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M─
옆 병실로 들어가 가면을 벗어던졌다. 담배를 급히 뽑아 물고 불을 붙였다. 레오파드가 들어오더니 “나도.” 하며 내 담뱃갑에서 한 개비 꺼내 물었다. 나는 연기를 깊숙이 당겨 빨았다. 진정이 되지 않았다.
처음이었다. 레이의 그런 눈빛은 처음이었다.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다. 매사 우울하고 힘없고 무심한 그가, 저토록 타오르는 눈초리로 상대방을 꼿꼿이 노려보리라고는 추호도 상상하지 못했다. 분노였다. 원한이었다. 그것도 보통 수준이 아니었다. 극도로 악에 받친 눈빛이었다.
당연했다. 나는 그의 가슴에 직접 총알을 박지 않았던가.
“이야. 정말 섬뜩하던데. 레드폭스가 저런 눈빛을 할 줄이야.”
레오파드가 중얼거렸다.
“고문부장으로 일하면서 별의별 스파이며 조폭이며 고관대작들을 혼쭐내 봤지만 저만큼 무시무시한 눈초리는 처음 봤어. 어이, 스네이크. 괜찮아?”
쿠퍼헤드도 뒤따라 들어왔다. 내리 앉아 있으면서 좀이 쑤셨던 모양이었다.
나는 창문을 열고 바깥으로 담뱃재를 털었다. 뿌연 연기가 어둠속으로 흩어졌다.
레이가 입원한 지 한 달째였다. 의식불명에서 깨어나서 한 번의 고비를 넘긴 후, 총상은 순조롭게 치유되어 가는 중이었다.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발생했다. 아무래도 정신이상 증세 같았다. 걸핏하면 온몸을 뒤틀며 비명을 질렀다. 보고 있노라니 내가 고문을 당하는 착각에 사로잡힐 지경이었다.
첫 발작 때는 나와 쿠퍼헤드가 옆에 있었다. 레이가 갑자기 욕설을 퍼부으며 수액 병을 집어던지고 몸부림쳤다. 그 탓에 튜브며 주사바늘이 레이의 온몸을 찢어 놓는 꼴을 목도했다. 지옥이었다. 나와 쿠퍼헤드가 레이의 전신을 붙들었는데 보통 힘이 아니었다. 레이와 우리의 체격 차이를 감안하면 이 또한 광기의 일환이 분명했다.
목이 졸리는 느낌이었다. 내가 방문할 때마다 레이가 가만히 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항상 괴롭게 몸을 뒤틀거나 신음했다. 한 시절 고관대작나리들 깨나 고문해 본 내 안목으로는 예사 수준이 아니었다. 의식을 종종 차리고 조용히 있다는 의사들 주장에 의심만 들었다. 잠깐이나마 얌전해진 모습을 본 때가 오늘이 처음이었다.
닳아 버린 담배를 허공으로 날리고 한 개비를 더 뽑다가 멈칫했다.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인생에 돌이킴이란 존재하지 않아. 모든 비극은 어둠속을 떠도는 바람처럼 되돌아온다네. 그것이 숙명이야, Messara……》
담배에 불을 붙인 후 한 모금 들이마셨다.
숙명이라. 비극은 어둠속을 떠도는 바람처럼 되돌아온다라.
하나는 알 것 같았다. 인생에 돌이킴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만은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아무리 몸부림쳐도 레이의 가슴에 총을 쏴 버린 실수를 돌이킬 수는 없었다. 절대 되돌릴 수 없었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마녀는 내 연애 사업이 엉망이 되리라 예언했다. 더불어서 잘해 보라는 말도 빼먹지 않았다. 의사는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장담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은 상황이 나빠도 나중에는 내 노력 여부에 따라 잘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레이에게 내 신분을 밝힐 일이 아득했지만 애써 낙관해 왔다. 부장들을 다스리는 것이 먼저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지금은 모조리 내팽개치고 자살하고픈 마음뿐이었다. 레이는 손발을 묶어 놓은 줄이 덜렁거릴 정도로 발버둥 쳤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내 살점이 뜯겨나가고 온몸에 못이 박히는 듯했다.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다.
