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M─
“강간이라니. 그 영감탱이가 사람을 어찌 보고.”
나는 연신 분통을 터뜨렸다. 돌이킬수록 부아가 치솟았다.
강간이라니.
가이거 본부장으로 승진하자마자 내가 취한 조치는 성범죄 전과가 있는 대원들을 해고한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성범죄 전과가 있는 자는 아예 대원으로 채용하지 못하게끔 정했다. 일과 섹스는 멀수록 이롭다. 내 개똥철학이었다. 바로 그 구레나룻이 내 개똥철학을 훌륭히 증명하고 비명에 갔다.
강간은 못생긴 무능력자나 저지르는 짓거리였다. 자고로 능력 있는 남자는 강간을 저지를 필요가 없는 법이다. 암만 사디스트라지만 내게도 나름의 자부심은 있었다. 타고난 살인의 재능을, 밤거리나 어슬렁거리며 무력한 창녀들만 골라 살해한 잭 더 리퍼식으로 낭비할 의향은 추호도 없었다. 3류 살인마로나 끝낼 생각이었으면 애당초 정쟁판에 비비지도 않았다.
나는 핸들을 톡톡 두들기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새 레이는 곯아떨어져 있었다. 차도가 끔찍하게 막혔다. 목적지까지 얼추 두 시간은 걸릴 듯했다.
그런데 그 양반이 거긴 웬일이지.
타넬리 소렐. 일명, ‘오후의 정사’를 망쳐 놓은 주범이었다. 열이 바짝 오른 와중에도 어안이 벙벙했다. 저 양반이 무슨 용무로 사창가의 헌책방에 납셨나 싶었다. 그도 모자라 강간사건의 증인이 되어 주겠노라며 가게로 되돌아왔다?
과연 희한한 양반이로군.
타넬리 소렐, 54세. 왕국 최고의 석유왕이자 보석상이며 미술상. 1년의 태반을 독일에서 거주하고, 매스컴을 극도로 기피하는 성격으로 유명했다. 극좌파로도 명성을 떨쳤다. 외국에서는 일반적으로 공산주의자나 노동운동가를 극좌파로 치지만, 왕국에서는 군주제 폐지론자를 뜻했다. 소렐은 왕국 최대 규모의 군주제 폐지단체 ‘프리버드’에 매년 거액을 기부하는 큰손이기도 했다.
이 많은 직함도 모자라 부업으로 동화책 작가도 겸한다고 했다. 한마디로 괴짜였다.
며칠 전만 해도 나는 소렐의 면상조차 알지 못했다. 가이거 본부장직은 군주제 폐지론자 따위에게 신경 쓸 만큼 한가한 자리가 아니었다. 닷새 전, 왕실주재 파티에 참석하지만 않았다면 나는 소렐의 코 옆에 사마귀가 있다거나, 라틴댄스의 고수라는 사실 등도 평생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나는 레이를 곁눈질했다. 어김없이 입을 헤 벌리고 자고 있었다.
우연치고는 희한한데…….
닷새 전의 그 파티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접했다. 알토넨 뒤에서 귀족들의 대화를 들어보니 소렐이 왕실주재 파티에 참석한 이유가 희한했다. 다름 아닌 눈의 여왕 초상화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눈의 여왕 초상화는 오랫동안 왕실 소장품이었다. 왕실 소유의 수많은 미술품 중에서도 최고가를 달리는 인기작이었다. 그것을 소렐이 오랜 로비를 들여 손에 거머쥐었다는 것이다. 격렬한 군주제 폐지론자가 하필 왕비의 초상화를 탐내다니 의아했다.
「그 이유는?」
내가 묻자, 쿠퍼헤드가 대답했다.
「16세기에 눈의 여왕 초상화를 그린 궁정화가가 바로 소렐의 선조거든. 궁정화가 마그소 소렐. 뭐, 재산적 가치도 막대한 작품이니까.」
「그렇군.」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고는 소렐에 대한 관심을 깨끗이 끊어 버렸다. 눈의 여왕 초상화를 핑계 삼아 레이와 왕궁 데이트나 하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구나, 잠깐 아쉬워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저 양반이 레이의 가게로 납셨다?
