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L. (59/101)

2 ─L.

자기 연출력이 뛰어나다니.

낭패감이 뼛속까지 사무쳤다. 그럴 리 없지 않은가. 결혼패물을 착용하지 않은 것도 다른 까닭이 있었다.

메사라의 얼토당토않은 해석에 기가 막혔지만, 나름대로 정곡은 찌른 셈이었다. 자작나무가 제 외모에 자신감이 대단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만날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왕은 후회할 거야, 흥!” 하고 중얼중얼 헛소리를 했다.

그림…….

저도 모르게 꿈을 돌이켰다. 아직도 의구심이 들었다. 설마 진실로 데이탄즈가 오십 년이나 자작나무를 생각했을까. 계속 사랑했을까. 좌절하고 자책했을까. 흐릿한 붓질로만 남아 버린 낡은 캔버스를 쳐다보고 또 쳐다보았을까.

꿈에 보인 모습은, 찰나의 감상에 사로잡혀 자작나무를 찾고 있던 것뿐 아니었을까. 추억은 만추의 낙엽과도 같다. 자칫하면 부스러져 망각해 버리기 쉽다. 자작나무 사후 그가 보인 태도들도 내 의심을 부채질했다.

메사라가 차를 마시다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이 차 뭡니까. 맛이 특이하네요?”

“녹차예요. 처음 마셔 보나 봐요?”

메사라가 “예.” 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 편안한 표정에 웃음이 나왔다. 이런 상황도 퍽 코미디였다.

메사라는 자작나무 초상화를 보면서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너무 멀쩡해서, 그를 데이탄즈로 확신한 내 판단에 의심이 들 정도였다. 물론 그건 아니었다. 메사라는 16세기의 그 개자식이 틀림없었다. 그토록 잔인한 짓을 서슴없이 저질렀던 남자가 이 시공에서 내 연인이자 숙적으로 재차 마주친 상황 또한 기묘하기만 했다.

우연일까. 아니면 필연일까.

아무래도 상관없어.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여러 번 뇌까렸다. 메사라는 메사라고 레이는 레이라고. 데이탄즈와 자작나무는 거울에 부딪쳐 깨진 일광일 뿐이라고. 아주 오래전에 스러졌다고. 이제는 모래시계를 거꾸로 놓아야 할 때라고.

꿀꿀한 생각은 그만하자.

나는 한숨을 쉬며 다음 장을 넘겼다. 헨리 8세의 또 다른 부인 제인 세이모어의 초상화가 나왔다. 헨리 8세는 여섯 아내를 두었으며 그중 둘을 처형했다. 데이탄즈에 필적할 개자식은 헨리 8세와 푸른 수염뿐일 것이다, 따위의 생각을 하며 다음 장을 넘기다가 멈칫했다.

이런.

메사라가 내 등으로 슬금슬금 몸을 밀착시키고 있었다. 저 성격에 얌전히 있는 것이 더 이상하긴 했다. 그렇다고 도착한 지 30분도 못 넘기고 저러다니.

“……오늘은 토요일이고 지금은 오후 네 시예요. 손님이 올지도 몰라요.”

“절대 그럴 리 없습니다.”

내 설득에, 메사라가 단호한 반박으로 맞섰다. 하기야 겨울 불황으로 가게에 들르는 손님이 하루에 두서너 명이 전부이긴 했다. 그리고 벌써 메사라는 내 손을 자신의 다리 사이로 가져가고 있었다. 아주 딱딱했다.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여간에 이런 남자였다. 이러니까 내가 완전히 속은 것이다. 사적인 만남만 놓고 보자면, 메사라는 정말이지 할 일 없는 남자였다.

“여기서 한 번만 하죠. 그리고 오늘은 내가 당신을 다른 곳에 데려가려고 계획했습니다. 끝나면 그곳으로 가는 겁니다.”

“다른 곳이라니?”

메사라는 미소만 지었다. 야릇한 웃음이었다. 또 쇼핑센터로 가서 선물을 한 아름 사서 내게 떠안기려 저러나.

