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M─
마넨의 근래 행보가 기록된 보고서를 검토했다. 훑어보자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굉장히 즐거웠다. 어쩌면 이렇게나 내 짐작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지 배꼽을 잡고 싶었다. 쿠퍼헤드와 레오파드는 아예 입을 딱 벌렸다. 앞으로 내 말이면 껌벅 죽을 태세였다.
카운트다운 들어간 후, 우리는 울프삭 경 주변을 얼씬도 하지 않았다. 나머지 부장들로 하여금 울프삭 경을 수행시키며 거짓정보를 내리 흘렸다. 이른바 낚시질이었다.
그리고 마넨은 찌를 물었다. 보고서를 훑으며 내 자석이론이 옳았음을 재차 확인했다.
레오파드가 담뱃재를 털며 물었다.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할 셈이야?”
“호프먼이 그리폰의 로비스트들과 만날 때까지 기다려야지. 령이 분명 한 번 더 호프먼을 탐색할 테니까. 그 즈음 해서 그리폰의 로비스트들에게 접근시킨 대원들을 철수시킨다. 울프삭 경 때문에 할 수 없이 손을 뗀다고 슬쩍 정보를 흘려 주면서 말이야. 검찰에 심어 놓은 대원들도 더불어서 철수시키고. 그렇게만 해 주면 마넨은 다시 그리폰 사에 쿠키를 요구해서 받아낼걸.”
“호오.”
“쿠키를 받아낼 때 현장을 급습한다. 경찰은 울프삭 경과 한통속이니 그 다음부터 우리가 할 일은 고속질주밖에 없어.”
“하지만 울프삭 경도 그리폰 사에 쿠키를 받잖아. 그건 어떻게 처리하려고?”
쿠퍼헤드가 물었다.
“호프먼을 적절한 때에 포섭하면 돼. 그리폰 사가 울프삭 경에게 쿠키를 전하는 시기를 늦게 정하는 거지. 그쪽이 워낙 마넨에게 많이 퍼줘서 울프삭 경에게 건넬 쿠키를 마련할 때까진 시간이 걸린다고 핑계 대면 그만이야.”
“이거 정말이지 우리 본부장님을 적으로 돌리면 큰일 나겠는걸.”
쿠퍼헤드가 중얼거렸다. 레오파드가 “이제 알았냐.” 하며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나는 지그시 웃었다.
“어쨌든 우리는 나머지 부장들과 따로 움직여야 해. 시일이 걸리니까 그때까지는 여유롭게 지내도록 하자구.”
저렇게 말은 했으나 요 2주일간 여유와는 거리가 먼 시간을 보냈다.
레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퇴근하는 즉시 그의 집으로 가서 자리를 지켰는데 지금껏 감감무소식이었다. 집 근처를 돌며 금발머리나 괴상한 코트를 봤느냐고 물었으나 역시 허탕만 쳤다. 새로 구입한 저택은 공사가 끝나 가건만 정작 들어갈 사람이 없으니 미칠 노릇이었다. 생사 여부도 뚜렷하지 않았다.
그래도 와중에 수확은 있었다. 내 추측이 들어맞았다. 이웃들에게 레이는 정신이상자로 통했다. 내가 그의 방문을 노크할 때마다, 저들이 이쪽을 저글링 돌리는 원숭이 보듯 흘끗거렸던 이유를 비로소 깨달았다.
“복도를 걷다가 공중을 향해 삿대질하는 일이 잦았죠. 흡사 뭔가를 치우려는 듯 버둥버둥 손동작도 하구요. 그런데도 정작 자신은 모르는 눈치더라구요. 하도 이상해서 제가 물어본 적도 있어요. 왜 그러냐구요. 그랬더니 하는 말이 ‘제가 언제요?’였어요. 한 번은 자기 방문 앞에서 오도카니 몇 시간이나 넋을 놓고 서 있을 때도 있었구요.”
건너편 룸에 사는 중년남자 말로는 레이의 룸에서 누군가에게 고함치는 소리도 종종 들렸다고 했다. 내리 혼자서 지내는 그가 대체 누구에게 화내는지 도통 모를 노릇이었다고 말했다.
