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M─
왕비는 왕이 수도로 귀환하기 이틀 전에 사망했다. 왕실 시종장은 왕비의 사인을 ‘고문을 못 이겨 일어난 사고’로 발표하며 간단하게 덧붙였다.
「고문을 받던 도중 왕비가 갑자기 숨을 거두었습니다.」
수도로 귀환한 왕은 이튿날에야 왕비의 시신 수습에 나섰다. 맑은 햇빛이 비쳐드는 오후였다. 왕의 부름을 받은 신하들이 왕궁의 정원에 모였다. 그들 앞에 고문관들이 왕비의 시신이 실린 들것을 내려놓았다.
시신을 덮은 거적 밖으로 왼팔 하나만 삐져나와 있었다. 그뿐이었지만, 두 달간 왕비가 겪은 고문의 강도를 짐작하기에는 썩 어렵지 않았다. 그만큼 팔의 상태는 참혹했다.
우선 몹시 앙상했다. 뼈의 형상이 피부 바깥으로 튀어나올 만치 바짝 말라 있었다. 헐벗은 겨울 나뭇가지 같은 그 팔에는, 말라붙은 핏줄기와 채찍자국이 태피스트리 무늬처럼 빼곡히 뒤덮여 있었다. 손가락마디는 남김없이 비틀려 있었다.
손톱 또한 모조리 빠져 있었다. 엄지는 숫제 송두리째 떨어져 나가 흰 뼈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셀 수도 없는 못 자국에는 숨까지 막혔다. 무엇보다 끔찍한 것은 악취였다. 그것은 고작 나흘 된 시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고약했다. 손수건으로 코를 막아도 소용없었다. 악취는 흡사 유혹처럼 섬세하게 비강을 파고들었다.
참다못한 어느 귀족이 냄새가 어찌 이리도 고약하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고문관은 왕비가 살아 있을 무렵부터 살과 내장이 썩은 탓이라고 설명했다.
나는 생각했다. 15년간 한 번도 모습을 보이지 못한 왕비였지. 마치 유령처럼. 그러나 저 악취가 소리 지르고 있군. 나는 존재했으며, 살아 있는 사람이었노라고…….
시간이 계속 흐르는데도 왕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동안 문신귀족들은 물론이거니와 무신귀족들조차 침묵만 지켰다. 적막을 깨뜨리는 것은 거적 위를 윙윙거리며 맴도는 파리떼뿐이었다.
훗날 왕궁 수비대장은 내게 털어놓았다.
「지하감옥을 지키던 병사들 사이로 흉흉한 소문이 끊이질 않았어요. 왕비의 비명이 밤낮 새어 나온다고요. 저는 믿지 않았죠. 암만 모후께서 잔인한 고문을 명령했다지만 그래도 명색이 왕비니까요. 왕궁에 남아 있는 문신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왕의 측근들이 퍼뜨린 헛소문으로 믿으려 애썼습니다.」
어느 자작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정실이 고문을 못 이겨 죽을 때까지 방치해 버린 건, 사랑하는 정부를 위한 왕의 배려일 겁니다. 평민출신 정부가 귀부인들에게 또 곤욕을 치를까 봐 본보기로 삼은 거죠.」
긴 시간 끝에 드디어 왕이 등장했다. 한참 움직임 없이 들것을 응시하더니 짤막하게 말했다.
「손수건.」
시종이 건넨 손수건으로 왕은 코를 막고 재차 들것을 내려다보았다. 감정이라고는 한 치도 찾아볼 수 없는 시선이었다.
고문관들이 말했다.
「시신을 어찌할까요, 폐하.」
왕이 고문관들에게 눈길을 향했다. 고문관들이 겸연쩍게 머리를 긁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옆에 서 있는 이단 심문관들도 마찬가지였다. 왕의 싸늘한 눈초리에 모두 식은땀만 뻘뻘 흘렸다.
두 달에 걸친 고문에도 저들은 왕비에게서 자백을 받아내지 못했다. 그 탓에 왕비의 저주사건은 왕이 전쟁을 끝내고 돌아온 지금도 미해결 사건으로 남아 있었다.
이윽고 왕이 고문관들에게서 눈길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황무지에 매장해 버려.」
무성의한 음성이었다. 별생각도 없어 보이는 표정이었다.
