물일지도 몰랐다.

그래서일까. 그래서 레이는 눈의 여왕에 집착하는 것일까. 오랫동안 탑에 갇혀, 고독한 시간을 보낸 자작나무에게 동질감을 느껴서? 진실로 그렇다면 송두리째 뿌리 뽑고 싶었다. 그건 취미가 아니었다. 불행의 파생물이었다. 내가 증오하는 레이의 어둠이었다.

그리고 언령도 마음에 걸렸다. 마녀의 백발백중 예언 이후, 언령이니 뭐니에 은근슬쩍 신경 쓰게 된 참이었다. 내가 레이의 눈의 여왕 취미를 요즘 질색하게 된 으뜸가는 원인이 기실 언령이었다.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지금은 뚜렷이 깨닫고 있었다. 우연이겠지만 그래도 소름이 돋았다.

눈의 여왕과 레이는 머리카락이 굉장히 길었다. 데이탄즈는 자작나무 가지와 아내 이름의 연관성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는 레이의 이름이 곧 령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눈의 여왕은 주술을 부리다가 정쟁에 휘말려, 데이탄즈에게 살해당했다.

갑자기 전신으로 한기가 확 뻗어 나갔다. 반사적으로 레이를 끌어당겼다. 레이가 “왜?” 하며 이쪽을 응시했다. 나는 대답 대신 레이에게 키스했다. 키스를 나누며 빌어먹을 생각을 떨치려 노력했다.

어차피 출처도 불분명한 엉터리 소설이었다. 지금 레이는 내 앞에 있었다. 주술과 정쟁에서도 깨끗이 손 씻었다.

뭐가 문제인가.

격한 성욕이 치고 올라왔다. 곧장 레이의 옷을 벗겼다. 나도 옷을 벗으며 슬그머니 테이블을 응시했다. 위스키 잔에 가라앉은 얼음이 날카롭게 빛났다.

뭐, 오늘쯤은 좀 즐겨도 괜찮겠지.

한 달 가까이 나름대로 건전하게 섹스해 온 나날이었다. 욕구불만이 엄청났다. 핑 돌기 직전이었다. 이런 뜨거운 몸뚱이를 코앞에 두고서 성질 죽이려니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허리와 목조르기로도 시름을 달래기에는 이제 역부족이었다. 뭔가가 더 필요했다. 간절히 필요했다. 진정 도리 없는 녀석이었다.

괜찮았다. 레이는 어느 선까지는 내 요구를 받아 주려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토요일이었다. 주말은 자고로 즐겁게 보내야 바람직한 법이다.

일단 초반부는 레이를 위해 봉사했다. 식스나인 체위를 취하고 레이에게 내 좆을 실컷 빨게 해 주었다. 나도 눈앞에 활짝 노출된 레이의 가랑이를 맘껏 탐했다. 애무에도 긴 시간 할애했다. 그가 좋아하는 후배위로 부지런히 넣어 주었다. 두 번의 절정을 같이 갔다. 레이는 충분히 만족한 기색이었다.

“좋았어요?”

내가 묻자 레이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레이가 여운을 마칠 때까지 기다린 후 본판에 들어갔다. 레이를 정상위로 눕혔다. 레이가 순간적으로 움찔했으나 뭔가를 깨달은 듯 제지는 하지 않았다.

나는 재차 위스키 잔을 곁눈질했다. 꽤 녹아서 얼음의 각이 무뎌져 있었다. 저 정도면 시도해 볼 만했다. 우선 처량한 어투로 양해를 구했다.

“그동안 너무 참았더니 오늘은 참기가 힘드네요. 좀 도와줄래요?”

레이는 입술만 미세하게 떨었다. 해도 괜찮다는 뜻이었다. 나는 지그시 웃으며 잔에서 얼음을 꺼내 들었다. 레이가 단박에 질겁했다.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죠?”

“별것 아닙니다. 각이 무뎌졌으니 안이 다치진 않을 겁니다. 좀 차갑기야 하겠지만.”

“그럼 그걸…….”

“뭘 떱니까. 이보다 더 큰 것도 들어가는 걸 다 아는데. 하하하.”