레이가 화를 낸다? 고함을 친다? 그에게서 거의 보지 못한, 아니, 상상도 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그게 이상하죠. 저는 십 년 가까이 아리사 씨 건너편 룸에서 살았는데, 말 한 마디 나눈 적이 거의 없었어요. 보통은 조용한 사람이었어요. 아니, 조용함을 넘어서 그 정도면 아예 유령에 가까웠죠. 그리고 화를 낼 정도의 상대라면 어떤 교분관계가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런데 아리사 씨는 책가게와 집만 오갔거든요.”
“혹시 짚이는 이유는 없습니까.”
“그게…… 아리사 씨는 봄에도 겨울옷으로 온몸을 감싸고 돌아다녀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변장에 가깝게요. 그 계절에 가끔 저를 찾아오는 제 친척들은 아리사 씨가 전신화상을 입은 환자인 줄 착각하더라니깐요. 아리사 씨는 사실 눈에 확 띄는 용모잖아요. 그러니까 더 이상하지요. 이웃끼리는 아리사 씨가 과거에 안 좋은 일이라도 당했냐며 숙덕대곤 했어요.”
“……혹시 화를 내는 상대방 이름을 들어 본 적은 없습니까.”
“‘너’라고만 부르던걸요. 아리사 씨가 일방적으로 화내는 패턴이었어요. 그런데 그게 진짜 오래되었어요. 제가 아리사 씨를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으니 십 년 가깝죠.”
“어떤 내용인지는 못 들었습니까.”
“글쎄 그건 도통. 아, 그리고 그 고함치는 빈도가 요 몇 달 들어 아주 잦았어요.”
갑자기 중년남자가 미간을 찡그렸다.
“저기…… 그런데, 댁은 아리사 씨하고 무슨 관계슈?”
나는 대답 대신 지갑에서 수표를 뽑아 중년남자의 손에 쥐여 주었다. 수표에 찍힌 액수를 확인한 중년남자가 눈을 부릅떴다.
“그가 눈에 띄면 이쪽으로 연락 주십시오. 그때는 세 배를 드리지요.”
중년남자에게 휴대전화 번호를 적어 주고 레이의 룸으로 들어갔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온몸을 파고들었다.
담배를 뽑아 불을 붙이고 깊이 당겨 빨았다. 두 개비를 더 피운 다음 쿠퍼헤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레이의 집을 지켜달라고 부탁했다. 쿠퍼헤드는 마침 근처에 있었다. 피 끓는 근육질이 남아도는 시간을 죽이는 방식이란 게이나 스트레이트나 똑같았다.
20분 뒤 쿠퍼헤드가 룸을 노크하고 들어왔다. “허, 이게 금발의 집이야? 뭐가 이리 썰렁해?” 하며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이야, 근데 우리 본부장님이 단단히 빠졌나 봐. 전에 가면무도회 때도 그랬지만 이번에는 또 웬일이냐? 금발이 갑자기 사라졌다구?”
“여기서 자리 지키고 기다려 봐. 혹시 찾아오면 바로 연락 줘.”
쿠퍼헤드는 “응.” 하며 흥미로운 눈길로 책장을 살펴보았다.
“오우. 본부장님의 금발께서 취미가 의외신걸. 꽤 신기한 책들이 많잖아. 이건 또 뭐냐, 중국의 병법서까지 있군. 호오, 이런 책들을 다 어디서 구했을까. 눈의 여왕 팬인가. 자작나무 책도 상당히 많네. 의외로군.”
“헌책방을 운영하는 사람이니까 책이 많은 거야 이상할 일이 아니지. 그럼 지키고 있어.”
그 말만 남기고 밖으로 나왔다. 밤하늘에서 눈의 여왕이 하얀 보폭을 옮기고 있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대체 어디로 사라졌을까. 눈보라가 맹위를 떨치는 한겨울이었다. 지금 같아서는 남자가 곁에 있어도 좋으니 무사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가슴 한구석으로 돌멩이가 침입한 듯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지독스레 고통스러웠다. 스물아홉에야 비로소 마술같이 찾아온 이 감정이 증오스러웠다. 아니, 차라리 이전에 경험이 있었다면 지금 같은 실수는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왜 몰랐던가. 어찌하여 단순한 성욕으로만 치부했던가. 그렇게나 수시로 떠오르고 시간만 나면 찾아갈 궁리에 몰두하고 사소한 일에도 질투를 느꼈는데.