어째 찝찝했다.
뭐…… 오입을 하고 싶으셨나 보지. 그러다가 레이의 헌책방에 우연히 들렀을 테고.
앞에서 차 행렬이 움직였다. 나는 급히 핸들을 잡았다.
예상이 적중했다. 목적지까지 두 시간이나 걸렸다. 하여간에 뭔가가 이상하게 안 풀리는 하루였다.
나는 레이를 흔들어 깨웠다.
“다 왔어요. 이만 일어나죠?”
레이가 눈을 부스스 떴다.
“……여긴 어디예요?”
“어디긴요. 내 집입니다. 그것도 특별한 집이죠.”
“특별한?”
레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집을 응시했다. 흰 벽에 검은 지붕을 두른 오스트리아풍의 아담한 2층 주택이었다.
나는 레이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갔다. 작전 시작이었다.
레이가 실내를 둘러보며 말했다.
“확실히 특별하긴 하군요. 당신의 집 같지 않네요.”
당연하지.
나는 어깨만 으쓱거렸다. 레이의 말대로 이 집은 치부의 제왕 스네이크에게 전혀 걸맞지 않았다. 모든 면에서 평범한 중산층 가족에게나 어울릴 소박한 집이었다.
레이가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벽에 걸린 사진액자들을 훑어보기도 하고, 앤티크 소파에 덮인 체크무늬 천을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이 정도면 제법 괜찮은 반응이었다. 나는 지그시 웃었다.
레이가 체크무늬 천을 손으로 쓸며 머뭇머뭇 말했다.
“이 집, 혹시.”
“예. 양친께서 남기신 집입니다. 스무 살 때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역시 그렇군요. 저걸 보고 알았어요.”
레이가 벽에 빼곡히 걸린 사진액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사진 속에서 유아기부터 스무 살까지의 내가 양친이나 친구들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레이에게 이미 털어놓았지만, 나는 어린 시절부터 못 말리는 악당이었다. 사진에도 그것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대부분 상처투성이 얼굴로 씨익 웃고 있었다. 내가 봐도 참 흉악무도했다. 나를 빼닮은 아들놈 낳을 일 없는 게이라서 천만다행이었다.
레이가 액자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나는 레이를 뒤따라가며 소리 없이 웃었다.
레이는 고아였다. 그런 만큼 가정의 안온한 분위기에 쉽게 무너질 확률이 높았다. 고로, 가족의 온기가 고스란히 간직된 이 집으로 데려와 확실하게 그를 녹인다, 그런 다음 올해 겨울은 이곳에서 같이 보내자고 설득한다……. 이것이, 내가 짠 시나리오였다. 일명 ‘홈, 스위트 홈’.
괜찮았다. 11년간 음모 짓으로 잔뼈가 굵은 놈이 이 정도도 해치우지 못하겠는가. 특별한 집 운운도 괜한 소리만은 아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님 사후 3년까지 줄곧 살아온 집이었다. 부장으로 승진해 호화 아파트로 이사한 뒤에도 팔지 않고, 1년에 두 번씩 직접 대청소를 하고 관리하리만치 이곳을 아꼈다.
단칼에 동거를 거절당한 뒤, 이 난국을 어찌 타개하나…… 궁리하던 와중에 영감이 탁 떠올랐다. 이 집은 본부에서 45분 거리였고 전망도 아늑했다. 곧바로 인테리어와 경비업체에 의뢰하여 낡은 부엌시설과 가전제품들을 교체하고, 경비시스템도 구축했다. 손수 대청소를 하여 준비를 마무리한 때가 사흘 전이었다.
징조가 좋았다. 레이가 미소를 지으며 가족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두 번째 찌를 던졌다.
“내 방을 구경하겠습니까.”
