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 ─L. (49/101)

16 ─L.

고문관 비에노는 자작나무에게 동정적이었다. 갈아입을 옷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상처를 닦아 주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작나무가 부탁만 하면 편안한 죽음을 선사해 주겠노라고 간곡히 설득했다.

「왕께서는 언제 돌아오실지 모릅니다. 왕비님께서는 결코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기다려 보았자 왕비님께서 거둘 이득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끝까지 자작나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비에노는 오늘부터 사흘간 고문이 없을 예정이라고 말했다. 아내에게 부탁해 몰래 가져왔다며 음식과 옷을 주고 자작나무를 돌봐 주었다.

자작나무는 생각했다. 견뎌야 한다.

고문을 당하며 미친 듯 망상했다. 처참하게 망가진 자신을 보며 괴로워하는 왕의 모습을 마음껏 즐겨 주리라고 이를 악물었다. 그런데 전쟁이라니. 비에노의 말대로 편한 죽음을 선택하는 편이 나을까.

자작나무는 냉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왕이 자작나무에게 털어놓은 말이 진심이라면, 그는 나중에 후회할 것이다. 궁정화가가 자작나무의 초상화를 제작했다. 왕이 언젠가 그것을 볼 것을 계산하고 자작나무는 초상화에 모든 단서를 집어넣었다.

왕은 정말로 나를 사랑했을까. 왕을 사랑하게 된 나는 질투심에 사로잡혀 레비탄을 저주했고 그 일로 이런 고초를 당하고 있다. 말도 안 된다. 이렇게 사라질 수는 없다. 이 찢어지는 분노가 암흑 속에 파묻혀 스러지게끔 고이 내버려두어선 안 된다. 이대로 무너진다면 나는 역사의 보잘것없는 조연으로 남을 뿐이다.

왕은 뛰어난 전사였다. 그는 긴 시간 뒤에도 이름을 떨칠 것이다. 그러나 비극 역시 긴 시간 동안 입에 오르내리기 마련이었다. 또한 극단적일수록 명작으로 남았다.

견딜 수 있을 때까지 버텨 보기로 결심했다. 내 고통이 커지면 커질수록 비극의 깊이는 더해갈 것이다. 사람들이 경악하리만치 인내하리라고 마음먹었다. 이런 식으로 허물어질 수는 없었다. 이대로라면 내 죽음은 왕의 가벼운 오점으로나 남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왕이 치세 안정을 위해 큰일을 했다고 칭송받을 가능성까지 있었다. 그렇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알아야 했다. 왕도 알아야 했고 레비탄도 알아야 했고 모후도 알아야 했다. 모두가 똑똑히 알아야 했다. 나와 왕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내가 어떤 고통을 당하며 사라졌는지 반드시 기록되어야 했다.

자작나무는 인간의 입이 얼마나 가벼운지 잘 알았다. 그녀의 저주가 들통 난 이유는 자작나무가 철석같이 믿은 유모 때문이었다. 그리고 비에노는 입만 아니라 행동도 가벼운 사람이었다. 가혹한 고문은 왕의 모후가 직접 내린 명령이었다. 그렇건만 비에노는 자작나무에게 호의적으로 굴고 있었다.

자작나무는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비에노. 내 이야기를 들어 볼래요……?」

왕이시여. 사랑합니다.

당신이 저에게 한 말이 거짓이라면, 최소한 나를 기억이라도 하셔야 합니다.

당신이 나를 기억하지 않는다면, 다른 이들의 기억에라도 저는 남을 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입니다.

“바보 같으니! 뭐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라는 거야! 엉터리 수작 집어치워, 이 멍청아!”

손에 잡히는 것 아무거나 세차게 내던졌다. 쨍그랑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손목이 찢기는 듯한 아픔이 내달렸다. 삽시간에 사방에서 온몸을 붙잡혔다. 남자들의 고함이 터지더니 문 열리는 소리가 잇따랐다. 이윽고 팔뚝이 따끔거렸다. 차츰차츰 정신이 몽롱해졌다.

뭐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거야? 미련 버리고 편안히 죽어 버렸으면 너도 좋고 나도 좋았을 거 아니야.

한편으로는 의외였다. 극도로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흥미를 느낄 정도였다. 자작나무가 고문관에게 이야기를 털어놓은 것이 치밀한 계산속에서 행한 일이었다니. 이것도 예전에는 나타나지 않았던 사실이었다. 어찌 보면 천성적인 장난꾸러기 자작나무다운 짓이었다. 함께 고문당하는 레이 아리사 입장에서는 소름 돋는 녀석이었다. 무서웠다. 악마 같았다.

그래봤자지. 나는 눈을 감으며 혀를 찼다.

데이탄즈가 초상화로 자작나무를 알아본다고 치자. 그래보았자 얼마나 오래 기억해 준다고 저리 몸부림을 친단 말인가. 레이 아리사는 저런 은밀한 사생활이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일 따위 조금도 달갑지 않았다.

