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M─
“어디 갔다가 온 거야?”
쿠퍼헤드가 불만스레 물었다. 가이거 부장들과 활동대원들, 이스트에덴 신문사 기자들과 검사들, 경찰 간부들이 모여 한창 아이디어 회의 중이었다. 그런데 본부장이란 작자가 갑자기 자리를 떴으니 기가 찰 만했다.
나는 테이블 가득 쌓인 서류를 넘기며 “음. 별거 아냐.” 하고 건성으로 대꾸하고 치웠다. 빌어먹을 가면에 다시 한번 감사했다. 가슴이 울렁울렁했다.
레이 아리사는 포우 메사라를 사랑합니다.
귓가에서 자꾸만 재생됐다.
레이 아리사는 포우 메사라를 사랑합니다.
목이 조이는 느낌이었다. 기적 같았다. 몇 분 전의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정신이 나간 레이가 아닌, 멀쩡한 레이가 내게 말했다. 단지 “남자.”라고만 나를 지칭하던 레이가, 단호하고 흔들림 없는 음성으로, 레이 아리사는 포우 메사라를 사랑합니다, 하고 말했다.
태어난 곳으로 되돌아온 연어가 이런 기분일까. 지독스레 힘든 여정에서 비로소 안착한 느낌이었다. 잠든 레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한없이 고민했었다. 정신을 차리면 내게 어떤 말을 해 줄까, 하며 끝없이 뇌까렸다.
저도요. 레이 아리사는 포우 메사라를 사랑합니다.
몇 번이고 물었다. 계속해서 확인했다. 그때마다 그는 대답했다.
사랑합니다.
“마넨은 내일 오후 네 시에 그리폰 측 로비스트들과 만날 예정입니다. 지금까지 그의 행적은 하나도 놓치지 않고 기록해 두었습니다.”
대원의 말에 나는 급히 정신을 차렸다.
“그리폰 측 로비스트들이 쿠키를 전액 현금으로 만들어 포장한 것을 확인했습니다. 계좌추적을 고려한 조치로 보입니다.”
“내일 그 자리를 급습하기만 하면 된다, 이거로군.”
“예, 바로 체포 작업 들어가면 됩니다. 지금껏 수집한 정보로도 명분은 충분합니다.”
나는 손을 깍지 끼우며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마넨이 내일 마음을 바꿔 쿠키를 받든 안 받든 상관없었다. 네놈은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절차도 이미 끝내 놓았다. 이번에 동원한 검사들은 언론사 건으로 마넨에게 살해된 검사들과 절친했다. 다들 투지가 끓어 넘쳤다.
“좋아. 그럼 내일 작업 들어가지.”
업무실로 돌아가 가면을 벗어던지고 담배를 한 대 피웠다. 쉽사리 진정이 되지 않았다. 내 일방통행만이 아니었음을 레이에게 확인 받았다. 마넨의 실각도 코앞이었다. 모든 것이 손아귀에 들어오는 중이었다.
사랑합니다.
얼마나 듣고 싶었던가. 내가 얼마나 그 말을 갈구해 왔는지 당신은 결코 모를 것이다. 레오파드와 함께한 섹스 때도 자꾸만 눈길을 피하는 당신에게 알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나한테만 저러는 건가, 추측하며 노여워했다.
믿을 수 없게도 그때 이미 나는 당신에게 사로잡혔던 것 같다. 점차 떨어지는 모래시계의 모래알처럼, 감정은 내 영혼을 낙하시켰고 그 지점은 모조리 당신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걷잡을 수 없는 탈력감이 온몸을 감돌았다. 뚜렷하게 확신했다. 누구에게도 나누어줄 수 없을 것이다. 내 감정은 모두 소진되었다. 당신이 깡그리 앗아갔다. 당신에게 박탈당했다. 두 번째, 세 번째의 상대란 없다. 당신을 대신할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당신에게 질식되었다. 내게는 당신뿐이다.
스카치위스키를 마시며 생각을 정리했다. 레이는 어디에 입원했을까.
사회안전 네트워크에 레이의 입원 기록이 올라가려면 사흘은 걸렸다. 지금이 정오였다. 메이드가 도착하겠다고 한 시각이 열 시였으니 내가 출근하자마자 레이가 정신을 차리고 떠나 버린 것이 분명했다. 타이밍 하나 절묘했다. 절묘하다 못해 짜증이 확 치솟았다.
그래도 나쁘지만은 않았다. 레이가 자신의 병세를 고치려 스스로 노력한다는 것은 희망적인 일이었다.
앞으로는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럴 수 없었다. 내 손에서 그를 떠나보내는 따위의 일은 손톱만치도 생각하기 싫었다. 모레까지 흘려보낼 시간이 벌써부터 끔찍했다.
노크소리가 났다. 레오파드였다.
“흥, 그럴 줄 알았지. 그 마넨을 때려잡는 회의에 부리나케 휴대전화 부여잡고 밖으로 나갈 때부터 낌새 잡았다구. 레드폭스 전화였지?”
“음.”
레오파드가 레이를 언급할 때마다 켕겼다.
“재미 좋으시냐? 내 뒤통수 치고 둘이 나니나니 하고 사니까 행복해? 엉?”
“음. 행복해.”
할 수 없이 대답했다. 레오파드가 담배를 잇새에 끼워 물다 말고 이쪽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기가 막혀 말을 잊어버린 낯짝이었다.
“이것 참. 정말 놀랐어. 안 그럴 것 같은 인간이 한번 빠지니까 완전히 터진 강둑일세.”
“그러냐.”
“그래, 본부장님. 경악스럽기까지 해. 난 말이지, 네가 이런 식으로 진지하게 누군가와 관계를 맺으리라고는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거든.”
나도 마찬가지였다. 추호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같아서는 레이를 만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아닐까 하는 망상까지 들 정도였다.
“그나저나 말인데.”
