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M─ (62/101)

5 .M─

오늘은 알토넨을 호위하며 연회장을 돌았다. 온갖 귀족들이 앞 다퉈 몰려들어 알토넨에게 손바닥을 비볐다. 악수하는 데만 한 시간을 소요했다.

그동안 내내 미동도 않고 서 있자니 끔찍하게 지루했다. 쿠퍼헤드는 아까부터 어깨를 미세하게 뒤틀고 있었다. 지겨워 죽을 때면 으레 나오는 습관이었다.

“어라.”

쿠퍼헤드가 문득 중얼거렸다. 나도 멈칫했다. 이리나 바르디가 유유히 무도회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게이인 나는 감흥이 썩 없었지만, 쿠퍼헤드를 포함한 무도회장의 스트레이트 사내들은 사정이 달랐다. 단번에 사내들의 시선이 이리나에게 몰려들었다. 이리나가 한 번 웃을 때마다 죄다 빳빳이 굳고 아랫도리를 후들거렸다.

저래봤자 절벽 위에 핀 꽃 아닌가.

나는 속으로 코웃음 쳤다. 그래도 고관대작 나리들께서 일심동체로 침을 질질 흘려대는 꼴은 퍽 장관이었다. 가면 속에 숨은 부장들의 표정도 저들과 별반 다르지 않겠지만.

정력 넘치는 왕비는 귀족도 모자라 왕실 정원사, 마부, 수영코치 등등, 신체 건강하고 물건 커다란 사내는 닥치지 않고 건드렸다. 현재 임신 중인 아이에게도 의혹이 빗발치는 형국이었다. 멍청한 ‘양치기 소년’ 크루거는 최근에야 그 사실을 알고서 깊은 비탄에 빠져들었다. 그즈음 정열적인 붉은 머리 미녀가 왕에게 접근했다.

그녀가 이리나 바르디였다. 오랫동안 독일에서 오빠와 함께 지낸 이리나는 부친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귀국, 사교계에 막 데뷔한 미녀였다. 이리나는 왕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그것이 불과 2주 전의 일이었다.

레오파드가 내 옆구리를 툭 쳤다. 푸셔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문신귀족 최고 미남 영감님답게 오늘도 센스 만점의 로브와 보석을 걸치고, 트레이드마크인 일본식 부채를 우아하게 흔들고 있었다.

푸셔가 알토넨과 악수하며 어깨를 두들겼다. 그렇잖아도 알토넨은 ‘사교계에서 보기 드문 성실한 인상으로 근근이 승부한다’는 조롱 섞인 평을 받던 터였다. 잘생긴 푸셔가 옆에 서 있으니 그 꼴이 비루먹은 당나귀 같았다.

나는 혀를 차며 푸셔와 알토넨을 번갈아보았다. 이거 참, 성형수술이라도 시키든가 해야지…….

푸셔. 마넨의 후임 ‘로터스(Lotus, 문신귀족계급 대표의원)’였다. 푸셔는 드리아스넨, 레빌즈와 함께 마넨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측근이었다. 그러나 마넨의 실각 후 세 측근은 판이하게 명암이 엇갈렸다. 레빌즈는 마넨의 부정축재 행위에 적극 가담한 죄로 수배되어 지금껏 도피 중이었다. 드리아스넨은 일선에서 물러나 은거했다.

덕분에 푸셔는 길거리 굴러다니는 동전 줍듯이 손쉽게 로터스를 차지해 버렸다. 푸셔를 대신할 만한 거물급 원로가 없기도 했거니와, 푸셔의 외모에 열광하는 아주머니·할머니 팬들의 지지가 받쳐 준 탓도 한몫했다. 이후 지금까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푸셔가 알토넨과 악수를 나눈 후 떠났다. 다음 타자로 알토넨에게 다가선 귀족은 칼 바르디였다. 나는 눈초리를 가늘게 떴다.

이거 순번이 꽤 재미난걸. 주류에 이어서 이른바 다크호스의 등장인가.

칼 바르디 공작. 이리나의 오빠였다. 부친의 사망으로 이리나와 함께 귀국, 작위를 물려받고 사교계에 데뷔했다.

