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 ─L. (45/101)

12 ─L.

여긴 어디지.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안이 벙벙했다.

넓고 화려한 침실이었다. 온갖 쇼핑백이며 옷, 보석들이 잔뜩 널브러져 있었다.

이건 또…….

바로 직감했다. 자작나무가 또 사고를 쳐 버리고 만 것이다.

머리를 쥐어뜯다가 급히 일어섰다. 몇 걸음 걷노라니 낯이 화끈했다. 섹스 후의 느낌은 아침까지 가기 마련이었다. 이 느낌은 분명했다. 제기랄, 하고 흔치 않게 욕을 내뱉었다. 침실을 뒤져 간신히 내 옷을 찾아냈다. 옷을 입고 부리나케 집을 나섰다. 42번가에서 한참 떨어진 신시가지의 호화 아파트였다.

다행히도 코트 주머니에 몇 푼의 돈은 들어 있었다. 행인을 붙잡고 오늘이 며칠이냐고 물어보았다. 기가 막혔다. 무려 일주일이 지나 있었다. 부랴부랴 전철부터 탔다.

도대체 누구와 함께 있었지. 엄청난 부자 같던데.

옷을 입을 즈음에야 목에 걸린 목걸이를 발견했다. 첫눈에도 고가의 진품이었다. 침실에 흐트러진 쇼핑백의 옷 역시 내게 사 준 듯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고가의 선물을 안길 정도면 보통 갑부는 아닐 터였다. 비어 버린 시간 속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생각하기 싫었다. 이게 전부 자작나무 탓이었다.

자작나무…… 도대체 너라는 녀석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냉정을 찾으려 애썼다.

자작나무만 욕할 수 있을까. 어쩌면 나도 모르는 새 돌아 버렸는지도 몰랐다. 가능성 있었다. 충분히 있었다. 내가 살아온 시간을 돌이키면 미치지 않은 것이 이상했다.

그리고 자작나무는 자존심이 강했다. 레이 아리사처럼 아무하고나 뒤엉킬 녀석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내 쪽에 문제가 있는 거였다.

도대체 제정신인가. 그 무시무시한 스네이크와 섹스를 하리만치 사리분별을 못하지 않았던가. 이번에는 어떤 남자였을까. 배가 불룩 나온 중년 아저씨의 유혹에 줄래줄래 뒤따라가는 내 꼴을 상상하니 오싹했다.

그나저나 마넨 경이 걱정이었다. 소니아의 집으로 헐레벌떡 뛰어갔다.

“어머! 자기!”

소니아가 소리 질렀다.

“도대체 어떻게 문을 부수고 나간 거예요? 수리비가 얼마나 나온 줄이나 알아요?”

“제가…….”

“그래요. 문을 부수고 나갔다구요. 어머, 봐요. 손이 완전히 엉망이네. 그나저나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자기 애인이 자기를 찾았다나 봐요. 자기가 여길 뛰쳐나간 밤에 엘리 씨한테서 연락을 받았거든요.”

“예?”

온몸이 차가워졌다. 애인이라니.

설마 메사라가?

“자기 집에 자주 찾아왔던 남자였대요. 금발에 키가 아주 큰 남자요. 자기 애인한테 여기 주소를 가르쳐주긴 했는데 엘리 씨가 걱정했어요. 자기 애인이 혹시 오해할지도 모르겠다구요. 술집 여자와 같이 살았는데 어떻게 생각하겠느냐구요. 그래선지 몰라도 자기 애인이 여길 안 찾아왔어요. 어떡해요, 정말! 답답해!”

나는 스르르 주저앉았다.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메사라가 나를 찾았다.

그가 나를 찾았다.

그런데 그 시간에 나는…….

“커피 마셔요. 담배나 한 대 피우면서 진정해요. 아침은 먹었어요?”

“배는 안 고파요. 먹었나 보지요 뭐.”

“먹었나 보지요? 그건 또 무슨 말이래?”

소니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커피를 마셨다. 열 시 가까워진 시각이었다.