그래. 그거 하나만큼은 소원 성취했다, 이 바보야.

엄밀히 헤아리면 코미디였다. 자작나무의 저주사건은 드라마 시리즈나 영화로 자주 만들어지는 인기 소재였다. 자작나무는 갖가지 모습으로 윤색되고 표현되었다. 보고 있노라면 내 낯이 화끈화끈했다. 민망하고 끔찍하고 어색했다.

최악은 영상물로 표현되는 데이탄즈와 자작나무의 러브신이었다. 메사라와 레스토랑으로 향한 날, 하필 그 빌어먹을 장면이 텔레비전에서 나왔다. 귀를 고문하는 신음성과 “왕이시여!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제발…… 아!”, “허억, 사랑하오오오…….” 하며 연놈이 벌거벗고 뒤엉키는 꼬락서니를 메사라와 함께 듣고 보았다. 소름끼치게 느끼했다. 거짓말 안 보태고 토하는 줄 알았다.

자작나무는 설마 저런 것까지 다른 이들이 ‘눈으로 보고’ 즐길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당시는 대부분의 이야기가 기껏 음유시인의 눈물 섞인 가락에나 구전되던 시기였다. 과학의 발달은 예상치 못한 블랙 코미디를 만들어 버리고 만 것이다.

잠으로 빠져드는 와중에도 웃고 말았다. 멀리서 누군가가 “왜 웃는 거지.” 하고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메사라와 조금 비슷했다. 그러나 희미한 시야 속으로 들어차는 것은 이쪽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사신 가면뿐이었다.

역시 마넨 경은…… 하면서 나는 정신을 잃었다.

얼굴을 찡그리며 눈만 간신히 떴다. 몸이 나른해졌다. 또 진정제가 투입되는 모양이었다.

주사 바늘을 뽑는 간호사가 보였다. 기분이 묘했다. 우습게도, 스네이크에게 총을 맞아 여기로 실려 온 것이 레이 아리사와 자작나무의 의식을 분리하는 데 도움을 준 듯싶었다. 발버둥을 치면 어김없이 진정제가 투입되고, 직후에는 조금씩 안정이 몰려오면서 고통도 가셨다. 모르핀 유의 마약성 진통제를 주입하는 듯했다.

주변에서 남자들의 웅성거림이 들렸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상처는 잘 회복되고 있다면서.”

“환자가 심적으로 굉장히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일단 약물을 투여하고는 있습니다만.”

“심적으로 불안한 정도가 저래? 자꾸만 아프다고 비명 지르는 소리가 당신들에게만 안 들리나 보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외관상으로는 아무런 이상이 없고, 검사결과에서도 별다른 병증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저러지는 않습니다. 종종 편하게 의식을 차리고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올 때만 저러냐고.”

눈을 설핏 떴다. 가이거 부장들과 의사들이 희미하게 보였다. 나를 살려놓은 뒤 괴롭힐 작정인 듯싶었다.

마넨 경은 어찌 되었을까. 아마도 카타콤 발전소 건으로 덜미 잡혔을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이 건을 획책한 자는 스네이크가 분명했다. 불길한 직감이 이것을 가리켰던 듯했다.

그래도 타이밍이 안 좋았다. 하필 메사라와 약속을 앞두고 총을 맞다니 이 웬일이란 말인가. 생각은 여기까지가 끝이었다. 나는 잠으로 떨어졌다.

눈을 떴다. 자작나무가 고문에서 벗어나면, 레이 아리사에게도 휴식이 찾아온다. 데이탄즈나 자작나무나 고약한 종자였다. 너희 사이에 껴서 내가 이 웬 고생이란 말이냐. 웃기기도 하고 괴롭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참 그랬다.

천장 형광등이 켜져 있었다. 밤중인 모양이었다. 불이나 꺼 주지…… 하며 눈을 찌푸렸다. 전신이 갑갑했다. 아래로 시선을 내리깔자 꽁꽁 묶인 몸이 보였다. 발버둥 때문에 취한 조치인 것 같았다. 낭패감이 들었다.

나는 천장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지금 자작나무는 고통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 시점에서는 왕에 대한 사랑도 광기의 찌꺼기에 불과하다고, 나는 확신했다. 그래도 이쯤 되니까 그럭저럭 면역력이 생겨서, 제법 냉정을 차릴 수 있었다.

자작나무가 죽은 타이밍을 생각해 보았다. 사가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한 사항이었다. 자작나무가 죽은 시점이 왕이 수도로 귀환하기 며칠 전이었다. 실로 절묘하지 않은가. 데이탄즈가 사람을 시켜 자작나무에게 소녀형구를 씌우게 했다면?