보고 싶었다. 만지고 싶었다. 같이 걷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웃겼다. 그 이전에 잔인했다. 레이를 떨쳐내려 노력할 때는 그렇게나 우연이 반복되지 않았던가. 정작 그를 다시 찾으려는 이 시점에서는 한 조각의 실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레이에게는 치료가 시급했다. 씁쓸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쓰디썼다. 그가 이렇게까지 불행에 휘감겨 있을 줄은 몰랐다. 알고는 있었다. 나는 그의 온몸을 드리운 우울한 그림자를 질색했었다. 그리고 그 이유를 가난과 고독한 생활로 단정해 버렸다. 기껏 궁상이려니, 인간쓰레기니 저러고 살지, 하며 비웃어 치웠다.
그러면서 아랫도리 푸는 일에나 열중했다. 정부로 적당히 들여앉힌 후 잘 먹이고 잘 입히면 궁상도 사라지겠거니 낙관했다. 그러나 레이를 감싼 그림자는 내 예상을 초월하는 무겁고 혹독한 불행이었다. 정신이 붕괴될 만치 고통스러운 시간을 지냈던 것이다.
신은 무슨 심산으로 그런 사람을 내 앞으로 내동댕이쳤을까. 끔찍하게 잔혹했다. 왜 당신인가. 어째서 하필 당신이 내 감정이 질주하는 목표점인가.
갑자기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저기, 아까 수표를 받은 사람인데요. 옆집의 엘리 씨에게 아리사 씨 소식을 방금 들어서 말입니다. 엘리 씨가 그쪽과 통화하고 싶다는데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담배를 꺼내 물며 “바꿔 주십시오.” 했다.
그러다가 멈칫했다. 짙은 어둠속 멀찍이서 아마빛 머리카락이 희미하게 일렁거렸다. 휴대전화에서 엘리 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라비린스에서 알게 된 여직원의 집에 레이가 신세를 지고 있다고 했다.
“네, 네. 그 집 주소를 말해 주십시오.” 하며 아마빛 머리카락 쪽으로 황급히 뛰어갔다. 내가 레이를 잘못 볼 리 없었다. 그사이 아마빛이 어느 곳으로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스노우 화이트였다.
체온이 내려갔다. 여직원의 주소를 메모하면서 스노우 화이트의 계단을 밟았다. 스노우 화이트는 침침한 지하의 비좁은 바였다. 일반적으로 게이들은 시끄러운 음악이 난무하는 클럽을 선호했다. 그런 점에서 스노우 화이트는 다소 특별한 취향의 소유자들이 선호하는 장소였다.
바 문을 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담배연기가 자욱했다. 깔리는 음악도 게이들이 으레 좋아하는 클럽음악 따위가 아닌 우아한 교향곡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며 레이를 찾았다. 눈에 금방 띄었다. 봄에도 온몸을 감싸고 다닌다는 이웃의 말이 무색한 모습이었다.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흩뜨린 채, 앞 단추가 모조리 풀린 코트를 걸친 상태로 주정뱅이처럼 비틀비틀 걷고 있었다. 레이는 술을 못 마셨다. 그러니까 저건, 정신이 나간 거였다.
대번에 주변 시선이 레이에게 쏠렸다. 나는 젠장, 하며 욕설을 내뱉었다. 벌써 아메리칸 풋볼 단원들이 레이에게 슬금슬금 모여들고 있었다. 평소에도 그랬지만 오늘따라 인간들이 터지리만치 많았다. 장소가 비좁아서 사람들을 헤치는 일부터 번거로웠다. 레오파드와 내가 이런 식으로 레이를 놓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결국 포기하고 상황을 관찰하기로 했다. 누구와 동행하든 레이가 나가는 즉시 뒤쫓기로 했다.
그리고 나도 진정이 필요했다. 좆같았다. 2주 가까이 레이를 찾아 헤맸는데 다른 장소도 아니고 하필 스노우 화이트라니. 거기다가, 업소 여자와 동거를 했다?