레오파드가 이쪽을 흘끗 곁눈질 했다.
흐음…….
나는 손을 깍지 꼈다. 레오파드가 저렇게 흘끗거릴 때는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뜻이었다.
“쿠퍼헤드에게 들었어. 마넨을 치기 직전에 울프삭 경에게 이번 건을 털어놓겠다고 했다며.”
“그랬지.”
“진심이야?”
그 질문에 나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레오파드만은 내 속내를 막연히 짐작하리라 이미 예상한 터였다.
“글쎄.”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레오파드가 담뱃재를 털며 스카치를 깊이 들이마셨다.
“……어쨌든 나는 본부장님 말에 무조건 따를 작정이야. 내가 그렇다면 다른 부장들도 다 그럴걸. 말이 났으니 말인데 너와 나는 우리 중에서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라이벌이었잖아.”
나는 빙긋 웃었다.
바로 그런 이유로 나는 일부러 레오파드를 가까이 두며 내 본색을 슬쩍슬쩍 보여 주었다. 두려움은 인간을 조종하는 가장 간편한 방식이었다.
레오파드가 착잡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잘해 보자고. 어차피 너는 본부장에만 멈출 녀석은 아니라고 다들 생각했으니까. 그런 만큼 네가 잘해야 해. 너는 우리의 리더야. 네가 무너지면 우리를 비롯해 가이거 전체가 무너지는 셈이나 마찬가지야. 그건 잘 알겠지.”
“내가 누구냐.”
나는 딱 잘라 말했다.
무너져? 내가?
하하하. 천만의 말씀.
내게는 오직 질주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레오파드가 “건배나 하지.” 하며 내 잔에 위스키를 따랐다. 나는 잔을 치켜들며 말했다.
“나만 믿고 따라와.”
레오파드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끝까지 신뢰하지.”
우리는 잔을 부딪쳤다.
나는 어설픈 우정이니 학연이니 혈통 따위를 싫어했다. 본부장에 오른 후 어느 누구도 믿지 않으며 부장들을 관찰해 왔다. 오랜 세월 천천히 인내심을 가지고, 부장들로 하여금 나라는 인간이 어떤 종자인지 체감하도록 만들었다. 그로써 나를 두려워하고, 종국에는 철저히 신뢰하게끔 유도했다.
신뢰는 거짓말이나 배신을 낳지 않는다. 음모가 판치는 추악한 세계에서 그것은 우정이니 학연이니 혈통 따위보다 쓸 만한 도구였다. 울프삭 경이 조만간 당할 화도 나를 신뢰하지 않아 자초한 결과였다. 그리고 지금 부장들이 내게 품는 신뢰는 절대적이었다. 나는 부장들에게 상응하는 멋진 보답을 선사할 작정이었다.
침실이 공허했다. 어둠만 서려 있었다. 쇼핑백이며 옷이며 보석들이 잔뜩 흩어진 자리에 정작 레이가 없으니 이상했다. 넥타이를 풀다가 멈칫했다. 침대에 내가 걸어 준 목걸이가 빛을 뿌리며 우두커니 있었다.
좋게 생각해야 했다. 그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이곳이 어디인지부터 생각했을 것이다. 전혀 모르는 남자를 따라왔으리라 판단했을 것이다. 레이는 내가 사 준 패물 어느 하나에도 손대지 않고 처음 온 행색 그대로 빠져 나갔다. 나에 대한 사랑을 지킨 것으로 해석해야 했다.
그럼에도 알 수 없는 울적함이 몰려왔다. 이 방에서 레이에게 이것저것 입혀 보며 놀던 때가 눈앞에 되살아났다. 동료들이 그 꼴을 보았다면 실신했을 것이다. 나도 놀랐으니까. 흡사 인형놀이 같은 짓을 가이거 본부장인 이 내가 레이에게 해 대며 즐거워했다. 별짓을 다하며 놀았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도 없었다. 신기루 같았다.
오늘 내내 레이에게서 전화는 걸려오지 않았다. 뭘 하고 있을까.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마넨만 아니었다면 사사로이 대원을 풀었을지도 몰랐다.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하는 내가 이런 마음을 품다니 기가 막혔다. 그럴 수밖에. 감정은 사그라지기는커녕 갈수록 영역을 확장하고 있었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나를 지배했다.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게 했다. 격앙된 곡조의 사나운 노래처럼 나를 몰아세웠다. 그것은 나도 어리둥절하리만치 강렬한 감각이었다.
잠을 청했다. 혼자만의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이 끔찍했다. 그가 사라진 방은 묘지일 뿐이었다.
기분이 엉망이었다. 오전에도 레이에게서 전화는 걸려오지 않았다. 자꾸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좆같았다. 자제심이라면 누구보다도 강하다고 자부했는데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로비스트가 들어갔어.”
옆에서 레오파드가 속삭이는 소리도 건성건성 흘렸다. 마넨을 체포하러 몇 시간째 잠복 중이었다. 위장용 자동차에 앉아 하릴없이 죽치고 있으려니 좀이 쑤셨다.
추접한 거래는 대개 으슥한 장소에서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마넨이 로비스트와 만나는 곳도 수도 변두리의 한적한 레스토랑이었다. 덕분에 마넨을 은밀하게 체포하려는 우리도 작업이 수월해졌다.
“그런데 울프삭 경에게 언질은 했어? 작업 들어가기 직전에 털어놓겠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쿠퍼헤드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과연 쿠퍼헤드는 영리한 녀석이었다. 어느 정도 짐작했다는 표정으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역시.”
“알면서 뭘 물어.”
“그렇지.”
쿠퍼헤드의 낯빛에 긴장감이 역력했다. 레오파드나 쿠퍼헤드나 전부 쫄고 있었다. 하기야 십 년이나 떠받든 상관을 조지려는 즈음인데 안 쫄고 견디랴마는…….
