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 .M─ (48/101)

15 .M─

병원에 도착한 시각이 밤 여덟 시였다. 열흘간 의식불명 상태이던 레이가 갑자기 발작을 일으켰다. 그때가 오후 네 시였건만 리져드는 저녁 일곱 시에야 내게 소식을 알렸다.

부장들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했다. 레이가 죽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날 쿠퍼헤드를 동행시킨 것은 행운이자 불행이었다. 레이를 바로 알아본 쿠퍼헤드는 내 행동을 주시했고, 내가 관자놀이에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총을 걷어찼다. 그러고는 대원들로 하여금 날뛰는 나를 붙들도록 지시한 후, 레이의 상태를 확인하여 사망에 이르지 않았음을 알려주었다. 나는 겨우 정신을 차려 인근 병원으로 레이를 옮겼다.

총알이 심장을 아슬아슬하게 비껴 나간 관통상이었다. 대수술을 거친 끝에 레이는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그동안 나는 지옥을 맛보았다.

내가 레이의 수술을 지키는 동안 쿠퍼헤드는 부장들과 만났다. 최악이었다. 딱따구리는 부장들에게 모든 일을 술술 불어 버렸다. 내 자살 시도는 부장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레이를 중환자실로 옮기자마자 쿠퍼헤드와 레오파드가 나를 찾아왔다. 쿠퍼헤드가 내게 담배를 권했다.

“마음은 알겠는데, 네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사실, 잘 알지?”

뒤이어 레오파드가 말했다.

“부장들에게 내가 다 설명했어. 령과의 관계는 우연이었다고. 너하고 나하고 게이바에서 우연히 령을 만났고, 먼저 추근거린 쪽은 나였다고.”

나는 레이만 응시했다. 한 마디만 끝없이 떠오를 뿐이었다. “왜?”였다.

왜?

모든 것을 손아귀에 쥐었다고 확신했다. 여행에서 일생 최고의 달콤한 시간을 만끽했다. 그에게서 사랑을 확인받고 절정의 희열감까지 맛보았다. 그 일순간에 날개가 부러져 지옥으로 추락했다. 삽시간에 내동댕이쳐졌다.

왜인가.

왜.

왜 우리가 이렇게 되었는가.

“정신 차려, 본부장님. 지금 부장들 분위기가 말도 아냐. 네가 자살을 시도하다니 이게 말이 되냐고. 우린 뭐가 돼? 응? 말 좀 해봐.”

레오파드가 내 어깨를 흔들었다. 쿠퍼헤드가 담배를 비벼 끄며 말했다.

“본부장님, 냉정을 차려. 계속 말할 테니까 잘 들어. 내가 령을 병원으로 데려간 이유는 령이 좋아서도 아니고 존경스러워서도 아냐. 지금 부장들 모두 령을 제거하자는 데 의견이 일치하고 있어. 그 마넨을 휴대전화 하나로 움직인 녀석이야.”

사이를 두고 쿠퍼헤드가 강하게 덧붙였다.

“하지만 나는 령을 죽이자는 데 반대했어. 왠 줄 알아? 본부장님 때문이라구. 당신은 향후 계획을 털어놓지 않은 채 우리를 이끌었고, 우리는 당신 하나만 믿고 얌전히 따르기만 했어. 본부장님 당신 하나만 믿고 말이지.”

쿠퍼헤드의 어투가 노골적인 힐난조로 변했다.

“지금 로터스는 피떡으로 변해 고문실에 갇혀 있어. 울프삭 경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고 말이야. 이번 건에 관여한 사람들이 일개 사단을 넘는다는 사실은 본부장님 당신이 제일 잘 알 텐데, 어떡할 거야. 어떡할 거냐고요. 이렇게 해 놓고서 마음 편하게 자살이라? 자살하려면 계획이나 다 털어놓고 죽어. 안 말릴 테니.”

뒤이어 레오파드가 말했다.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나 알아? 오밤중에 병원 한 층을 전부 빌려 대원들에게 호위를 보게 하고 있어. 문신귀족들한테 이 사태가 알려지면 어떻게 되겠어. 부장들은 그런 점에서도 분노하고 있다구. 어이, 본부장님. 듣고 있기는 하냐.”