레이를 데리고 2층의 내 방으로 갔다. 벽에 온갖 프로레슬러와 권투선수 사진걸개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바닥에는 농구공을 포함한 갖가지 스포츠기구가 너절하게 굴러다녔다. 책장에는 만화책과 탐정소설들이 가득했다. 오디오 근처에는 시디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와아. 추리소설에 취미가 있을 줄은 몰랐군요.”
헌책방 주인답게 레이는 책부터 살펴보았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사흘 전 대청소할 때 게이잡지를 모조리 모아 뒷마당에서 불살라 버리길 잘했다 싶었다.
나는 14세에 부모님께 커밍아웃한 후 어머니가 울든 말든 집으로 반반한 녀석들을 끌어들여 신나게 굴러먹었다. 게이잡지는 숫제 대놓고 구독했다. 물론 이 불효하고 추접한 과거는 레이에게 털어놓지 않았다. 평생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나는 세 번째 찌를 던졌다.
“고등학교 졸업앨범이나 한번 볼래요?”
레이와 앨범을 구경했다. 레이는 프롬 파티 때의 내 행색에 박장대소했다.
“당시의 십대들에겐 돌풍적인 유행이었죠. 이 꼴로 나가려는 내게 아버지가 한마디 하시더군요. 얘야, 그 무슨 끔찍한 꼴이니? 하고요. 나는 속으로 아니, 저 영감이 웬 헛소리야? 하고 투덜거렸죠. 1년 뒤, 나는 함께 사진을 찍은 여자가 불쌍해졌습니다. 이런 옷을 입은 사내와 프롬 파티 기념사진을 찍다니, 그 여자는 남편에게 평생 고등학교 졸업앨범을 숨기고 살아야 할 겁니다.”
“아하하. 지금의 당신과 완전히 다른데요. 옷에 신경 많이 쓰잖아요.”
“신경을 쓴 게 이런 꼴이었죠. 뭐, 숱한 유명 디자이너들도 젊은 시절에는 번쩍거리는 전구로 스커트를 만들지 않습니까. 일종의 시행착오였죠.”
“아하하.”
레이가 눈물을 닦으며 웃었다. 나는 참지 못하고 슬쩍 레이의 입술에 키스했다. 아랫도리가 흐물흐물 녹았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 홀딱 벗겨 깔아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인내해야 했다. 지금은 경건히 금욕해야 했다. 벌써 본색을 드러냈다간 골 넣기도 전에 필드에서 퇴장당하는 꼴을 자초하는 격이었다. 오늘 하루 만에 ‘매너만 좋은 변태’ 이미지를 180도 바꿔 놓기는 물론 역부족이겠지만, 그래도 어느 선까지는 개선할 심산이었다.
레이가 웃으면서 앨범을 계속 넘겼다. 이 정도면 내 소박한 면모를 성공적으로 과시한 것 같았다.
“아래로 내려가죠. 배고픈데 같이 저녁이나 만들지요.”
레이와 함께 음식을 만들었다. 말이 ‘함께’지 요리는 내가 거의 전담하고 레이는 옆에서 구경하는 식이었다. 재출발 후 나는 레이에게서 무서운 일면을 발견했다. 그의 요리 실력은 최악이었다. 게다가 채식을 좋아했다. 앞으로 내가 잘 먹기 위해서라도 레이에게 식도락의 기쁨을 시급히 깨우쳐 주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와인을 꺼내며 말했다.
“식탁은 내가 차릴 테니까 레이는 거실에서 텔레비전 보고 있어요.”
“그래요?”
식탁에 음식을 놓고 양초에 불을 붙였다. 준비하는 도중 거실을 가끔 보았는데 레이는 텔레비전 삼매경이었다. 식탁을 차린 다음 레이를 불렀다.
“다 끝났어요. 일어나지요?”
레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레이?”
뭘 저렇게 넋을 빼고 보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소파로 걸어갔다.
“레이.”
뒤에서 레이의 어깨를 건드렸다. 순간 레이가 허리를 쿡 숙였다. 거의 무너지다시피 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레…….”
