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L. (61/101)

4 ─L.

겨울 동안 당신과 이 유리정원에서 지내고 싶습니다.

메사라의 말을 곱씹으며 오후를 보냈다. 생애 최초로 생일축하 선물을 받은 이튿날, 메사라가 뒤뜰의 온실로 나를 데리고 가서는 말했다. “겨울 동안 당신과 이 유리정원에서 지내고 싶습니다.”라고.

유리정원에서 함께 지내고 싶습니다.

구애할 때 흔히 쓰는 표현이었다. 겨울이 1년의 반을 차지하는 왕국에서는 대개의 저택이 온실을 갖추고 화초와 푸른 나무를 키웠다. 왕국사람들은 그 온실을 ‘유리정원’이라고 불렀다.

메사라의 정원은 오랫동안 비워 놓은 탓에 투명한 유리를 소복소복 덮는 하얀 눈꽃밖에 없었다. 그곳에서 메사라는 내 어깨를 잡고 말했다.

사랑합니다.

그가 나를 끌어안으며 재차 말했다. 사랑한다고.

멀거니 창밖을 응시했다. 결국은 승낙했다. 어쩐지 메사라의 꾐에 넘어간 기분이었지만,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2주 만에 동거로 돌입하다니.

쓰게 웃으며 차를 마셨다. 내가 동거를 망설였던 이유는 자작나무 때문이었다. 아직도 내게 집요히 손짓하는 자작나무 때문에, 혹여 해묵은 증오가 다시금 날카로운 어금니를 드러낼까 무서웠다.

붉은 고기는 시간이 지나면 검은색으로 부패한다. 그처럼, 내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희기만 한 자작나무를 흑색 거룻배에 태워 떠나보내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천천히, 차분하게 메사라와 만나며 서로를 더 알아보고, 관계도 깊이…… 이것이, 내 애초 계획이었다.

그랬는데 고작 2주 만에 이렇게 되어 버리다니.

어딘지 멍했다. 공중전화 박스에서 나는 메사라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아직도 내게 마음이 남아 있느냐고.

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제 모든 것은 당신이 가져갔습니다. 마지막까지 당신에게 제 모든 것을 바칠 겁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확신에 찬 음성이었다. 전화선의 지직거리는 소음도, 공중전화 박스를 두들기는 난폭한 바람도, 목소리에서 풍기는 그 열기는 지우지 못했다.

영원한 사랑……. 아직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다. 자작나무는 데이탄즈에게 모멸당했고, 레이 아리사는 부모에게 버림받았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흔들림 없이 뇌까렸다. 사랑은 없어, 하고.

그랬건만 메사라를 만나 이렇게 되었다. 영원까지는 모르겠으나, 내게도 매우 깊은 감정인 것만은 분명했다. 어쨌든 지금은 여기까지 왔다.

그럼, 어디까지 갈까. 이 시간이 언제까지 지속될까.

두려웠다. 믿을 수 없으리만치 행복한 와중에도 언뜻언뜻 드는 이 생각에는 자꾸만 움츠러들었다. 나는 손끝으로 찻잔 가장자리를 느릿느릿 문질렀다.

자꾸만 자작나무 탓으로 몰아세우는 감이 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잿더미에 파묻힌 불씨처럼 은밀히 반짝거리는 이 의심은, 자작나무에게서 비롯된 바가 컸다.

메사라는 곧 시작될 동거에 들뜬 기색이었다. 그는 우리의 미래에 어떤 불안도, 의심도 품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혹시 몰랐다. 사랑과 동거는 다르지 않을까. 오랫동안 연애한 커플이 정작 결혼 후 몇 달 만에 깨지는 것은 흔해 빠진 일이었다. 어쩌면 석 달 뒤, 우리도 “내 눈에 뭔가가 씌었던 게지!” 하고 치를 떨며 각자 짐을 꾸릴지도 몰랐다.

관자놀이를 억누르며 상념을 떨쳐냈다. 정신 차려, 레이 아리사. 현재에만 충실하기로 누차 결심했잖아. 즐거운 생각이나 하자고.

메사라는 고약한 섹스취미만 제외하면 좋은 연인이었다. 쉴 새 없이 이벤트를 만들어 나를 즐겁게 해 주려 노력했다. 솔직히 나 같은 가난뱅이에게는 아까운 사람이었다.