일단은 마넨부터 시작해야지.
셰퍼드는 셰퍼드답게 놀라고 했으렷다, 이 영감.
지그시 웃었다. 오늘 마넨은 내게 단단히 혼쭐이 날 것이다. 지금 나는 기분이 안 좋았고 마넨은 딱 걸린 횟감이었다. 그것도 보통 횟감이 아니었다. 마넨을 체포하는 즉시 가이거 지하 고문소로 끌고 갈 계획이었다. 태어난 것을 후회하게끔 주물러 줄 작정이었다.
카타콤 프로젝트 다음 차례는 언론사 비리였다. 그것 말고도 상영작은 수십 편 밀려 있었다. 마넨의 치부를 남김없이 펑펑 터뜨려 확실하게 실각시킬 예정이었다. 괜찮았다. 울프삭 경이 이제껏 마넨을 앞서지 못한 것은 극단적으로 나서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잘 알았다. 적당히 패면 계속 대든다. 그러나 철저하게 조져 버리면 누구라도 고분고분해진다. 너 죽고 나 죽자로 덤비면 꼬리를 말며 도망가는 것이 인간의 천성이었다.
앞으로 미친 듯이 날뛸 예정이었다. 사람들이 경악하여 입을 떡 벌릴 만큼 광기를 드러내야 했다. 그럴수록 작업은 수월해질 것이다.
나는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짙은 잿빛이었다. 레스토랑 주변을 둘러싼 전나무 숲은 병들었는지 버터밀크 색깔로 말라붙어 있었다. 메마른 전나무 사이로 황량한 바람이 떠돌았다. 흡사 소녀의 울음처럼 바람이 흐느꼈다. 이런 걸 미장센이라고 해도 좋을까. 훌륭한 그림이 나올 것 같았다. 나는 웃고 있었다.
그런데 웬일로 마넨이 직접 나섰지.
나라면 측근을 시켜 쿠키를 받아냈을 것이다. 그게 상식 아닌가? 혹여 낭패를 당하면 대신 뒤집어쓸 사람이 필요했다. 마넨이 직접 로비스트들에게 쿠키를 받아내려 한다는 정보에는 나도 잠깐 놀라 버렸다.
요즘 마넨은 이상했다. 파티에서 취할 때까지 퍼마셨다. 물론 악수는 꼬박꼬박 빼먹지 않았다.
나야 일이 편해져서 좋다만.
레스토랑이 시끌시끌했다. 그새 대원들이 작업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비명이 터지고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여기까지 요란했다.
이윽고 정문이 확 젖혀지더니 포박되어 발버둥치는 마넨이 대원들에게 잡혀 끌려 나왔다. “내가 누구라고!”, “감히 누구한테 손을 대!”, “나는 로터스야, 로터스!” 헛소리를 해 대며 시건방지게 굴었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네놈은 끝났다. 아니, 마넨과 울프삭 경의 시대가 끝났다.
즐거운 기분으로 그림을 감상했다. 대원들이 마넨의 발끝까지 부대자루를 뒤집어씌우고는 지프로 난폭하게 떠밀어 넣었다. 제법 볼만했다. 그림의 완성도가 예상을 뛰어넘었다.
나는 지그시 웃었다.
“본부로 가지.”
장갑을 끼고서 고문실 문을 열었다. 마넨이 의자에 앉은 채 이쪽을 노려보았다. 부장 전원을 거느린 나를 보고도 조금도 겁먹지 않는 기색이었다.
카타콤 건이 뭐 대수랴 싶을 것이다. 명예에 조금 흠집이나 남겠거니 하는 속내가 눈앞에 훤히 보였다. 그래. 대수가 아니다. 국민들도 귀족들의 부정부패에는 만성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트집을 잡으려면 뭘 못 잡겠는가. 강둑이 부서지는 것도 작은 구멍에서 시작하는 법이다.
침묵이 흘렀다. 이쪽에서 먼저 말을 꺼낼 마음은 없었다. 지금은 일종의 기 싸움이었다.
“이야기 좀 하지.”
마넨이 입을 열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앉게.”
마넨이 건너편 의자를 가리켰다. 나는 의자를 설핏 뒤로 끌었다. 그러다가 단숨에 채찍으로 마넨의 가슴을 후려쳤다. 비명과 함께 마넨이 나동그라졌다.
“아직도 착각하고 있군. 할 이야기 따윈 없어. 이야기라면 좆같은 새끼하고나 실컷 나눠.”
“가…… 감히 로터스를…….”
마넨이 말을 더듬거리며 콜록콜록 기침했다. 나는 마넨의 배를 퍽 걷어찼다. 버둥거리는 마넨을 천천히 따라가며 구석구석 여유롭게 꼼꼼히 밟아 주었다. 아주 짜릿했다.
거 말 한번 잘했다. 감히 로터스 아니신가. 계급이 높을수록 뭉개 주는 쾌감은 컸다. 내 앞에서 로터스 타령한 것이 네놈에게는 치명적인 실수였다. 하하하.
“떵떵거리면서 명예 누리고 사니까 좋아?” 하며 채찍으로 등을 후려쳤다. “문자 써 대며 피 빨아먹으니 행복해?” 하면서 콧대를 밟았다. 작자를 적당히 찌그러뜨린 후 가면을 확 벗었다. 귀족나리를 고문실에서 살해하기 전에는 반드시 내 얼굴을 보여 주는 것이 습관이었다. 부드럽게 웃으며 마넨을 응시했다.
마넨의 면상이 창백했다. 대개 저런 반응이었다. 야수같이 생긴 놈이거나 혹은 비열한 낯짝을 상상했을 것이다. 내 입으로 말하긴 근질거리는 소리지만, 나는 선이 가늘고 단정한 미남이었다. 한마디로 멀쩡하게 생겼다.