급히 부축하려는 순간, 레이가 이쪽으로 고개를 느릿느릿 돌렸다. 파란 눈동자가 내 시선에 비명처럼 부딪쳤다. 찰나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크게 뜨인 푸른 눈에 물기가 설핏 어려 있었다. 나는 잠깐 사이를 두다가 “왜?” 하고 얼떨떨하게 물었다. 레이가 급히 일어섰다.
“프로그램 내용이 슬퍼서.”
“아……. 그렇습니까.”
“미안해요. 내가 넋을 빼 놓고 있었군요. 가죠.”
레이가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끄며 말했다. 나는 식당으로 향하는 레이를 뒤따라가며 헤아려보았다. 프로그램 내용이 슬퍼서 울었다?
정말일까.
나중에 천천히 알아보기로 했다. 지금은 작전 수행이 먼저였다. 레이와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했다. 퍽 즐거웠다.
레이는 내 어린 시절의 악동 짓을 듣기를 좋아했다. 그의 웃음을 실컷 구경할 수 있었기에, 나도 마다 않고 어린 시절의 추태를 부지런히 늘어놓았다. 물론 적절한 삭제도 잊지 않았다.
이를테면 권투시합에서 거둔 승리는 신나게 떠들되 패자의 지나친 부상으로 경찰에 체포당할 뻔했다든가 하는 비화는 교묘히 빼 버리는 식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레이는 마냥 재미있어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나는 슬쩍 질문했다.
“그런데 내 이야기만 하는 것 같아서 어째 섭섭한데요. 나도 당신의 어린 시절 이야길 듣고 싶거든요.”
“아…….”
레이가 잔을 내려놓았다.
“내 어린 시절이야, 뭐.”
“흐흠. 주술수업 받느라 바빴나 보지요?”
“거의 그랬어요. 처박혀서 수업만 받았어요.”
이것도 참 이상했다. 도대체 어디서 수업을 받았단 말인가. 눈 가리고 아웅 하느니 대놓고 물어보았다.
“사실 죽 궁금했습니다. 우리가 수집한 정보에는 열일곱 살까지 당신의 거주지가 불명이더군요. 짐작 가는 곳이라야 스승 마라타의 집뿐인데, 그녀는 미혼여성으로 혼자 생활했다고 알려져서 말이지요. 그동안 당신이 어디서 살았는지 의문이 들어서요. 설마 투명인간? 하하하.”
“음…….”
레이가 썩 불쾌해하는 기색 없이 냅킨으로 입술을 닦았다.
“짐작이 맞아요. 나는 마라타와 함께 살았어요. 병원 갈 때를 제외하면 밖으로 나오지 않아서 이웃도 내 존재를 몰랐을걸요. 나는 다락방에서 주술만 공부했어요. 그곳은 평상시에도 자물쇠로 잠겨 있어서 마라타만 출입할 수 있었죠.”
“그랬군요.”
순간 확 치솟은 분통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이웃이 동거인의 존재도 모를 만치 집에 처박혀 주술만 공부했다? 그것도 자물쇠로 잠겨 있는 다락방에서? 그 정도면 거의 감금 아닌가.
“마라타와는 언제부터 같이 살았습니까.”
“일곱 살부터요. 그녀는 죽어 가는 나를 살려 준 은인이었어요. 엄한 스승이기도 했죠. 매일매일 회초리에 한 달에 일주일은 꼭 단식기도를 시켰죠. 칭찬도 손에 꼽을 만큼만 했어요. 그래도 공부가 적성에 딱 맞아서 즐거웠어요.”
나는 말을 잊었다. 다락방 감금도 충격적이건만 구타에 굶기기까지 했다? 내 혐오인간 리스트에서 마넨을 밀어내고 마라타가 새로이 1위에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참으려 애써도 열이 들끓었다. 끝내 심술궂게 내뱉어 버렸다.