도대체 내 어디가 좋은 거지.

성격 때문은 아니리라 보았다. 나는 말재주가 모자랄뿐더러 재치도 부족했다. 내가 봐도 심심하고 재미없었다. 그럼 용모 때문일까.

창문에 비치는 나를 응시했다. 금발에 푸른 눈동자의 전형적인 북구 미인이었다. 줄기찬 두더지 생활 덕분에 피부도 유난히 희었다.

하지만 멍청해 보인다…….

나는 뺨을 긁적거렸다. 예쁘긴 하되 명석한 인상은 아니었다. 설핏 내리깐 속눈썹 그림자 때문인지 무척 멍해 보였다.

눈동자 색깔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순도 높은 울트라마린이었다. 19세기 유럽 화가들은 빛나는 색깔을 천박하게 여겼다. 그 탓에 당시 그림에서 순수한 울트라마린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뭐, 유행은 유행일 뿐이지만.

메사라에게 직접 물어볼까.

나는 미소 지었다. 부드러운 충만감이 온몸을 감쌌다. 포근하고 기분 좋은 느낌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기쁨이란 이 얼마나 신기한 감각인가.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 어딘지 붕 떠 있는 듯한 이 감각은, 마법과도 비슷했다. 지금 다시 누리는 이 느낌만으로도, 용기를 내서 공중전화박스에 들어간 것은 잘한 일이었다.

한편으론 꽤 바보 같았다. 손님이 뜸한 요즘 내가 가게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카운터에 애벌레처럼 늘어져 메사라나 생각하는 것이 전부였다. 가끔 창문을 쳐다보면, 멍청한 표정으로 턱에 손을 괸 채 메사라아, 한심하다 한심해, 하며 흥얼흥얼하는 레이 아리사가 보였다. 끔찍하게 맹해 보였다.

그렇지만 끝없이 돌이켜도 재미나기만 했다. 만남을 거듭하며 그를 깊이 알아 가는 시간이 즐거웠다. 미처 모르던 부분들을 깨닫는 이 시간이 행복했다.

저번 수요일, 메사라와 길을 걷다가 나는 이런 질문을 했다.

「왜 머리를 넘기고 다녀요? 앞머리를 내리고 다니는 편이 더 어울리는데.」

메사라가 웃었다.

「그렇게 보입니까.」

「예. 머리를 넘기면 단정하긴 하지만 인상은 차가워 보이거든요. 눈동자 색깔까지 회색이라서 접근하기 어려워 보여요.」

「그래서 언제나 넘기고 다니는 겁니다.」

「일부러 차갑게 보이려고 넘긴다는 뜻?」

「예. 내 동료들은 하나같이 시끄럽고 시건방지거든요. 조금만 부드러워 보이면 당장 맞먹으려고 들어서 말입니다. 레이도 알 것 같은데요. 금발은 오해를 사기 쉽죠. 경박하고 멍청하다고 제멋대로 단정하기 일쑤더군요. 한때 머리를 염색할까 고려한 적도 있어요.」

「그랬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메사라가 의외로 용모에 불만이 있었구나…… 싶어서 웃음이 나왔다. 한편으로는 섬뜩했다. 동료들과 화합이 좋거니 하고 단순하게만 생각했는데, 실은 노련히 그들을 통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료들에게 메사라는 어떤 사람일까. 이것도 궁금했다. 스네이크를 돌이켜 보면, 내게 보여 주는 다정하고 유쾌한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그때 그는 단지 ‘채찍으로 모든 걸 말하는 사나이’였다. 동료들 앞에서는 과묵하고 냉정한 리더일 뿐인 것일까.

역시 특이한 사람이었다. 그 직후에 일어난 일을 돌이켜 보면 더 그랬다.

「이 오렌지 어때요?」

메사라가 길거리 과일상점 좌판에서 오렌지를 골라 내밀었다. 나는 향기를 맡아보며 「좋군요.」 했다. 메사라가 오렌지를 여러 개 사서 상점을 떠났다. 별생각 없이 메사라를 따라 걷는데 그가 갑자기 내 옆구리를 꽉 잡았다.

「왜 그래요?」

그러자 메사라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당신 젖꼭지를 빨고 싶습니다. 지금 당장이요.」

「……예?」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곧바로 메사라가 나를 붙들고 눈앞의 건물로 들어갔다. 삽시간에 건물 화장실 칸까지 끌려갔다.