똑똑히 다 들었다. 반 협박, 반 설득이었다.

나는 냉정을 찾으려 노력했다. 레이는 아직 죽지 않았다. 의식불명 상태일 뿐이었다.

“오늘만 자리를 지키게 해 줘.”

“아침 일곱 시까지만이야. 부장들 전원 의견일치 봤어. 령에 관해서만큼은 우리가 너를 통제해야겠다고. 너도 할 말 없겠지. 자살 시도로 너는 우리에게 경악을 안겼으니까. 병실도 너 혼자서는 못 지켜. 부장들이 교대로 한 명씩 따라붙기로 했어. 병원 측에서 오는 연락은 리져드가 맡기로 했고. 오늘은 레오파드야.”

쿠퍼헤드의 말은 일방적인 통보였다. 나는 노여움을 참으려 노력했다.

레오파드가 담뱃재를 재떨이에 털며 말했다.

“본부장님. 명분부터 만들어 줘. 가이거가 령을 살리고 보호해야 할 명분부터 만들어야 부장들을 설득할 수 있어. 어떡할 거야.”

나는 머리를 굴렸다. 지금은 일생에서 가장 냉정해야 할 때였다.

“령의 머리에 있는 정보는 마넨과 비교도 할 수 없을 거야. 마넨에게 말하지 않은 여러 정보도 있겠지. 조만간 정쟁 구도에 일대 지각변동이 생길 예정이니까 그때 령에게 이것저것을 신문할 예정이라고 전해 줘.”

“정쟁 구도에 지각변동이 생길 예정이라…… 흐흠. 좋아. 부장들에게 의견을 전달하지. 다른 할 말은?”

“레이의 옷에서 신분증이 나올 거야. 주소를 찾아가서 집과 가게를 뒤져. 령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물적 증거를 확보해서 가져와. 레이가 진짜로 령이라면 마넨과 문신귀족에 관련된 정보를 기록해 놓았을지도 몰라.”

“그리고.”

“아침 아홉 시까지 기획팀 전부 소집시켜. 카운트 들어가야지.”

“알았어. 나는 이만 간다.”

쿠퍼헤드는 눈치 빠르게 자리를 비켜 주었다. 이로써 령과 함께 잤던 가이거 부장 둘만 남아 버렸다. 레오파드도 기가 막히는지 그답지 않게 멍한 기색이었다.

“……정말 령일까. 그냥 우연히 마라타와 아는 주술사라서 기일에 장미꽃을 들고 찾아갔던 것은 아닐까.”

레오파드가 웅얼거렸다. 바로 그 가능성 때문에 내가 집과 가게를 뒤져 물적 증거를 확보하라고 지시내린 것이었다. 나는 아직 불신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글쎄. 하지만 맞아떨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 맞아떨어졌다.

휴대전화를 들고 부리나케 달려가던 레이가 떠올랐다. 휴대전화 상대가 누구냐고 내가 캐물었을 때 애매하게 말을 흐리던 모습도 되살아났다.

령의 전화번호를 추적했더니 엉뚱한 사람만 나오더라고 마넨은 털어놓았다. 레이의 휴대전화 번호를 검색했을 때 나온 것은 공란뿐이었다. 잘나신 양반이 바로 마넨이었다.

하나하나 착착 맞아떨어졌다. 믿을 수 없으리만치 정확하게 맞물려 떨어졌다. 주술사 코트부터 그랬다. 나와 레오파드가 처음 레이를 보고 “마녀 앞에서 카드점 결과를 기다리는 기분이었어.”라고 떠들어 댄 소리는 일부 적중 수준을 넘어 과녁 정중앙을 쏘아 맞힌 것이었다.

레이는 무신경한 성격이었다. 아울러서 가난하지만 버젓한 직업이 있는 사람이었다. 평상시 주술사 코트를 태연하게 입고 다니면서도 주변 시선을 괘의치 않았다. 주술사로 오인 받더라도 큰 문제는 없으리라고 계산했던 것이다. 나조차 레이가 어딘가에서 코트를 주워 입었으려니 단정하고 넘기지 않았던가. 이 정도면 무신경이 아니었다. 대담한 거였다.

