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L.
“로트 후작에 대해서 말해 봐.”
“멍청합니다.”
“그것뿐이야?”
“예.”
부장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노트북 자판을 두들겼다. 취조 초반에는 내 화법이 괴상하다고 투덜거렸었다. “평가 말고 정보를 말하란 말이야, 정보를.” 하고 다그쳤었다.
여기 온 지 일주일이 지났다. 심심했다. 방에 틀어박혀 시간을 물처럼 흘려보내는 데 익숙한 내가 지루함을 느꼈다. 기력이 제법 돌아왔다는 증거일까.
남는 시간은 방을 빙빙 거닐며 몸 회복에 신경 썼다. 건강에 관심이 있어서는 아니고, 심심해서 그랬다. 시계가 없어서 짐작만 할 뿐이지만 하루에 서너 시간을 취조당하는 듯했다.
언제나 스네이크와 부장이 와서 내게 정보를 얻어갔다. 귀족들 이름을 알파벳순으로 정리해 하나씩 질문을 던졌다. 생각지도 않은 이름이 몇 개 있었다. 기존 정쟁구도에 변동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스네이크는 오늘도 아무 말 없이 이쪽을 노려보기만 했다. 의외로 할일 없는 작자 같았다. 스네이크와 함께 언제나 찾아오는 부장은 소위 ‘단정한 음성’이었다. 녹음기와 노트북을 들고 와서 내가 밝히는 정보를 녹취하고 메모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단정한 음성이 노트북을 덮고 일어섰다. 스네이크와 함께 방을 나갔다.
침대에 드러누웠다. 일주일 넘는 취조에서 마넨 경에 대한 질문은 하나도 없었다. 마넨 경은 죽었거나 완벽하게 몰락한 것이다. 씁쓸했다. 십 년간 내 상담을 받아 로터스까지 올라갔건만, 물욕으로 한순간에 파멸해 버렸다. 그래도 그 나이까지 그만한 영화를 누렸으면 괜찮게 산 셈이었다.
어제는 단정한 음성에게 슬쩍 질문했다.
“제가 어떻게 꼬리를 밟혔죠.”
스네이크가 령을 믿지 않는다며, 울프삭은 불만이 극심하던 터였다. 그러던 스네이크가 마넨 경에게 령에 관하여 직접적으로 캐물을 가능성은 희박하리라 추측했다. 그 점을 염두에 둔 유도질문이었다.
단정한 음성은 내 유도질문에 넘어갔다.
“우리가 바보인 줄 알아? 그렇게나 악수를 해 대는데 누가 모르겠…….”
바로 그때 스네이크가 채찍으로 바닥을 후려쳤다. 단정한 음성이 멈칫했다. 뭔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
짧은 시간 침묵이 흘렀다. 단정한 음성의 미세하게 떨리는 어깨에서 노기가 역력하게 드러났다. 나도 긴장감으로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별다른 조치 없이 방을 나가 버렸다.
그래도 대단한 프로들이었다. 가면무도회에서 있었던 일로 스네이크와 단정한 음성은 아무래도 껄끄러웠다. 혹여 성적인 행동을 취할 가능성에 겁을 먹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저들은 그 일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당시 상당히 친절하게 굴던 단정한 음성은 언제 그랬냐는 듯 철두철미하게 질문만 던졌다. 말투도 판이했다. 스네이크는 자리만 지킬 뿐이었지만 결정적인 부분에서는 채찍으로 바닥을 후려갈기며 제동을 걸었다. 내가 슬쩍슬쩍 던지는 유도질문을 단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 관찰력이 무서울 만치 뛰어났다. 그리고 과묵했다. 소위 ‘채찍으로 모든 걸 말하는 사나이’였다.
나는 하나씩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스네이크는 언론사 건을 계기로 마넨 경의 뒤에 령이 도사렸으리라 판단한 모양이다. 그때 일은 내 능력이 아니었다면 스네이크에게 질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언론사 건 이후 스네이크는 마넨 경을 면밀히 관찰한 뒤 악수를 주목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카타콤 발전소 건에 느꼈던 내 불길한 직감도 아귀가 들어맞았다. 함정이었다.
