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L.
나는 요즘 재갈을 물고 있었다. 발작 중에 혀를 깨문 모양이었다. 독한 자작나무가 이랬을 리는 없고, 레이 아리사가 저지른 짓이 분명했다. 겁 많은 내가 자살을 시도하다니 말이 되지 않았다. 아마도 실수로 혀를 깨문 듯했다.
밤에 간혹 정신을 차리면 어김없이 사신 가면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요즘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보통 둘, 간혹 셋씩 짝을 지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랐다. 먼데서 봐도 무서운 모습일진대 밀폐된 공간에 함께 있자니 무시무시했다.
왜 저럴까, 저 작자들. 내가 주술사라서 저러나. 갑작스레 자리를 털고 일어나 시공 저편으로 훨훨 날아갈까 봐 감시하는 중인가. 그게 가능하다면 자작나무부터 패 줬을 것이다.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눈을 감았다. 극에 달하는 고문으로 요즘에는 도통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고문 수위가 엄청났다. 누군가에게 지시를 받은 것이 확실했다. 시간을 헤아려 보니 두 달째로 접어드는 것 같았다.
정신 차려, 레이 아리사. 환각이야. 환각일 뿐이라고.
다 지난 일이고.
제아무리 뇌까려도 소용없었다. 곧 다가올 소녀형구 고문을 상상하면 소름부터 돋았다. 하여간에 데이탄즈는 찢어죽일 자식이었다. 자작나무를 저렇게 해 놓고서 오십 년이나 더 잘 먹고 잘살았다. 개새끼였다. 나는 욕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데이탄즈를 향해서는 얼마든지 퍼부을 수 있었다.
더욱 열 받는 건, 꼴에 구국영웅이라느니 화려한 치세를 자랑한 왕 운운하며 평가까지 좋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점에서는 자작나무가 영리한 짓을 하긴 한 거였다. 「눈의 여왕」 드라마나 영화에서 묘사되는 데이탄즈는 으레 우유부단한 마마보이였다. 육백 년 전에 죽어 버린 놈이 22세기 사람들에게 제 명예가 훼손되든 말든 무슨 신경을 쓰겠냐만.
결론은 나만 고생이다.
미간을 찡그렸다. 재갈 때문에 짜증이 났다. 사소한 것에도 분노가 솟구쳤다.
이러면 안 된다, 레이 아리사.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어떻게든 자작나무를 극복하고 가이거에서 탈출해야 했다. 앞날이 아득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마넨 경과 계약하지 않았다면 좋았을걸, 하는 후회까지 들었다. 그랬다면 지금 가까이서 노려보는 가이거 부장들 따위 삽시간에 개구리로 만들어 버리고 도망쳤을 것이다.
그러나 계약은 마넨 경이 죽어도 풀리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내가 운 좋게 자작나무를 극복하더라도 가이거에게 끌려가 고문당해 죽을 가능성이 컸다.
메사라나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지 않아도 자작나무 때문에 가뜩이나 우울했다. 메사라와 병원에서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던 때를 떠올렸다.
나도 참, 어쩌자고 그런 이야기나 했을까…….
정령 이야기는 이따금 꿈에서 본 환상이었다. 어릴 적에 나는 내가 기형아인 줄 알았다. 얼굴에 겹치는 썩어문드러진 자작나무의 형상 때문이었다. 나이가 들어서 내 상황을 깨달은 뒤, 자작나무와 데이탄즈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았다. 그때 느낀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후 그 꿈을 꾸었다.
정확히는, 자작나무의 초상화가 데이탄즈의 서재에 보관되었다는 기록을 읽은 뒤부터였다. 데이탄즈는 업무가 끝나면 서재에 처박혀 있기 일쑤였다고 했다. 그 기록에서 비롯된 내 망상 내지는 대리만족일 것이다.
꿈에서 데이탄즈는 자작나무의 초상화 앞에서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그러면서 ‘십 년마다 십 분만이라도 당신을 볼 수 있다면…… 찰나라도 좋으니 한 번만이라도……’ 하고 중얼거렸다. 온몸에 우울함이 서려 있었다. 많이 늙은 꼴을 보니 오랜 세월 동안 자작나무 때문에 심하게 고통 받은 듯했다. 살아 있는 주검을 방불케 했다. 엄청나게 고소했다.
