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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M─ (52/101)

19 .M─

업무실로 돌아왔다. 온몸이 땀으로 흥건했다. 부장들에게 나는 요즘 신나는 안주거리였다. 도대체 어떻게 될지 무진장 궁금한 모양이었다. 좆같았다.

오늘 레이를 퇴원시켜 본부 고문소에 구금했다. 냉정해야 했다. 부장들은 령에게 여전히 경계심을 풀지 않고 있었다. 레이의 상태가 호전되자마자 부장들은 내가 령에게 정보를 얻어내겠다고 한 약속을 지켜 달라고 요구했다. 취조가 끝난 뒤에는 살리든지 죽이든지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했다.

나는 그들의 요구를 수락했다. 우리는 동류였다.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하는 것도 공통점이었다.

방을 청소한 후 이것저것 넣어 놓긴 했으나 기분이 씁쓸했다. 내일부터는 취조 시작이었다. 쿠퍼헤드와 내가 맡기로 했으나 그가 강경하게 나온다면 문제였다. 고문 행위는 일절 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상황이 여러모로 울적했다. 그래도 레이의 이상증세가 심장발작 뒤부터는 완전히 사라져서 다행이었다.

심장발작을 되살리면 끔찍하기만 했다. 코앞에서 직접 목격했다. 레이의 심장이 한 번 완전히 멎었다가 다시 뛰었다. 그 순간이 내 온몸을 짓눌렀다. 전신이 불길에 타오르는 느낌이었다. 의사가 말하길 조금만 늦었으면 뇌손상까지 갔을 거라고 했다. 소름 끼쳤다.

이후 레이는 순조롭게 회복했다. 시큰둥하고 힘없는 본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덕분에 내 두 달간의 수난도 함께 막을 내렸다. 실로 돌이키고 싶지 않은 잔인한 시간이었다. 죽을 때까지 못 잊을 고통이었다. 지옥이었다. 그것 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도가 없었다.

보드카를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어떡하면 그에게 내 사정을 설명할 수 있을까. 가면을 벗는다. 그런 다음 말한다. 제가 사실은 스네이크입니다. 그 다음은?

감이 안 잡혔다. 넉살과 거짓말과 공갈협박은 내 주특기였는데 레이 앞에서는 운을 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발휘해 봤자 먹힐 정황도 아니었다. 처음부터 레이는 내 본모습을 간파할 만치 눈썰미가 좋았다.

가슴 한구석이 갑갑했다. 그도 좋고 나도 좋을 뚜렷한 방안이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역시 스플래터 호러물이나 써야 할 시나리오 작가였다.

다음날부터 레이의 취조에 들어갔다. 취조는 하루 세 시간으로 정해 놓았다. 강경하게 나오면 어쩌나 했던 걱정이 무색하리만치 레이는 술술 대답해 주었다. 예상했던 대로 노트 기록보다 자세한 정보가 그의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었다.

쿠퍼헤드가 신문하는 내내 나는 침묵을 지켰다. 레이는 가끔 나를 흘끗거렸다. ‘저 양반, 저러고 있으려면 뭐하려고 여기 오나’ 하는 눈초리였다.

기분이 묘했다. 레이는 스네이크와 하룻밤을 지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썩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무심히 대답하는 태도도 기이했다. 내게 보여 주던 일상적인 자태 그대로였다. 그러나 입에서 나오는 진술은 령이었다. 관찰하고 있노라면 야릇했다.

포우 메사라가 아닌 스네이크의 관점에서 판단하자면, 그는 취조에 순응하면서도 우리를 면밀히 관찰하고 있었다. 탈출이나 살길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쿠퍼헤드도 내 의견에 동의했다.

“금발, 영리해. 아닌 척하면서도 슬쩍슬쩍 찔러 보는데 가끔은 나도 넘어가거든.”

하여간에 답답했다. 짜증이 치솟았다. 술만 들이켜는 나날이었다. 모든 상황이 원망스럽고 열불이 터졌다. 알토넨은 허수아비 역할에 만족하는 기색이었고, 왕세자비는 무신귀족 측에서 추대했고, 의원선출 대회에서는 무신귀족들의 압승이 확실시되고 있었다. 그 짓거리의 주역인 나만 엉망이었다. 좆같았다.

“있어?”

레오파드가 들어왔다.

“음. 뭐냐.”

“뭐긴. 지금이 몇 신데 퇴근 안 해?”

밤 열한 시였다. 레오파드가 혀를 찼다.

“본부장님, 레드폭스에게는 지나치게 저자세 아닌가. 술은 왜 그렇게 마셔 대. 토요일인데도 퇴근도 안 하고 오후부터 지금껏 술만 마셨잖아.”

“간섭 마.”

“뭐가 문제냐. 레드폭스는 이제 회복 중이잖아. 네 소원대로 됐잖아. 심장발작 때 침대 머리 붙잡고 죽지만 말아 달라며 울부짖지 않았던가.”

심장발작 때 레오파드가 옆에 있었다. 쿠퍼헤드였다면 나는 부장들 앞에서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했을 것이다. 담배를 피워 물었다. 엿 같았다.

레오파드가 내게서 술잔을 뺏어 바닥에 부어 버렸다.

“그만 퍼마셔. 이것 참, 하여튼 아닐 것 같은 인간이 사고를 치면 단단히 친다니까. 너는 우리 리더 아냐. 부장들도 레드폭스에게 정보만 다 캐내면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이래. 이유가 뭐야. 쿠퍼헤드가 말하던데 너, 취조 내내 쥐죽은 듯 있다며. 수작의 황제께서 대체 왜 이러시나.”

“내버려둬.”

레오파드는 이쪽을 한동안 노려보더니 업무실을 나갔다. 나는 유리잔으로 보드카를 들이부었다. 칠흑 같은 어둠이 전신을 둘러쌌다. 언젠가 꿈에서 본 좆같았던 상황과도 흡사했다. 마누라 초상화를 앞에 두고 술을 들이켜던 내 꼴이 되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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