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유리정원 1-프롤로그 (57/101)

나는 이야기를 하나 하듯 이 보고서를 쓰려 한다.

진실이 무엇이냐는 것은 어떻게 상상하느냐에 달린 문제라고 나는 고향에서 배웠기 때문이다.

―Ursula K. Le Guin, The Left Hand Of Darkness

프롤로그

나는 수화기를 들고 동전을 넣었다. 손에 입김을 분 다음 천천히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몇 번 가고 딸깍 소리가 울렸다.

―음. 뭐냐.

무심한 음성이었다. 나는 잠깐 미동하지 못했다.

그 사람의 목소리다.

레이 아리사가 사랑하는, 포우 메사라의 목소리다.

헤어져 있던 긴 시간 동안 수천 번, 수만 번 귓가에서 울리고 또 울린, 그의 목소리였다. 쥐어짜도 쥐어짜도 산산이 흩어지기만 할 뿐인 달빛 같은 꿈이 아니었다. 고개를 돌리면 연기처럼 가셔 버리는 환각 따위도 아니었다.

현실이었다.

―뭐냐니까.

언젠가처럼, 설핏 노기를 띤 음성이었다.

“나예요.”

짧은 시간 적막이 흘렀다. 그러나 나는 알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그의 감정이 주체할 수 없이 휘청거리고 있었다. 숨 막힐 것 같은 감각이 내 전신을 치달았다.

―……레이.

“예.”

나는 말했다. 사랑한다고. 그때의 거절은 본심이 아니었노라고. 미안하다고. 아직도 내게 마음이 있으면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떠듬떠듬 고백했다.

“보석도, 옷도, 필요 없어요. 내가 원하는 건 당신뿐입니다. 당신입니다. 포우 메사라입니다. 당신의 마음이 알고 싶습니다.”

그러자 단숨에 대답이 돌아왔다.

제 모든 것은 당신이 가져갔습니다. 짠맛이 나는 눈물도, 단단한 뼈도, 뜨겁게 흐르는 피도, 맥박 치는 심장도, 열기를 띤 피부도, 바람에 흔들리는 머리카락도, 빛나는 눈동자도, 날카로운 이빨도, 언어를 토하는 혓바닥도, 붉은 땅을 딛고 선 두 발도, 손짓과 행동, 체세포 하나하나, 마음 한 조각 한 조각, 그리고 영혼까지 그 모든 것이 당신의 소유입니다.

단호한 음성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지는 그 고백은, 거의 울음과도 같았다. 아니, 울음이었다.

―기다려요.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거기 어딥니까?

메사라가 말했다. 나는 장소를 말한 뒤 전화를 끊고 공중전화 박스를 나왔다. 8분에 걸친 통화였다.

단 8분 만에…….

뭔가 기묘한 기분에, 나는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창백한 태양이 잿빛하늘을 어슴푸레 밝히고 있었다. 우두커니 선 낡은 골목으로 눈이 뚝뚝 떨어졌다. 비명을 지르는 바람이 캄캄한 거리를 휩쓸고 지나가는 늦은 오후였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걸음을 옮겼다.

단 8분 만에.

다시 한번 멍하게 뇌까렸다.

메사라와 만나기로 한 카페 앞 가로등에 등을 기댔다. 손톱을 세운 눈발이 사납게 몰아쳤다. 쇠창살에 매달린 간판들이 가늘게 몸을 떨었다. 시간이 느릿느릿 흘러갔다. 그래도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곧 그를 만난다. 포우 메사라를 만난다. 내가 사랑하는 포우 메사라를 만난다.

홀연, 나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눈꽃이 부딪쳐 허물어지는 도로 끝에서 붉은 빛이 반짝거렸다. 희미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미칠 듯이 몰아치는 눈꽃도 잊어버린 채 숨도 쉬지 못하고 불빛을 바라보았다. 불빛이 차츰차츰 커져 갔다.

그 사람이다…….

포우 메사라가, 레이 아리사에게 달려오고 있다.

자동차가 저만치서 멈춰 섰다. 문이 확 열리며 장신의 남자가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가 나를 향해 팔을 활짝 벌렸다. 나는 그에게로 달려갔다. 그가 나를 끌어안았다. 나도 그를 끌어안았다. 삽시간이었다. 단 8초도 안 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긴 시간 내 육신을 잔인하게 짓밟은 분침소리가 산산이 증발되는 것을 느꼈다. 눈물도 키스도 없었다. 단지 포옹뿐이었다. 끌어안고 끌어안겨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죽음마저 몰아내 버릴 듯한 억센 얽힘이었다. 파리하게 질린 입술에서 침묵만이 풀려나오는 시간이었다.

한참 뒤에야 나는 그의 등에서 손을 풀었다.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엉망이었다. 술 냄새까지 지독했다. 그러나 망상이나 환각 따위가 아닌, 체온을 띠고 맥박이 생생히 박동치는, 살아 있는 포우 메사라였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의 차가운 뺨을 만졌다.

“추워요. 다른 곳으로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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