스네이크가 울프삭까지 속여 가며 덫을 친 것이다. 내 투시주술을 역이용하여 방심을 유도한 다음, 마넨 경이 제 발로 덫에 걸리게끔 교묘히 조종했다. 그리고 이건 섣부른 짐작일지 모르겠지만, 울프삭까지 스네이크에게 큰 화를 입었을 확률이 높았다. 울프삭은 령을 증오했다. 그런 령을 울프삭이 지금껏 살려 둘 리 만무했다.
여기까지 전부 적중했다면 본부장 스네이크는 실로 무서운 사내였다. 악수를 눈치 채려면 어설픈 추리력으로는 불가능하리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무엇보다도 초자연적인 현상은 사람들이 무시하기 마련이다. 스네이크는 오직 직감으로 그것을 꿰뚫어보았으리라. 소름이 돋았다. 역시 적으로 돌리면 안 될 남자였다.
스네이크뿐만 아니라 휘하 부장들도 노련했다. 단정한 음성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심지어 팀워크까지 좋았다. 자기들끼리는 친근하게 낄낄대지 않았던가.
취조가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때까지는 어떻게든 빠져나갈 계획을 세워야 했다.
약을 먹은 뒤 목욕을 했다. 그래도 대우는 나쁘지 않았다. 가이거를 둘러싼 흉흉한 소문에 의심이 갈 정도였다. 약도 꼬박꼬박 주고 식사도 괜찮았다. 이용가치가 없어지면 단번에 태도를 바꿀 것이 빤하지만.
“한심하다, 한심해.”
메사라는 알고 있을까. 내가 다름 아닌 가이거에 끌려와 취조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지금쯤 뭐하고 있을까. 길거리를 뛰어다니며 시위대를 패는 중일까. 메사라는 그 일을 진심으로 즐기는 것 같았다. 언제나 풍기던 은은한 피 냄새며 간혹 드러내던 잔혹함이 일반대원으로만 머무를 타입으로는 안 보였다.
어쩌면 메사라도 몇 년 뒤에는 부장으로 올라갈지도 모르겠다. 영리하고 손속도 잔혹한 남자였다. 그렇지만 내 생각으로는 직종을 옮기는 편이 그의 장래를 위해서 더 좋을 것 같았다. 스네이크의 구상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껏 가이거는 울프삭의 소모품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메사라 나이도 물어보지 않았다. 몇 살일까. 얼핏 스물다섯, 스물여섯으로 보였는데. 내가 연상일 가능성도 있었다. 내가 스물일곱이나 먹었다고 말하면 메사라는 놀랄 것이다. 소니아에게 담배를 배운 후, 상점에 담배를 사러 가면 판매를 거부당하기 일쑤였다. 그때야 내가 동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 동안이었다.
나는 욕실의 거울을 멍하니 응시했다. 자작나무의 형상이 완전히 가셔 있었다. 소니아의 사진에서 구경했던 얼굴이었다. 여전히 실감이 안 나서 손으로 얼굴을 매만졌다. 신기했다. 소니아의 말대로 예쁘다고 평할 만한 용모였다. 남자가 이래봤자 뭐에 쓰겠냐만.
이런 얼굴이라서 변태들이 덤벼들었던가. 조금 웃겼다.
옷을 입고 침대로 돌아갔다. 머리카락이 발꿈치까지 닿아 있었다. 자작나무는 사라졌지만 아직은 머리카락을 자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메사라가 “밤에도 눈부시게 빛나는 금발”이라고 말했던 그 색깔이었다. 그는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종종 생각에 잠겼다. 어울리지 않게 사색을 좋아하는 남자였다.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만지작하며 픽픽 웃기도 했고 가끔은 으스스한 표정도 지었다. 무슨 상념에 빠져 있을까 궁금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심심한 시간 내내 메사라만 떠올리며 보냈다. 달리 내가 회고할 만한 즐거운 거리는 없었다. 그와의 기억은 아무리 재탕해도 즐겁고 행복했다. 너스레를 떨던 그를 돌이키면 웃음만 나왔다. 변태 취미만 제외하면 재미난 구석이 많은 남자였다. 활력이 넘치고 재치만점이었다. 스포츠에 가깝게 섹스를 한 후에는 “좋았어요?” 하고 짓궂게 꼭 질문했다.