이리나는 정부가 되자마자 왕에게 칼을 소개했다. 칼은 금방 왕의 친구가 되었다. 동시에 사교계 최고 인기남으로도 급부상했다. 왕의 정부인 여동생에, 가문 좋고 재력까지 탄탄한 칼에게 이목이 쏠리지 않는 것이 되레 이상할 일이었다. 나와 부장들은 칼을 가리켜 ‘포스트 외척’이라고 종종 빈정거렸다.

바로 저 칼이 오늘의 관찰 대상이었다. 요즘 칼에게 문신귀족들이 슬슬 모여드는 형세였다. 대부분이 마넨에 비해 리더십이 떨어지는 후임 로터스 푸셔에게 불만을 품은 젊은 무리였다.

칼은 자신이 권력에 뜻이 없다고 강조하고 다녔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파티에서 무신, 문신을 안 가리고 어울려 시시덕거리거나 왕과 농담 따먹기를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알토넨까지 칼에게 호감을 품은 눈치였다. 부장들도 칼은 크게 경계할 대상이 아니라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나는 생각이 달랐다. 칼은 중도파로 곱게 머물 작자가 아니었다. 욕심 많은 새끼였다. 늙고 멍청한 크루거의 정부나 하는 누이를 가만히 내버려 두는 꼴만 봐도 수상했다. 뚜쟁이 냄새가 짙게 풍겼다.

나는 눈앞에서 오가는 칼을 훑어보았다. 귀국한 지 얼마 안 된 작자라 사생활은 알려진 바가 없었다. 얼굴은 미남이었다. 아이들에게 친절하고 요리와 미술, 피아노에도 능통해서 귀부인들에게 인기폭발이었다.

알토넨이 와인 잔을 기울이며 칼에게 “어찌 지냈냐?” 했다.

“갤러리나 돌아다녔지. 얼마 전에 반 다이크 경 전시회를 다녀왔는데, 기대에 비해서 영 떨어지더라고. 대표작이 한 점도 없더군. 그래도 그럭저럭 감상할 가치는 있었어. 해리 자네도 한번 가 보지?”

칼이 교과서적인 대답으로 변죽을 울렸다. 알토넨이 “음. 그래볼까.” 하며 웃었다. 나는 그들 뒤를 따라가며 칼과 관련한 정보를 되살렸다. 찜찜한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칼의 외적 조건을 감안하면 무지하게 수상쩍기 이를 데 없었다.

칼에게는 여자친구가 없었다. 여자친구를 만들 노력도 전혀 하지 않았다. 심지어 오입도 하지 않았다. 이게 말이나 될 법한 일인가. 여자들이 남자더러 동물, 짐승, 아메바라고 부르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남자란 종자가 원래 다 그렇고 그런 것이다.

우리는 칼을 게이로 추정했다. 이것도 어렴풋한 추정이었다. 추파를 던지는 게이 귀족들에게도 칼은 나무토막처럼 굴었다. 설마 고자인가.

그렇다면야 죽여주게 폭소감이긴 하다만.

나는 혀를 차며 알토넨의 뒤를 따라갔다. 물론 그건 아니었다. 놈은 단지 섹스 스캔들을 경계하는 것뿐이었다. 국민들은 섹스 스캔들에 병적으로 중독되어 있었다. 나 역시 섹스 스캔들을 즐겨 터뜨렸다. 투자 대비 수익률이 높고 재미도 쏠쏠했다.

뭐, 놈도 조만간 본색을 드러내겠지.

별안간 칼이 우뚝 멈춰 섰다. 놈의 시선이 향한 곳은 한 무리의 어린아이들이었다. 부모에게 억지로 끌려와 한구석에 모여 우울하게 과자나 먹는 어린아이들은 파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칼이 싱긋 웃더니 아이들에게로 다가갔다. 아이들에게 친절하다는 정보가 맞긴 하나 보네, 하며 나는 칼을 무심히 응시했다.

“심심하지? 피아노나 쳐 줄까?”

칼의 말에 아이들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칼이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피아노를 디리리잉 쳤다. 귀부인들의 이목이 일제히 칼에게로 쏠렸다. 무신귀족 마누라, 문신귀족 마누라 가리지 않고 감동에 젖은 기색이었다.

나는 픽픽 웃었다. 인기 끄는 수법도 참 가지가지로군…….