고문관들이 들것을 들고 정원을 떠났다. 거적 밖으로 삐져나온 앙상한 팔이 떨어질 듯이 흔들거렸다. 그리고 금방 사라졌다.
그날 밤도 왕은 파티를 열어 즐겁게 놀았다. 그러나 그즈음에는 왕궁의 어린 세탁부조차 왕비가 어떻게 죽었는지 샅샅이 알고 있었다. 그날 파티에서만은 무신귀족들마저 왕에게 가까이 가지 않고 몸서리쳤다.
다음날 왕은 왕비를 마녀로 공식 선포했다. 결혼예물을 제외한 왕비의 전 소지품 및 사건의 재판기록도 모두 불살라 파기시켰다. 왕비의 가문까지 평민계급으로 격하시켰다. 그나마 가문의 재산은 몰수하지 않은 것이 왕이 베푼 유일한 자비였다.
며칠 지나지 않아 왕비의 죽음이 가져온 충격은 물거품처럼 가셨다. 다시금 궁정으로 웃음소리가 떠돌았다. 어느 후작 부인은 하품하며 말했다.
「어차피 이름뿐인 왕비였잖아요. 예전으로 돌아간 거예요.」
분위기가 반전된 때는 자작나무의 사망 한 달 뒤였다. 그 무렵 아내가 내게 기묘한 이야기를 즐겁게 떠들었다. 나는 소문을 어디서 들었느냐고 물었다. 아내가 말했다.
「출처가 중요한가요? 어차피 이 소문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요, 뭐. 왕만 빼고.」
일주일 뒤 왕세자 탄생 축하파티가 벌어졌다. 국왕 부부는 변함없이 서로에게 열중하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귀족들은 포기하지 않고 기다렸다. 왕족 초상화 연작에서 처음으로 실체를 드러낸 자작나무의 생전 모습이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탓이었다.
안타까울 만큼 젊고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왼손에는 자작나무 가지를 들고 있었다.
지루한 기다림 끝에 드디어 궁정화가가 왕에게 초상화를 소개했다. 일순간 연회장이 적막에 잠겼다. 모든 이들이 ‘경악하며 눈물을 흘리는 왕’을 열렬히 기대하며 숨을 삼켰다.
왕이 자작나무의 초상화를 지목하며 궁정화가에게 질문을 던졌다.
궁정화가의 설명을 들은 왕은 「자작나무.」 하고 짧게 말했다. 처음 소개받은 가정교사 이름을 발음하는 듯한 어투였다.
그러고는 곧, 젊은 백작이 바친 수사슴 가죽에 눈길을 돌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눈물을 흘리기는커녕 그날 파티에서 왕은 유난히 즐거워 보였다. 어느 때보다 새 왕비와 뜨거운 눈빛을 교환했다. 큰 소리로 웃고, 오래오래 춤을 추었다. 도박에서도 거액을 따내며 환호성을 질렀다.
결국 귀족들은 실망감만 안고 연회장을 떠났다. 아내는 투덜거렸다.
「소문이 거짓이면 왕이 나뭇가지 따위에 흥미를 보일 리 없잖아요! 전처와의 하룻밤이 별 재미가 없었나 봐요.」
“무슨 책을 그렇게 열심히 읽어, 응? 본부장님.”
다음 장을 넘기려는 찰나, 레오파드가 불쑥 말했다.
“음. 책 읽는 거 처음 보냐.”
“그건 아니지만…… 허구한 날 탐정소설이나 갱소설만 읽어대던 분께서 웬 교양서적인가 싶어서 말이야. 제목부터 희한한걸. 「빌즈 남작의 회고록」?”
“「빌즈 남작의 회고록」? 웬 그런 지루한 책을 다 읽어?”
옆에서 쿠퍼헤드가 껴들었다. 나는 못 들은 척하며 책을 덮었다. 눈의 여왕에게 관심이 많은 레이와의 대화를 위한 독서라고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지루한 책?”
레오파드의 말에 쿠퍼헤드가 “응.”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16세기 중반 데이탄즈를 보필한 빌즈 남작의 회고록이야. 작자가 살아생전 아들에게 무려 4만 통이나 편지를 썼대나. 그가 죽고 200년 뒤, 남작의 후손이 그 편지들을 소설 형식으로 출간했는데, 그것이 「빌즈 남작의 회고록」. 데이탄즈 왕정의 비화들이 생생히 드러나 있어서 출간 당시 굉장한 화제였다고 하더군.”