「자, 잠깐. 집까지 금방이에요.」

「여기까지 왔는데 조금만 빨고 가죠.」

메사라가 표정 하나 안 바꾸고 내 상의 단추를 풀었다. 속수무책으로 그의 허벅지에 걸터앉혀진 채 가슴을 빨렸다. 당혹스럽기 짝이 없었다. 집요한 애무에 나중에는 나도 흥분해 버렸지만. 메사라는 오럴섹스도 요구했다.

「나도 빨아 줬으니 당신도 해 줘요. 내 좆 빠는 거 좋아하잖아요. 어서.」

참 창피하게도 그런 말을 대놓고 했다. 아무튼 그날 일로 똑똑히 깨달았다. 메사라의 성욕은 때는 물론이고 장소도 가리지 않았다. 정말이지 난잡했다.

그런데 내가 페니스 빠는 걸 좋아하나? 그렇게 보이나?

문득 드는 의문에 나는 미간을 모았다. 그런가……?

빠는 것에 거부감은 없었다. 정액을 삼키는 것도 싫지는 않았다. 애널섹스보다는 오럴섹스가 만족감도 높은 편이었다. 그러고 보니 메사라는 애널섹스 도중에도 “이런 거 좋아하죠? 빨고 싶죠?” 하면서 종종 내 입으로 성기를 들이밀었다. 메사라의 눈에는 대체 내가 어떻게 보이는 것일까. 나중에 한번 물어볼까.

창밖을 쳐다보았다. 메사라의 청을 수락하되 사흘간 말미를 달라고 했다. 습기 탓에 며칠만 내버려 두어도 책이 상하기 일쑤였다. 사흘간 실내를 최대한 건조시킨 후 닫을 생각이었다. 어딘지 우울했다.

석 달 뒤 내가 이곳에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하나만은 뚜렷이 알았다. 메사라는 내가 헌책방을 걷어치우기를 원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내 가난을 싫어하는 티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사람이었다. 메사라 입장에서는 그런 바람이 당연할 터였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내가 메사라를 받아들인 것은 레이 아리사로서 남은 시간을 채우기 위한 과정의 하나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내 꿈을 실현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지금 나는 주술과 이별을 고했다. 거기에서 찾을 꿈은 이제 더는 없었다.

그나마 남은 것이 이 헌책방이었다. 얼음장보다 시린 복수의 길목에서 나를 지탱해 준 곳이었다. 이곳을 포기할 의향은 없었다. 메사라는 이 헌책방을 궁상으로만 치부하겠지만, 나는 내 직업을 부끄러워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잔을 내려놓았다.

천천히 메사라를 이해시키자.

동거 기간에 나는 책을 쓸 생각이었다. 글쓰기가 바로 헌책방을 운영하면서 막연히 키워온 꿈이었다. 알고 있다. 상상력 제로, 재치 제로, 감수성 제로인 레이 아리사에게 소설이나 시 쓰기는 어림도 없었다.

내가 쓰고 싶은 책은 실용서적이었다. 령은 주술뿐 아니라 민간요법이나 식물의 효능도 두루 공부했다. 이런 부분은 공개해도 괜찮을 듯했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도 될 것 같았다. 물론 이 원고가 출판사에 팔릴지는 의문이지만.

갑자기 방울이 치링치링 울렸다. 나는 퍼뜩 생각에서 벗어났다.

“어서 오세…….”

인사를 하다가 멈칫했다. 토요일의 그 불청객이었다.

사내가 헛기침하며 가게를 둘러보았다. 나는 챙겨 놓은 지팡이를 들었다.

“전에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이거 가지러 오셨죠? 고급제품 같아서 챙겨 두고 기다렸습니다.”

지팡이를 건네며, 나는 사내의 뺨에 찍힌 붉은 입술 자국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사내가 “감사합니다.” 하며 지팡이를 받아들었다. 립스틱 자국을 추호도 눈치 못 채는 기색이었다. 지적해줄까 하다가 관둬 버렸다. 여기는 42번가였다.

사내는 눈길을 여기저기 돌리며 도통 나가지 않았다. 행태가 퍽 수상쩍었다. 나는 안색을 딱딱하게 굳혔다.

“왜 그러십니까, 손님. 용무가 없으면 나가 주십시오.”