식당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던가. 울프삭 경에게 관심 있느냐고 물었을 때 레이가 화들짝 놀라던 반응도 지금 돌이켜보면 이상했다. 레이가 울프삭 경과 마넨에 관하여 늘어놓았던 견해 역시 나도 잠깐 놀랄 만큼 예리했다.

마넨은 령이 상담에 필요한 공부를 해야겠다고 하기에, 자신이 책을 추천해 주고 의견을 나누었다고 했다. 필요한 가재도구만 간신히 갖춘 레이의 방에, 어울리지 않게도 빼곡히 쌓인 책들 대개가 정치와 역사에 관한 것들이었다. 쿠퍼헤드는 중국의 병법서까지 있군, 하며 감탄했었다.

마넨이 령의 용모를 빗댄 그림에 등장하는 살로메는 금발에 얼굴이 흰 여자였다. 레이는 성별이 구분 안 가는 하얀 얼굴에 금발이었다.

의문이 하나 남았다. 왜일까. 왜 돈도 한 푼 안 받고 마넨의 전속 주술사를 자처했을까. 마라타가 마넨에게서 챙겨간 금액만도 이천만 탈란텐이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레이는 엄청난 부를 긁어모을 수 있었다.

“……무신귀족들 자체가 싫다고나 할까요.” 했을 때 레이의 야릇한 미소가 생각났다. 무신귀족들에게 나쁜 일을 당하기라도 했을까. 원한이었을까. 그렇다면 설명이 가능했다.

이 무슨 기가 막힌 일이란 말인가.

나는 그를 겉보기만으로 상극빈자에 인간쓰레기라고 단정해 버렸다. 그러나 실은 반대였다. 그는 내 머리 꼭대기에 앉아 춤추고 있었던 것이다. 1만 명을 헤아리는 깡패집단 가이거를 이끄는 나에게 레이는 홀로 대적하여 엿을 먹였다. 레이야말로 한 시간 공부하여 일등을 차지하는 우등생이었다. 나는 면전에서 비웃음을 당한 셈이었다.

그래도 불신감이 뇌리에 출렁거렸다. 레이가 령이다? 저 겁 많고 우울하고 힘없는 사람이? 정신까지 붕괴된 저 가엾은 사람이?

“혹시 말이야.”

레오파드가 침묵을 깼다.

“령은 일부러 우리에게 접근한 것 아닐까. 하필 우리라니 너무 이상하잖아. 정보를 탐색하기 위해 우리에게 접근해 최면을 걸어 반하게 했다든가…….”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런 일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나를 이용하고자 접근했다? 그가 속삭인 사랑의 언어가 추악한 음모에 목적한 것이다?

일생 최초의 이 감정이 령의 주술로 조작된 것이다?

“레이는 그럴 사람이 아니야.”

레오파드는 말없이 담배 한 개비를 뽑아 물었다.

“그리고 내가 달라붙었어. 싫다고, 나가라고 하는데 내가 계속 달라붙었어. 심지어 차이기까지 했어.”

그랬다. 레이는 내 머리 꼭대기에서 춤추는 것으로도 모자라 내 감정까지 송두리째 앗아갔다. 철저히 조종했다. 나에게 천국과 지옥을 번갈아서 선사했다. 내 영혼을 쥐락펴락했다.

당신이 일순간에 날아갔다고 생각한 찰나 나는 망설임 없이 관자놀이에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당신이 없는 시간과 공간은 지옥일 뿐이다. 무덤일 따름이다. 죽을 때까지 당신만을 회고하며 막막한 시간을 헤칠 자신은 한 치도 없다. 한마디로, 당신은 나를 철저히 짓밟았다.

“어쨌든 본부장님, 일곱 시야. 식사하고 일 시작해야지.”

레오파드가 의자를 털며 일어났다. 나는 멀거니 레이를 응시했다.