비로소 내가 의자에 앉았다. 담배를 한 대 뽑아 물자 쿠퍼헤드가 지포라이터로 불을 붙여 주었다. 불을 붙여 주는 딱따구리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녀석뿐 아니라 전 부장들의 오금이 잔뜩 저릴 터였다. 오늘 취조에 부장들 전원을 거느린 목적은 이른바 공범 의식을 치르기 위해서였다.
괜찮아…….
나만 믿으면 된다니까.
지그시 웃으며 “저놈 옷 벗겨. 남김없이.” 하고 지시했다. 벌쳐와 리져드가 마넨을 알몸으로 만들었다. 나는 마넨의 추레한 알몸을 유쾌하게 감상했다. 이제야 마넨도 뭔가를 깨달았는지 얌전히 있었다.
담배를 남김없이 태운 후 바닥에 던지고 워커로 비벼 껐다. 손끝으로 탁자를 가볍게 톡톡 치다가 불쑥 말했다.
“손바닥 비비면서 사람 마음 읽고 다니니까 재미 좋았지?”
마넨의 표정이 제법 볼만했다. 충격과 경악으로 범벅되어 재미있게 찌그러졌다. 엄청난 쾌감이 내 전신을 빙그르르 돌았다. 네놈은 나에게 패배를 선사한 드문 녀석이었다. 그러나 마지막에 웃는 것은 결국 내가 되었다.
“좆같은 새끼에 대해서 얼른 불어.”
“누구를 말하는가.”
나는 느릿느릿 일어섰다. 춤추듯 스텝을 밟으며 마넨에게 다가섰다. 채찍으로 작자의 턱을 치켜들어 싱긋 웃음을 날린 후 곧장 입으로 주먹을 먹였다.
“우와아아악!”
이빨들이 공중으로 튀었다.
“어디서 감히 개수작이야? 장난쳐? 네놈으로 하여금 손바닥 비비게 한 자식 말이야.”
“모르네. 그런 건.”
마넨의 뺨을 연달아 채찍으로 갈겼다. 스무 대를 훑어 주자 눈도 뜨지 못했다. 마넨의 목을 쳐들어 물고문으로 직행했다. 물이 붉게 변할 때까지 부지런히 물을 먹여 주었다.
“얼른 말해. 그리고 말투 바꿔. 나는 시건방을 못 참거든.”
“려, 령은.”
“령은?”
“그대로 놔두게.”
마넨의 배에 주먹을 박아 넣었다. 작자의 입에서 핏물이 쏟아졌다.
“말투 바꾸랬지. 그리고 빨리 불어. 그 새끼의 이름, 주소, 네놈과의 접선 경로, 전부 말이야.”
“모르네.”
십 분간 물을 더 먹였다.
“말투 바꿔.”
“려, 령은…….”
“그래, 령은?”
“나, 나도 이름과 주소는 모릅니다…….”
말투는 고분고분하게 변했는데 아직도 줏대를 세우고 있었다. 놈의 손가락 마디를 몇 개 부러뜨렸다.
“어디서 고집을 피워? 뻔한 수작하지 말고 곱게 불어. 내 성질 돋궈 봤자 좋을 거 없어.”
“정말입니다! 정말 모릅니다! 그는 내게 정체를 숨겼습니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물고문을 20분 더 한 후 손가락과 발가락 전부를 꺾어 주었다. 배가 퉁퉁 튀어나온 마넨이 질질 실금했다.
“빨리 떠들어. 다음은 정강이야. 그 다음은 이빨 하나하나를 뽑아 줄 거야. 이빨까지 다 나가면 말할 때 발음이 뭉개지니 나도 썩 내키진 않아. 그 전에 우리 적당히 합의 보잔 말이야.”
“정말입니다. 접선 경로라면 말할 수 있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그는 내게 정체를 숨겼습니다.”
마넨이 흐느껴 울었다. 그제야 나는 놈에게서 물러서서 의자에 앉았다.
“저놈 앉혀 봐.”
레오파드와 쿠퍼헤드가 마넨을 일으켜 내 건너편에 앉혔다.
“말해 봐. 령이 네게 정체를 숨겼다? 그럼 접선 경로는?”
“휴대전화로…… 통화했습니다.”
나는 “하.” 하고 코웃음 쳤다.
“그런 황당한 말을 내게 믿으란 소리야?”
마넨이 고개를 확 들었다. 눈물과 피로 낯이 얼룩덜룩했으나 안광은 형형했다.
“령의 능력을 우습게 보지 마시오. 령이 나를 버리지만 않았다면 내가 지금 이런 수모를 당하지도 않았을 터.”
“뭐야?”
잠깐 머리를 굴렸다. 령이 마넨을 버렸다?
마넨의 요즘 일거수가 다소 이상하긴 했다. 마치 연인에게 차인 놈같이 연회장에서 술을 퍼마시던 터였다.
“자꾸 수작 짓지 마. 어제도 파티에서 온갖 사람들과 손바닥을 비벼 대며 악수했잖아.”
“그건 혹시나 령이 나한테 다시 전화를 걸어올까 해서……. 정말입니다. 제발 믿어 주십시오.”
참말 거짓말을 구분 못하는 내가 아니었다. 마넨의 말은 참이었다.
“좋아. 그렇다면 지금 령과 통화를 해서 불러내.”
“그건 안 됩니다…….”
“이 새끼가.”
노여움이 서린 내 어투에 마넨이 팔로 얼굴을 가리며 웅크렸다.
“정말입니다. 내 서, 설명부터 들어 주십시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당장 박차고 일어서려는데 쿠퍼헤드가 내 어깨를 잡아 말렸다. 그제야 이성을 되찾았다. 간만에 묻히는 피에 너무 심취해 있었다. 작자가 어찌 나불댈지 일단 들어 보기로 했다.