“그게, 별건 아니고. 궁금한 게 있어서 말입니다.”

“궁금한 거라니요.”

“이 가게 말입니다. 그러니까…… 가게 이름이요.”

나는 잠깐 침묵했다.

“……제 헌책방 이름 어디가 궁금하다는 겁니까.”

“왜 이런 이름을 지었는지 궁금해서요. 《황무지에는 반지가 없다》 말입니다. 혹시 역사에 관심이 많으십니까?”

“제가 지은 이름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군요. 이 가게 간판은 전대 주인에게서 물려받은 겁니다. 그분이 역사에 꽤 관심이 많아 보이긴 했습니다만.”

“아…… 그렇군요. 그럼 저기, 혹시.”

“예.”

“전대 주인께서 자작나무에게 관심이 많았습니까. 특히 결혼반지에요.”

“모르겠는데요.”

나는 잘라 말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아저씨 참 특이하네…… 하고 뇌까렸다.

사실 헌책방 이름은 내가 지은 것이었다. 충동적으로 지은 이름이라서 이제껏 별반 신경 쓴 적은 없었다.

“자작나무에게 흥미가 많은가 보죠.”

“예? 예. 그쪽은요?”

“뭐, 그럭저럭. 한데 특이하시네요. 자작나무의 반지에 흥미를 보이는 분들은 드물던데요. 보통은 왕의 묏자리나 왕실 시종장 사건에 관심을 기울이던데.”

“사람마다 관심사가 다르니까요. 저는 보석에 흥미가 많거든요.”

사내는 어느새 책장을 찬찬히 훑어보고 있었다. 화집들 중에서 「유럽 왕실의 여인들」을 뽑아들며 손짓했다.

“이리 와 보세요.”

마침 심심하던 터라 나는 사내에게 다가갔다. 사내가 자작나무 페이지를 펼쳐들었다.

“자작나무가 낀 사파이어 반지 보이죠? 사파이어는 약혼예물이나 결혼반지에 흔히 쓰이는 보석입니다. 영국왕실 여인들은 지금도 결혼식 때 사파이어 반지를 끼고 파란색 물청개꽃 부케를 든답니다. 그러나 옛날엔 달랐죠. 16세기에는 몹시 부유한 사람들만 사파이어 반지를 낄 수 있었어요. 속칭, 제왕과 마리아의 보석이었죠.”

“그렇군요. 보석에는 관심이 없어서 잘 몰랐네요.”

나는 시큰둥이 대꾸했다. 멋쟁이 메사라와 달리 레이 아리사는 옷은 물론이고 보석에도 흥미가 없었다. 재미난 이야기네, 하다가 일순 멈칫했다.

메사라가 생일선물로 건넨 목걸이가 눈앞을 스쳤다. 그것도 사파이어 목걸이였다. 약혼예물이나 결혼반지에 흔히 쓰이는 보석…….

메사라는 보석에 관심이 많았다. 사파이어의 의미를 모를 리 없었다. 갑자기 낯이 달아오르고 가슴이 뛰었다. 진정하려 애쓰며 허둥지둥 말을 늘어놓았다.

“그, 그런데 손님이 그 반지에 흥미를 보이는 까닭이 궁금하군요.”

사내가 미간에 주름을 세우며 침묵했다. 저 표정만 보면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뺨의 립스틱 자국 때문에 뒤샹의 코믹한 패러디로만 보였다.

웃음을 참는 내 앞에서 사내가 느릿느릿 말했다.

“왕의 결혼식은 왕실의 권위를 과시하고자 반드시 화려하게 치렀던 만큼, 결혼패물도 모두 훌륭한 예술품이었다고 합니다. 이 반지는 그중에서도 으뜸이었어요. 그런데 자작나무에게서 압수한 결혼패물 중 하필 이 반지만 없었죠.”

“아아, 그랬죠. 그래서 왕이 자작나무의 모친을 불러서 펄펄 뛰었죠. 아하하.”

나는 조금 차갑게 웃었다.

“그 왕이 모친에게 다그치길, 반지를 끼고 있는데 시체를 그대로 황무지에 매장했냐고……. 혹시 시체에서 반지를 빼내 훔쳤다면 당장 내놓으라고 했다지요. 그래서 손님이 이 가게 이름에 흥미를 보이신 것?”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사내가 웃었다.