눈썰매를 타고 호텔에 가서 섹스를 한 다음 병원으로 돌아가는 길에서는 나를 업어 주기도 했다. 걸어가겠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전부터 하고 싶었다면서 하하하, 웃었다. 나를 업고서 냅다 뛰다가 빙글빙글 돌기도 하며 장난을 쳤다. 그러면서 “재미있어요?” 하며 질문을 던졌다.
내 머리를 감겨 주고 말려 주는 것도 좋아했다. 병원에 있을 때 내 손으로 감아 본 적이 없었을 정도였다. 직접 감기고 싶다면서 자기가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난리를 피웠다. 인내심이 강할 뿐만 아니라 고집도 센 남자였다. 나와는 판이했다. 돌이켜보니 병원에서의 일로 헤어짐을 겪긴 했지만, 병원에서 쌓은 추억도 많았다.
메사라가 보기에 나는 얼마나 심심한 사람이었을까. 그런 나를 사랑한다니 취향도 특이했다. 도대체 어디가 좋았을까. 문득 “이렇게 말랑말랑한 젖꼭지가 취향이지요.”가 떠올라 버렸다. 낯이 확 달아올랐다.
정말이지 메사라답다…….
우울했다. 메사라를 떠올릴수록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만 간절했다. 그가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다. 그러나 탈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저 무서운 스네이크와 휘하 부장들을 뚫고 도망치기란 불가능했다. 한숨만 푹푹 나왔다.
스네이크에게 령의 주술을 전수해 주겠으니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해 볼까. 마라타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일이었다.
가슴이 갑갑했다. 돌덩이가 짓누르는 것 같았다. 무심결에 버둥대다가 황급히 눈을 떴다. 어둠속에서 누군가가 나를 누르고 있었다. 술 냄새가 엄청났다. 가면을 쓰고 있었다. 부장들 중 한 명이었다. 본능적으로 오싹해졌다.
이런 짓을 당할 줄 조금도 예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래도 무서웠다. 반사적으로 그를 밀쳐내려 힘을 썼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바닥에 닿은 시선에 채찍이 들어왔다. 스네이크였다.
냉정하게 판단하면, 곱게 있는 편이 좋았다. 그를 자극해 보았자 내 탈출에 도움이 될 리는 없었다. 그렇지만 역시 역겨웠다. 나는 사력을 다해 발버둥 쳤다. 스네이크는 어떤 반응도 없었다. 되레 내 상의를 벗겨내고 다리까지 벌려 자신의 허리에 밀착시켰다.
“저, 저리 가요.”
스네이크가 내 팬티를 벗겨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닌 상태인지 아니면 일부러 못 들은 척 하는지 판단이 안 섰다. 나는 그의 어깨를 힘껏 밀쳤다.
“저리 가! 저리 가라니까! 싫어! 싫다구!”
“……싫다라.”
스네이크가 짧게 말했다. 얼음처럼 싸늘한 어투였다. 나는 움찔했다.
처음으로 듣는 스네이크의 목소리였다. 그런데 귀에 익었다. 그러나 그럴 리는 없었다. 나는 다시 한번 고함 쳤다.
“저리 가라니까! 가! 가란 말이야!”
“나야!”
스네이크가 소리 질렀다. 거의 발악하다시피 했다. 그러면서 가면을 확 벗었다.
“나라구!”
메사라였다.
나는 마비가 된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뭐…… 뭐지.
메사라가 확실했다.
가이거 본부장이 스네이크. 스네이크가 메사라.
메사라가 스네이크……?
“가만히 있어.”
메사라가 나직하게 내뱉었다. 분노와 좌절감으로 가득한 어투였다. 술기운으로 이성을 완전히 상실하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가면을 벗은 스네이크의 얼굴이 늑대나 북극곰이었더라도 지금만큼 황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도무지 납득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메사라가 잠깐 나를 더듬더니 몸을 일으켜 옷을 벗었다. 그리고는 다시 몸을 기울였다. 길게 오랫동안 나를 탐했다. 흡사 굶주린 양 덤벼들었다. 메사라에게 떠밀리며 몇 번이고 정신을 놓칠 뻔했다. 술에 취한 와중에도 메사라 특유의 섹스취미는 여전했다. 집요하게 밀어붙였다. 녹초가 되다시피 그를 받았다. 세 번의 체내사정 후에야 메사라가 떨어졌다. 나는 가까스로 숨만 내쉬었다.
