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L.
지하 감옥의 문이 서서히 열렸다. 표현할 수 없는 한기와 피 냄새가 안쪽 깊숙이에서 흘러나왔다. 병사들이 자작나무의 팔목에 쇠고랑을 채웠다. 자작나무는 입술을 깨물었다. 진심 같았다. 왕의 눈빛과 몸짓과 언어는 자신의 피까지 정지시키리만치 진실했다.
자작나무는 눈을 감았다. 잊을 수 없었다. 그날 밤, 자작나무숲에서 왕은 자작나무의 손을 잡고 간절히 속삭였다.
사랑한다고.
아직도 그걸 믿냐?
정말이지.
나는 혀를 차며 눈을 떴다. 기분이 야릇했다. 계약 후, 시간 순서대로 재생되는 자작나무의 기억은 계약 이전 토막토막 드러나던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생생하고 상세했다. 입문서와 논문서의 차이랄까. 이것은 곧, 조만간 시작될 고문도 예전과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생생한 고통을 선사하리라는 뜻이었다.
그걸 어찌 견디나…….
자작나무는 아직 고문을 당하기 전이었다. 고문관들이 고문 수위에 대해서 논의 중이었다.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자작나무가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았다.
저런, 바보. 나는 쓰게 웃고 말았다.
기록에는 데이탄즈가 모후를 달랬다고 나온다. 단, 형식적으로. 하여간에 빌어먹을 자식이었다.
당시 데이탄즈는 이웃국가의 빈번한 침입으로 무신귀족들을 가까이 두었다. 전통적으로 세력이 강한 문신귀족들은 왕에게 거세게 반발했고, 따라서 데이탄즈는 문신귀족들을 한 번은 크게 혼내 줄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잦은 시기에 숙청을 시도하면 내치혼란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컸다. 그 와중에 저주사건이 터졌으니 얼마나 쾌재를 불렀을까.
자작나무의 부친은 살아생전 문신귀족들에게 깊은 존경을 받았던 거두였다. 데이탄즈는 왕비를 모멸하여 문신귀족들에게 경고를 내린 셈이다. 아무리 문신귀족 거두의 딸이라 하나 명색이 왕비요 아내였다. 그런 아내를 두 달에 걸친 고문으로 죽도록 방치했으니 문신귀족들의 간담이 얼마나 서늘했겠는가. 게다가 자작나무는 국민에게도 인기 없는 왕비였다.
단 한 사람을 죽여 문신귀족 대다수를 고분고분하게 만들고, 임신한 레비탄과의 결혼도 추진할 빌미도 얻고, 거기에 국민의 인심까지 잃지 않았다. 실제로 자작나무 사건 이후 데이탄즈의 치세는 탄탄대로를 달렸다. 마넨 경의 모사로서 레이 아리사가 평가하자면, 대단히 능란한 처세술이었다.
그러나 레이 아리사는 자작나무와 한 몸이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자작나무를 지켜보며 궁금증을 품었다.
왜?
누가 자작나무를 저렇게 만들었는가?
힘없는 한 사람이 무슨 이유로 저토록 끔찍한 비극으로 빠졌는가?
나는 자작나무에 관한 서적을 읽으며 해답을 찾았다. 첫 번째는 정쟁이었다. 두 번째는 옛날사람들 그 자체였다.
레이 아리사가 보기에 옛날사람들은 이상한 구석이 많았다. 그건 현대인들 대개가 동의할 것이다. 옛날사람들이 꼽은 당시의 장점은 현대인들 관점에서는 잔인하고 야만적인 것이 많았다. 로마인이 열광한 검투 시합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데이탄즈 혼자만의 짓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물론 그는 1번이었다.
2번은 데이탄즈를 들볶으며 자신들의 보호를 요구한 무신귀족들이었다. 모후는 무신가문 출신이었고, 따라서 무신귀족의 든든한 후원자를 자처했다.
3번은 나라꼴은 모르쇠로 일관하며 데이탄즈와 무신귀족들을 압박한 문신귀족들이었다.
4번은 야만스러웠던 옛날사람들이었다. 국민들은 왕비가 언제까지 버틸지 돈내기를 하며 즐거워했다. 16세기 당시 왕국에서 마녀로 몰려 고문당해 죽은 여성들만 일 년에 평균 7천 명이었다. 죄수들이 산 채로 화형당하는 광경은 당시 사람들에게 최고의 오락거리였다.