칼이 우아하게 건반을 두들겼다. 계속 두들겼다. 끝날 낌새가 안 보였다. 졸지에 알토넨의 파티가 칼의 피아노 콘서트로 전락하고 말았다. 연주가 형편없으면 모르되 피아니스트 뺨치는 솜씨라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제지는커녕 곡이 끝날 때마다 “브라보오오”, “앙코르으” 함성이 빗발쳤다. 칼도 이제 아이들을 위로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예술에 한껏 심취한 면상이었다. 어깨를 미친 듯이 들썩거리며 피아노를 둥당둥당둥당당당당당당당 두들겼다.

본능적인 공포감이 온몸을 치달았다. 설마 했는데 세 시간 넘게 콘서트는 계속됐다. 그렇잖아도 멀미만 넘어오는 파티가 무려 두 시간이나 더 끌었다. 파티가 끝날 때까지 알토넨 뒤에서 꿈쩍도 않고 서 있었다. 엿 같았다. 그날 나를 포함한 부장 전원이 피아노 증오자로 탈바꿈하여 퇴근했다.

깨끗이 단정했다. 칼은 개새끼였다.

퇴근 후 《푸른 피》 파일을 노트북으로 실행했다. 이틀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오늘에야 프로그램을 볼 짬이 났다. 《푸른 피》 타이틀이 뜨면서 설명자막이 함께 나왔다.

「푸른 피: 귀족을 가리키는 표현. 스페인에서 유래했다. 스페인 귀족들은 북유럽 궁정과 혼인관계가 많았기에 피부색이 유난히 엷었다. 피부가 희면 푸른 동맥이 드러나 보인다. 그래서 시커멓게 탄 농부들은 귀족들의 정맥에 파란색 피가 흐른다고 믿었다고 한다.」

바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역시나 눈의 여왕 관련 프로그램이었다. 10분 만에 졸음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눈의 여왕뿐이면 몰라, 거미줄처럼 복잡한 데이탄즈 왕정계보 해설이 러닝타임의 태반을 채웠다.

레이가 눈의 여왕 팬이라는 사실만 절절이 실감하고 끝났다. 빌어먹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동거가 시작되었다. 레이의 살인적인 요리솜씨만 제외하면 무척 만족스러웠다. 퇴근하면 쏜살같이 집으로 달려가 시간을 보냈다.

온실에 꽃씨를 뿌리고, 식사를 같이하고, 대화를 나누고, 거리를 산책하고, 섹스를 했다. 그 모든 것을 레이와 함께했다. 그동안 머릿속으로만 펼쳐온 망상을 맘껏 실현하는 나날이었다. 행복했다. 온 세상이 내 것 같았다.

레이는 동거 기간에 령의 주술법 중 민간요법과 식물 효능에 관하여 책을 집필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열렬하게 박수를 치며 “좋은 생각입니다! 멋진 생각입니다!”를 연발했다.

진심이었다. 령의 주술법이라도 대중에게 공개할 내용이면 ‘배탈이 나면 개구리를 갈아 먹는다’ 정도 아니겠는가. 무엇보다 레이는 눈의 여왕 탐구 같은 꿀꿀한 취미보다 밝고 창조적인 일에 몰두할 필요가 있었다. 그날로 나는 레이에게 최신형 노트북을 선물했다.

레이는 지나가듯 말했다.

“이왕 하는 거, 많은 이에게 도움이 되는 악당이 되는 게 좋을 거예요.”

내 직업에 대한 충고로 심중에 새겼다. 많은 이에게 도움이 되는 악당이라……. 퍽 신선한 발상이었다. 지나치게 이상적이지도 않아서 마음에 들었다.

레이는 내 직장을 싫어한다고 처음부터 밝혔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내게 직장을 관두라고 강요할 수는 없을 것이다. 타고난 사디스트 포우 메사라는 본능을 합법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가이거 본부장직을 포기할 수 없었다. 절대 불가능했다. 그건 홈즈더러 머리 굴리지 말라는 말과 마찬가지였다.

천천히 생각하기로 했다. 검은색이 단박에 흰색으로 탈바꿈하기란 어려운 법이다. 흰색이 될 마음도 없었지만, 일단은 레이가 내게 타협의 태도를 보인 것만으로도 수확이었다.

아니, 수확을 능가했다. 직장에서 신나게 일하고, 사생활에서는 아름다운 연인의 품에 안기는 나날이었다. 포우 메사라의 인생이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 것이다. 그것도 끝내주게 멋진 전기였다. 이 얼마나 근사한가. 하하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