창백한 온몸에 튜브며 산소호흡기며 잔뜩 감고 있었다. 나 때문이었다. 내가 저지른 짓이었다. 나는 그의 몸이 아픈 것이 싫었다. 아주 싫었다. 그런데 그는 지금 나 때문에 생사를 헤매고 있었다. 악몽이었다.

“스네이크, 정신 차려. 탁 터놓고 말해서 자살 소동만 아니었다면 부장들은 네 의견을 깨끗이 무시하고 령을 제거했을 거야. 네 행동에 따라 령이 살고 죽는다구. 그러니까 일어나.”

레오파드가 내 어깨를 탁 때렸다. 나는 머리를 식히며 일어섰다.

레이의 뺨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를 등지고 병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순간 내 안의 무엇인가가 죽어 가는 것을 깨달았다.

우선 이스트에덴 신문사에게 내일 아침 카타콤 프로젝트를 터뜨리라 지시했다. 그리고는 대원을 불러 오늘 오후 두 시경 자동차 사고를 한 건 위장하라 지시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으리만치 깡그리 태워 버리라고 했다. 마넨을 비밀리에 호송하는 도중 사고가 났다고 설레발칠 작정이었다.

경찰과는 이미 이야기를 끝냈다. 물론 그들은 이번 작품이 전적으로 울프삭 경의 지시인 줄로만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내일 카타콤 프로젝트를 터뜨린 후 준비한 작품들을 연속으로 상영할 예정이었다. 의심이 빗발칠 것이다. 괜찮았다. 카타콤 프로젝트와 언론사 건에만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문신귀족들이 기 백 명이었다. 그리고 의문사 의혹이 쏟아지든 말든 마넨은 공식적으로 사망자 신세였다. 죽은 자는 권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법이다.

모두 끝내고 나니 정오였다.

“있어?”

쿠퍼헤드가 박스 한 개를 들고 업무실로 들어왔다.

“음. 뭐냐.”

“뭐기는. 령의 집과 가게를 뒤져서 물적 증거를 확보하라며. 네 지시를 받자마자 령의 집으로 직행했지. 네 말대로야. 재미난 것들이 수두룩 쏟아지던걸. 령의 침대 밑에 노트며 책들이 잔뜩 쌓여 있더군. 령은 줄긋기며 메모를 하는 타입이더라고. 자, 이것부터 봐.”

쿠퍼헤드가 박스를 책상에 쿵, 내려놓았다.

아득한 기분이었다.

박스 상단에 자작나무 가지 하나와 방울 한 쌍이 놓여 있었다. 자작나무 가지는 눈에 익었다. 레이의 집에서 무심히 스쳐보았던 것이었다. 마넨의 진술대로라면 이 자작나무 가지가 레이의 주술도구였다.

“이 방울은?”

“마넨이 령과 처음 만났을 때 령이 방울을 들고 있었다고 했잖아. 그 방울이지 뭐겠어. 보통 방울이 아냐. 한번 봐.”

방울을 들어 훑어보았다. 낡았지만 소리는 맑았다. 방울 양면에는 이상야릇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한문이라는 것만 알아보았다.

쿠퍼헤드가 서류철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건 령의 스승, 마라타의 자료. 그나저나 방울 어때 보여?”

“알 수가 있나. 이상한 글자만 빼면 평범해 보이는걸.”

“마라타가 일본계 여자야. 령의 집을 수색한 대원 중에 일본계가 있어서 방울을 보여 주며 한문이 무슨 뜻인지 물어봤거든. 그랬더니 뭐라는 줄 알아?”

“뭐라는데.”

“한 면에는 靈, 다른 한 면이 鈴이야. 靈은 영혼, 령Soul이라는 뜻이고, 鈴은 방울이라는 뜻이라고 하더군. 그런데 일본계 대원이 말하는데 둘 다 일본어로 발음은 같대. 뭔지 알아?”

“글쎄.”

“레이れい.”

“…….”

한기가 전신을 에워쌌다.

“그리고 방울을 어디서 찾았는지 알아?”

“어딘데.”

“책가게 출입문에 달아 놓았더군. 보란 듯이.”

이 얼마나 대담무쌍한 사람인가.