할 수만 있다면 타임머신을 타고 시공을 날아가 데이탄즈를 직접 살해하고 싶으리만치 살의가 들끓었다. 내세에 또 한 번의 생을 얻는다면, 나는 반드시 천재 과학자로 태어나서 타임머신 발명에 혼신을 불태울 것이다. 왕궁의 약도는 내 머릿속에 생생히 남아 있었다. 미래니까 특수한 무기를 타임머신에 탑재해서 가져가면 될 것이다. 살인은 식은 죽 먹기였다. 아니지, 타임머신 자체를 로봇병기로 겸하여 제작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그러고는 왕궁을 미친 듯이 때려 부수고 불을 질러 버리면 얼마나 후련할까.

도망치는 데이탄즈를 집요히 추적해서 레이저빔을 발포하고…… 모후와 무신귀족들도…… 그 꼴을 지켜보며 으하하하하 하고 통쾌하게 소리 높여 웃어 보면……. 말도 안 되는 상상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만치 절박했다. 여하간에 개자식이었다.

분을 억누르려 애썼다. 자작나무 때문에 나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예전이라면 바보, 멍청이, 하고 욕이나 퍼부었을 텐데 노여움에 휩싸여 황당무계한 망상에나 몰두하고 있었다. 망상은 탑에 갇힌 자작나무가 곧잘 즐기던 짓이었다. 레이 아리사는 매사가 시큰둥하고 세월아 네월아 시간을 줄줄 흘려보내는 타입이라 망상에 썩 취미가 없었다. 그런데 허무맹랑한 망상에 몰두하다니, 정신상태가 매우 나빠졌다는 증거였다.

그때 기척을 느꼈다. 나는 무심결에 눈동자를 옆으로 굴렸다.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가이거 부장들이, 그것도 세 명이나 앉아 있었다. 나란히 앉아서 이쪽을 노려보는 꼴이 섬뜩하면서도 황당했다. 중앙은 채찍을 든 스네이크였다.

저 인간들이 왜 여기에.

스네이크의 채찍이 시야에 잡히는 순간 분노가 치달았다. 그가 내게 총을 쐈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스네이크에게 데이탄즈가 겹쳐 버렸다. 그가 쥔 채찍으로, 자작나무의 온몸을 찢어놓았던 채찍이 겹쳤다.

알고 있다. 한스에게 뺨 맞고 찰스에게 성내는 격이었다. 스네이크는 울프삭의 부하로 제 본분에 충실했을 뿐이었다. 내가 그를 집요하게 노렸듯이 말이다. 그럼에도 노기를 주체할 수 없었다. 나는 스네이크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갑자기 스네이크가 벌떡 일어섰다. 병실 문을 확 열고 나가 버렸다. 박차고 나가다시피 했다. 꽝 하고 문이 닫혔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왜 저래, 저 인간.

그나저나 기이한 인연이었다. 마지막에 꼬리만 밟히지 않았다면, 나는 스네이크가 준 수표로 입원하여 자작나무를 극복했을지도 몰랐다. 그랬다면 그는 내게 은인으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스네이크와의 하룻밤도 자작나무가 친 사고의 결과물이었다. 망할 놈의 가면무도회가 뭐가 그리 좋다고 나를 골탕 먹이면서까지 줄래줄래 쫓아나갔을까.

도대체가 자작나무 너는……. 나는 혀를 찼다.

스네이크도 어안이 벙벙했을 것이다. 령의 정체에 얼마나 황당했을까. 인정하기 싫지만 나는 평소 모습과 섹스 때 모습이 판이했다. 메사라가 언젠가 나랑 할 때 “그쪽, 섹스 때는 굉장히 음탕해 보이는 거 압니까?” 한 적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메사라는 참 짓궂게도 말을 던졌다. 표정이 어떻다는 둥, 반응이 이렇다는 둥, 여기를 만져 주면 이런 식으로 신음한다는 둥, 이게 어디까지 들어간다는 둥, 저건 무슨 색깔이라는 둥, 하며 욕만 빼놓고 창피한 표현은 다 늘어놓았다. 그리고 나는 그의 말을 부인하지 못했다. 섹스 때의 나는 확실히 평소와 달랐다. 많이 달랐다.

…….

혹시 내가 스네이크 앞에서도 똑같이 놀았을까. 그런 것 같았다. 스네이크가 거액의 수표를 던져 줄 정도면 얼마나 음탕하게 굴었겠는가. 낯이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최악의 낭패감이 전신을 파고 돌았다.

자작나무…… 정말이지 너라는 녀석은.

나는 창피함과 노여움으로 몸을 떨었다.

정말로 내세에 또 한 번의 삶이 주어진다면, 나는 반드시 타임머신을 발명해내 과거로 올라가 너와 데이탄즈를 응징하고 말 거다.

문득 메사라가 보고 싶었다. 그의 짓궂은 목소리와 몸짓에 휩싸이고 싶었다. 나를 숨 막히게 감싸 주던 활기가 그리웠다.

간절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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