제아무리 레이의 상태를 감안해도 이성을 유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까딱 잘못하면 뒤통수에서 뭔가가 핑 날아갈지도 몰랐다. 그렇게 된다면 스노우 화이트는 내일부터 스노우 블러드로 간판을 바꿔 달아야 했다.
스카치를 주문하고 담배를 뽑아 불을 붙였다. 연기를 깊숙이 빨며 뇌까렸다.
어쩔 수 없지. 내 일방적인 감정이니까.
진정하자…….
지금은 인내심을 발휘해야 할 때.
칵테일 바로 시선을 흘끗 던졌다. 레이가 바 테이블에 양팔을 괸 채 엎드리다시피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남자들이 왔다 갔다 하며 레이에게 수작을 걸었다. 지금 말을 거는 놈만도 여덟 번째였다. 어떤 면에서는 레이가 정신이 나가서 다행이었다. 오늘은 웬일로 첫 마디에 자리를 뜨지 않았다. 나는 새삼스런 기분으로 바를 훑었다.
끼리끼리 논다더니…….
무심결에도 실소를 터뜨렸다. 과연 변태들의 집합소였다. 바에 들어찬 객들 대개가 단정히 정장한 사내들이었다. 풍기는 분위기나 옷차림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경제력이나 학력이 드러났다. 저런 치들이 되레 위험했다. 젊은 사업가로 위장한 탓도 있지만 나 역시 원래 너저분하게 입고 다니길 싫어했다.
그러고 보니 그 골목길에서 내가 손봐 준 놈들도 험한 입과 달리 옷차림은 멀쩡했다. 정신 나간 새끼들. 자기들도 변태 주제에 레오파드와 나더러 ‘질 나쁜 섹스를 즐기는 놈들’이라고 욕했다 이거지.
갑자기 기분이 확 구겨졌다. 그건 곧 이쪽이 변태소굴에서도 공인받은 대변태라는 뜻 아닌가.
별안간 레이가 나더러 ‘매너 좋은 변태’라고 표현했던 것이 떠올라 버렸다. 제기랄이었다. 엿 같았다. 어쨌든 레이에게는 변태들에게 특히 어필하는 매력이 넘치는 듯했다. 이런 것도 그에게는 불행이었다.
나는 쓰게 웃으며 칵테일 바를 주시했다. 이번에는 금발을 단정하게 넘긴 놈이 레이에게 수작을 걸고 있었다. 기분이 나빠졌다. 나와 옷차림이 어째 비슷한 놈이라서 더 짜증이었다. 팔목에 찬 시계는 아예 똑같은 제품이었다. 신경질이 확 솟구쳤다. 나는 시계를 끌러 코트 포켓에 넣어 버렸다.
레이가 고개를 들더니 물끄러미 놈을 응시했다. 얼굴에 진 그림자 탓에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레이가 주춤주춤 일어서더니 남자의 품에 스르륵 안겼다.
나는 스카치를 남김없이 들이켜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스노우 화이트를 나서는 그들을 거리를 두고 뒤따라갔다. 밤거리로 눈이 소복소복 쌓였다. 인적이 뜸했다. 둘이 떠드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권총을 차에 놔두고 오길 천만다행이었다. 안 그랬다면 오늘 여기서 경관은 세 구의 시체를 수습해야 했을 것이다.
뭘 저리 정겹게 떠들어 대는지 참 궁금했다. 눈에 안 띄게 거리를 좁혀 가며 미행했다.
“하하하. 눈동자가 마음에 들었다구요?”
좆같았다. 나와 말투까지 비슷한 새끼였다.
레이가 웅얼웅얼했다.
“이거 기분 좋은데요. 눈동자 색깔을 칭찬 받은 적은 처음이라서요. 그것도 당신 같은 사람에게 말이지요.”
놈이 레이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어느 자동차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좆같게도 내가 얼마 전 구입을 고려하며 눈여겨본 신형 모델이었다. 이쯤 되면 도플갱어였다.
놈이 자동차 키를 꺼내다 말고 레이를 응시했다. 여기서 주둥이를 부딪칠 참인 듯했다. 뒤통수에서 뭔가가 확 빠지는 감각이 치달았다. 나는 전신주 뒤에서 걸어 나왔다.
“레이!”