내가 그 책가게를 몇 번이나 쳐다보았던가. 레이가 있을까, 하며 지나칠 때마다 출입문을 유심히 응시했다. 헌책방을 들락날락하며 여러 번 출입문을 열어젖히기까지 했다.

쿠퍼헤드가 픽 웃었다.

“본부장님의 지금 표정은 처음 보는걸. 꼭 유령을 목격한 듯한 얼굴이잖아. 하긴, 어울리는데. 령, 혼령Soul이니까 말이야. 나도 방울을 발견하고 어찌나 소름이 돋던지. 사람의 허점을 파고드는 게 보통 고단수가 아니야. 게다가 나는 그 집에 들어가기까지 했잖아. 나는 그저 책장을 훑어보며 오우, 금발, 제법인데, 하며 휘파람이나 불었다고. 그때 생각이 딱 떠오르면서 머리가 멍해지더군.”

나는 담배를 뽑아 물고 불을 붙였다. 박스를 훑어보았다. 책들은 잡지나 일간지였다. 가난하지만 레이는 헌책방 주인이었다. 그는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이런저런 자료들을 얻으며 생각을 정리했던 것이다.

“전략지도를 방불케 하는군. 이것 좀 보지.”

쿠퍼헤드가 노트를 펼쳐 보였다. 귀족들의 관계를 정리해 각종 화살표를 쳐 놓은 도표가 보였다. 색깔별로 구분되어 있었고, 몇 개의 명단에는 붉은 줄이 쳐져 있었다. 전부 마넨이 암살한 자들이었다.

파란색은 마넨과 친분이 깊은 자들이었으며 노란색은 애매한 관계, 초록색은 마넨이 포섭할 대상, 주황색은 정적으로 보였다. 몇몇 명단 아래에는 우리도 잡아내지 못한 정보가 메모되어 있었다.

숨이 막혔다. 내가 쿠퍼헤드에게 레이의 집을 뒤져보라 지시한 것은 불신감의 발로에서였다. 그러나 이 산더미 같은 증거는 하나같이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더는 의심할 나위가 없었다. 결론지었다. 레이는 령이었다.

쿠퍼헤드가 줄담배를 피워 대며 노트를 넘겼다. 가장 새것으로 보이는 노트에는 우리와 관련된 메모가 나열되어 있었다. 레이는 우리까지 뚫어보려 시도했던 것이다. 이쯤 되자 머리가 하얗게 비었다. 레오파드가 말한 ‘정말로 우연일까’가 귓가에 재생됐다. 한 치도 흔들림 없던 내 믿음이 걷잡을 수 없이 쪼개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진정하며 노트를 한 장씩 넘겼다. 레이는 비교적 악필이었다. 몇 개의 체크가 눈에 띄었다.

「검은색. 검은 기운? 기가 날카롭다…… 로터스는 그냥 주먹패라고만 무시함……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로터스가 본부장과의 악수에서 내리 실패함. 로터스도 이제는 무섭다고 했음…… 나도 실은 그렇다…… 뭔가 안 좋은 예감이.」

계속 넘겼다.

「스네이크, 본부장. 재규어, 중도를 지키나 실속은 다 챙김. 레오파드, 잔인함과 흉폭성 면에서 최고. 쿠퍼헤드, 유일한 대학졸업자에 영리함…… 이름, 주소 알 수 없음. 울프삭이 다 까먹었다…… 바보...」

「울프삭은 부하들을 우습게 본다…… 그러면서도 경계한다…… 바보.」

“바보라.”

쿠퍼헤드가 픽 웃었다. 나는 필터까지 닳은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껐다.

어쨌든 이것으로 레이가 우연을 가장하여 내게 접근한 것은 아니라고 확신했다. 레이는 내 이름을 알았다. 자기 집을 들락날락하는 나를 방치했다. 제거할 마음이었다면 옛날에 해치웠을 것이다. 노트 기록은 스타소프에서 끊겼다.

두 시간 동안 나와 쿠퍼헤드가 각기 피워 댄 담배가 한 갑을 넘었다. 재떨이를 비우고 다시 한 개비 피워 물었다.

쿠퍼헤드가 중얼거렸다.