“호오. 그런데 우리 본부장님께서 이런 책을 읽는다고?”
레오파드가 미심쩍은 눈초리를 던졌다. 나는 짤막히 대꾸했다.
“교양이나 쌓으려고.”
물론 거짓말이었다. 교양은 염병, 징그럽게 지루하기만 해서 눈의 여왕이 언급된 부분만 읽고 치우려던 참이었다.
퇴근 시간을 앞둔 토요일이었다. 폭설로 본부 앞 도로가 주차장으로 변했다. 정시 퇴근을 깨끗이 포기한 쿠퍼헤드와 레오파드가 내 업무실로 쳐들어와 노닥거리는 중이었다. 술이나 마시자는 둥, 단체로 오입이나 하러 가자는 둥 오만 잡소리를 늘어놓으며 사람을 괴롭혔다.
처량한 자식들. 하여간에 임자 없는 새끼들은 언제나 이 꼴이었다. 여자친구가 있거나 가정이 있는 놈들은 교통지옥에 굴하지 않고 정시에 퇴근할 터였다.
“요즘 본부장님 이상해.”
레오파드가 무심히 말했다. 심장이 아래로 똑 떨어졌다. 내 안면가죽이 철판이라서 다행이었다.
“이상하긴 뭐가.”
나는 태연하게 대꾸하며 책을 다시 펼쳤다.
“요 몇 달간 일이 끝나면 업무실에서 으레 술이나 퍼마시지 않았나. 그런데 요샌 술이 현저히 줄었다고. 심지어 담배까지 잘 안 피우고. 업무 끝나면 쏜살같이 차 몰고 퇴근해 버리고. 설마 새 연애질이라도 시작했냐. 도대체 뭐가 그리 살맛이 난 거야, 엉.”
“살맛은 무슨. 죽을 맛이라서 술 담배를 할 기분도 안 나는 거지. 너 몰랐냐? 나는 42번가에서 령의 헌책방 앞을 서성거리는 본부장님을 몇 번이나 봤는데.”
쿠퍼헤드가 맞받아치며 낄낄거렸다. 레오파드가 담배를 뽑다가 놀란 기색으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아직도 미련을 못 버렸어? 내가 누누이 말했잖아. 레드폭스는 보통 사람이 아니니까 깨끗이 포기하라고.”
포기 좋아하네. 내 사전에 포기라는 단어는 없었다. 하물며 다시 출발한 지 무려 2주째였다. 그러나 이 말은 하지 않았다. 부장들이 레이에게 품고 있는 경계심은 지금도 여전했다.
쿠퍼헤드가 드램비 잔을 흔들며 웃었다.
“네가 령을 스토킹하는 본부장님을 못 봐서 하는 소리야. 코트 깃 세우고 전봇대 뒤에 숨어서 헌책방 안의 령을 훔쳐보던 그 쫄쫄 굶주린 눈초리를 직접 보면 만류할 생각이 싹 사라질걸. 어이, 스네이크. 솔직히 말해. 이 회고록, 령 때문에 읽는 거 아니야? 령이 눈의 여왕 팬이잖아.”
빌어먹을 딱따구리. 역시 눈치 하나는 귀신이었다.
“아까 말했잖아. 교양 쌓으려고 읽는 거야.”
“흐흠……. 뭐, 믿어 주지. 아무튼 령은 정말 특이한 사람이야. 안 그래?”
“어디가 특이한데.”
“어디가 특이하다니. 본부장님 눈에는 진정 령이 금발 인형으로만 보인단 말이냐. 특이하지. 정신이상도 그렇지만, 그 조용한 사람이 이런 살벌한 정쟁판에 뛰어든 것 자체가 미스터리라고. 무엇보다도 냉혈 본부장님을 완전히 녹여 놓았다는 것이 최고의 미스터리지. 대체 무슨 방법을 썼기에.”
“한번 자 보면 알아.”
레오파드가 대꾸하다가 내 눈길에 찔끔했다.