발악하듯 고함쳤다. 놈이 움찔하며 이쪽을 쳐다보았다.
레이는 고개를 늘어뜨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내 목소리에 어떤 반응도 없었다.
“레이!”
한 번 더 이름을 불렀다. 여전히 레이는 반응하지 않았다. 내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레이!”
더욱 소리 높여 또 한 번, 이름을 외쳤다. 그제야 레이가 천천히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림자가 드리워진 푸른 눈동자가 내게 멎었다. 찰나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혼이 사라진 듯한 텅 빈 눈동자였다. 그때와 똑같았다. 차디차게 “머리를 식히는 게 좋겠군요, 메사라.” 하고 내뱉던 그 순간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에게 재차 거절당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뒤이어 믿을 수 없는 감각이 온몸을 내달렸다. 그것은 전율과도 흡사했다. 공포였다.
나는 움직임 없이 레이를 주시했다.
레이가 몸을 휘청거렸다. 아슬아슬하게 간신히 중심을 잡고서 나를 다시 쳐다보았다. 여전히 텅 빈 눈동자였다. 그러나 곧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주검처럼 차디찬 눈동자에 물기가 서렸다. 그가 서서히 한 걸음 내딛었다. 이쪽으로, 나에게로 걸어왔다. 점점 빨라졌다. 거의 달려오다시피 했다. 일순간 아마빛 머리카락이 내 품으로 쏟아져 내렸다. 파란 눈동자가, 작은 몸이, 힘껏 뛰어들었다. 무엇인가가 나를 꿰뚫는 듯한 감각이 내달렸다. 그것은 바람 같기도 하고 불덩이 같기도 했다.
삽시간이었다. 길디긴 목마름을 비웃기라도 하듯 뜨거운 부딪침이었다. 나는 그를 으스러지게 끌어안았다. 지금의 레이는 정신이 나가 있었다. 개의치 않았다. 그는 내 품으로 뛰어들었다. 나는 그를 끌어안고 있었다. 눈을 뜨면 사라져 버리는 망상이 아니었다. 여운만 남기는 꿈 따위도 아니었다.
현실이었다.
고단하고 먼 여행에서 간신히 되돌아온 느낌이었다. 그 길에서 나를 사로잡았던 온갖 좌절감과 분노가 저 너머로 날아갔다. 어둠은 빛이 되고 냉기는 열을 띠었다. 이대로 시간이 정지하길 바랐다. 이곳이 설사 파멸을 부르는 영혼이 출몰하는 망대라도 상관없었다. 눈꽃이 갈가리 흩어졌다. 멀리서 점멸하는 자동차 불빛을 깨달은 때는 한참 뒤였다.
출입구 수위의 찌르르한 눈초리로 뒤통수가 근질거렸다. 당연했다. 이곳 고급 아파트에 입주하고 4년간, 나는 일주일에 두 번 부르는 메이드를 제외하면, 애인은커녕 친구 한 명 집으로 데려온 적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6층 버튼을 눌렀다. 레이는 잠들다시피 내게 안겨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호텔로 데려가려다가 마음을 바꿔 집으로 향한 터였다. 내가 거주하는 집은 평범한 가이거 대원은 꿈도 못 꿀 고급 아파트였다. 레이가 정신을 차리는 대로 내 신분을 밝히고 사정을 설명할 생각이었다.
엘리베이터가 멎었다. 침대에 레이를 눕히고 코트를 벗겼다. 문득 그의 손에 눈길이 갔다.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급히 구급상자를 가져와 상처를 처치했다. 어쩌다가 이렇게 다쳤을까. 가슴 한구석이 싸했다. 잠깐 잊고 있었던 그의 정신이상이 뇌리에 되살아났다.
몸을 일으켰다. 샤워를 하면서 비로소 피곤을 느꼈다.
가운을 걸치고 거실로 나왔다. 머리가 번잡했다. 일단 쿠퍼헤드에게 전화를 걸어 레이의 집에서 나오라고 했다. 그리고 내일부터 며칠간 병가를 내겠노라고 했다.
쿠퍼헤드가 실실 쪼갰다.
“병가? 누가 믿겠어? 이거 단단히 빠지셨구만, 우리 본부장님께서. 그나저나 타이밍 기가 막힌데. 내일 또 축제잖아.”