얼마 전, 일을 끝내는 길에 42번가를 지나치면서 레오파드와 함께 레이의 집에 들렀다. 참으로 씁쓸했다. 표현할 수 없는 울적함이 가슴을 후벼 팠다. 노란 테이프가 문 앞에 둘려 있었고 룸은 엉망진창이었다. 레이와 함께 이곳에서 보낸 시간이 눈앞을 스쳤다. 그것은 소중한 추억이었다. 일생 최초로 경험한 사랑의 시간이었다. 궁상이라며 비웃었던 인형눈알 달기도, 열리지 않는 문에 분노하여 격하게 노크하던 때도, 침대를 뒹굴며 그를 탐하던 시간도.
그것이 전부 폐허로 변해 버렸다. 산산이 파괴되었다. 레오파드만 없었다면 룸을 본래대로 정리했을 것이다.
이 손이었다. 그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부숴 버린 주체는 다름 아닌 내 손이었다. 고독하고 불행한 사람을 헤아릴 수 없이 깊은 구덩이로 빠트렸다. 그 사실이 소름끼쳤다. 본의가 아니었다. 그렇더라도 결과가 섬뜩할 만치 처참했다.
덫에 걸린 느낌에 자꾸만 사로잡혔다. 누군가가 파 놓은 견고한 덫으로 내달린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레이를 파멸로 몰아세웠다. 이는 곧, 나도 함께 파멸의 길로 질주한 것이었다. 산산조각 난 사랑과 찢어발겨진 추억을 공중에 뿌려 버리고 암흑으로 뛰어든 것이었다.
끔찍했다. 나는 본능에 휩싸여 폭풍처럼 질주한 29년 인생을 지금껏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것이 나를 여기까지 내몰아 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그럴까. 그래서 이런 것일까. 신은 그래서 레이를 내게 던져 주었을까.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되었을까.
혹시 제물인가. 신은 제물로써 레이를 요구한 것일까. 부장들이 더는 레이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못하리만치 나는 모든 일을 성공적으로 해치웠다. 나도 귀신에 홀린 기분이 들 만큼 술술 풀렸다. 반면 레이는 저 꼴이었다.
포우 메사라여, 너에게 영광스런 권력을 줄 터이니 대신 사랑하는 사람을 바쳐라, 이런 뜻인가. 그런 거였나. 그렇다면 신은 엿이나 먹어야 한다.
만약, 정말로, 내 손아귀에 움켜쥔 이 권력이 레이를 제물삼은 것이라면, 나는 악마에게 혼을 팔아서라도 신에게 대적할 것이다.
모르겠다. 미궁뿐이었다. 제물이 아니라면, 그럼 신이 내게 벌을 내린 것인가.
나는 태어날 때부터 악당이었다. 그 점은 절대 부인하지 않는다. 주제파악을 해야 악당 짓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 내 철학이었다. 마넨과 울프삭 경이 좋은 예였다. 그들도 매한가지의 악당 주제에 신에게 선택받은 양 오만을 떨었고 그것이 몰락을 자초했다. 이런 점부터 나는 철두철미한 악당인 셈이었다.
그러나 벌이라고 쳐도 이건 아니었다. 벌을 내리려면 나를 괴롭힐 일이지 왜 레이란 말인가. 하필 저 불행한 사람에게 아픔을 내린단 말인가.
아니, 어쩌면 그래서 효과적인지도. 그 탓에 나는 깊은 괴로움을 맛보고 있었다. 나라는 녀석은 죽을 때도 “이제 갈 때가 온 게로군.” 하며 덤덤해하고도 남았다. 혹여 고문을 당한다면 “좀더 솜씨를 발휘해 봐. 내가 한수 가르쳐줄까.” 하며 이죽거릴 것이 뻔했다. 지옥에 떨어지면 외려 기뻐하며 이 악마 저 악마에게 권투시합이나 신청하고 돌아다닐 것이다. 그게 나였다.