마침 시계가 오후 1시를 알렸다. 퇴근 시간이었다. 나는 책을 탁 덮고 일어섰다. 이 노린내 나는 싱글들하고 더는 부대끼기 귀찮았다. 놀자며 내 바지자락 붙들고 발광하는 두 놈을 냉정히 떨쳐 내고 본부를 빠져나왔다.
2주 전 토요일이었다. 그날따라 잿빛 하늘에서 하얀 결정체가 미치도록 휘몰아쳤다. 하루에도 몇 번씩 직종을 갈아 치울 것을 결심하며 찌푸린 얼굴로 술잔을 기울이는 퇴물 사립탐정처럼, 그날도 어김없이 업무실에 처박혀 보드카를 퍼마시던 내게 돌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레이였다. 기적 같았다. 아니, 명백한 기적이었다.
날아갔던 레이가 되돌아왔다. 나를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그때의 거절은 본심이 아니었다고 했다. 미안하다고 말했다. 아직도 자신에게 마음이 있으면 새로 시작하고 싶다고 했다.
그의 말이 눈처럼 쌓이는 매 순간, 찢어졌던 내 감정이 회귀했다. 삽시간에 온몸으로 온기가 퍼져나갔다. 마비되었던 육체에 체온과 숨결이 스며들었다.
그리고 나는 되살아났다. 맥박이 뛰고 눈이 뜨였다. 레이는 피그말리온이 되어 내게 생명을 불어넣었다.
당장 업무실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단숨에 42번가에 도착했다. 갈가리 흩어지는 눈꽃 속에서 레이가 서 있었다. 그가 시야에 들어차는 순간, 거리가 홀연 안개 같은 정적에 휩싸였다. 모든 것이 정지했다. 그리고 그때까지 나를 짓눌러온 잔인하고 난폭한 절망감이, 붉은 커튼 뒤로 퇴장하는 마술사처럼 삽시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가 힘껏 달려왔다. 내 품으로 뛰어들 듯 안겼다. 나는 그를 끌어안았다. 그도 나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 완성으로 향하는 터널을 다시금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 여행이 2주째로 들어서는 즈음이었다.
자동차를 몰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오늘 처음으로 피워 무는 담배였다. 레오파드가 제대로 봤다. 요사이 나는 술과 담배를 줄이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레이를 위해서였다. 이것부터 시작해 우리의 미래를 위한 모든 계획을 차근차근 실행에 옮길 생각이었다. 하나도 남김없이 성취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걸림돌이 하나 있었다.
2주일 전, 열병처럼 흩어지는 눈꽃 속에서 나는 그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확신했다. 차 안에서 몰래 훔쳐보는 한심한 스토커 짓도, 혼자서만 보내는 막막한 어둠도 저 멀리로 떠나보냈다고. 앞으로는 함께하는 시간만 남았다고.
그렇게 확신했는데, 어긋났다.
나는 손가락 사이에 끼운 담배로 핸들을 톡톡 두들겼다.
그놈의 고집…….
보석도, 옷도 필요 없다는 말이 그런 의미였을 줄이야.
그렇다. 이것이 문제였다. 바로 레이의 쇠고집이 걸림돌이었다.
재결합한 첫날 나는 레이의 원룸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레이에게 「얼른 짐을 챙깁시다.」하고 말했다. 그러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짐은 왜요?」
정말로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왜긴요. 나랑 같이 살아야지요. 17번가에 멋진 저택이 있습니다. 아, 물론 당장 맨몸으로 가도 좋고요. 하기야 챙길 짐도 없긴 하군요.」
나는 유쾌하게 말했다. 그러자 레이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17번가는 42번가로 출퇴근하기엔 너무 먼데요.」
「예. 17번가는 42번가로 출퇴근하기엔 너무 먼……. 예?」
별생각 없이 레이의 말을 따라 읊조리다가 대경실색했다. 어안이 벙벙했다. 이제 고생 끝, 호강 시작이건만 이 어인 소리인가 싶었다.
황당해하는 내게 레이가 차분히 말을 늘어놓았다. 뜻은 알겠지만, 동거까지는 아직 생각이 없다고 했다. ‘사랑해 마지않는 헌책방’을 운영하며 만남을 지속하는 것으로 만족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끝이었다.
