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 .M─ (56/101)

23 .M─

그날따라 잿빛 하늘에서 하얀 결정체가 미치도록 휘몰아쳤다. 하루에도 몇 번씩 직종을 갈아 치울 것을 결심하며 찌푸린 얼굴로 술잔을 기울이는 퇴물 사립탐정처럼, 그날도 어김없이 업무실에 처박혀 보드카를 퍼마시던 내게 돌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레이였다. 기적 같았다. 아니, 명백한 기적이었다.

날아갔던 레이가 되돌아왔다. 나를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그때의 거절은 본심이 아니었다고 했다. 미안하다고 말했다. 아직도 자신에게 마음이 있으면 새로 시작하고 싶다고 했다.

그의 말이 눈처럼 쌓이는 매순간, 찢어졌던 내 감정이 회귀했다. 삽시간에 온몸으로 온기가 퍼져나갔다. 마비되었던 육체에 체온과 숨결이 스며들었다.

그리고 나는 되살아났다. 맥박이 뛰고 눈이 뜨였다. 레이는 피그말리온이 되어 내게 생명을 불어넣었다.

당장 업무실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단숨에 42번가에 도착했다. 갈가리 흩어지는 눈꽃 속에서 레이가 서 있었다. 그가 시야에 들어차는 순간, 거리가 홀연 안개 같은 정적에 휩싸였다. 모든 것이 정지했다. 그리고 그때까지 나를 짓눌러 온 잔인하고 난폭한 절망감이, 붉은 커튼 뒤로 퇴장하는 마술사처럼 삽시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가 힘껏 달려왔다. 내 품으로 뛰어들듯 안겼다. 나는 그를 끌어안았다. 그도 나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지금 내 옆에서 자고 있다.

이제는 차 창문 너머로 몰래 그를 훔쳐보지 않아도 되었다. 차갑고 막막한 한밤중을 혼자서만 지새우는 나날도 저 멀리로 사라졌다.

메마른 시간이 물기를 띠며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흘러왔다. 정지해 있던 음악이 피리 소리와 북소리를 울리며 연주를 시작했다. 땅 끝 너머에서 꼬리를 그리며 불꽃이 치솟았다.

이제 우리는 함께였다.

보석도, 옷도 필요 없어요. 제가 원하는 건 당신뿐입니다.

레이가 말했다.

당신입니다. 포우 메사라입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날 밤 나는 이상할 만큼 지독한 피로감에 내몰렸다. 그것은 치열한 결투를 끝낸 직후 몰려오는 고단함과도 비슷했다. 그날 아주 오랜만에 정신을 잃다시피 잠이 들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내 의식을 움켜쥐고 늪처럼 깊고 깊은 어딘가로 이끌었다. 꿈에서 나는 기나긴, 헤아릴 수 없이 기나긴 시간을 여행했다. 그 길목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암흑뿐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무거운 하늘이 보였다. 그리고 끝없이 드넓은 황무지가 내 앞으로 펼쳐졌다.

깊은 물 밑같이 차가운 어둠이 내려앉는 초저녁이었다. 황무지는 얼어붙은 겨울 오솔길처럼 침묵에 잠겨 있었다. 불현듯 무엇인가가 내 시선을 잡아끌었다. 앙상하게 마른 자작나무였다. 갈바람을 고스란히 받고 있는 자작나무 가지 아래에서 검은 그림자가 위태로이 흔들렸다. 송장이었다. 자작나무 가지에 줄을 늘어뜨린 채 목을 매고서, 심술궂은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왜일까. 왜 하필 자작나무에 목을 매 자살했을까.

익숙한 감각이 온몸을 감쌌다. 그것은 가방도, 돈도, 목적지도 잊은 채 정처 없이 떠도는 여행자의 고독감과도 비슷했다.

정처 없이 떠도는 여행자라……. 틀리진 않지.

나는 웃었다. 시체를 매단 채 어둠에 파묻히는 자작나무를 재차 쳐다보았다.

저 시체를 매단 것이 버드나무였다면, 은전 서른 닢에 어떤 이를 팔아치운 죄책감 탓일까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저건 자작나무 아닌가. 헛된 탐욕에 눈이 어두워 아내를 참혹하게 살해하기라도 한 것일까.

나는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뇌까렸다. 대답은 없었다. 돌아오는 것은 황량한 침묵뿐이었다. 알고 있다. 아무리 부르고 또 불러도, 목이 쉬어 잠길 때까지 외쳐도, 이 이름에 대답할 사람은 이제는 없었다. 그 사람은 사라졌으니까. 오래전에 죽었으니까.

이미 31년 전에 우리는 끝났다. 매혹적인 첫사랑은 썩어 버려, 악취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31년 전 축제의 밤, 축복하듯 환하게 빛나던 달은 어느새 파리하게 질린 낯빛으로 나를 말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왕관과 푸른빛 망토만을 우두커니 걸친 앙상한 해골로 변해 버렸다. 나는 그 사람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다. 내게 남은 것은 죽는 날까지 그 사람을 회고할 기나긴 시간과 낡은 초상화 한 점뿐이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통곡하는 바람이 황무지를 아스라이 휩쓸었다. 붉디붉은 잔인한 땅에는 잡초마저 돋아 있지 않았다. 단지 몇 그루의 앙상한 자작나무뿐이었다.