“어차피 마넨이 쿠키를 얻을 때까지 며칠은 기다려야 해. 마넨이 호프먼과 울프삭 경과 접촉하면 내게 연락 줘. 그럼.”
수화기를 내려놓고 소파에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어떡할까. 내일 레이를 바로 입원시킬까.
보내기 싫었다. 며칠이라도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무엇보다도 두려웠다. 레이가 제정신을 되찾으면 나를 재차 거절할지도 몰랐다. 나는 천성적으로 냉정하고 인내심이 강했다. 그러나 레이에게만은 자제가 되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 같았다. 나는 거칠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리해 보자…….
사람의 눈길을 피하려 한다. 봄에도 온몸을 꽁꽁 감싸고 다닌다. 삿대질을 한다. 너,라고 부르며 욕을 퍼붓는다.
짚이는 것이 있었다. 나는 레이가 잠든 모습을 즐겨 구경했다. 섹스가 끝나면 레이는 곯아떨어지기 일쑤였고 나는 그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때 뜸하게 내뱉던 잠꼬대 내용이 이상했었다.
“저리 가, 이 나쁜 자식.”이라든가 “수작 짓지 마.” 따위였다. 병원에서 기회를 틈타 그것을 슬쩍 떠보자 레이는 악몽이라고 대답했다. 나는 참인지 거짓인지 귀신같이 간파할 줄 알았다.
그 대답은 거짓이었다.
레이는 스노우 화이트에서 만났던 변태들에게 괴롭힘 당했다. 나는 잠꼬대 내용이 그 변태들과 연관된 것이려니, 결론지었다.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가면무도회에서 레이는 내게 안겨 오며 뭐라고 말했던가.
나의 왕이라고 했었다.
왕이라.
어떤 새끼야.
안에서 무엇인가가 지글지글 들끓었다. 자명종이 새벽 세 시를 알렸다. 머리가 복잡했지만 몸을 일으켰다. 레이 곁에 누워 눈을 감았다. 일단 내일부터 모든 것을 생각해 보기로 했다.
바깥에서 펑펑 터지는 소리가 났다.
뺨이 간지러웠다. 뭐지…… 하다가 정신이 돌아왔다. 눈을 확 뜨며 일어났다. 레이가 웃으면서 손을 옆으로 치웠다.
멍했다.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바로 앞에서 레이가 웃고 있었다. 나를 부드럽게 응시하며 미소 짓고 있었다.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내 눈길을 피하지도 않았다. 평소의 레이와는 동떨어진 모습이었다.
아직도……
“제가 왕으로 보입니까.”
나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레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왕이라니요?” 하고 되물었다.
그 태연한 표정에 되레 내가 말문이 막혀 버렸다. 뒤이어 레이가 갑자기 안겨 왔다. 말할 수 없이 부드러운 포옹이었다. 머리가 텅 비는 것 같았다. 적막한 어둠속에서 언제나 꿈꾸어 온 모습이었다.
차라리 이대로 계속 있어 준다면. 그를 끌어안으며 한없는 이기심을 품고 말았다.
나는 손아귀에 죽음을 움켜쥘 때에야 가장 큰 희열을 느끼는 놈이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내 본능이었다. 이제껏 추호도 상상하지 못했다.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이었다. 사람의 체향이 이토록 깊은 기쁨을 안기리라고는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다.
갑자기 밖에서 빛이 번쩍 터졌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밤이었다. 축제를 알리는 불꽃놀이 소리가 연거푸 이어졌다. 잠깐 어이가 없었다.
밤이 될 때까지 잤단 말이야? 체력이라면 부장들 중에서도 으뜸가서 아무리 오래 자도 일곱 시간을 넘기지 않았는데.
“이런, 제가 너무 많이 잤군요. 배 안 고픕니까?”
레이는 그저 웃었다. 그를 데리고 거실로 나가서 간단히 식사를 했다.
식사를 하며 곰곰이 헤아렸다. 어떻게 할까. 어쨌든 병가는 냈고 레이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의 레이도 썩 나쁘지 않았다. 그에게 재차 거절당할 두려움 때문에 생긴 이기심이라고 해도 할 수 없었다. 알고 있다. 여기서 미적거릴 노릇이 아니라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직행해야 했다.