“그런데 그 많은 돈을 벌고도 하나밖에 없는 제자에게 한 푼도 남겨 주지 않았다니, 하하. 무정한 스승인데요.”
“하지만 돈보다도 더 소중한 교훈을 남긴걸요. 그리고 한 푼도 남겨 주지 않은 건 아니었어요. 지금 사는 원룸은 마라타가 남긴 돈으로 구했어요. 주술사 코트와 방울도 물려주었고요. 무엇보다도 주술법을 남김없이 전수해 주셨지요. 나는 그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해요.”
레이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나는 어깨만 으쓱 올렸다.
제아무리 레이가 마라타를 변호해 보았자 씨도 안 먹혔다. 한 푼도 안 남기나 땡전 몇 푼 남기나 그게 그거 아닌가. 다락방 감금 하나만으로 내게 마라타는 계단도 없는 높은 탑에 라푼첼을 가두고 학대한 여자 마법사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뭐라고? 주술법과 뭉크코트를 물려준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다름 아닌 그 주술을 배웠기에 레이는 마넨의 전속 주술사가 되고 말았다. 염병할 뭉크코트 탓에 나는 레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총을 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그것들만 물려받지 않았으면 갑부 포우 메사라는 평범한 헌책방 주인 레이 아리사와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다.
뭐…….
지금은 잘됐으니까.
어쨌든 의문 하나는 해소되었다. 뒤이어 왕인지 뭔지 하는 새끼도 캐물어 보려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닌 듯했다.
레이를 살펴보다가 슬그머니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럼, 레이는 후계자를 키우고 싶진 않습니까? 그 뛰어난 주술을 혼자만 알고 있기에는 아깝잖습니까. 대대로 내려온 주술사 집단인데 후계자 양성은 의무일 것 같은데요.”
“예?”
레이가 물을 마시다가 멈칫했다. 나는 냉정한 눈초리로 레이를 주시했다. 어쩔 수 없었다. 이건 가이거 본부장 ‘스네이크’로서 한 번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다.
부장들이 지금도 레이를 경계하는 이유는 제2의 령을 우려해서였다. 겁 많고 조용한 성품이건만 레이는 정쟁으로 뛰어들었다. 그것도 자청해서. 우리는 그 동기를 원한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이 점을 감안하면, 혹여 레이가 무신귀족들을 적대하는 누군가에게 령의 주술을 전수할 가능성이 티끌만치도 없다고는 장담하지 못했다. 이 가능성이 온전히 불식되지 않는 한 일명, ‘령 사건’은 줄기차게 현재진행형이었다. 하물며 재회하자마자 레이는 가이거에 압수당한 뭉크코트와 방울을 돌려받고 싶다고 간청한 터였다.
레이가 포크로 샐러드를 느릿느릿 헤집다가 입을 열었다.
“글쎄. 령의 후계자는 내가 키우고 싶다고 해서 키울 수 있는 게 아니라서요.”
의외의 답변에 나는 “예?” 하고 되물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설마 누군가에게 결재라도 받아야 한다는 의미?”
“그건 아니에요. 음……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황당무계해서 안 믿을지도.”
“흐흠? 글쎄…… 하하. 령의 존재를 능가할 황당무계는 없을걸요.”
“그런가요. 후후후. 그럼 설명할게요. 령은 아주 오래전, 시베리아에서 왕국으로 건너온 주술사 집단이에요. 즉, 령의 주술은 시베리아 전역에 꽃핀 북방 무속과 유럽의 마법이 합쳐진 거죠.”
“동서양 주술의 종합판입니까.”
“비슷해요. ……그렇지만 령이 일반 주술사를 능가하는 힘은, 유럽의 마법이 아니라 시베리아에서 전해진 북방 무속에 근거하고 있어요. 그런데 시베리아의 북방 무속은 공부만 열심히 한다고 하여 부릴 수 있는 게 아니에요. 타고난 재능, 일종의 선택받은 재능이 있어야 하지요.”