덫이든 제물이든 벌이든 포우 메사라를 괴롭히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완벽하게 성공했다. 절정의 행복으로 끌어올린 후 곧장 극단의 불행으로 추락시켰다. 과실을 맛보지 않았다면 아픔도 느끼지 못했을 터. 멋진 연주였다. 베토벤이 울고 갈 장중한 교향곡이었다. 브라보! 엿이나 먹어라.
이제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의 아픔이 멎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이상한 게 있어.”
쿠퍼헤드가 불쑥 말했다.
“뭐가.”
“마넨이 말한 거 기억나?”
“무슨 말.”
“령이 자신은 얼마 살지 못한다며 떠났다고 했잖아. 혹시 지금의 상태를 예견한 것이 아닐까. 령은 무서운 능력의 소유자니까, 자기가 죽을 미래도 알지 않았을까.”
쿠퍼헤드가 내 낯을 보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말아야 했다. 여러 번 마넨을 취조한 결과, 레이는 마넨에 한해서만 능력을 발휘할 뿐, 그 외에는 일반인과 똑같음을 알아냈다. 레이는 자신의 정신이상 증세를 알고 병원을 예약했다. 마넨에게 얼마 살지 못한다고 했던 말은 그와 헤어지기 위한 핑계 아니었을까, 하고 막연한 추측만 할 뿐이었다.
육체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것만은 틀림없었다. 예전에도 마음에 걸려서 그에게 검사를 받게 한 터였다. 레이는 무신경하게 지나쳤겠지만, 내가 당시 그에게 받게 했던 검사는 보통의 종합검진이 아니라 초정밀 종합검진이었다. 그때도 이상은 없다고 나왔다.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 밟아 껐다. 가면을 다시 쓰고는 레이의 병실로 돌아갔다. 레이는 천장만 바라볼 뿐 어떤 반응도 없었다. 다시 한번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느꼈다.
간호사가 들어와 레이에게 안정제를 투입했다. 레이가 코를 훌쩍거렸다. 무심한 행동이 평소의 레이다웠다. 이윽고 레이가 스르르 눈을 감더니 수면에 빠졌다.
변함없이 아름다웠다. 오랫동안 병상에 있으면 온몸이 퉁퉁 붓거나 엉망이 되기 십상이건만 레이는 별반 다름없었다. 그것이 되레 기이한 인상을 풍겼다. 부장들은 무섭고 오싹하다고 했다. 인간의 형상을 한 이종족 같다고도 했다.
“레드폭스, 여전히 예쁜데. 저러니까 우리 본부장님이 미련을 못 버리지.”
레오파드가 중얼거렸다.
미련을 못 버린다라…….
물론이었다. 지금도 나는 레이가 떠난다면 망설임 없이 자살을 선택할 것이다. 그가 없는 나는 존재할 수 없었다. 한 달 동안 온갖 끔찍한 고통을 맛보았다. 자살 충동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레이가 살아 있어서 간신히 버텨 온 시간이었다.
신이 포우 메사라에게 고통을 주기 위한 도구로 레이 아리사를 동원했다면, 그것은 진정 탁월한 선택이었다.
어쨌든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마넨은 지금도 지하 고문소에서 끙끙거리는 중이었다. 작자만 보면 피가 끓어올랐다. 레이의 갖은 궁상과 가난이 마넨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십 년 동안 땡전 한 푼 안 주고 레이를 부려먹으며 로터스까지 올라갔다. 그런 주제에 ‘감히 로터스에게’ 운운했다. 레이의 행적을 불어 댄 것으로 그나마 의기소침해 있는 꼴을 보니 쥐꼬리만 한 양심은 있었다.
놈이 저지른 부정은 우리가 이제껏 수집한 정보를 초월했다. 실로 대단했다. 치부의 노하우에서는 울프삭 경을 훌쩍 능가했다. 덕분에 수많은 작품 소재를 마넨의 입에서 술술 얻어냈고, 이스트에덴과 경찰을 통해 모조리 팡팡 터뜨렸다. 이제 마넨을 편드는 자는 없었다. 오히려 마넨과 연루될까 봐 거개 몸을 사리는 형편이었다.