손가락으로 레이의 구멍을 벌렸다. 한 번의 체내삽입으로 혹사당한 구멍 안이 뜨끈뜨끈했다. 손가락 끝으로 얼음을 밀어 넣었다. 레이가 숨을 들이켜며 눈을 크게 떴다. 그의 몸에서 소름이 확 돋아났다. 그 반응에 지끈한 쾌감이 온몸을 빙그르르 파고들었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위스키 잔에서 얼음 하나를 더 꺼내 들었다. 레이가 사색이 되었다.

“그, 그만 넣…….”

“어차피 녹을 텐데 하나만 더 넣죠.”

“그, 그래도. ……읍. 으흡!”

얼음을 밀어 넣자 레이가 다리를 반사적으로 모으며 몸부림쳤다. 나는 레이의 다리를 확 벌렸다. 그새 녹은 얼음물이 정액에 섞여 설핏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것을 잠깐 동안 즐겁게 감상한 후 자세를 잡았다.

등이 허공에 뜨리만치 엉덩이를 높이 세워 가랑이를 완전히 노출시킨 후 바로 삽입했다. 사정 안 봐주고 끝까지 처넣었다. 퍼억 소리가 났다.

“아아아아아아!”

레이가 신음했다. 귀두 끝에 차가운 얼음이 쿡 부딪쳤다. 레이의 낯이 고통과 쾌락으로 일그러졌다. 저 꼴에 엄청난 쾌감이 머리끝을 질근질근 저몄다. 아주 짜릿했다.

얼음물과 정액이 뒤섞여 구멍 밖으로 질질 새어 나왔다. 레이의 안으로 철퍽철퍽 부딪쳤다. 속도를 빠르게 하여 깊숙이 푸욱 푹 삽입했다. 질척질척 내벽 문지르는 소리가 났다. 난폭한 움직임에 입구의 분홍빛 살이 쑥 나왔다가 쑥 들어갔다.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체액이 서늘했다.

레이가 정신을 못 차려했다. “아! 아!” 하며 비명만 질렀다. 내 물건만으로도 힘들 판에 얼음까지 넣었으니 후벼 파이는 감각이 무지막지할 것이다. 구멍이 물건을 바짝 조아대며 움찔거렸다. 움직임이 제법이었다. 나와 레오파드를 받을 무렵과 달리 이제는 퍽 사내 맛을 알았다.

사납게 쑤셔 박았다. 손가락까지 함께 넣어 전립선을 더듬었다. 레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연신 어떠냐고 말을 던졌다. 레이는 비명만 내질렀다.

“아! 아! 아아아아아!”

레이의 앞을 예민하게 만져 주었다. 레이가 자지러졌다. 그의 가랑이는 새어 나온 얼음물로 질펀하게 젖어 있었다. 들린 등허리를 타고 내려와 소파를 덮은 천까지 줄줄 적셨다.

나도 이제는 절정이었다. 최대한 깊이 박아 넣고 정액을 쌌다. 눈앞이 아찔했다. 오르가즘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싸준 후 물건을 확 뽑아냈다. 느슨히 열린 아래에서 탁한 빛깔의 정액이 치릿치릿 소리를 내며 새어 나왔다.

그곳에 눈길을 고정하고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욕구가 겨우겨우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아주 후련했다.

정말이지 도리 없는 녀석이라니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레이의 다리를 좀 더 벌리게 하는 자신에게 웃음만 나왔다. 레이가 멀거니 허공을 응시했다. 땀범벅의 몸뚱이에 머리카락이 잔뜩 달라붙어 엉망이었다.

나는 레이의 옆에 누우며 부드럽게 키스했다. 유두를 만지작거리며 “좋았어요?” 하고 물었다. 레이는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렸다. 귀가 빨갰다.

좋았다는 뜻이네.

나는 짓궂게 웃었다. 내가 레이를 위해 섹스 때 성질 죽이려 애쓰듯 레이도 나를 위해 노력해 줘서 다행이었다.

역시 나는 행운아라니까…….