“나불대 봐. 령과 관련을 맺은 시기부터 전부. 네놈이 42번가에 죽어라 출입하다가 십 년 전부터 발길을 끊은 이유까지 남김없이 불어.”
마넨이 회한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령과의 인연은 십팔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령을 알게 된 계기는 우연이었습니다. 아내가 주술을 좋아해 자주 42번가를 들락거렸지요. 신기하게도 아내가 이래라저래라 하면 족족 들어맞기에 한번 캐물었더니 한 주술사를 소개시켜 주더군요. 그때만 해도 그녀가 령인 줄은 몰랐습니다. 이름은 마라타. 십 년 전에 사망한 전대 령이지요.”
내 예상이 적중했다. 역시 십 년 전에 령이 세대교체를 했던 것이다.
“당시는 테렌스를 비롯한 5인 체제이던 터라 머리가 복잡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마라타를 찾아갔는데 그녀가 이천만 탈란텐을 주면 자신이 죽을 때까지 나를 상담해 주겠노라고 말했습니다. 그것도 선불로 말입니다.”
부장들이 웅성거렸다. 나도 놀랄 만치 엄청난 금액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갈등했습니다. 그러나 마라타의 눈빛을 보는 순간 그녀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직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천만 탈란텐을 그날 바로 지불했습니다. 마라타는 저와 대립하는 정적들에 대해 이것저것 알려주더군요. 그들의 심중이며 향후 계획 등을 말입니다.”
“그리고.”
“십 년 전 마라타가 사망했습니다. 그녀의 장례식이 끝난 직후 저에게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나는 마라타의 후계자다, 하면서요.”
“계속 말해.”
나는 담배를 뽑아 물고서 불을 붙였다. 드디어 나를 엿 먹인 새끼 이야기였다.
마넨의 목소리가 꿈결을 노니는 듯 몽롱해졌다.
처음에는 의심했습니다. 마라타와 팔 년이나 만났지만 그녀가 후계자를 키운다는 이야긴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거든요. 농담하느냐? 했더니 상대방이 저보고 이러더군요.
「경께서는 지금 흰옷을 입고 계시는군요. 그리고 내일 엑달을 만날까 말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아닙니까?」
저는 놀랐습니다. 제가 있던 방은 침실 옆에 딸린 기도실이었고 아내도 들어올 수 없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엑달을 만날까 말까 하는 생각은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은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속는 셈치고 령의 후계자를 만나 보기로 했습니다. 령은 마라타의 무덤가를 만남의 장소로 지정했습니다.”
마넨이 말을 멈췄다. 우울하면서도 쓸쓸한 표정이었다.
“달이 훤히 뜬 밤이었습니다…… 저는 비밀리에 마라타의 무덤으로 갔습니다. 어느 순간 달이 구름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눈송이가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묘지 근처에 인기척이라곤 없기에 전 초조해졌죠.”
집으로 돌아갈까 생각할 즈음이었습니다. 어느 틈엔가 어둠속에서 방울 소리가 조금씩 울려 퍼지더군요. 순간 기이한 예감이 몰려왔습니다. 방울 소리가 제 영혼을 붙잡아 챈 양 저는 옴짝달싹도 못하고 어둠속을 뚫어지게 쳐다보았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점차 령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한손에 든 방울을 천천히 흔들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은 주술사 코트를 걸치고 있었습니다. 짙은 어둠으로 령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방울을 든 흰 손만 드러난 채 소리 없이 다가오는 그 모습은 마치 유령이 출현한 듯했죠.
령은 내게 휴대전화 통화로도 당신의 상담은 충분하다고 했습니다. 저는 귀를 의심했습니다. 마라타조차 주술도구를 필요로 했는데 말이지요.
령은 상담비도 받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전속 주술사로 나와 계약하겠다고까지 했습니다. 령은 거액만 주면 누구에게나 상담을 봐 주는 것이 철칙입니다. 그런데 공짜로 저의 전속 주술사를 해 주겠다니 황당했습니다.
왜냐고 물었더니 령은 질문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이름도 나이도 주소도 묻지 말라. 그리고 나는 일반 주술사들처럼 당신에게 미래를 예지해 주겠다느니 행운을 안겨 주겠다느니 따위의 헛소리는 하지 않는다. 대신 미래를 바꿀 수 있는 현재를 투시해 주겠다. 그러니 지금 계약을 하자.
“저는 밑져야 본전이라 생각하고 수락하겠노라 했습니다.”
소설보다 더 황당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저건 참말이었다. 이 짓을 7년 한 내가 못 알아볼 리 없었다.
“그래서? 왜 말을 멈춰? 어서 말해.”
마넨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느리게 말했다.
“……자정이 가까워지자 눈이 멎으면서 달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령은 달이 더 높이 뜰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며 천천히 무덤가를 거닐다가 자작나무 가지 하나를 꺾었습니다. 그때 문득 달빛에 그의 얼굴이 드러났습니다. 저는 무심결에도 숨을 들이켰습니다. 『헤로데 왕 앞에서 춤추는 살로메』가 그의 얼굴에 겹쳤습니다. 순간 그가 진짜 령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주술사들이 괴상하게 생긴 건 나도 알아. 계속 이야기해. 어쨌든 그 새끼 몇 살이야?”
“저도 모릅니다. 단, 십 년 전 그때 그는 아무리 많이 쳐도 십대 초반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워커로 담배를 짓이겨 끄다가 멈칫했다. 쿠퍼헤드도 “십대 초반?” 하며 놀라워했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온몸을 파고 돌았다. 그렇게 새파랗게 어린 새끼한테 우리가 엿을 먹였다 이 말이지.
“계속 떠들어 봐.”
“저는 주술도구가 필요할 텐데, 했습니다. 그러자 령이 조용히 말하더군요. 이것 하나로 충분합니다, 하면서 자신이 꺾은 자작나무 가지를 들어 보였습니다.”
그러며 령은 말했습니다.
