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L. (63/101)

6 ─L.

조용한 오후였다. 차를 끓여 거실 소파에 앉았다.

동거가 일주일째로 접어들었다. 첫날은 생활용품과 식료품을 구입하느라 메사라와 함께 정신없이 마트를 쏘다녔다. 이후 지금껏 집 정리며 청소를 하며 바쁘게 지냈다.

관자놀이를 누르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피곤해…….

사실, 같이 사는 동안 나는 한가하게 지내리라 짐작했다. 그래서 글쓰기를 마음먹었는데, 완전히 깨졌다. 일주일간 글 한 줄 쓰지 못했다. 그만큼 집안일이 많았다.

엄밀히 말하면 내가 자초한 일이었다. 그래. 모두 내가 자초했다.

이곳으로 온 이튿날, 나는 찬찬히 집을 둘러보았다. 메사라 어머님의 감각에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영국풍 실내 곳곳에 직접 만든 조명등, 독특한 프린트의 핑크 커튼, 노란색 앤티크 소파, 고풍스런 소품 등이 눈을 즐겁게 했다. 2층 재봉실의 오리엔탈풍 대형 장롱에는 메사라 어머님께서 직접 만드셨다는 식탁보며 커튼, 침대 커버, 이불 커버 등등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티 포트 컬렉션도 볼거리였다. 메사라의 세련된 감각이 누구에게서 물려받았는지 티 포트 컬렉션을 감상하며 뚜렷이 깨달았다. 그중에서도 코끼리 모양의 산호빛 티 포트가 마음에 쏙 들었다.

정말 예쁘다…… 하며, 별생각 없이 코끼리 티 포트를 슥 만져본 것이 문제였다. 나는 잠깐 말없이 코끼리 티 포트를 응시했다. 손가락이 쓸고 지나간 자국에 드러난 색깔은 산호빛이 아니라, 노란색이었다.

손가락을 쳐다보았다. 시커멨다. 코끼리 옆의 짙은 보라색 티 포트를 손끝으로 훑어보았다. 손자국 아래로 파란색이 드러났다. 그제야 나는 기억해냈다. 메사라는 ‘이 집이 8년간 비어 있었다’고 말했다.

「계절마다 대청소를 하고 벽지도 갈았지요. 며칠 전에도 손수 대청소를 해 뒀습니다. 레이는 석 달간 푹 쉬면서 글만 쓰면 됩니다.」

하고, 유쾌하게 덧붙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메사라 ‘개인적 기준’의 대청소인 것이다. 그리고 ‘개인적 기준’은 75억 세계 인구의 다양한 외모만큼이나 제각각인 법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다시 집을 한 바퀴 돌았다. 커튼을 만져 보고 전등갓도 훑어 보고 양탄자까지 샅샅이 살폈다. 두 시간 뒤 결론지었다. 이 집은 곰팡이와 먼지의 왕국이었다.

메사라가 의외로 위생에 무감각했군.

메사라는 먼지투성이 집에서 내 손을 꼭 잡고, “이 유리정원에서…….” 운운한 셈이다. 기가 막혔다. 하기야 대부분의 남자가 생각하는 대청소란 객관적 기준에 미달되기 마련이었다. 메사라도 먼지떨이나 두어 번 휘두르면 대청소 끝이라고 착각해 버리는 ‘대부분의 남자’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레이 아리사는 그 너절한 부류에 속하지 않았다. 바로 그날부터 대대적인 집안 청소에 들어갔다. 엄청났다. 거실과 주방을 비롯하여 침실 셋, 욕실 둘, 다용도실, 드레스 룸, 온실과 차고까지 갖춘 어엿한 2층 주택이었다. 일하다 보면 땀이 비 오듯 했다.

요새는 아예 알몸으로 돌아다니기 일쑤였다. 이것도 모두 빨랫감을 줄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래도 오늘쯤 되니 차 한잔 마실 여유가 생겼다.

차를 스푼으로 휘저었다. 문득 웃음이 나왔다. 어제, 메사라가 거실에 앉아 있는 나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즐겁게 말했다.

「눈의 착각인가……. 오늘따라 거실에서 빛이 나는 것 같습니다, 하하. 레이가 앉아 있어서 그런가 봐요.」

그건 눈의 착각이 아니라, 내가 열심히 쓸고 닦은 결과라고 말하려다가 관두었다. 그나마 메사라가 소니아처럼 날개가 떨어져나간 큐피드 조각상을 주워 오며 흐뭇해하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역시 연애와 동거는 달랐다. 미처 몰랐던 부분이 확실하게 보였다. 이를테면 메사라의 규칙적인 생활습관이라든가. 변태니까 동거하면 온종일 집 곳곳을 뒹굴며 사람을 더욱 못살게 굴겠거니, 추측했는데, 멋지게 깨졌다.

메사라는 자기 관리가 아주 철저했다. 아침 6시에 기상해 7시까지는 반드시 운동으로 체력을 단련했다. 식단도 빈틈없이 조절했다. 술은 즐기되 폭음은 절대 하지 않았다.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기까지 1분 1초도 낭비하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메사라는 잠을 푹 잤다. 일주일 동안 섹스를 세 번(이것이 제일 의외였다) 했는데, 섹스를 안 하더라도 메사라는 죽은 듯이 잤다.

동거 전, 나는 메사라에게 꿈을 자주 꾸느냐고 살짝 물어보았다. 메사라는 곤히 자는 것이 습관이라 거의 꿈을 꾸지 않거나, 꿈을 꾸더라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라고 답했다. 그 까닭을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그렇건만 그날은 왜 그랬을까. “찰나라도 좋으니 한 번만…… Whitebirch.”라니. 눈앞의 이 다정한 사람이, 때로는 철없는 소년처럼 내게 기대는 저 남자가, 오랜 옛날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습격하듯 되살아날 때면 그저 씁쓸했다.