레이와 함께 소파에서 뒹굴거렸다. 벌거벗은 채 서로를 더듬으며 주거니 받거니 대화도 나누었다. 《앗, 실수》를 보며 폭소도 터뜨렸다. 《앗, 실수》는 몰카가 설치된 줄도 모르고 온갖 바보짓을 저지르는 귀족들을 보여 주는 오락물로서, 레이와 내가 가장 즐겨보는 프로였다. 이런 시간이 퍽 좋았다.

“밤이 꽤 깊었네요. 이만 씻고 자죠.”

레이와 욕조에서 거품목욕을 했다. 레이가 내 가슴에 등을 나른히 기댔다. 나는 욕조 옆에 놓아둔 와인 잔을 들다가 레이를 살펴보았다. 레이는 편안한 안색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흐흠…….

눈의 여왕에게 관심 끊으라고 하면 레이는 어떻게 반응할까. 지나친 간섭이라고 반발하지는 않을까. 나는 와인을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영리한 레이는 이미 깨닫고 있겠지만, 나는 주술과 정쟁에 관해서만큼은 철저하게 레이를 통제하고 있었다. 그건 가이거 본부장 스네이크로서 당연한 업무였다. 그렇건만 눈의 여왕 취미까지 참견한다? 이건 확실히 지나친 간섭이었다.

나는 욕조 가장자리를 톡톡 쳤다. 레이가 챙겨 온 짐에 눈의 여왕 관련서적은 한 권도 없었다. 대부분이 식물자료집이나 민간요법 책들이었다.

레이를 재차 눈여겨본 후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레이. 눈의 여왕 말인데요.”

“예?”

레이가 눈을 황급히 떴다. 하여간에 눈의 여왕만 나오면 반응이 남달랐다.

“별건 아니고요. 레이가 챙겨온 짐에 눈의 여왕 관련서적이 한 권도 없더군요. 의외여서 말입니다. 이 집에 있는 책이라고는 만화책과 탐정소설들이 전부인데요. 낮에 심심하지 않아요?”

“아, 그건.”

레이가 우물쭈물했다. 물로 뺨을 톡톡 마찰하며 뜸을 들였다.

“눈의 여왕을 더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안 가져온 거예요.”

“네?”

예상 밖의 대답에 나는 와인 잔을 내려놓았다. 이게 웬일인가 싶었다.

“정말입니까. 하긴, 눈의 여왕은 취미로 삼기에는 좀 어두운 이야기긴 하지요. 그래도 갑자기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이유가 궁금하군요.”

“심경의 변화라…….”

내 어깨에 뺨을 문지르며 레이가 웃었다.

“어차피 옛 이야기니까요. 이제는 잊고 떨쳐내야 할 때라고 생각해요. 힘들지만 노력해야죠.”

그 말에 확신이 들어섰다. 역시 내 짐작이 맞았다. 레이의 눈의 여왕 집착은 어린 시절에 당한 학대 때문이었다. 당장 시민묘지로 달려가 다이너마이트로 마라타의 무덤을 폭파해 버리고 싶은 마음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어쨌거나 희소식이었다. 불행한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밝게 살고자 노력하는 건 좋은 태도였다. 나는 소리 내어 웃지 않으려 노력하며 와인을 마셨다. 기분 좋은 취기가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제법 멋지게 마무리된 토요일 밤이었다.

하하하. 이거 정말 근사한데.

목욕을 끝낸 후 침실로 들어갔다. 뒤늦게 피로감이 몰려들었다. 갓전등을 끄려는 내게 레이가 문득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런데요, 메사라.”

“네?”

레이가 침대 옆 테이블 서랍을 열더니 뭔가를 꺼냈다. 한 장의 카드였다.

“여기 가고 싶어요. 데려다 줄래요?”

뭔가 싶어서 카드를 들여다보는 순간 뒤통수가 띵했다. 눈앞까지 아득했다. 레이는 “눈의 여왕 취미를 완전히 정리하고 싶어서”라고 설명했다.

할 수 없이 수락했다. 완전한 정리라고 하지 않는가. 완전한 정리. 그럼 된 것이다. 그러나 오늘로 소렐은 내 혐오인간 리스트에 당당 3위로 등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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