「저는 자작나무와 인연이 많은 것 같습니다. 령은 시베리아에서 건너온 주술사 집단입니다. 시베리아에서는 자작나무와 방울을 숭상하지요. 자작나무는 생명의 나무입니다. 방울은 죽은 자의 혼령을 불러내지요.」
령은 자작나무 가지로 바닥에 기묘하고 복잡한 도형을 그린 후 저를 안에 세웠습니다. 그러며 도형을 한참 느릿느릿 돌았습니다. 방울 소리가 딸랑, 딸랑, 그림자처럼 령을 따라갔습니다. 그 소리는 아주 맑고 신비로웠죠.
그러다가 령이 도형 안으로 들어와 제 앞에 멈춰 섰습니다. 잠깐 나를 응시하던 령이 자작나무로 가볍게 제 어깨를 치더군요.
「끝났습니다.」
믿을 수 없으리만치 짧은 스침이었습니다만, 일순간 내 몸속으로 엄청난 에너지가 몰려옴을 느꼈습니다. 그와 내가 한 몸이 되었다는 착각까지 들었습니다.
그 감상을 말해 주자 령이 웃었습니다.
「잘 보셨습니다. 이 계약의 명칭이 사랑이니까요. 이로써 경과 저는 한 배를 탔습니다. 사랑은 투시주술만 사용할 수 있으며, 전속계약을 맺은 지금부터 그 주술은 경을 통해서만 발휘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경은 속마음을 알고 싶은 사람과 악수를 한 뒤 저에게 연락하십시오.」
그러고는 령은 사라졌습니다. 오른손에는 방울을, 왼손에는 자작나무 가지를 들고 어둠속으로 흔적을 감추었습니다. 방울 소리만 꼬리를 물듯 암흑 속에서 가느다랗게 이어졌죠.
방울 소리가 완전히 끊길 때까지 저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 손에 령의 휴대전화 번호가 적인 메모지가 쥐여져 있더군요. 그날이 제가 령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난 날이었습니다.
다음날 저는 엑달을 만나 악수를 나눈 뒤 령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러자 령이 엑달의 심중을 읽어 주더군요. 마라타와는 비교도 되지 않으리만치 정확했습니다.
령이 상담을 끝내며 말했습니다.
「미래를 바꾸는 것은 현재입니다.」
“저는 엑달의 계획을 역이용해 환란을 피했습니다. 그 후 저는 파티란 파티는 족족 참석하여 악수를 나누고 령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적막이 흘렀다. 부장들은 침묵하며 옴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나는 담배를 한 대 뽑아 물고 불을 붙였다. 깊숙이 한 모금 당겨 빨았다.
저 말대로라면 보통 위험한 놈이 아니잖은가.
“저는 언제부턴가 령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이라…… 어떤 의미에서는 그 말이 맞을지도요. 령은 총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가르치는 것도 저의 즐거움이었습니다. 「경께서 정쟁을 치르고 있으니 저도 그에 걸맞은 공부를 해야겠습니다. 괜찮은 책을 추천해 주십시오.」 하기에 제가 이런저런 책을 추천해 주고 의견도 나누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어느덧…… 사사건건 그에게 의견을 물어보고 그가 하라는 말은 무조건…… 따르게 되었……습니다.”
마넨이 흐느껴 울었다. 재규어가 “어이가 없군.” 중얼거렸다. 얼이 빠진 음성이었다.
나는 피가 거꾸로 도는 것을 느꼈다. 령은 조력자를 넘어서서 아예 마넨을 조종하고 있었다. 지금에야 울프삭 경을 좌지우지할 심산을 품은 나를 일찌감치 앞서간 것이다.
나는 마넨이 영리하다고 항시 평가해 왔다. 그러나 실상 마넨은 령의 꼭두각시였다. 령에게 한 방, 아니, 열 방은 먹은 기분이었다. 가히 멋지고 멋진 라이트크로스였다. 열이 치솟았다. 반사적으로 마넨을 향해 탁자를 확 밀었다.
“우왁!”
마넨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죽 밀려났다.
“당장 놈에게 전화를 걸어 불러내. 십 년 동안 보답을 못 했으니 지금이라도 돈을 듬뿍 안겨 주겠다고 말하란 말이야.”
“그, 그건 불가능합니다…….”
“이 자식이!”
나는 벌떡 일어섰다. 마넨에게 확 달려들어 수십 차례 짓밟았다.
“왜? 십 년 동안 돈 한 푼 안 주고 부려먹었다며? 그런 꼴에 사랑이랍시고 지금에야 정이 새록새록 돋기라도 한 거야? 왜 못 불러낸다는 거야.”
“령은 전화를 받는 즉시 제 심중을 읽을 수 있습니다. 제가 숨기려 해도 숨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령에게 전화를 건다면…….”
“그럼 그 자식 휴대전화 번호 불어.”
마넨이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놈을 몇 대 더 밟아 주었다. 갈빗대가 나가고도 마넨은 울기만 했다.
“제발 그를 내버려두십시오. 령은 저를 버렸습니다. 저 아니면 주술능력을 발휘하지도 못합니다.”
“빨리 불어.”
“부탁드립니다. 어차피 령은 얼마 살지 못합니다. 저에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목숨이 몇 달 안 남았다고 했습니다.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닙니다.”
“아직도 뜨거운 맛을 못 봤군.”
정신을 차리니 부장들이 양 옆에서 나를 뜯어 말리고 있었다. 그새 마넨이 죽기 일보직전이었다. 나는 넥타이를 느슨히 풀며 성질을 죽이려 노력했다.
“소설 적당히 써. 너 아니면 령이 능력을 발휘하지도 못한다? 령이 얼마 살지 못한다? 그따위 엉터리 수작으로는 내 화를 돋우기만 할 뿐이야. 곱게 말할 때 빨리 불어.”