메사라가.

나를 찾았다.

그렇다는 건 아직 내게 마음이 있다는 뜻이었다. 속이 갑갑했다. 본의는 아니었으나 그를 배신한 셈이 되지 않았는가. 자괴감이 온몸을 파고들었다.

이것저것 물어 대는 소니아를 피해 휴대전화와 짐을 챙겨 집을 나왔다. 뭔가 계속 멍했다.

메사라가 나를 찾았는데. 그날 하필 집을 뛰쳐나가 얼굴도, 이름도 모를 남자와 엉켜 붙어 지냈다니. 그것도 일주일이나.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이런 레이 아리사를 나 몰라라 하고 자작나무는 저주에 혼신을 불사르고 있었다. 열심히 나를 골탕 먹이고 있었다. 사고 쳐놓고 시치미 뚝 뗀 심술쟁이 꼬마 같았다.

자작나무가 어두침침한 골방에 틀어박혀서 주문을 중얼중얼 외었다. 주술사인 나는 저 주문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잘 알았다. 바보 같으니. 이왕 하려면 똑바로나 할 것이지.

저 저주는 레비탄이 아니라 나를 향해 꽂힌 듯했다. 웃기게도, 가능하다면 내가 저곳으로 날아가서 자작나무를 제대로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버렸다. 웃기고 한심한 상상이었다. 레비탄이 무슨 죄가 있는가.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자작나무를 지켜본 나로서는 레비탄에 대한 증오를 억누르기 힘들었다.

황량한 골방이었다. 왕과 혼인한 후, 몇 달은 그럭저럭 대접받으며 지내다가 갑자기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탑으로 옮겼다. 냉기가 올라오는 차디차고 어두운 방이었다. 암살할 가치도 없는 왕비였기에 탑 앞을 지키는 호위병조차 없었다. 시중을 드는 시녀도 유모 한 명뿐이었고, 옷가지라고는 허름한 드레스 몇 벌이 전부였다. 저런 꼴이었기에 평민으로의 변장은 식은 죽 먹기였다.

평소 입던 옷 그대로 왕실 벽을 타고 넘기만 하면 끝이었으니까. 나는 씁쓸히 뇌까렸다.

자작나무는 여러 면에서 나와 달랐다. 주변 환경 탓에 침울한 성격으로 변해 버렸지만 근본적으로 호기심이 많았고 장난꾸러기였다. 그랬으니 그 갑갑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핑핑 도는 현기증을 참으며 집으로 들어갔다. 휴대전화를 충전시키며 잠깐 몸을 쉬었다. 귓가에서 주문 외우는 소리가 웅웅거렸다. 뺨을 몇 대 때렸다.

정신 차려라, 레이 아리사.

그리고 자작나무, 너도 정신 좀 차려.

내 목소리가 몇 백 년 전의 사람에게 들릴 리 없었다. 엉터리 저주에 열중하는 자작나무에게 별수 없이 웃고 말았다. 주술사인 내 견지에서는 참으로 한숨만 나오는 꼬락서니였다. 나름대로 코미디였다.

그리고 방향도 틀렸어. 하려면 레비탄이 아니라 왕에게 퍼부어야지, 바보야.

커피를 끓여 한 모금 마셨다. 조금씩 머리가 맑아졌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마넨 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자마자 마넨 경이 전화를 받았다. 뭐라 말도 못하고 흐느껴 울었다. 내가 죽은 줄 지레짐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감동하기는커녕 기가 막혔다.

“그새를 못 참고 그리폰 사와 접촉하셨습니까.”

“아직 돈을 받진 않았네. 혹시나 자네가 돌아오면 그때 다시 상의하려고 일단 운만 떼놓았다네.”

마넨 경이 우물쭈물 말했다. 경은 울프삭도 그리폰 사에 쿠키를 받아내고자 작정했으니 가이거가 자신을 건드리지 못하리라 자신하고 있었다. 너무도 단순한 셈법이었다.

한심한 늙은이 같으니.