“가게 명칭이 특이하게 느껴지더군요. 황무지에는 반지가 없다. 자작나무가 처음부터 반지를 끼지 않았다는 의미로 보여서 말입니다.”

“그랬군요. 뭐, 어쩌면 자작나무를 고문한 고문관이 반지를 훔쳐갔을 수도 있지요. 비싼 보석이라면서요.”

“껄껄껄. 어쨌든 데이탄즈는 빌어먹을 자식입니다.”

“예. 빌어먹을 자식 맞아요.”

나는 웃으면서 수긍해 주었다. 사실 그 짤막한 사건도 내 의심을 부채질하는 에피소드들 중 하나였다.

반지 사건은 초상화가 공개되고 석 달 뒤 일어났다. 모친은 자작나무를 손수 묻어 준 유일한 가족이었다. 데이탄즈에게 양심이 있다면 반지 내놓으라고 입에서 불을 뿜을 것이 아니라, 자작나무의 모친에게 사과를 했어야 했다.

“그런데 남자친구가 그쪽을 많이 아끼나 봐요.”

“예?”

나는 고개를 들었다. 사내가 내 목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그제야 셔츠 칼라 밖으로 목걸이가 설핏 드러났음을 깨달았다. 나는 급히 칼라를 여몄다.

“아. 값어치가 썩 나가는 물건은 아닙니다.”

“아닌 것 같은데. 이탈리아의 유명 보석 디자이너 비아지니의 작품 같은데요. 지중해를 모티브로 한 물결무늬도 그렇고. 올 여름에 선보인 최신작 「6월의 푸른 바다」 같습니다만? 혹, 걸쇠에 브이 이니셜이 새겨져 있지 않습니까?”

설명이 청산유수였다. 나는 “그렇습니까.” 하고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기가 막혔다. 메사라가 또 거짓말했구나.

“역시 보석에 관심이 남다르시네요. 그렇지만 잘못 보셨습니다. 그는 말단 가이거 대원이고, 재력도 변변찮아요.”

“음. 하긴, 그 보석을 제대로 사려면 오십만 탈란텐은 줘야 하니까. 남자친구 마음이 아주 깊은가 봅니다. 위조품이라도 이런 선물을 한 걸 보면. 보석을 좀 볼 줄 아는 저도 잠깐 속을 만큼 잘 만들었군요.”

오십만 탈란텐. 고급주택 두어 채는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목이 갑자기 엄청나게 무거워졌다. 공포감까지 들었다. 이곳은 백주에도 살인강도가 횡행하는 42번가였다.

돌연 휴대전화가 울렸다. 사내가 “오, 여보.” 하며 허겁지겁 휴대전화를 들었다. 나는 다시 한번 사내의 뺨을 응시했다.

“으응. 고, 곧 가겠소. 친구 생일파티가 생각보다…… 시간을 많이 끌더구려.”

통화를 마친 사내가 지팡이를 들며 옷매무새를 고쳤다.

“이만 가야겠습니다. 대화 즐거웠습니다.”

“심심하던 참에 저야말로 재미있게 시간을 보냈는걸요. 저기, 그런데. 그 왼쪽 뺨 말인데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검지로 창문을 가리켰다. 창문으로 맹하게 눈길을 주던 사내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

“아, 아니, 이, 이건. 그, 그러니까, 나는 단지 그냥 여기 노, 놀러 와, 왔는데. 예, 예전엔 여, 여기가 사창가가 아, 아니었거든요. 그냥 써, 써, 썰렁한 허, 허, 허, 허허벌판이었는데, 그, 그것만 기억하며 왔다가 노, 놀랐지 뭡니까. 차에 내리자마자 여자들이 사방팔방에서 나를 잡아끌며 키스를 해대서 어, 어찌나 노, 놀랐는지.”

사내가 뺨을 벅벅 문지르며 속 보이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손님 옷차림이 워낙 고급스러우니까요. 여자들이 오해할 만도 하죠.”

나는 짐짓 속아 주는 척했다. 사내가 멋쩍게 고개를 숙이다가 대뜸 포켓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이건 보답입니다. 시간 나면 한번 들러 주시지요.”

“예? 아…… 예. 감사합니다.”

사내가 떠난 후 카드를 열어 보았다. 파티 초대장이었다. 간단한 약도와 타이틀이 적혀 있었다. 《소렐의 가면무도회》. 일시는 2주일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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