주술사들이 언급했던 ‘오르키투니카’가 뇌리를 스쳤다. 나는 계속 주의 깊게 귀를 기울였다.
“시베리아에서 무당이 되려는 사람은 단식을 하며 꿈을 꾸는데, 이때 꿈속에서 맹금대모조신猛禽代母鳥神이라는 새를 본다고 해요. 대모조신 새는 토템 동물처럼 무당의 살점을 뼈만 남기고 모두 뜯어낸 후, 그의 머리를 장대 끝에 매달아 놓아요. 그러고는 뼈를 추리고 그 위에 살을 새로 붙여 주지요. 이렇게 하여 무당은 보통사람과는 다른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죠.”
“무서운 새로군요. 그런데 그 꿈이 령의 후계자와 어떤 상관이?”
“밀접한 관련이 있어요. 바로 그 맹금대모조신이 선택하는 자만이 후계자가 되는 거죠. 령은 평생 두 번 그 꿈을 꾼다고 해요. 령이 되기 위해 단식하는 시기에 한 번, 후계자를 점지받을 때 한 번이요. 후계자를 점지받을 때 그 사나운 새가 꿈에 등장하여 날갯짓하죠. 여섯 장의 날개를 난폭하게 퍼덕거리면서요.”
레이의 어조가 조금씩 느려졌다.
“마법의 힘이 가장 강해지는 만월의 밤, 마라타는 그 꿈을 꾸고 홀린 듯이 밖으로 나갔대요.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목적지를 알 수 있었다고 후일 내게 속삭였어요. 그리고 그 끝에서 나를 발견했다고. 환한 달빛 아래에서 육탈의 시기를 앞둔, 거적만 덮은 시신들이 죽 늘어서 있는 어느 산기슭에서요. 거적 밖으로 왼팔 하나만 살짝 삐져나와 있었는데도 보자마자 이 아이다, 하고 직감했댔어요.”
“예…….”
한기가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아이를 물고 오는 황새 이야기는 숱하게 들어봤어도 이런 흉악한 새는 처음이었다.
“그럼 레이는 이미 한 번은 그 꿈을 꿨다는 말이로군요.”
“그래요. 나는 마라타에게 발견되고 일 년 후 꿈속에서 사나운 새와 마주쳤어요. 하지만 아직 두 번째 꿈은 꾸지 못했죠. 아마 두 번째로 사나운 새를 마주칠 일은 없으리라 봐요.”
“왜요?”
“나는 132대를 내려온 령 역사 최초의 백인이에요. 령은 시베리아에서 이 땅으로 이주해 온 뒤에도 줄곧 동양인이었죠. 일본계 마라타의 스승은 몽골계라고 들었어요. 마라타는 아무래도 내 대에서 령의 맥이 끊어질 것 같다며 걱정했어요.”
“인종차별적인 발상 아닙니까, 그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령의 역사가 통계적으로 증명하는걸요. 백인에게서 령이 탄생할 확률은 극히 낮다고요. 그리고 이제껏 령은 모두 스물다섯 이전에 후계자를 맞이했다는 선례도 있어요. 나는 지금 스물여덟이에요. 그런데도 아직 사나운 새를 만나지 못했죠.”
레이가 씁쓸하게 웃었다. 나는 질문을 던지려다가 관두었다. 졸지에 령의 맥이 자기 대에서 끊기게 된 레이야 슬프겠지만, 나에게는 희소식일 뿐이었다. 숫제 기분이 날아갔다.
나는 레이가 주술에 관련되는 것이 싫었다.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조용히 살아가기만을 바랐다. 나는 레이에게 모든 것을 선사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공부를 시켜 줄 수도 있었고, 보석으로 온몸을 감싸 줄 수도 있었다. 왕비 대접을 해 줄 각오였다.
단, 주술만은 안 됐다. 그것만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주술같이 염병할 취미는 레이와 어울리지도 않았다.
어쨌든 한숨 놓았다. 이것으로 걱정거리 하나는 덜었다.
“식사도 끝났는데 이만 거실로 나갑시다. 차나 마시죠.”