내게 의지해 온 오랜 세월이 그를 단단히 좀먹은 듯했다. 아울러서 십 년이나 한 몸처럼 지낸 전속술사의 행방불명으로 마넨 경은 일주일간 엄청난 실의에 빠져 지냈다. 그 와중에 돈 욕심을 못 이겨 경솔하게 행동하다니 한심할 뿐이었다.

“그럼 한번 보겠습니다.”

울프삭과 호프먼은 로비에 성공했다. 그리폰 사는 마넨에게 건넨 액수보다 더 높은 금액을 약속했다. 울프삭은 쿠키를 받을 날만 손꼽아 기다리며 자축하는 중이었다.

저게 문제가 아니지.

검은 기운을 채집했다. 긴 시간 살펴보았으나 잠잠했다. 울프삭의 엄포에 기가 죽은 탓일까. 그러나 스네이크가 이대로 순순히 포기할 작자는 아닌데…….

마넨 경에게 채집 결과를 이야기했다.

“그럼 내가 그리폰 사에게 쿠키를 받아도 문제없겠군.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경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감이 안 좋았지만, 짜증이 나서 내뱉어 버렸다.

마넨 경이 멋대로 저지른 짓이 눈에 훤히 보이는데 간언은 하나마나였다. 입찰일이 코앞이라서 마넨 경은 안달복달하고 있었다. 덕분에 후련하게 안녕을 고할 수 있었다.

“그럼, 전에 말씀드린 대로 경과 저의 인연은 오늘로 마지막입니다. 경에게 신의 축복이 함께하길 빌겠습니다.”

마넨 경이 침묵했다. 그래도 내게는 다 보였다. 그의 속마음이 눈앞에서 글자로 우수수 흩어졌다. 불신과 충격 그리고 노여움이 범벅되어 있었다.

나는 쓰디쓴 미소를 지었다.

“편히 지내십시오.”

통화를 끝내고 시간을 잠깐 흘려보냈다. 뭔가 나도 멍했다.

십 년이었다. 무려 십 년이나 흡사 연인처럼 끊임없이 통화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 유일한 대화 상대였다. 그것이 이런 식으로 끝나다니 상당히 이상한 기분이었다.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 이제는 쓸 일이 없겠구나.

뒤늦게야 마넨 경에 대한 감정이 몰려왔다. 내 죽음에 슬퍼해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니.

다시 전화해서 쿠키는 받지 말라고 만류할까.

형용할 수 없으리만치 예감이 나빴다. 보통 불길하지 않았다. 울프삭과 호프먼, 검은 기운만을 보면 마넨 경에게 불리한 상황은 아니건만 왜 이런 느낌이 드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자작나무 때문인가.

가슴 한구석에 울혈이 맺힌 듯 갑갑했다. 어쨌든 오늘 당장 입원하기로 결심했다. 이 상태로 더는 있을 수 없었다. 곧 있을 마라타의 기일에는 어쩔 수 없이 밖을 나서야겠지만…… 하며 커피를 마실 찰나 노크소리가 울렸다.

“있나?”

건너편 룸의 루드 씨였다.

“무슨 일이신가요.”

“저기, 말일세.”

루드 씨가 우물쭈물했다.

“예?”

“자네를 찾았던 금발 남자 말이요. 사실은 말인데…… 내가 그 사람에게 받을 돈이 있걸랑.”

의외의 이야기에 나는 “예에?” 했다.

“돈……이라뇨?”

루드 씨가 민망해하며 안경을 벗어 닦았다.

“금발 친구가 자네 행방을 물으면서 내게 돈을 줬어요. 그쪽 행방을 제보하면 금액의 세 배를 주겠다고. 그래서 내가 엘리 씨에게 물어서 자네 행적을 알아냈거든. 그런데 그 이후에 전혀 여길 찾아오질 않아서…… 허 참. 그래도 약속했는데 사람이 그러면 안 되지 않을까.”

“하하하…….”