대체 왜 그랬을까. 그러지만 않았다면, 나도 편한 마음으로 메사라를 사랑할 수 있었을 텐데.

“기가 막힌다, 참 기가 막혀.”

쓰게 웃을 찰나 초인종 소리가 적막을 깨뜨렸다. 나는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황급히 가운을 걸치며 일어섰다.

“누구세요.”

“이웃에 사는 엘리노어 티트마이어 캐슬마인이라고 해요. 편하게 캐슬마인 부인이라고 불러요. 인사나 하려고 들렀답니다. 이건 내가 구운 케이크예요.”

온화한 인상의 노부인이 내게 케이크 상자를 건네며 미소 지었다. 나는 얼른 안쪽으로 손짓했다.

“감사합니다. 저는 레이 아리사라고 합니다. 밖이 추운데 들어오시죠.”

“고마워요.”

캐슬마인 부인이 실내를 둘러보며 들어섰다. 벽에 걸린 사진액자를 찬찬히 훑어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그러네. 포우가 여기로 돌아온 것 맞지요?”

“그를 아시나요?”

“그럼요. 애기 때부터 봐 온 걸요. 포우의 모친인 제니와 나는 오랜 친구였어요. 요즘 이 집에서 불빛이 계속 반짝거리기에 혹시나 해서 왔답니다. 제니와 그 남편이 그렇게 간 후 오랫동안 이 집은 비어 있었거든요. 그럼 레이는 포우의?”

“예.”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가운 차림이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옷을 제대로 입고 문을 열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캐슬마인 부인이 내 손을 잡았다.

“호호호, 보자마자 알았어요. 포우가 딱 좋아하게 생겨서 말이야.”

포우가 딱 좋아하게 생겼다라. 그의 성 정체성이 이웃까지 자자했단 말인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메사라가 꽤 유명했나 봐요?” 했다.

“말도 마시우. 모르는 이가 없었어요. 누구나 인정하는 갱단 보스감이었지요.”

나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모든 이가 인정하는 갱단 보스감이라니. 정확한 예측 아닌가.

“그런데 포우는 뭘 하고 지내요?”

“……그냥 직장인이에요.”

“세상에, 이래서 사람 앞일은 모르나 봐요. 포우가 안정된 직장인이 되어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다니,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그야말로 탕아의 귀환이군요. 아아, 제니가 이걸 봐야 하는데! 서른아홉 살에야 얻은 아이가 너무 속을 썩인다며 얼마나 속상해했는지.”

캐슬마인 부인이 옷소매로 눈시울을 훔쳤다. 부인의 터무니없는 착각에 할 말이 없어서 나는 계속 미소만 지었다.

“그럼 이번 일요일 정오에 포우와 함께 우리 집에 들러 줘요. 점심이나 같이합시다.”

“초대 감사합니다. 꼭 들르겠습니다.”

캐슬마인 부인을 배웅한 후 소파에 앉았다. 다시금 조용해졌다. 침묵이 되돌아온 자리가 해가 진 골목같이 적적했다. 상자를 열어 케이크를 꺼냈다. 막 구워 따끈따끈한 케이크를 한입 베어 물며 천장을 응시했다.

일주일 만인가.

메사라를 제외하면, 일주일 만에 처음으로 주고받은 타인과의 대화였다. 뭔가 아이러니했다. 헌책방을 운영할 때도 이렇게까지 외부와 대화가 없진 않았는데.

부엉이 시계가 다섯 시를 알렸다. 메사라는 뭐 하고 있을까.

근래 정쟁에 관심을 두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지만, 메사라의 기색을 보건대 직장 일은 순탄한 듯했다. 그러나 혹시 몰랐다. 현 구도는 이른바 춘추전국시대라서 돌발변수가 터질 가능성이 컸다. 후임 로터스 푸셔도 겉보기처럼 물렁물렁한 양반이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생각하지 말자.

이제는 떠나간 꿈이다.

그러나 메사라는 정쟁에서 완전히 손을 씻기로 한 내 결심을 믿지 않는 듯했다. 정쟁 관련해서는 사소한 화제조차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뿐인가. 웬만한 채널은 모두 송출되는 이 집 케이블에서 유독 공중파와 뉴스전문채널만은 나오지 않았다. 신문과 인터넷도 마찬가지였다.

동거 첫날, 메사라는 저녁을 먹으며 말했다.

「혼자 외출할 때는 내게 꼭 전화를 주십시오.」

어투는 부드러우나 명백한 명령이었다. 저 모든 의미는 뚜렷했다. 메사라는 나를 사랑하면서도 감시의 고삐를 놓지 않고 있는 것이다. 내가 감수해야 할 부분이었다. 메사라는 가이거 본부장이고, 나는 한때나마 령이었으니까.

그래도 갑갑했다. 그가 내게 품고 있는 경계심이 느껴져서 울적했다.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찻잔을 들고 식당으로 향했다. 요리책을 뒤적거리며 메뉴를 골랐다. 메사라는 입맛이 까다로웠다. 평일 요리를 맡은 나로선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막 재회했을 때에 비하면 메사라의 안색이 많이 좋아졌다. 그동안 어찌 지냈기에 얼굴이 이리도 엉망이냐고 묻자, 메사라는 짤막하게 대꾸했다.

「술만 퍼마셨죠.」

짧지만 많은 의미가 함축된 말이었다. 가슴이 아팠다. 메사라는 나와 헤어져 있는 동안에는 자기관리도 내팽개치고 지냈던 듯했다.

요리 걱정이라.

갑자기 자작나무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지우려 애써도 소용없었다.

우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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