울프삭 경은 식물인간으로 변신했다. 나는 레이와 플로레아트로 떠나기 직전, 큐 사인을 보냈다. 울프삭 경의 여행에 동행한 호위팀은 완벽한 내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솜씨를 발휘하여 울프삭 경의 척추와 경추를 망가뜨린 후 사고로 위장했다. 울프삭 경은 이제 눈알이나 굴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병원을 방문했더니 레이저 빔을 방불케 하는 눈초리로 나를 흘겨보았다. 제법 볼만했다.
울프삭 경의 지시라고 철석같이 믿고 내게 협력한 검사, 경찰 등등은 완전히 사색이 되었다. 카타콤 건을 터뜨리기 하루 전이었고, 그들은 마넨이 지하 고문소로 끌려가 신나게 터진 것을 알고 있었다. 잘못하면 전부 목이 달아날 위험에 처한 것이다. 그들이 내게 엄청나게 의지해 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울프삭 경은 후계자 없이 사고를 당했고, 직계혈육이라고는 외동딸 하나뿐이었다. 사위 역시 반신불수 신세였다. 일명 《울프삭 경의 변신》은 기실, 사위의 반신불수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었다. 보수적인 울프삭 경은 딸을 평소 냉대했다.
나는 우선 딸과 사위를 불렀다.
울프삭 경에게 정적이 많다는 사실은 당신들도 알 것이다. 평소 울프삭 경이 양자로 삼으려 마음먹은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을 대리로 내세워 울프삭 경의 배턴을 이어받게 하자. 그러지 않는다면 울프삭 경의 재산을 빼앗으려 온갖 귀족들이 아귀다툼을 벌일 테고 당신들의 목숨 또한 무사치 않을 것이다. 괜찮다. 나만 믿어라. 나는 당신들의 충실한 가신 아니냐.
딸과 사위는 오냐, 그러마 하고 흔쾌히 대답했다. 나는 변호사를 시켜 문서를 날조한 후, 해리 알토넨을 불렀다.
해리 알토넨은 세력이 약한 무신가문 자제로서 스타소프와 함께 릴리즈에서 손꼽히던 주요 멤버였다. 허영의 황제 울프삭 경은 가문만 보고 스타소프와 구레나룻을 총애했지만, 나는 알토넨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영리하면서 주제파악을 할 줄 아는 드문 사내였다.
나는 알토넨에게 말했다.
울프삭 경이 스타소프와 아리사의 뒤를 이어 당신을 심중에 품고 있었다. 혹여 자신이 해를 입을 경우, 당신이 대리로 당분간 뛰어달라고 위임장까지 만들었다. 아시다시피 무신귀족은 머릿수에서 문신들에게 딸리지 않느냐. 지금이 중요한 시기다. 당신과 내가 손잡고 우리 한번 잘해보자. 우리는 당신을 울프삭 경이라 생각하며 성심껏 보좌하겠다.
알토넨은 역시 분수를 아는 사내였다. 내 공갈협박을 재빨리 눈치 채고서 잠깐 심각하게 양미간을 찡그렸다. 그러나 곧 활짝 웃으며 내게 악수를 청했다.
알았다. 무슨 일이든 무조건 당신과 논의하고 결정하마.
알토넨이 내게 건넨 답이었다. 이로써 일명 《울프삭 경의 변신》은 깨끗하게 막을 내렸다.
마넨과 울프삭 경의 느닷없는 비극(?)에 사람들이 경악한 것은 물론이었다. 문신귀족들은 우왕좌왕했고 무신귀족들은 머리를 싸매고 드러누웠다. 의원선출 대회를 코앞에 두고 대혼란이 불어 닥친 것이다.