나는 어색하게 웃음만 흘렸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친구의 연락처를 모릅니다. 기다려 보시면 그 친구가 오지 않을까요. 그럼 저는 이만…….”

문을 닫으려는 나를 루드 씨가 황급히 잡았다.

“휴, 휴대전화 번호라면 내게 있어. 자네가 말해 주면 안 될까? 자기도 직접 관련이 되어 있고 하니까 말이야. 내가 전화하긴 뭣하고.”

“메사라의 휴대전화 번호를…… 가지고 있다구요?”

루드 씨에게서 휴대전화 번호가 적힌 메모지를 받았다. 침대에 멍하니 앉아 메모지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전화를 걸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 내 상태는 엉망진창이고 미래도 불투명했다.

그러나 내가 고문을 참지 못하고 죽는다면? 그렇다면 이 통화가 마지막이 될 수도 있었다.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이것은 기회였다.

주문에 열중하는 자작나무의 목소리를 귓가로 흘리며 하염없는 생각에 잠겼다. 저항하기 힘든 충동이 나를 사로잡았다.

바보 같은 자작나무.

바보 같은 레이 아리사.

이미 내 손가락은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신호가 몇 번 가는 동안 마른침을 삼켰다. 딸깍 소리가 났다.

“음. 뭐냐.”

무심한 음성이었다. 직접 듣던 때와는 많이 다른 느낌이었다. 내게 건네던 장난스럽고 예의바른 말투와 판이했다. 무의식중에도 저 음성이 정말 메사라 맞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휴대전화 너머가 시끌시끌했다. 남자들 고함이며 웅성거리는 소음이 한데 뭉쳐 떠돌았다. 메사라의 친구들일까. 아니면 직장 동료들일까.

내가 반응이 없자 휴대전화 건너편에서 짧은 침묵이 흘렀다. 메사라가 다시 말했다.

“뭐냐니까.”

설핏 노기를 띤 음성이었다.

“……포우 메사라 씨 휴대전화가 맞습니까.”

“…….”

“죄송합니다. 제가 전화를 잘못 걸었나 보군요.”

“잠깐만. 끊지 말고 기다려요. 제대로 건 것 맞습니다.”

메사라가 자리를 이동하는 듯 북적거리는 소음이 점차 멀어졌다.

“레이?”

“……예.”

짧은 시간 적막했다.

어쩌자고 전화했을까, 하며 쓰라리게 후회했다. 메사라가 내 행방을 찾다가 여자와 동거했다는 소식에 발길을 끊었다고 듣지 않았던가. 그동안 나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엉켜 세월아 네월아 보냈다.

잘 알고 있지 않았던가. 자작나무숲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 사건에서 얻은 교훈은 책임지지 못할 행동은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렇건만 지금 나는 왜 이따위 행동을 한단 말인가. 진저리나는 좌절감이 온몸을 후벼 팠다.

메사라가 낮게 헛기침했다.

“레이. 거기 어디입니까?”

“……제 집이요.”

메사라가 제길, 하고 나직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거기서 꼼짝 말고 기다려요.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머리가 멍했다. 그럼에도 입에서는 대답이 술술 나왔다.

“그럴 필요 없어요. 저는 어딘가로 갈 예정이에요.”

“어딘가라뇨? 도대체 어디로 간다는 겁니까?”

메사라가 다급하게 되물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막막했다.

“레이. 진정하고 내 말 들어요.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할 말이 있어요. 꼭 할 말이 있습니다. 오늘 하루만 저를 기다려 주면 안 됩니까. 부탁입니다.”

당장이라도 예, 하고 대답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뺨을 연거푸 때렸다. 신께서 너에게 내린 큰 장점이 무엇이더냐. 냉정함 아니더냐.

정신 차려, 레이 아리사.

“어디 가는지 장소라도 가르쳐주십시오. 제가 그쪽으로 찾아가겠습니다. 혹시 라비린스의 여직원 집입니까? 그녀에게 마음이 있는 겁니까!”

분노가 가득한 음성이었다. 낯이 화끈거렸다.