그날 온종일 설득했는데 레이는 꿈쩍도 안 했다. 알고 있었다. 레이는 담백한 사람이었다. 마넨에게 10년이나 착취당하면서도 돈 한 푼 요구하지 않으리만치 담백했다. 본성부터 담백과 궁상의 황제였다.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은, 레이 입장에서는 괜찮게 돌아가고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이쪽은 아니었다. 나는 도리 없는 포우 메사라였다. 레이 아리사처럼 주말 데이트만으로 곱게 만족할 남자가 결코 아니었다. 연인이 사창가에서 왕파리만 윙윙 날아다니는 헌책방이나 운영하는 꼴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사내는 더더욱 아니었다.
나는 그의 가난이 증오스러웠다. 초인종도 달려 있지 않은 레이의 원룸은 처음부터 염병이었다. 뭉크코트는 숫제 신물이 났다.
42번가도 문제였다. 수도 최고의 매음굴 아닌가. 아메리칸 풋볼팀이 포진해 있는 ‘스노우 화이트’가 헌책방에서 20분 거리였다. 또 변태의 눈에 띄어 레이가 곤욕을 치른다면? 혹, 다른 놈과 눈이 맞아 나를 차 버린다면?
속 좁다고 해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근거 없는 불안감도 아니었다. 레이는 처음부터 다리만은 쉽게 벌려 주었다. 아니, 다 떠나서 나는 남자들이 레이를 쳐다보는 상황 자체가 싫었다. 족족 눈알을 뽑고 좆을 뭉개고 싶었다.
난관에 난관이었다. 레이 주변에 심어 놓은 감시대원들도 문제였다. 재출발 사흘 후, 감시대원들이 따끈따끈한 보고서 한 부를 내게 제출했다. 레이와 내가 손잡고 호텔로 들어가는 사진 아래,
[감시 대상이 최근 남자에게 푹 빠졌음. 상대는 가이거 말단 사무직 대원.]
라고, 메모가 첨부되어 있었다.
령 감시팀은 내가 관리했기에 요행이었다. 내 신분이야 겹겹이 위장해 놓은 덕에 추적은 불가능했지만, 그래도 신중하게 레이와 만나야 했다.
이쯤 되자 의문이 고개를 쳐들었다. 왜일까. 레이는 무슨 이유로 동거를 거부할까. 몇 가지 가정을 세우고 곰곰이 검토해 보았다.
혹시 아직도 내게 감정의 찌꺼기가 남아 있어서일까. 가능성 있었다. 내게 쏘아붙이던 원한의 눈초리를 돌이키면, 그가 나를 용서해 준 것이 되레 이상한 일이었다.
그게 아니면, 내 돈을 거북하게 여기는 탓인가. 내 부의 태반은 뇌물로 쌓았다. 그런 이유라면 나도 레이에게 함부로 강요할 수 없었다. 포우 메사라는 양심은 없으되 상식은 있는 인간이었다.
나는 담뱃재를 털며 나직이 투덜거렸다.
“이도저도 아니면…….”
마지막 가능성은 남자였다. 그 왕인지 뭔지 하는 새끼였다. 아직도 놈에게 미련을 못 버려서 내게 거리를 두는지도 몰랐다. 그 새끼만 생각하면 뒤통수에서 뭔가가 핑 날아갔다. 불같은 질투심이 들끓었다. 떠올리지 않으려 억지로 노력해야 할 정도로 피가 거꾸로 돌아갔다.
쿠퍼헤드의 지적이 옳았다. 레이에게는 의문점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사실, 모든 의문을 다 합쳐도 두 달간 병석에서 레이가 일으켰던 발작에는 미치지 못했다.
원인 없는 결과란 없는 법이다. 레이가 그 지경까지 된 까닭이 가장 의문이었다. 그 정신병에도 레이는 신경조차 안 쓰는 눈치였다. 그러나 내 판단에 레이에게는 치료가 시급했다.
레이의 이웃에게 전해들은 대로 봄에도 온몸을 감싸고 돌아다니는 그를 보는 순간, 내가 느낀 감정은 어떤 형용사를 동원해도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건 정말로 충격이었다. 정신과 치료만큼은 강경히 요구했는데도 레이는 요지부동이었다.
시간이 깊어 가도 알 수 없기만 했다. 레이의 금발은 절정의 D장조처럼 눈부셨지만, 그의 마음은 흰색을 섞을수록 탁해지기만 하는 회색 같았다. 도통 알 수 없었다. 여기에 생각이 닿자 갑자기 말도 못하리만치 울적해졌다.