“우리를 우습게 보면서도 경계한다라…….”

레이의 노트를 보자니 기분이 야릇했다. 만약 내가 마넨과 악수를 했다면?

레이는 남김없이 투시하여 우리 명단에 붉은색 형광펜을 그었을 것이다.

덫에 빠진 기분이었다. 레이와 나는 사랑에 빠졌다. 동시에 추적하고 추적당했다. 어느 쪽이든 한 사람은 크게 다칠 결말이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다.

쿠퍼헤드가 내선전화로 부장들을 불렀다. 내일부터 본격적인 업무였다. 남는 시간에 령의 노트를 검토하자고 했다. 령을 통제하는 것은 부장들이 맡기로 했기에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노트를 검토한 부장들은 침묵했다. 레오파드까지 질린 안색이었다. 모두 말없이 바닥만 내려다보았으나 그들의 속내는 또렷하게 드러났다. 지금 바로 령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저들의 반응에 전신으로 한기가 퍼져 나갔다. 덫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중 덫, 삼중 덫이었다. 나를 둘러싼 모든 상황이 레이의 목을 죄고 있었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나는 흘끗 시계를 보았다. 벌써 다섯 시였다.

“음. 뭐냐.”

“긴급입니다. 울프삭 경께서 여행지에서 수도로 돌아오는 도중 사고를 당하셨습니다. 중상을 입고 현재 병원으로 호송 중입니다.”

“……정……말……이……냐……!”

나는 충격을 받은 음성으로 말했다.

“어느 병원이냐.”

“수도 부근 테레제 병원입니다.”

“극비로 후송해. 그리고 언론에 이 사실을 공개하지 마. 큰 혼란이 올 테니까.”

전화를 끊고 손을 깍지 끼었다. 나는 부장들을 하나씩 바라본 다음 입을 열었다.

“울프삭 경께서 사고를 당하셨다는군.”

팽팽한 정적이 서렸다. 부장들 전원이 서서히 고개를 쳐들며 나를 응시했다. 경악과 불신으로 범벅이 된 낯이었다. 레오파드까지 자기 귀를 의심하는 표정이었다.

자식들, 대충 예상했을 텐데 왜 저래. 하긴,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나가리라고는 추호도 상상 못했을 것이다.

나는 지그시 웃어 주었다.

괜찮았다. 나는 인내심이 강한 남자였다. 지금부터가 중요했다. 레이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의사는 자신한 터였다. 문제는 부장들이었다. 부장들에게 내가 어떤 놈인지를 확실하게 드러내서 딴마음 못 먹게 만들어야 했다. 머릿속이 엉망으로 뒤엉켜 있었지만 지금은 코앞에 닥친 일에만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레이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하릴없이 손 놓고 지낼 수는 없었다. 또한 그러고 있으면 부장들부터 가만있지 않을 터였다. 내 의사를 무시해 버리고 레이를 살해할 것이다. 그러고도 남을 녀석들이었다. 나는 녀석들을 잘 알았다.

레이를 살릴 훌륭한 기술은 의사가 지니고 있지, 포우 메사라가 아니었다. 나는 병실을 멍하니 지킨다고 해서, 그것이 기적이나 빠른 쾌유로 이어진다고 믿을 만큼 순진한 놈이 아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레이를 원동력 삼아 화끈하게 뛰어 보기로 결심했다.

어쩔 수 없었다. 이것이 나라는 녀석이었다.

그리고 레이가 죽으면 나도 따라 죽으면 그만이었다. 부장들이 옆에서 감시해도 자살은 식은 죽 먹기였다. 간단했다. 혀만 깨물면 그만 아닌가. 하하하.

나는 천성적으로 죽음을 좋아했다. 그 말은 곧, 나 자신의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이제껏 레이는 부지런히 나에게 엿을 먹였다. 그러나 마지막에 웃은 것은 결국 나였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나는 레이를 어떻게든 살릴 것이다. 기필코 살려내 그를 내 옆에 둘 것이다. 그럴 수 있다. 그래야 했다. 생각은 그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보드카를 남김없이 들이켜고 일어섰다.

“따라와. 전원 병원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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