“아니에요. 그녀와 저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제가 어디로 가는지는 말할 수 없어요. 저는…… 저는요. 그러니까…….”

“레이. 내 말 잘 들어요. 기분 나빠하지 말아요. 이웃에게 들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좀 이상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고집 피우지 말고 저를 기다리십시오. 당신은 보호가 필요해요. 지금 당장 가겠습니다. 한 시간만 기다려요.”

“그러지 말아요!”

반사적으로 고함쳤다. 머리가 핑핑 돌았다.

내가 입원한다고는 가르쳐줄 수 없었다. 내 불투명한 미래를 고백할 수도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도대체 어떻게 하면…….

아니, 모든 것은 거짓말.

사실은 그를 보고 싶었다. 미치도록 간절한 욕망이었다. 그것은 주체할 수 없이 가파른 한곳으로 나를 내쳤다. 파도에 떠밀리는 듯한 감각이었다. 무의식중에 “그럼…….” 하는 자신을 깨달았지만 걷잡을 수 없었다. 그것은 광기에 가까웠다.

“모레 만나요. 모레 자정에 네겔라인 전철역 4번 출구에서 기다리겠어요.”

“모레라뇨? 그때까지 어디 있겠다는 겁니까.”

“그때 설명하겠어요. 예. 저는 당신의 말대로 좀 이상이 있죠. 저도 잘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혹시 병원에 가는 겁니까?”

나는 침묵했다.

“병원 이름을 말해 주십시오.”

“말할 수 없어요.”

“…….”

“이만 끊겠습니다.”

“잠깐만요. 그럼 휴대전화 번호라도 알려주십시오. 당신 번호는 발신자 번호가 안 찍히도록 설정되어 있군요.”

“제가 연락할게요.”

지금 전화를 끊어야 했다. 이런 식으로 그를 몰아넣을 수는 없었다. 똑똑히 느꼈다. 메사라는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의 감정이 저 너머에서 주체할 수 없이 전달되어 왔다. 질식할 것 같았다. 타오르는 일광에 증발되는 느낌이었다. 치달리는 행복감과 좌절감으로 숨이 막혔다.

기다려 주는 사람이 있었다.

나를 사랑하고, 기다려 주는 사람이 존재했다.

“그럼…… 모레 봐요.”

“레이.”

“예?”

팽팽한 정적이 지나갔다.

“사랑합니다.”

나는 눈을 깜박거렸다.

지금 내가 무엇을 들은 것인가. 사랑합니다,라고 말했다. 포우 메사라가 레이 아리사에게 단호한 어조로 사랑을 속삭였다.

「이름이란 뭐지? 장미라 부르는 꽃을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아름다운 그 향기는 변함이 없는 것을……」

그렇지 않아.

내게 이름은 중요해.

꽃은 지고 향기는 스러진다. 사랑은 장미와 다르다. 일방적으로 향기를 내뿜는 장미가 아니다. 그것은 혼자만으로 완성할 수 없다.

너는 이름을 말하지 않았기에 잔혹한 죽음을 맞이했다. 향기만 남겨두고 도망쳤기에 파멸을 맞이하여 황무지에 파묻혔다. 그래서 지금도 의심하고 궁금해 하는 것이다. 왕은 정말로 나를 사랑했을까…… 하며.

그만둬! 그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

너는 너다. 나는 나다.

“저도요.”

나는 너와 다르다. 레이 아리사다.

“레이 아리사는 포우 메사라를 사랑합니다.”

나는 너처럼 살지 않을 것이다.

메사라는 짧은 시간 어떤 반응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알았다. 휴대전화 너머에서 일렁이는 감정을 똑똑히 느꼈다.

“정말입니까.”

메사라가 질문했다. 그 의심이 나는 기뻤다.

“예.”

나는 그에게 사랑을 확인시켰다.

“사랑합니다.”

“한 번 더 말해 주십시오.”

“사랑합니다.”

“한 번 더요.”