어떻든…….
나를 원한다고 했으니까.
괜찮았다. 아직은 레이에게 준비가 덜됐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올해는 50년 만의 최고 한파라고 기상청에서 난리였다. 그리고 나는 작년 이맘때 레이의 집을 방문했을 무렵, 그가 인형 눈알을 달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먹고살 길이 막막하면 설마 내게로 오지 않겠는가. 겨울이 수그러들 때까지 같이 살자고 제의한 후 집에 들인다, 그런 다음 빌어먹을 헌책방은 꿈도 못 꾸게끔 확실하게 호강시킨다…….
이것이 2주간 정성껏 주물럭거린 시나리오였다. 프리 프로덕션 작업은 모두 마쳤다. 령 감시팀도 어제를 기해 철수시켰다. 오늘은 드디어 작업 개시일이었다. 성공적인 작품이 되리라 확신했다. 반드시 그래야 했다.
멀리서 42번가가 형체를 드러냈다. 먹장구름에서 눈보라가 출혈처럼 쏟아졌다. 늦은 오후의 하늘은 벌써 밤처럼 컴컴했다. 42번가 광장 한복판에서 메두사 목을 높이 치켜든 페르세우스의 청동 나신이 오늘따라 유난히 추워 보였다.
내 코트라도 벗어서 걸쳐 주고 싶군.
코웃음을 치며 페르세우스를 훌쩍 지나쳤다. 차를 적당한 곳에 세워 놓고 레이의 헌책방으로 향했다. 메마른 바람이 어깨를 스쳤다. 거리에는 차가운 침묵뿐이었다. 이즈음에는 세상의 모든 것이 얼어붙는다. 가혹한 불황만이 눈과 함께 춤추는 시기였다.
담쟁이덩굴을 껴입은 헌책방이 저만치서 보였다. 띄엄띄엄 선 가로등 불빛이 책가게를 힘없이 눈짓하고 있었다. 문을 열기 전 잠시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성에가 낀 창문 너머로 책장 귀퉁이에 앉아 있는 레이가 보였다. 눈물 어린 망막에 맺힌 상처럼 형체가 어슴푸레했다. 먼지투성이 바닥에 구불구불한 아마빛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나는 잠깐 미동하지 못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신기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레이를 볼 때면 항상 가슴 한구석이 지금처럼 저릿하게 내달렸다. 심장이 건널목 신호등으로 변해버린 양 어김없었다.
레이는 대형 화집을 넘기고 있었다. 책장에 고정된 새파란 눈동자가 캄캄한 동굴에서도 뚜렷이 빛나는 코발트 광석 같았다. 최근에 안 사실이지만, 레이의 헌책방은 역사서적과 미술화집을 다량 취급하는 곳으로 42번가의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자못 유명했다.
문을 열고 가게로 들어갔다. 레이가 이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미소를 짓더니 “어서 와요.” 하고는 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나는 “무슨 책을 그리 열심히 봅니까?” 하며 레이에게 다가갔다.
“별거 아니에요.”
레이가 책장을 넘기며 웃었다. 나는 슬그머니 레이의 뒤에 앉아 그를 끌어안았다. 두꺼운 옷을 사이에 두고도 나긋나긋한 몸뚱이가 선명하게 닿았다. 즉각 아랫도리가 뻐근하게 달아올랐다. 하여간에 못 말릴 녀석이었다.
이러니까 변태 소리나 듣지…….
“하하. 별거 아닌 것치고는 표정이 꽤 심각한데요.”
“그러니까 이건, 유럽 왕실 여인들의 초상화를 전문적으로 수록한 책이에요. 내가 못 본 작품들이 많아서요. 특히나 이 공주는 꽤 독특하네요.”
레이의 어투가 퍽 진지했다. 덩달아 나도 화집을 들여다보았다. 박쥐처럼 생긴 여자가 페이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독특해요? 내 눈에는 그저 평범한 아가씨로만 보입니다만.”
“눈썰미가 좋은 줄 알았는데 그림에는 안목이 부족하군요. 잘 봐요. 어디가 특이한지.”