그 꿈에서 보인 모습이 사실이라면, 데이탄즈에게 남은 것은 자작나무의 초상화와 기억으로나 되살릴 수밖에 없는 짧은 추억뿐이었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자책감에 평생 짓눌릴 터였다.
그러나 그럴 리 없지.
단 두 번이었다. 기껏 두 번의 만남으로 데이탄즈가 자작나무를 긴 세월 동안 그리워할까? 아니라고 보았다. 헛된 꿈으로 대리만족이나 하는 나에게 코웃음만 나왔다.
그래도 이따금 상상했다. 그 상황이 진실이라면, 데이탄즈는 오십 년간 어떻게 살았을까. 당시는 국가끼리 전쟁이 극심했고 데이탄즈는 왕이었다. 자살도 마음대로 못했을 것이다. 십 년마다 십 분, 아니, 찰나라도 좋으니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어 했다면 보통 깊은 사랑이 아닐 터였다.
그렇게 사랑한 이를 죽여 놓고 칠렐레팔렐레 하다가 나중에야 진실을 깨달았다. 손아귀에 움켜쥔 치세안정의 기초가 사랑하는 사람의 피를 반석 삼은 것임을 뒤늦게 깨우쳤다. 눈앞이 핑핑 도는 기분이지 않을까.
나는 망상에 썩 취미가 없었지만, 이것만큼은 즐거웠다. 알고 있다. 데이탄즈는 고작 여자 때문에 자살할 녀석이 아니었다. 묏자리를 자작나무만 몇 그루 있는 황무지에 정한 것도 우연의 일치라 보았다. 왕국에서 흔하디흔한 나무가 자작나무였다. 멋진 척하고 싶어서 순장도 거부했겠지. 다 떠나서 놈이 자작나무 초상화를 쳐다보는 행위 자체가 자작나무에 대한 모욕이었다. 무슨 낯짝으로 자작나무를 쳐다본단 말인가.
이런 꿀꿀한 이야기를 메사라에게 털어놓다니, 한심했다. 그의 뚱한 반응이 되살아나자 절로 민망했다.
내가 메사라에게 한 이야기는 꿈에서의 상황을 변형한 것이었다. 데이탄즈의 소원대로 차라리 십 년마다 십 분씩 만나 주면 더 악랄한 복수가 될 것 같았다. 정령은 인간에게 무관심하다. 그 무심하고 차가운 모습으로 데이탄즈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십 년마다 십 분씩, 데이탄즈의 기억에 남은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를 완전히 망각한 채로. 멋진 복수 아닌가.
멋지긴.
메사라를 생각하려 했는데 또 이딴 짓이다.
멍하게 천장을 응시했다. 메사라는 지금 뭐하고 있을까. 약속을 어겼으니 얼마나 화가 났을까. 그와 나는 인연이 아닌 모양이었다. 가이거에게 포획된 현 상황에서 내가 살아날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래도 좋았다. 메사라 때문에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감정을 한껏 누렸다. 그리움으로 밤을 지새워 보았고 사랑한다는 말도 직접 해 보았다.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도 깨달았다. 그의 활력에 감싸여 눈이 선사하는 쾌감도 경험했다. 잊을 수 없을 것이다. 27년 인생에서 이 정도면 큰 축복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자작나무보다 몇 만 배 행복하게 산 셈이었다.
미간을 찌푸렸다. 재갈 때문에 이제는 참을 수 없으리만치 불편했다. 어찌나 세게 묶어 놓았는지 천과 맞닿은 부위가 쓰라렸다.
갑자기 뺨으로 뭔가가 닿았다. 스네이크가 재갈을 풀고 있었다. 내가 어지간히 끙끙댄 모양이었다. 재갈이 풀려나가니 살 것 같았다. 숨을 들이쉬며 후우, 후우, 했다. 혀가 쓰라렸다. 많이 깨물지는 않은 듯했지만 그래도 상당히 아렸다.
스네이크가 내게 물을 마시게 해 주었다. 그리고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주었다. 참기 어려웠다. 나는 누군가가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정말 싫었다. 설령 가면 속에 숨어 있는 눈초리라도 마찬가지였다. 나름대로 배려를 베푸는 행동이었지만, 나는 지금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었다.
“그건 관둬요.”
스네이크가 멈칫했다. 잠깐 미동 없이 있다가 이윽고 병실을 나가 버렸다. 다른 부장도 뒤따라서 병실을 나갔다.