나는 알토넨에게 플로레아트 영지만 제외한 마넨의 모든 재산을 사회에 헌납하되 평민대표 오르키스와 상의하여 절차를 밟으라 했다. 정적을 숙청하면 그 재산은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뺏는 것이 왕국의 오랜 악습이자 관습이었다. 수단을 동원할 필요도 없었다. 아무도 안 말렸고 숙청된 자는 알아서 재산을 갖다 바쳤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대개 살해되기 때문이었다. 이백 년 넘게 귀족들이 본분을 팽개치고 황금전쟁에 열중한 이유도 모두 이런 탓이었다.
알토넨이 내 제안을 전하자 폰타네 의원은 오줌을 지릴 듯한 표정으로 굽실굽실했다. 귀족들은 민생에 관심이라고는 한 치도 없었다. 이게 웬 떡이냐 싶었을 것이다. 다음날 각종 일간지에 알토넨과 폰타네 의원이 함께 악수하며 활짝 웃는 사진이 대서특필되었다. 이것으로 민심을 한손아귀에 움켜쥐었다.
이제껏 무신귀족들은 부정 선거로 힘겹게 의석을 차지해 왔다. 그러나 나는 마넨의 재산으로 국가에 이바지하며 무신귀족의 세력까지 확장하는, 이른바 꿩 먹고 알 먹고를 예외 없이 해치워 버렸다.
그런 후, 왕비의 아침 식사로 바치는 은쟁반 밑에 사진 한 장을 끼워서 보냈다. 오랜 선정 작업을 거친 야심작이었다. 이것으로 왕세자비 건도 산뜻하게 마무리지었다.
여기까지 오자 시위도 시들해졌다. 시급을 주던 마넨이 사라졌으니 부랑자들이 길거리로 나올 이유가 없었다. 경찰은 뛸 듯이 기뻐했다. 국민들도 길거리가 조용해지니 좋아했다. 이 또한 꿩 먹고 알 먹고였다. 마넨과 울프삭 경이 잇따라 맞이한 비극(?)에 쏟아지는 의혹의 눈초리는 여전했으나, 어차피 왕국의 역사는 미스터리로 점철되어 있었다. 조만간 깨끗이 사그라질 터였다.
나는 평소 빌어먹을 가면과 제복코트를 증오했지만, 앞으로도 계속 이 코스튬을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령 사건으로 일종의 경계심을 지니게 된 것이다. 우리는 호위병으로 멸시나 당했기에 오랫동안 마넨의 마수(?)를 피할 수 있었다. 앞으로도 계속 타인의 주목을 받지 않는 편이 음모 활동에 도움이 되리라 판단했다. 부장들도 동의했다. 저들은 금발과 악수를 영원히 경계하며 살아갈 태세였다.
어찌 이렇게 잘되어 가나 싶으리만치 술술 풀렸다. 지금까지의 상영작들은 울프삭 경의 셰퍼드로 지내면서 머릿속에서만 구상해 온 작품들이었다. 이렇게 하면 될 텐데, 저렇게 하면 될 텐데, 막연히 생각하던 일들을 과감히 실행에 옮겨 본 것이었다. 몇 개의 돌발수도 염두에 두었으나 그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족족 내 의도대로 진행되었다.
울프삭 경의 개로 살아왔으나 나는 기본적으로 평민이었다.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다. 귀족들에게 엿을 먹이고 있노라니 속이 후련했다.
레이의 노트를 읽으며 다시 한번 확인했다. 울프삭 경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언급한 부분을 곱씹자니 분노가 지글지글 끓었다. 마넨의 재산 헌납은 일종의 분풀이였다. 그렇다고 내가 돈을 싫어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돈은 내가 본분으로 삼는 추악한 음모에 따라오는 일종의 상금일 뿐, 그것이 목적이 될 수는 없었다. 본분을 잊은 채 날뛰다가 몰락한 울프삭 경과 마넨이 좋은 반면교사였다. 플로레아트만으로도 실속은 챙겼다고 판단했다. 이제 부장들은 내 말이면 무조건 따르겠다 자세였다. 당연하지. 내가 누구더냐.