“흐으음…… 글쎄? 내가 키우는 미적 취미라야 보석밖에 더 있습니까. 뭐, 보석 애호가로서 평가하자면, 공주의 옷에 걸린 장신구가 썩 세련되진 않군요. 머리쓰개는 멋지지만. 가득 박힌 진주 때문에 굉장히 부유해 보입니다.”
“그리고?”
“얼굴이 밋밋하게 생겼군요. 그래도 공주답게 단아한 인상입니다만.”
“후후후.”
레이가 웃으면서 공주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인상이 단아하다라……. 이건 「클레베의 안네 공주」라는 작품이에요. 소위 거짓 초상화죠.”
“거짓 초상화?”
“당시에는 사진을 대신한 것이 초상화였어요. 이웃나라 왕족은 자신의 배필을 고를 때 초상화를 참고할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 화가들은 모델을 실물보다 아름답게 그려야 했지요.”
“사진 조작 같은 술수가 옛날에도 있었군요. 재미있는데요.”
“이 그림을 잘 봐요. 좌우가 자로 잰 듯 똑같잖아요. 실제 사람이라면 왼쪽과 오른쪽 얼굴이 다른 것이 자연스럽지요. 어쨌든 이 초상화를 본 영국 왕은 홀딱 반해서 그녀를 아내로 삼기로 결심했죠.”
“저런.”
“그러나 왕은 공주를 본 첫 순간 엄청나게 실망했어요. 왕은 ‘저렇게 못생길 수가! 암말이 따로 없군!’하고 모욕적인 말을 퍼부었죠. 결국 영국 의회는 결혼을 무효로 선포했어요. 그러나 그것은 사실 공주에게는 굉장한 행운이었지요.”
“왜죠? 왕이 외모에만 집착하는 사내라서?”
“비슷해요. 그는 바로 헨리 8세거든요.”
레이가 웃으면서 안네의 뺨을 검지로 툭 쳤다. 그 미소가 상당히 기묘해서 나는 침묵했다.
레이가 책장을 넘기다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아. 추울 텐데 차라도 마실래요?”
“좋습니다.”
카운터에서 레이가 차를 우리는 동안 나는 책장을 넘겼다. 대개의 왕비와 공주는 그저 그런 외모였다. 거짓 초상화가 이 정도라면 실물은 어땠을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몇 페이지 더 넘기자 눈의 여왕이 나왔다. 어렴풋한 밤안개처럼 신비로운 미녀였다. 초상화의 정식 제목을 오늘에야 알았다. 「흰 드레스를 입은 왕비」였다. 미모만큼은 단연 발군이었다.
지나치게 예쁜데. 이 그림도 혹시 거짓 초상화인가.
나는 미심쩍게 도판을 훑어보았다. 레이가 찻잔을 들고 오다가 멈칫했다.
“……그건 왜 그렇게 열심히 봐요?”
“예? 아, 예. 레이의 마돈나 아닙니까. 나도 호기심이 생겨서요.”
“예…….”
레이가 찻잔을 내밀며 앉았다. 당황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마돈나라니. 그런 표현을 쓸 만큼 내가 눈의 여왕에 관심이 많아 보였나요.”
“예. 티가 확 나던데요. 책장에 자작나무 서적만 열 권 넘게 있잖아요. 그리고…….”
당신의 주술도구도 자작나무 가지였지요, 하고 하마터면 말할 뻔했다. 나는 차를 마시며 “대단한 미인이니까요.” 하고 말을 돌렸다.
“그런데 그림에서 왼손 약지의 결혼반지만 빼면 보석이라고는 일절 안 보이는군요. 검고 긴 머리카락과 흰 벨벳 드레스, 심플한 보석 착용이라……. 요즘 봐도 손색없는 세련된 감각인데요. 자기 연출력이 뛰어나고 외모에도 자신감이 대단한 사람이었나 봐요, 하하. 눈의 여왕 별칭이 옷 색깔에도 이유가 있었나 싶군요. 동명의 안데르센 동화에 나온 여왕도 흰 드레스를 입고 있었잖아요.”
“그럴지도요. 그 별칭은 왕국의 이상기후 현상이 지속되며 붙은 거니까. 18세기의 유명희곡 제목이 「하얀 여왕」인 탓도 있을 테고.”
레이가 페이지를 넘겼다. 묘하게 허둥거리는 모습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돈나라는 표현 때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