할 수 없었다. 이미 메사라는 내 팬티를 아래로 끌어내리고 있었다. 기가 막혔다. 만남을 거듭할수록 절감하지만, 참으로 성욕이 강한 남자였다. 그뿐 아니라 하고 싶을 때 바로 해야 직성이 풀렸다. 도통 감당이 되지 않았다.

다른 부분은 대단히 냉철한 남자가 섹스에 한해서 만큼은 왜 이리도 무절제한지 알 수 없었다. 저 이글이글 들끓는 성욕을, 체력이 든든히 뒷받침해 줘서 더욱 문제였다.

참 못 말릴 사람이다…….

메사라가 원하는 대로 다리를 벌리며 천천히 누웠다. 문득 재회한 첫날이 생각났다. 그날 하루 메사라가 얼마나 점잖았는지 말도 못했다. 그날 하루만은.

만나서 여섯 시간 동안 대화만 나누고, 식사를 하고, 조용히 잠들었다. 섹스에서도 변태 행위는커녕 간단히 오럴만 하고 끝내서 되레 내가 깜짝 놀랄 정도였다. 섹스를 마친 뒤 울적한 표정으로 욕실로 가서 담배를 피우고 돌아오긴 했지만, 그래도 놀라웠다. 헤어져 있는 동안에 메사라가 생각을 많이 한 모양이다…… 하고 판단했는데, 이튿날 깨졌다.

만나서 세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더니 호텔로 갔다. 삽입 섹스를 했다. 사흘째에는 두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눈 뒤 내 집으로 갔다. 섹스 도중 내 허리를 졸랐다.

나흘째에는 한 시간가량 대화를 나눈 다음, 헌책방에서 섹스를 했다. 내 목과 허리를 졸랐다.

그렇게, 대화시간이 점점 단축되고 섹스 수위는 높아져 가는 요즘이었다. 메사라도 자신의 변태욕구는 감당하기 힘든 골칫거리인 모양이었다. 처량한 눈빛을 던지거나 은근히 내 눈치를 살피고는 했다.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왜 그렇게 웃어요?”

메사라가 내 가슴을 애무하며 물었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냥, 간지러워서.”

“흐흠?”

메사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다시금 내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었다. 나도 점점 기분이 고조되어 갔다. 키스와 애무가 잇따랐다. 언제나 느끼지만, 메사라는 정말로 키스와 애무를 잘했다. 몸이 녹는 듯했다.

혼미한 감각으로 메사라의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돌덩이처럼 단단한 몸이 나를 짓눌렀다. 숨이 콱 막혔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아래에서 자꾸만 이상한 감각이 치솟고 있었다.

“메, 메사라…….”

“왜요? 설마 넣어 달라고요? 아까는 손님 타령했잖아요.”

메사라가 장난기 가득한 소리만 늘어놓았다. 그러면서도 내 아래로 손가락을 슬쩍 넣더니 나직하게 웃음을 흘렸다. 말할 수 없이 창피했다. 나도 모르게 아래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걸 손가락으로 고스란히 다 느낀 것이다.

“힘 빼요.”

메사라가 속삭였다. 슬쩍 들이밀더니 삽시간에 난폭하게 밀고 들어왔다.

“아…….”

나는 눈을 크게 떴다. 크고 딱딱한 것이 아랫배까지 닿으리만치 깊이 들어왔다. 단박에 내부가 꽉 차는 감각이 치달았다. 극단의 고통과 쾌감이 아슬아슬하게 달렸다. 메사라가 내 다리를 자신의 어깨에 걸쳐 멨다. 등까지 바닥에서 들린 채로 그를 받았다. 초반부터 삽입 속도가 지나치게 빨랐다.

“아, 아, 아! 처, 천천히 해요.”

“웬 엄살입니까. 겨우 이 정도로.”

메사라가 되레 더 깊숙이 찔러 넣었다. 까칠까칠한 음모가 입구로 퍽퍽 부딪쳤다. 푸욱 푹 사납게 꽂혔다. 애무와는 딴판으로 가혹한 움직임이었다.