“령의 휴대전화는…… 저하고만 전용으로 통화하는 휴대전화입니다. 사실 옛날에 령의 신상을 추적한 적 있습니다. 휴대전화 번호를 통해 추적했으나 엉뚱한 사람만 나왔습니다. 그 번호의 통화기록을 훑어보았는데 저 외에는 통화를 나눈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마넨이 손발을 싹싹 빌며 울었다.
“그가 떠난다고 통보한 직후 다시 번호를 추적했습니다. 십 년간 그에게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한 자책감에서…… 그러나 결과는 여전히 저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령도 화를 내는 바람에 관둬야 했습니다. 그는 치밀한 사람입니다. 제 번호 아니면 전화를 받지도 않을 겁니다. 휴대전화 위치 추적을 해도 소용이 없으리라 봅니다.”
나는 놈의 정강이뼈를 꺾어 주었다.
“다시 한번 떠들어 봐.”
“제발 부탁합니다. 저는 십 년 동안 그에게 어떤 보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에게 편안한 죽음만이라도 허용해 주십시오.”
“이 새끼가.”
부장들이 내 양 옆구리를 필사적으로 잡으며 진정시켰다.
“본부장님. 진정해. 알아낼 것은 알아내고 죽여야지.”
레오파드까지 나를 달랬다. 나는 담배를 한 대 피워 물었다.
진정 교묘한 놈 아닌가.
“그럼 그 새끼를 잡을 방법이 영영 없다는 거야? 얼른 불어. 어떻게든 생각해내란 말이야. 똑똑히 말해 주지. 고이 불면 살가죽은 벗기지 않겠어. 질질 끌면 살가죽을 벗길 거야. 셋 셀 동안에 떠들어. 셋, 둘― ”
나는 주저 없이 칼을 뽑아 들었다.
“말하겠습니다! 말하겠어요! 령은……!”
마넨이 손바닥을 비벼 대며 빌었다. 나는 싸늘하게 웃었다.
“빨리 말해.”
“령은…… 내일 24번가의 시민묘지에 나타날 겁니다. 그날은 령의 스승인 마라타의 기일입니다. 저는 그날 아침마다 장미꽃을 바쳤습니다. 얼마 전 령과 통화하는데 그가 그 사실을 언급하더군요. 언제나 내가 자기보다 앞섰다고요.”
“마라타의 묘지에 나타나신다. 장미꽃을 바치신다.”
멋졌다. 내일이라니.
바로 코앞 아닌가.
운명의 여신이 내게 미소 짓고 있었다.
“좋아. 내일 령이 나타나지 않으면 네놈은 지옥을 맛볼 줄 알아.”
레오파드에게 계속 마넨을 취조하도록 지시했다. 놈은 정보의 보고였다. 레이가 언급한 우등생 이론을 되살렸다. 마넨 한 명만 달달 볶으면 정보수집에 쏟아 붓는 1년 예산을 대폭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는 직속부하를 불렀다. 시민묘지에서 마라타의 묘지를 찾아 아침 일찍 장미꽃을 바쳐 놓으라 했다. 령이 행여 의심을 품으면 곤란했다.
그런 다음 아이디어 기획팀들을 다시 불러 모았다. 령을 잡으려면 마넨 스캔들을 며칠 미뤄서 터뜨려야 했다. 이스트에덴 신문사로도 전화를 돌려 기사를 늦추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쿠퍼헤드와 함께 묘지에 잠입시킬 팀을 짰다. 이로써 령을 포획할 준비가 모두 끝났다.
운이 좋았다. 오늘은 축제일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길거리를 쏘다니며 춤추고 노래를 불렀다. 시민묘지 근처도 예외는 아니었다. 덕분에 대원들을 가면과 망토로 변장시켜 수월히 풀어놓을 수 있었다. 나와 쿠퍼헤드도 제복코트 위에 망토를 걸치고 새벽부터 잠복 중이었다.
조건이 괜찮았다. 묘지 주변은 빽빽한 침엽수와 덤불이 둘러싸고 있었다. 바깥과 통하는 길이라고는 묘지 출입구에서 이어지는 오솔길 하나뿐이었다. 마라타의 묘지도 잠복 장소에서 살펴보기 적당한 곳에 있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밤 10시 30분이었다. 이 시각까지 마라타의 무덤에 접근하는 인간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암만 세팅을 잘해 놓아도 배우가 등장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었다. 조금씩 초조해졌다. 빌어먹을 가면 때문에 담배도 못 피우고 있었다. 어쨌든 쿠퍼헤드의 말대로라면 령은 금발이거나 얼굴이 허여멀건 새끼였다.
“마넨이 령의 얼굴을 보는 순간 떠올린 『헤로데 왕 앞에서 춤추는 살로메』는 그림이야. 귀스타브 모로의 대표작으로 꼽히지. 그 그림으로 추정컨대 령은 금발이리라 봐. 아니면 얼굴이 지나치게 하얗거나. 그 작품은 피사체에서 뻗어 나오는 발광체 묘사로 유명하지.”
“꼴에 문신귀족이라고 비유법을 동원했나 보군.”
“나름대로 그럴싸하지 않았냐.”
“웃기는 소리. 달빛을 받으면 누군들 얼굴에서 빛이 안 날까.”
“하긴. 달빛을 받은 본부장님 가면 덕분에 지금 내 눈이 제법 부시긴 해.”
나는 시계를 한 번 더 보았다. 열한 시 가까웠다. 레이와 자정에 만나기로 약속한 터였다. 조바심이 났다.
그래도 다행히 약속장소가 여기서 가까웠다. 레이는 아직도 전화 한 통 없었다. 만약 레이가 약속장소에 나오지 않는다면 직접 그를 찾아가 볼 생각이었다. 모레 오전에는 사회안전 네트워크에 그의 입원 기록이 업데이트될 터였다. 령의 체포를 마무리 지은 후 그를 방문하면 될 것 같았다.