레이와 남은 시간을 즐겁게 보냈다. 만화영화를 시청하며 정신없이 웃었다. 시간이 슬슬 깊어갔다. 나는 레이의 옆으로 몸을 밀착하며 어깨에 손을 둘렀다. 레이는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한 채 웃고만 있었다.
하여간에 무신경하기는…….
나는 지그시 미소 지으며 시계를 보았다. 자정을 30분 앞두고 있었다. 마지막 카드를 꺼내야 할 때였다.
“이만 자죠.”
레이가 움찔했다. 텔레비전으로 아쉬운 눈길을 던지는 그의 반응을 무시하고 그를 일으켰다. 그를 끌어안고 부모님이 쓰던 침실로 직행했다. 방탕한 게이 아들에게 한숨짓던 부모님도 레이라면 기꺼이 허락하시리라 믿었다.
레이를 침대에 눕히며 몸을 포갰다. 내 시선에 레이가 이번에도 어김없이 고개를 돌렸다. 나를 똑바로 쳐다보게 하려다가 관두었다. 그에게 내 눈짓을 외면당할 때마다 씁쓸함만 몰려들었다. 문득 어떤 감정이 전신을 엄습했다. 그것은 흡사 죄수의 붉은 피처럼 짙고 뚜렷했다. 바로 분노였다.
일생에 하나밖에 없을 내 연인은 나이 일곱에 시체더미 속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꿈에서 사나운 새에게 살을 뜯어 먹히고 목이 잘렸다. 한여름 정오의 태양빛조차 얼려 버릴 차디찬 다락방에서 십 년의 밤을 홀로 보냈다. 왜. 어째서.
의문만 솟았다. 왜 레이인가. 어째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인가. 달조차 파랗게 질려 물러설 고독한 시간을, 하필 레이가 견뎌야 했단 말인가. 한갓 힘없는 사람에게 신은 무슨 심산으로 광막한 어둠을 씌워 주었단 말인가.
알고 있다. 세상은 불공평하다. 불평등과 불공정과 불공평은 세상을 작동시키는 주요한 연료요 톱니바퀴였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맑시즘의 몰락이 그것을 증명한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타고난 악당 포우 메사라는 아이러니하게도 신의 존재를 믿었다.
유능한 부하가 열 명이나 모인 것만으로도 나는 신의 은총을 받은 셈이었다. 일도 순탄일로를 달렸다. 그것은 내 능력을 넘어선,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행운이 항상 작용해 온 결과였다. 그래서 나는 신은 언제나 내 편이라고 생각해 왔다. 이따금 착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포우 메사라는 혹시 신에게 특별히 선택받은 자가 아닐까, 하며 픽픽 웃고는 했다.
그러나 레이를 볼 때만은 신을 증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이 어마어마한 권력을 미끼로 내게 레이를 요구하는 듯한 느낌도 들어 괴롭기까지 했다. 주체할 수 없는 의문과 노여움만 치솟을 뿐이었다.
어쨌든 지금은 잘되었으니까…….
분노를 억누르며 레이에게 키스했다. 미리 준비한 보석 상자를 열고 목걸이를 꺼냈다.
“받아 주십시오.”
레이가 눈을 크게 떴다. 그가 거절의 말을 꺼내기 전에 선수를 쳤다.
“생일 아닙니까. 이것만은 받아 줘야 합니다.”
“어…….”
레이가 입을 막았다. 자신의 생일도 깨닫지 못했던 기색이었다. 씁쓸했다. 나는 목걸이를 레이에게 걸어 주며 말했다.
“오늘이 끝나기까지 오 분 남았군요. 값어치가 나가는 물건은 아니니까 부담 갖지 말아요. 이것만은 꼭 해 주고 싶었습니다.”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내가 레이에게 바치는 생일선물을 싸구려로 고를 리 없잖은가. 하하하.
“……고마워요.”