메사라는 삽입하며 내 허리를 손아귀로 조여 대는 습관이 있었다. 이번에도 어김없었다. 아니, 평소보다 혹독하게 졸랐다. 게다가 체위까지 세 번 모두 앞이었다. 추측이지만, 예전에 메사라는 내 버릇을 생각해서 되도록 뒤에서 삽입해 줬던 것 같았다. 지금 그는 분노에 가득 차 있는 것이 분명했다.
메사라가 팔로 눈을 가려 막은 채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나는 천장만 쳐다보았다. 메사라가 스네이크였다. 여전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스네이크가 메사라였다?
그가 가이거 대원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메사라는 처음부터 자신의 신분을 숨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본부장이었다니. 스네이크였다니. 황당무계할 따름이었다.
내 눈에 비친 그는 변태이긴 했으나 기본적으로는 쾌활하고 할 일 없이 가난뱅이 집에나 들락날락하는 남자였을 뿐이었다. 그렇건만 스네이크와 메사라가 동일 인물이었다?
묘지에서 망설임 없이 권총을 빼들어 내게 발사했던 스네이크와, 병원 가라고 걸핏하면 성화를 부리던 메사라가 같은 사람이었다?
“내 좆은 꽤 좋았지?”
메사라가 말했다. 술에 취한 어투에서 분노가 어른거렸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갔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 좆은 꽤 좋아하지 않았냐고. 내 좆 빠는 거 좋아했잖아. 다 알아. 말해 봐. 내가 스네이크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서 접근했던 거야? 아니면 그냥 내 좆이 좋아서 만났던 거냐고. 빨리 대답해. 묻고 있잖아.”
“……몰랐어요.”
“모르셨다. 하하하.”
술에 취해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를 의심하는 것일까. 그러나 내 대답은 사실이었다.
뒤늦게야 이해가 갔다. 이 요상하게 좋은 대우며 스네이크가 계속 병상을 지키고 있었던 이유며. 뒤통수가 저렸다. 메사라도 내게 총을 쏜 후 기가 막혔던 모양이었다.
“알아! 알아! 안다고! 몰랐어! 당신은 몰랐다구!”
메사라가 고함쳤다. 주먹으로 매트리스까지 퍽퍽 쳤다. 나도 지금은 뭐가 뭔지 감이 안 잡혔고 메사라도 진정이 필요했다.
“일단 쉬어요.” 하며 시트를 끌어당겨 몸을 돌렸다. 순간 메사라가 나를 확 잡아 자신에게로 향하게 했다.
“등 돌리지 마. 건방진 버르장머리 당장 고쳐. 아주 싫어. 싫다구.”
“…….”
회색 눈동자가 타는 듯이 빛났다. 건방진 버르장머리가 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여하튼 등은 돌리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나는 움직임 없이 있었다.
메사라가 입술을 깨물며 이쪽을 노려보았다. 무의식중에 나는 그의 눈길을 피했다. 메사라가 곧바로 내 턱을 잡아 자신에게로 고정시켰다.
“눈 피하지 마. 나를 똑바로 보란 말이야. 그 버릇도 고쳐.”
메사라가 내 습관을 싫어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껏 직접적으로 표현한 적은 없었다. 섹스 때를 제외하면 외려 내게 맞춰 주려 노력하는 것 같았다. 그랬던 그가 지금 이런 식으로 강압적으로 굴다니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술기운이려니 생각하려 해도 무서웠다.
메사라는 스네이크였다. 지금 저 태도는 평소의 메사라에 스네이크의 본질이 교묘히 섞인 것이었다. 두려움을 참으며 메사라를 응시했다. 메사라는 노여움을 간신히 억누르는 기색이었다. 회색 눈동자에 어린 취기에서 분노와 고통이 일렁거렸다. 얼굴이 엉망이었다. 나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메사라가 숨을 가다듬더니 내게 키스했다. 난폭한 태도와 딴판의 부드럽고 짙은 키스였다. 이윽고 그가 입술을 떼어내고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그에게 꽉 끌어안긴 채 나는 눈만 깜박거렸다.