나는 중얼거렸다.

「이곳이 좋겠군.」

언제부터인가 뺨이 간지러웠다. 잠결에도 뭐지…… 하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나는 급히 몸을 일으켰다. 레이가 미소를 지으며 손을 거두었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레이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그때가 눈앞으로 되살아났다. 정신이 나가 버린 레이를 집으로 데려왔던 그때와 비슷했다. 그날도 나는 깊은 잠을 잤고, 어느 순간 뺨이 간지러워 황급히 눈을 떴다. 그리고 지금처럼 레이는 웃으면서 옆으로 손을 치웠었다.

이게 정말 현실인가. 지금 나는 레이가 그리운 나머지 그날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눈꽃이 갈가리 흩어지는 거리에서 어제 우리가 나누었던 열렬한 포옹은 혹시, 알코올이 빚어낸 망상 아닐까.

“제가…….”

나는 충동적으로 말했다.

“누구로 보입니까.”

“예?”

레이가 두 눈을 깜박거렸다. 어딘가 허를 찔린 듯, 푸른 눈동자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긴장감을 떨쳐내지 못하고 레이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의 입에서 나올 대답이 두려웠다. 왕? 아니면 이번에도 남자?

이내 레이가 미소를 지었다.

“누구로 보이긴요. 포우 메사라로 보이지요.”

차분하면서도 단호한 어투였다.

“아.”

나는 반사적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비로소 안도감이 몰려왔다. 물거품 같은 망상이 아니었다. 허탈한 여운만 남기는 꿈도 아니었다.

현실이었다.

“미안합니다. 아직도 실감이 안 나서 제가 그만 바보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괜찮아요? 악몽을 꾸는 것 같아서 깨웠어요.”

“악몽이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꿈을 꾼 것은 확실했지만 기억은 잘 나지 않았다. 어딘가를 지치고 고단하게 방랑하던 느낌만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몸을 비틀면서 신음했어요. 땀도 많이 흘리고.”

“그랬군요. 컨디션이 안 좋아서 가위에 눌렸나 봅니다.”

“그런데 아까 그 질문은 무슨 뜻이에요? 당신이 누구로 보이냐니……. 설마 제가 당신을 다른 사람과 헷갈릴까 봐 그랬어요?”

레이가 조금 멈칫거리며 물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예전에 당신이 나를 몰라봤거든요. 레이는 기억 못하겠지만, 일주일간 당신과 제가 함께 지낸 적 있어요. 그때 저를 전혀 몰라보았죠. 내가 누구냐고 물어볼 때마다 당신은 그저 남자라고만 답했어요.”

레이는 말을 잊은 표정이었다. 나는 뒤늦게 아차 했다. 레이 입장에서는 자신이 정신이상 증세로 사람을 몰라보기까지 했다는 이야기가 충격적으로 들릴 터였다.

“제가 실수했군요. 당신에게 괜한 말을 했습니다.”

“아니에요.”

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약속하지요. 앞으로는 제가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거나 다른 사람과 헷갈릴 일은 없어요.”

이번에도 예의 차분하면서도 단호한 어조였다. 왠지 어색한 기분에 나는 고개를 돌리다가 놀랐다. 벽시계가 벌써 오후 네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런, 제가 너무 많이 잤군요. 배 안 고픕니까?”

그때와 똑같은 질문을 하자, 레이가 웃었다. 이 또한 예전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갈증이 치달았다. 꿈이 아니라 현실임을 알면서도, 나는 또 한 번 충동적으로 말했다.

“레이.”

“예.”

“사랑합니다.”

대답은 주저 없이 돌아왔다.

“저도요.”

“진심입니까.”

“예.”

레이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레이 아리사는 포우 메사라를 사랑합니다.”

“다시 한번 말해 주십시오.”

“레이 아리사는 포우 메사라를 사랑합니다.”

몇 번이고 물었다. 그때마다 레이는 대답했다.

레이 아리사는 포우 메사라를 사랑합니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나를 사로잡았다. 축포가 명멸하는 밤하늘 아래에서 함께 춤추던 그때처럼, 시간도, 공간도, 모든 것이 사라졌다. 이 세상에서 나와 레이, 두 사람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다시 한번 똑똑히 깨우쳤다. 나는 레이에게 사로잡혔다고. 포우 메사라의 영혼은 레이 아리사의 소유라고.

나는 레이의 손을 힘껏 붙들었다. 그리고 어제처럼 다시 열렬하게 고백했다.

레이. 제 모든 것은 당신이 가져갔습니다.

짠맛이 나는 눈물도, 단단한 뼈도, 뜨겁게 흐르는 피도, 맥박 치는 심장도, 열기를 띤 피부도, 바람에 흔들리는 머리카락도, 빛나는 눈동자도, 날카로운 이빨도, 언어를 토하는 혓바닥도, 붉은 땅을 딛고 선 두 발도, 손짓과 행동, 체세포 하나하나, 마음 한 조각 한 조각, 그리고 영혼까지 그 모든 것이 당신의 소유입니다. 마지막까지 당신에게 제 모든 것을 바칠 겁니다.

포우 메사라는 레이 아리사를 사랑합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하고자 여기에 태어났습니다. 앞으로 두 번 다시 당신을 놓치지 않겠습니다.

죽는 날까지 저는 당신과 함께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눈의 여왕 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