어느 틈엔가 내 몸 한구석이 지끈거렸다. 쾌감이 점차 속도를 높이며 단박에 전신을 장악했다. 나는 신음하며 메사라의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좋아요? 좋습니까? 좀 더 조여 봐요…….”

메사라가 내 유두를 핥았다. 핥다가 질근질근 씹으며 희롱했다. 나도 이제는 절정이었다. 치고 올라오는 쾌감이 불덩이였다. 밀리고 빠지는 구멍 입구의 감각이 생생했다.

성난 페니스가 머리끝까지 찔러 버릴 기세로 속력을 높였다. 내부가 쿵쿵 내려찍히고 뒤집히는 감각이 무시무시했다. 메사라가 좋으냐고 쉴 새 없이 질문을 던졌다. 나는 정신을 못 차리며 비명만 질렀다. 삽입이 절정을 달렸다. 오르가즘이 내부를 저몄다. 눈앞이 하얗게 빌 찰나였다.

돌연 출입구에서 방울이 치링치링 울렸다. 전신이 얼어붙었다. 집요하게 밀어붙이던 메사라도 순간 동작을 우뚝 멈췄다. 짧은 시간이 지나갔다.

“이런 제길……!”

메사라가 욕설을 내뱉었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내부가 젖어 들고 있었다. 페니스가 정액을 질금질금 쏘아냈다. 체액이 한 번에 그치지 않고 여러 번 사출됐다. 안을 적시다 못해 밖에까지 새어 나와 들린 등허리를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메사라가 낭패한 기색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다리를 모으지도 못한 채 천장만 쳐다보았다. 한 가지 생각만 들었다. 봤을까. 봤을 것이다.

이런 창피가.

페니스가 아래에서 스르륵 빠져나갔다. 메사라가 지퍼를 올렸다. 신경이 바짝 곤두선 안색이었다.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객이 나갈 기척이 없었다.

메사라가 고개를 확 돌렸다.

“뭘 그렇게 보고 서 있어! 당장 안 나가!”

잠깐 뒤 문이 열리는 기척이 났다. 유리창 밖으로 잿빛 그림자가 허둥지둥 뛰어갔다. 적막 속에서 치링치링 울리는 방울소리가 불안하게 깔렸다.

메사라는 출입구에 눈길을 고정한 채 가만히 있었다. 연기처럼 떠돌던 방울소리가 완전히 가신 후에야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많이 놀랐습니까.”

“아…….”

메사라의 손을 잡고 간신히 일어섰다. 메사라가 손수건으로 내 몸에 묻은 체액을 닦은 후 옷을 입혀 주었다.

“미안합니다. 체외 사정을 하려고 했는데. 괜히 내가 고집을 피워서 당신만 창피를 당했군요. 다음부터는 여기서 하지 않겠습니다.”

메사라가 이쪽을 살펴보며 머뭇머뭇 말했다. 나는 “괜찮아요.” 하며 카운터로 돌아가 앉았다. 살다 보면 이럴 수도 있지.

어차피 여긴 42번가이고.

간단히 생각하며 잔으로 차를 따랐다. 메사라가 코트를 걸치며 “잠깐 기다려요. 차 가지고 돌아오겠습니다.”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나는 멀거니 창밖을 응시했다.

성에가 잔뜩 낀 유리창이 탁했다. 솜털처럼 날리는 희디흰 눈꽃 사이로 메사라가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언제쯤 올까.

다리를 바짝 모았다. 안이 끈적거렸다. 정액이 내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감각이 불쾌했다. 잘못하다간 속옷을 적실지도 모르겠다는 상상까지 들었다.

아랫배를 감싸며 허리를 숙였다. 그래도 이물감은 여전했다. 섹스와 별개로 이런 건 썩 좋아하지 않는 메사라인 만큼 그도 기분이 편치는 않을 것 같았다.

메사라는 콘돔을 싫어하는 대신, 뒤처리에는 매우 철저했다. 내가 아무리 피곤해해도 샤워는 꼭 하고 자게끔 했다. 곤죽이 되어 움직이지 못하면 자신이 직접 뒤처리를 해 주었다. 스노우 화이트에서 만나 섹스를 한 첫날밤, 아래에서 흘러내리는 체액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내게 샤워기를 이용한 뒤처리 요령을 가르쳐 준 사람도 메사라였다. 정기적으로 성병 검사를 받는다고 한 말이 그냥 한 소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문득 방울 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메사라가 아니었다. 코트 차림의 중년사내가 가게로 들어서고 있었다.