그가 수차례 물었다. 나는 그때마다 단호하게 대답했다.

사랑한다고.

“모레 자정에 만나요. 그때 이야기해 줄게요.”

전화를 끊은 뒤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예약한 병원에서 두 구간 가면 네겔라인 역이었다. 네겔라인 역에서 도보로 30분 거리에 마라타가 묻힌 시민묘지가 있었다.

모레가 마라타의 기일이었다. 이 외출만은 어쩔 수 없이 해야 했다. 저녁에 마라타의 무덤 앞에 꽃을 바친 후 자정에 메사라를 만나면 될 것 같았다. 나는 눈으로 덮인 길을 걸으며 하늘을 응시했다.

오르키투니카가 내 전생의 기억을 단숨에 뚫어 버린 뒤, 열일곱 살까지 나는 환각과 환청으로 되살아나는 전생의 기억에 고통 받았다. 그것은 지독스레 생생한 감각이었다. 어떤 때는 길디긴 시간을 골방에 틀어박혀 창밖을 응시했고, 어떤 때는 잔혹한 고문에 시달렸다. 영혼의 기억은 한없이 나를 괴롭히고 짓이겼다.

마넨 경과의 계약은 내 능력을 묶어 주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것은 절반의 성공이었다. 해방의 황홀감은 일순간에 불과했다.

기억은 다른 형태로 조금씩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자작나무가 살아온 순서대로 기억이 재생되기 시작한 것이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시간대로 재생된다는 것은 곧, 두 달의 고문까지 고스란히 버텨야 한다는 뜻이었다.

왜일까.

경과 계약을 했음에도 오르키투니카가 유지되는 이유라면 하나밖에 없었다. ‘사랑’은 투시주술만 남겼다. 그리고 나는 타고난 투시능력자였다. 부작용인 것이다. 1번 상대인 마넨 경과 통화하노라면 그 생생한 감각에 소름끼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리고 0번 상대는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사랑이 묶어 버리기에는 내 투시능력이 지나치게 강했던 것이다.

속이 갑갑했다. 길거리 자판기에서 담배를 사서 한 개비 뽑아 피워 물었다.

데이탄즈…….

자작나무 생각에 부쩍 골몰하는 요즘이었다. 괴롭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작나무는 두 달 동안 왕을 기다리며 고문을 견뎠다. 한 번쯤은 왕이 직접 자신을 심문하리라고 확신했다. 그런 자작나무를 끝내 죽음으로 내몬 것은 ‘무쇠 소녀형구(Eiserne Jungfrau)’ 고문이었다. 백오십 개의 못이 그녀의 육체를 갈가리 찢었다. 레이 아리사가 심장마비에 걸려 버린 시점도 그 고문이 되살아난 순간이었다. 다시 닥쳐올 그 고통을 내가 견딜 수 있을까. 점치기 힘들었다.

너는 정말 바보야.

나는 데이탄즈를 절대 용서할 수 없다. 독 발린 달콤한 말로 자작나무의 눈을 어둡게 했고, 고문을 명령하는 모후도 방조했으며, 자작나무의 시신까지 별반 감흥 없이 황무지에 매장하라고 지시했다. 자작나무가 아무리 데이탄즈를 갈구해도 레이 아리사는 끝까지 그를 증오할 것이다.

당신은 벌을 받아야 한다. 자작나무가, 내가 당한 고통을 맛보아야 한다. 우리가 겪은 절망과 아픔을 당신도 똑똑히 체감해야 한다. 만약, 이 시공간에 데이탄즈가 함께 존재한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그를 저주하리라. 신도 나의 복수를 기꺼이 허락할 것이다. 어깨를 두들기며 격려할 것이다. 주저 없이 내 왼손에는 천칭을, 오른손에는 칼을 쥐여 줄 것이다. 지옥으로 그를 떨어뜨려 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반드시 살 것이다. 몸부림칠 것이다. 자작나무를 극복하고 기억의 찌꺼기를 뒤로 한 채 머나먼 저편으로 걸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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