멍하기만 할 뿐이었다. 메사라가 스네이크였다. 스네이크가 메사라였다. 두 문장만이 머릿속을 왔다 갔다 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메사라와 그의 친구를 처음 만났던 무렵이 떠올랐다. 그들과 나는 섹스를 일곱, 여덟 번은 했다고 기억했다. 반복해서 만나는 내내 그들이 서로를 지칭한 기억은 나지 않았다. 가이거 부장들은 자기들끼리도 실명을 몰랐다. 그렇다면 메사라의 친구도 가이거 부장이었을 확률이 높았다.
스네이크의 심중을 채집한 때가 생각났다. 어딘지 울적한 느낌에서 떠오른 글자는 다름 아닌 내 이름이었다. 스네이크와 관련 있는 동명이인 때문에 우연의 일치거니, 하며 지나쳤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그것은 내 이름이었던 듯했다. 당시 메사라와 나는 헤어진 후였다. 그 일로 울적해하고 있었다면 이도 들어맞았다.
술자리 수행에서 있었던 스네이크의 격한 반응도 비로소 이해가 갔다. 내가 변태들 이야기를 하자 메사라는 ‘모조리 목을 꺾어 주었을 텐데……’ 하며 웃었었다. 그때 그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그는 내게 행패를 부린 변태를 두들길 때도 집요하게 성기를 뭉개 놓았다. 소니아에게 마음이 있느냐며 격렬하게 소리 지르던 것까지 헤아리면, 메사라는 내게 접근하는 남자들을 싫어하고 질투심도 강했다.
스네이크가 던진 고액수표의 의미도 알 것 같았다. 메사라는 내 궁상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코트며 정령 이야기며 인형눈알 다는 일이며 건강에 무관심한 면모 등등을 비웃거나 혹은 못마땅해 했다. 그런 음란파티의 시종으로 일하며 아무 남자에나 안기는 내게 어처구니가 없었을 것이다.
메사라는 내게 전화를 받자마자 “음. 뭐냐.” 했다. 내게 건네던 평상시 어투와 판이했다. 보통의 사람이 “음. 뭐냐.” 하고 전화를 받던가? 그리고 머뭇거리는 내게 침묵을 지키다가 “뭐냐니까.” 하고 싸늘히 내뱉던 그 목소리. 부하를 다그치는 어투와도 비슷했다. 메사라의 휴대전화는 스네이크의 전용 휴대전화였던 것이다.
두려움이 몰려들었다. 메사라가 일반대원으로만 머무를 남자는 아니라고 생각하긴 했다. 그렇다고 부장도 아니고 스네이크라는 사실에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런 것도 모르고 아니, 우리는 그런 것도 모르고 서로를 노려왔던 것이다. 무서웠다. 한기가 전신을 감쌌다.
메사라도 내 정체를 안 후 비슷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얼마나 전율했을까. 소름 끼쳤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지독히 잔인한 장난을 친 것만 같았다. 메사라는 내 집과 헌책방을 수색해 상담노트를 찾아냈을 것이다. 그 추악한 기록장을 보며 메사라는 어떤 기분을 맛보았을까. 상상하기 싫었다.
메사라는 내게 보여 준 짓궂은 면모 외의 것을 이제껏 숨기고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좋아했던 그의 모습이 거짓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필이면 메사라가 스네이크인 까닭이 여전히 아연할 뿐이었다. 그리고 내 추악한 면모를 메사라에게 들켜 버린 이 상황이 지독스레 끔찍했다. 사필귀정인가. 나는 벌을 받은 것이다.
메사라가 “으음…….” 하며 나를 끌어안았다. 숨이 막혔다. 속이 갑갑했지만 그가 정신을 차리는 것이 급선무였다. 나를 쏜 일로 그도 매우 괴로워했을 것이다. 그가 그동안 침묵을 지킨 이유를 이해했다. 자신의 신분을 어떻게 드러내야 할지 많이 고민했을 것이다. 내가 병상에서 발작하는 동안 그가 느꼈을 고통도 컸으리라 보았다.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가슴이 아팠다.
문득 메사라가 몸을 뒤척거리며 중얼거렸다.
“찰나라도 좋으니 한 번만…… Whitebirch.”
나는 멍하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