갑자기 짙은 암흑이 하늘을 뒤덮었다. 눈발이 거세게 변했다. 통곡하는 듯한 바람이 묘지를 뒤덮었다. 문득 싸한 한기가 목덜미를 덮쳤다. 나는 기이한 예감을 느끼며 오솔길 너머를 주시했다.
“……배우께서 드디어 등장하셨군.”
나는 차갑게 웃었다.
저 멀리서 느리게 걸어오는 작은 그림자가 보였다. 꼴에 주술사라고 퀴퀴한 코트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쓴 채 느릿느릿 걸어오고 있었다. 쿠퍼헤드가 “저 자식이 령인가. 이거 제법 흥분되는데.” 하고 중얼거렸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7년이다. 물경 7년이나 이쪽과 줄기차게 부대낀 멋진 새끼의 등장 아닌가. 어떤 놈인지 감상부터 하기로 했다.
령이 완전히 드러났다.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게끔 코트 후드를 푹 눌러쓰고 있었다. 체구는 볼품없었다. 오른손에는 담배 한 개비를, 왼손에는 장미꽃 한 묶음을 들고 어슬렁어슬렁 걸어왔다. 도보 속도가 달팽이처럼 느렸다. 이따금 담배를 입으로 가져가 연기를 뿜어냈다.
령이 잠깐 걸음을 멈추더니 길목 휴지통에 담배를 버렸다. 행동 하나하나가 굉장히 굼뜨고 느렸다. 간혹 코까지 훌쩍거렸다.
나를 골탕 먹인 맞수치고는 실망스러우리만치 한심한 꼬락서니였다. 기차에서 가톨릭 신부를 처음 본 순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던 프랑스인 형사의 심정을 체감했다. 마넨은 령을 숭배한 나머지 기억에 왜곡 현상이 일어난 것이 틀림없었다. 아니면 시력에 심각한 문제가 있거나. 역시 실체는 직접 겪어 보지 않으면 알지 못하는 법이다. 멀끔한 얼굴 아래에 도사린 내 사디스트 본능이나, 굼뜬 모습 밑에 숨긴 령의 비상한 능력이나, 겉보기만으로 어느 누가 알아차리겠는가.
순간 지독한 어둠이 주변을 에워쌌다.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들 정도였다. 잠깐 시간이 흐른 뒤에야 먹구름이 물러가면서 사위가 조금 밝아졌다.
그새 령은 모퉁이를 꺾어 마라타의 무덤 앞에 서 있었다. 우리에게서 등을 보인 채 그가 마라타의 무덤을 내려다보았다. 장미꽃을 내려놓은 뒤에도 한참 침묵을 지켰다.
확실했다. 저 자식이 바로 령이었다. 나는 무전기로 “포위해.” 하고 잠복한 전 대원들에게 지시했다. 그러고는 벌떡 일어섰다. 덤불숲이 파르르 떨리며 이파리를 휘날렸다.
그래도 령은 반응이 없었다. 미동도 하지 않고 무덤만 응시할 뿐이었다. 참으로 건방진 새끼였다.
나는 망토를 벗어 젖혔다. 너도 이제는 끝이다.
사방에서 접근하는 워커 소리에 비로소 령이 움찔했다.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며 안절부절못했다. 그 꼴이 아주 짜릿했다. 나는 권총을 확 뽑아들었다. 처음부터 령을 살려 둘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마넨은 령이 자신 아니면 주술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진술했으나, 거짓말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령은 극도로 위험한 새끼였다. 오늘 내 손으로 직접 사살해 버릴 작정이었다.
“본부장님, 뭘 그렇게 흥분하셔.”
뒤에서 쿠퍼헤드가 바짝 따라붙으며 낄낄거렸다. 내 심산을 벌써 눈치 채고 있었다.
령이 뭔가를 깨달은 듯 뻣뻣이 굳어 있었다. 다가서는 나와 쿠퍼헤드의 차림새로 가이거 부장들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래. 너는 정말 멋진 상대였다. 나에게 열심히도 엿을 먹여 주었다. 내 골머리를 아주 단단히, 톡톡히 썩혀 주었다. 그러므로 마지막 가는 길은 예의를 차려 주겠다.
단숨에 령의 앞에 멈춰 서서 놈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대로 령의 허리를 뒤로 젖혀 왼쪽 심장부에 총구를 겨누었다. 그리고 발사했다. 한줄기 총성이 어둠을 흔들었다. 령의 몸이 세차게 경련했다. 구멍이 뚫린 코트에서 눈같이 희디흰 연기가 새어나왔다. 그러나 그때 나는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내 팔에 몸을 기댄 채 쓰러지는 령의 후드 아래에서 길디긴 머리카락이 한 가닥 두 가닥 새어나왔다. 후드가 확 젖혀졌다. 아마빛이 흡사 폭설처럼 묘지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그때와 똑같았다. 스노우 화이트에서의 첫 순간과 한 치도 다름없었다. 머리카락이 바닥으로 풀썩 떨어졌다. 파란 눈동자가 내게서 멎었다. 텅 빈 눈동자였다. 놀란 것 같기도 하고 의아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기계적으로 눈을 두어 번 깜박거리다가 잠시 후 내려 감았다. 하얀 눈밭으로 붉은 피가 뚝, 뚝, 떨어졌다. 그것은 정말로 선명했다.
나는 레이를 끌어안은 채 서서히 무릎을 꿇었다. 머리가 멍했다.
이것만은 확실했다. 내가 이 손으로 직접 레이를 사살한 것이다. 나는 그를 다시는 볼 수 없었다. 레이는 일순간에 날아갔고 나에게는 죽을 때까지 암흑 같은 시간만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다음의 행동에 주저할 이유는 없었다. 나는 레이를 힘껏 끌어안으며 내 관자놀이로 총구를 가져갔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