알토넨을 호위하며 연회장을 둘러보노라니 꽤 재미있었다. 울프삭 경과 마넨 아래에서 눈치만 보던 젊은 귀족들이 이리저리 나대며 콧대를 세웠다. 그들이 보기에 알토넨은 벼락감투를 쓴 애송이에 불과했다. 정쟁판은 춘추전국시대가 되었다. 저들은 지구가 멸망하는 날까지 서로에게 부지런히 흙탕물을 끼얹어 대며 날뛸 것이다. 독하리만치 정신을 못 차리는 종자들이었다. 덕분에 내 음모 취미는 앞으로도 마음껏 누릴 수 있을 듯했다. 안 그랬다면 퍽 섭섭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도 모두 레이 일이 해결된 다음이었다.
오늘로써 한 달하고도 보름이 지났다. 레이는 갈수록 발작이 심해졌다. 얌전히 있어도 심장이 후벼 파이는 기분이건만 저렇게 아파하는 모습에 절망감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오늘은 새벽 네 시에야 발작이 멎었다. 비로소 나는 겨우 숨을 돌렸다. 머리가 어지럽고 기력도 돌지 않았다.
별안간 창밖이 펑 소리와 함께 확 밝아졌다. 축제로 흥청거리는 밤이었다. 나는 환호성과 노래가 들끓는 창밖을 응시했다.
두 달 전,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꼬리를 그리며 치솟는 불꽃 아래에서 함께 거리를 걸었다. 그때 나는 문득 확신했다. 우리를 둘러싼 이 불꽃은 영원히 타오르고, 음악도 항상 연주될 터이며, 시간까지 멈추리라고. 그 생생한 충만감이 지금은 파도에 휩쓸리는 씨앗처럼 흩어져 버렸다.
다시 한번 체온이 아래로 내려갔다.
언제까지일까. 이 잔혹한 지옥은 어디까지 갈 것인가. 그의 발작이 심해질수록 내 고통도 무게를 더해 갔다. 만약에, 레이의 저 병세가 개인사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내가 저지른 총상 때문이라면……?
나는 그에게 무릎을 꿇고서 관용을 구해야 할 것이다.
어차피 나는 레이에게 빌 생각이었다. 빌어야 했다. 나는 그의 모든 것을 망가뜨렸다. 이해를 구하는 건 턱도 없었다. 무조건 관용을 베풀어 달라고 머리를 조아리고 사과해야 했다. 그리고 용서받고 싶었다. 용서받고 새 출발을 하고 싶었다.
이런 바람도 배부른 타령이었다. 레이가 정신을 차리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레이가 고개를 스르르 떨어뜨렸다. 얼굴에 머리카락이 달라붙어 엉망이었다. 물수건으로 뺨과 이마를 닦고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땀으로 범벅된 몸을 닦았다. 가슴의 총상이 눈에 띄자 가슴 한구석이 저몄다.
창밖에서 장미가 만개하듯 눈부신 불꽃이 어둠을 수놓았다. 노래가 울려 퍼지고 북 소리와 피리 소리가 잇따랐다. 이 병실만 눈물 같은 정적에 싸여 있었다. 막막하고 씁쓸했다. 불과 두 달 전의 행복했던 시간이 한여름의 꿈같았다. 그날 축제의 밤에서 아마빛 머리카락에 휩싸인 일순간, 나는 시공간에 우리만 존재하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깨우쳤다. 내 전부는 그가 송두리째 앗아갔다고.
갑자기 귓가로 어느 목소리가 스쳤다.
「이왕 비유하려면 갈라테이아가 더 나을 거예요.」
갈라테이아.
축제에서 피그말리온은 아프로디테에게 기원하였다. 자신이 빚은 조각상이 사람으로 변하게 해 달라고. 그 후 피그말리온이 집으로 돌아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조각상에 키스를 하는 것이었다. 어느 순간 싸늘한 조각의 입술에 사람의 체온과 숨결이 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눈을 떴다.
레이를 응시했다. 석상처럼 창백했다. 나는 몸을 기울여 차디찬 입술에 키스했다. 변하는 것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