레이가 고개를 숙이며 나직이 말했다. 나는 레이를 천천히 눕혔다. 그를 애무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레이가 나를 끌어안았다. 긴 속눈썹 그림자가 푸른 눈동자를 드리웠다. 아마빛 머리카락이 굽이굽이 흩어졌다.
불현듯 원인 모를 울적함을 느꼈다. 이것은 갈증과도 비슷했다.
어쩌면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내가 부족함 없는 유년시절을 보내는 동안 레이는 사형장같이 어두운 다락방에 갇혀 지냈다. 우리의 시작이 지나치게 늦었다는 생각만 들었다. 십 년 전에 만났더라면…… 하는 원망만 사무쳤다.
괜찮았다. 지금부터 만회하면 그만이었다. 분침 소리만 존재하던 황폐한 시간은 사라졌다. 그 빈자리는 이제 아마빛이 채우고 있었다. 바로 내 눈앞에 있었다. 소녀의 얼어붙은 손에 들린 성냥불처럼, 지금 내 주변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나는 아마빛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건드리며 상념에 잠겼다.
―마법의 힘이 가장 강해지는 만월의 밤, 마라타는 그 꿈을 꾸고 홀린 듯이 밖으로 나갔대요.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목적지를 알 수 있었다고 후일 내게 속삭였어요.
만월의 밤…….
그날도 만월의 밤이었다. 불꽃이 꼬리를 그리며 치솟는 매혹적인 밤하늘 아래에서, 나는 피리와 북 소리에 취해 레이와 춤을 추었다. 문득 아마빛 머리카락이 내 전신을 휘어 감았다. 푸른 웃음이 내게로 부딪쳐, 달빛처럼 산산이 깨져 흩어졌다.
그 순간 나는 예감했다. 그것은 하얀 입김처럼 주문을 불어넣었다. 포우 메사라는 레이 아리사에게 사로잡혔으며, 이것은 운명이라고. 딱딱하고 싸늘한 관에 육신을 눕힐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사랑하리라고. 이 감정은 일생 최초이자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썩어 문드러져 악취가 풍기는 송장조차, 이 감정만은 영원히 간직하리라고.
신이 변덕을 부려 또 한 번 레이를 제물로 요구하면, 나는 악마에게 혼을 팔아서라도 저항할 것이다. 두 번 다시 아마빛을 떠나보내는 일은 없어야 했다. 사랑합니다, 하고 레이에게 속삭였다. 끝없이 뇌까렸다. 그래도 목마름은 가시지 않았다.
레이가 잠든 것을 확인한 후 몸을 일으켰다. 거실로 나가 휴대전화를 들어 인터넷 창을 켰다.
프로그램 내용이 슬퍼서 눈물을 흘렸다?
나는 싸늘하게 웃었다. 차라리 청어더러 빨갛다고 하는 편이 더 그럴싸하지…….
가이거 본부장을 상대로 거짓말을 늘어놓으려면 엔간한 연기력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단박에 간파했다. 그건 급히 둘러댄 거짓말이었다. 그리고 레이가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껐을 때, 이미 나는 채널번호를 눈여겨본 뒤였다.
레이에 관한 한 티끌 하나도 넘기지 않을 작정이었다. 퀴퀴한 코트를 무심히 지나친 결과가 어떤 참극을 불러일으켰는지 나는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죽는 순간까지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기시감을 느꼈다. 레이가 허겁지겁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끄는 순간, 목덜미가 찌르르 울렸다. 그 모습이 언젠가 레이가 휴대전화를 들며 나를 확 떨쳐내던 때와 흡사했던 것이다. 그 휴대전화의 상대가 누구였던가. 마넨 아니던가.
해당 케이블 방송국 홈페이지로 접속했다. 프로그램 편성표를 확인했다. 그때 시간이 저녁 8시 가까웠다. 하나 나왔다. 6시 40분부터 7시 50분까지 방영된 프로그램이었다. 제목은 《푸른 피》. 재방 시간은 내일 밤 10시였다. 나는 스케줄러에 그것을 메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