내가 좀 건방졌나. 그래서 열 받았나.
무서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고이 있을 걸 그랬나 싶어 후회스러웠다. 조금은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시간을 흘려보냈다. 간호사가 들어와 내게 안정제를 투입했다. 정신이 몽롱해지며 다시 잠으로 빠져들었다.
며칠 뒤 자작나무는 소녀형구를 썼다. 온몸에서 흐르는 피가 바닥을 적셨다. 그런 자작나무 앞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보였다. 꺼져 가는 의식 속에서도 자작나무는 그자의 정체를 확인하려 애썼다. 레비탄이었다.
심장발작 후 4주가 지났다. 나는 안대로 눈을 가린 채 가이거 본부로 호송되는 중이었다. 차가 출발한 지 시간이 꽤 지났다. 옆에는 스네이크가 앉아 있었다.
여전히 멍했다. 극복한 것인가. 극복한 게 맞는 것 같았다. 환각이며 생생한 고통이 더는 엄습하지 않았다. 자작나무를 떠올리려면 기억의 서랍을 뒤적거려야 했다.
그렇다면 레이 아리사는 자작나무와 이별을 고한 것이 맞았다. 여전히 실감은 안 났으나, 그래도 이렇게 후련할 수 없었다. 꿈같았다. 기쁘기도 하고 개운하기도 했다. 앞으로는 자작나무를 잊는 일만 남았다. 과연 잊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노력할 예정이었다.
문제는 지금 닥친 일이었다. 가이거 본부로 끌려가서 어떤 일을 당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자동차가 멈췄다. 바깥에서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렸다. 환락가나 시가지 중심부인 듯했다.
레비탄…….
자작나무의 눈에 비친 자가 레비탄이 확실하다면, 소녀형구를 씌우게끔 고문관을 사주한 자는 레비탄이었다. 왕의 도착이 임박한 시기라서 조마조마했던 모양이다. 혹은 데이탄즈가 비밀리에 레비탄에게 연락을 취해 시켰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정작 둘은 결혼 후에는 사이가 시원찮았다는 기록이 있었다. 뭐, 나름대로 둘 다 벌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대단한 여자였다. 죽어 가는 자작나무를 지켜보며 웃고 있었다. 여기서 나는 실소하고 말았다. 자작나무도 레비탄을 저주하지 않았던가.
되로 주고 말로 받았구나.
“스네이크. 어제 말이지.”
앞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단정하고 지적인 목소리였다. 스네이크에게 수표를 건네받아 내게 전했던 부장이었다.
뭔가 묘했다. 친구와 대화하듯 툭툭 건네는 말투가 막연히 상상하던 가이거 부장의 이미지와 한참 동떨어졌다. 상상대로라면 야수처럼 으르렁 소리가 끓어올라야 마땅하건만 되레 지나칠 만큼 멀쩡했다.
“레오파드가 끝내주게 웃기는 사진을 들고 왔거든. 혹시 봤냐. 왜, 알잖아. 그거 말이야, 그거.”
스네이크가 손을 휘적거리는 기척이 났다. 앞에서 웃음이 터지더니 “알았어, 알았다구.” 했다. 다시금 침묵이 가라앉았다.
차가 멈춰서더니 스네이크가 나를 끌어내렸다. 그에게 부축되어 한참을 걸어갔다. 나는 아직도 거동이 불편했다. 문이 열리는 기척이 나더니 “안대 풀어.” 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침침하지만 깨끗한 방이었다. 각오했던 전기의자나 고문 기구는 보이지 않았다. 침대를 비롯해 작은 욕실까지 딸려 있었다.
단정한 목소리가 말했다.
“내일부터 취조 들어간다. 오늘은 쉬어.”
그러고는 스네이크와 함께 나가 버렸다. 어이가 없었다.
이상한 자들이네.
방을 둘러보다가 침대로 느릿느릿 걸어가서 누웠다. 멍하게 천장을 응시했다.
여전히 어색했다. 당장이라도 보란 듯이 자작나무가 확 나타나서 나를 골탕 먹일 것만 같았다. 다행스럽게도 신은 레이 아리사에게 탄탄한 무신경을 선사해 주셨다. 역시 마넨 경과 계약하기를 잘했다. 계약이 아니었다면 이토록 깨끗이 줄을 끊어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쨌든 다음 일은 내일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곯아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