자작나무는 남자로 태어나 자신의 적들을 무찌르는 망상에 종종 몰두했다. 능력 있는 주술사로서 문신거두의 최측근의 길을 밟은 남자, 레이 아리사는 자작나무가 원했던 모습인지도 모른다. 마넨 경을 보좌하며 무신귀족들에게 엿을 먹이고 있노라면 몇 백 년 묵은 체증이 싹 풀리는 기분이었다. 마넨 경이 죽인 무신귀족들만 몇 명인가. 내 손도 결코 결백하지 않았다.
마넨 경을 상담하며 정쟁의 추악함을 똑똑히 알게 되었다. 데이탄즈는 이웃국가의 침입이라는 명분이라도 있었지만, 현재 왕국에서 벌이는 정쟁은 사사로운 탐욕으로 미쳐 날뛰는 흡혈귀들의 이권다툼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내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내 손에 묻힌 것이 흡혈귀의 피라 해도 피는 피니까.
마넨 경…….
머리가 띵했다. 비로소 그날 일이 뇌리에 되살아났다.
이렇게 까맣게 잊고 있었다니.
자작나무에 정신이 뺏겨 메사라와의 약속도, 묘지에서 총을 맞은 일도 완전히 망각하고 있었다. 한기가 온몸을 파고들었다.
스네이크였다. 왼손에는 채찍을, 오른손에는 총을 들고 이쪽으로 망설임 없이 걸어와, 나를 끌어안고서 심장부를 겨냥해 총을 발사했다. 나를 들여다보는 사신 가면에 무시무시한 공포가 치달았다. 잠깐의 적막 후 정신을 잃었다.
그런데 여긴 어디지.
나는 눈동자만 겨우 굴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잿빛 일광이 내려오는 흰 방이었다.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뒤늦게 내가 산소마스크를 쓰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멀리서 보이는 벽시계가 오후 세 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병원인가.
병실은 조용했다. 문 밖에서도 기척이 없었다. 하나만은 확실했다. 마넨 경은 지금 큰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스네이크는 어떻게 내 행적을 알았을까. 그럼 현재 나를 보호하고 있는 사람은 마넨 경일까. 뒤늦게 쫓아와서 나를 병원으로 옮긴 것일까.
이내 차디찬 얼음을 깨문 듯한 감각이 엄습했다. 내가 그날 마라타의 무덤을 찾는다는 사실은 마넨 경만 알았다. 한데 그 장소에서 나는 스네이크에게 총을 맞았다. 인즉 현재 마넨 경이 처한 어려움은 상상 이상이라는 의미였다.
영겁회귀로구나.
씁쓰레 미소 지으며 눈을 감았다. 나를 기다렸을 메사라에게 미안했다. 자책감이 가슴을 찢었다. 이런 일이 닥칠 줄 알았으면 그에게 사랑한다 운운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책임질 수 없는 말은 내뱉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자작나무숲에서의 일로 뼈저리게 경험했건만…….
그때 고문관들이 다가왔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왕비님.」
그들이 자작나무를 뒤로 돌렸다. 곧장 온몸으로 채찍이 파고들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작나무. 너는 그런 꼴을 당하고도 왕이 좋더냐? 정말 그래?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알고 있다. 내 육체에 직접적으로 위해가 가지는 않는다. 똑똑히 알면서도, 오감으로 생생하게 전달되는 이 느낌에는 새삼 몸서리가 쳐졌다.
냉정해라, 레이 아리사. 이건 환각이다. 환각일 뿐이다.
갑자기 왼쪽 가슴이 엄청나게 갑갑했다. 숨도 쉬기 힘들었다. 자작나무 탓만은 아닌 것 같았다. 다음 순간 깨달았다. 나는 심장 부위에 총을 맞았다. 이건 곧, 환각을 버티기에 굉장히 안 좋은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작살 맞은 물고기처럼 몸이 경련했다. 괴로워서 미칠 것 같았다. 잘하는 짓이었다. 16세기의 자작나무나 22세기의 레이 아리사나 주술을 남용하다가 이 꼴이었다.
자작나무가 울먹였다. 왕이시여, 당신은 진심이었나요.
병실 문이 확 열렸다. 피로 얼룩진 환각 사이로 의사들이 뛰어 들어왔다. 나는 정신을 잃으며 마지막으로 생각했다.
내가 알 게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