“죄송합니다만 곧 가게를 닫아야 합니다, 손님.”

사내가 이쪽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낯선 얼굴이었다. 이 가게에 자주 들르는 가난한 예술가 무리와도 동떨어진, 부티 나는 차림새였다.

사내가 내 전신을 훑어보며 안색을 붉혔다. 기분이 나빠졌다. 나는 카운터로 눈길을 피하며 말했다.

“가게를 닫아야 합니다, 손님. 죄송합니다만 다음에 들러 주십시오.”

사내는 손에 든 지팡이만 만지작거렸다.

“손님. 죄송합니다만 가게를 닫아야 합니다.”

“……책을 사려고 온 게 아닙니다.”

“그럼, 길을 물으려고요?”

“그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말입니다.”

사내가 카운터로 바짝 다가서며 내게로 고개를 기울였다.

“아까 봤습니다. 뭔지 알겠더군요.”

“예? 뭔지 알겠다니요?”

반문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순간적으로 이 사내가 누군지 깨달았다. 아까의 불청객이었다.

이런.

뺨이 화끈거렸다. 쥐구멍으로 들어가고만 싶었다. 그런데 뭔지 알겠다니. 이건 또 무슨 뜻일까.

“강간 맞지요? 남자가 입고 있던 제복으로 알아보았습니다. 가이거 대원이더군요. 제가 증인이 되어 드릴 테니 얼른 신고하십시오. 죄송합니다. 아까 이쪽으로 소리 지르던 남자가 무서워서 그냥 도망쳤습니다.”

“강…….”

황당했다. 강간이라니.

기가 막혔지만 메사라의 직장이 주는 이미지를 고려하면 사내를 탓하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역시 불쾌한 오해였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사내를 잠깐 노려본 후, 입을 열었다.

“오해하셨습니다. 호의는 고맙지만, 그 사람은 제 친구입니다.”

“예……. 예에?”

사내가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들었다.

“예. 제 친구입니다. 요즘 가게가 한산하던 참이라 사람이 들어오리라고는 생각 못하고 즐기던 중이었어요. 이 정도면 설명이 되었을까요.”

“아, 예. 예. 그랬군요. 이것 참, 제가 바, 방해를 했네요.”

사내가 벌게진 낯으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상한 아저씨네…….

이곳은 42번가였다. 대로변에서 오럴섹스가 벌어져도 아무도 신경 안 쓰는 곳이 여기였다. 이곳을 잘 모르는 외부 사람이 분명했다. 억양에서도 독일어 악센트가 풍겼다.

“레이, 정리 다 끝났습니까? 이만 나가죠.”

마침 메사라가 들어왔다. 이쪽으로 다가서다가 사내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코트를 걸치고 열쇠를 꺼냈다.

“가요.”

메사라는 무표정으로 사내를 응시할 뿐이었다. 그 태도에 나는 잠깐 당황했다. 눈썰미 좋은 메사라인 만큼 사내가 누군지 첫눈에 알아차려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저 반응은 지나쳤다.

사내가 겁에 질린 안색으로 나와 메사라를 번갈아 보았다. 나는 메사라의 팔을 잡고 “나가요.” 하고 재촉했다.

“흐흠…….”

웃음을 흘리던 메사라가 쾌활하게 소리쳤다.

“뭘 그렇게 쳐다봅니까, 아저씨? 게이 처음 봐요?”

단번에 사내의 낯이 붉게 달아올랐다.

“죄, 죄송합니다.”

사내가 허겁지겁 밖으로 나갔다. 메사라는 픽픽 웃기만 했다.

메사라와 함께 헌책방을 나섰다. 눈발이 코냑빛 거리를 무자비하게 몰아세웠다. 카운터 테이블에 기댄 지팡이를 발견한 때는 문을 잠근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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