잘 알면서도, 지금 나는 레이와 병가 동안 뭘 할지 궁리 중이었다. 정말이지 도리 없는 녀석이었다.
냉정히 가늠했다. 거절당하든, 거절당하지 않든, 모두 레이가 정신을 차린 다음 벌어질 일이다. 그럼, 내가 그동안 하릴없이 그를 쳐다만 보아야 옳은가?
터무니없는 소리.
말도 안 됐다. 지금 저렇게 나를 원하고 있지 않는가. 간간이 내게 웃음을 보내고 있잖은가. 이런 그를 해바라기처럼 목을 빼고 가만히 쳐다보기만 한다? 터무니없었다. 나는 사지 멀쩡한 젊은이였고 성욕도 끓어 넘쳤다. 레이에게 차인 뒤 지금껏 섹스도 끊고 살았다.
다정한 포우 메사라는 악당 스네이크로 삽시간에 변해 버리고 말았다. 냅킨으로 입을 닦은 후 그에게 미소 지었다.
“축제입니다. 여기서 시간만 보낼 순 없잖아요? 나갈까요?”
만월의 밤이었다. 거리로 인파가 밀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축제 때는 온갖 상가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문을 열었다. 레이의 허리를 끌어안고 느긋이 거리를 노닐었다. 기분이 좋았다. 어깨를 부딪치는 행인부터 사방팔방에서 잡아끄는 잡상인까지 흥을 돋웠다.
괜찮았다. 그동안 망상해 온 모든 짓을 레이에게 다 쏟아부을 작정이었다. 나는 부양가족 없는 게이였고 돈도 썩어 넘쳤다. 병가까지 얻었것다, 오늘은 축제의 날이었다. 우선 보석 숍으로 갔다.
“목걸이를 보고 싶습니다.”
직원이 “세상에. 스노우 퀸의 금발 버전이네.” 하고 감탄하며 우리를 안내했다. 레이와 손을 잡고 보석을 구경했다. 이것저것 둘러보다가 한 제품에서 눈길이 멎었다.
나도 모르게 흐음, 했다. 심플하고 고급스러운 디자인이었다. 남자가 걸고 다니기에 무리가 없을뿐더러 레이에게도 어울릴 것 같았다.
“이게 좋겠군요.”
망설임 없이 목걸이를 골라서 포장했다. 직원들이 “이 목걸이는 우리 매장에서 3년 동안 팔리지 못했을 만큼 고가 제품입니다.” 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코가 땅에 닿을 만치 허리 숙이는 직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보석 숍을 나섰다. 오늘밤 레이를 홀랑 벗겨 놓고 직접 걸어 줄 작정이었다. 상상만으로도 아래가 뻐근했다. 그 전에 정신을 차리면 곤란한데, 하며 스르르 웃었다.
하여튼 어쩔 수 없는 녀석이라니까…….
신경 껐다. 이왕 시작한 일, 끝까지 간다가 내 주의였다. 괜히 악당 스네이크가 아니었다.
레이가 문득 한 방향으로 손짓했다. 소녀들이 붉은 꽃을 팔며 호객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꽃을 사서 하나씩 들고 거리를 노닐었다. 기분이 아주 째졌다.
“좋아요?”
“예.”
이번에도 멀쩡한 반응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레이는 조용하게 웃으며 이쪽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설핏 풀린 눈동자였다.
“제가 누군지 알겠어요?”
그래도 기대감을 품고 질문을 던졌다. 레이가 주저 없이 대답했다.
“남자.”
“…….”
아아, 이런.
안도와 아쉬움을 반반 느끼며 다시금 그의 허리를 꽉 잡았다. 아마빛 머리카락이 눈앞에서 펄펄 휘날렸다. 아찔한 춤사위처럼 흐드러졌다. 숨이 콱 막혔다.
그나저나 왕인지 뭔지는 어떤 새끼야.
레이가 이 꼴이 된 데에는 그 새끼가 한몫한 것이 틀림없었다. 분명했다. 봄에도 온몸을 꽁꽁 감싸고 돌아다닌다면 강간일 가능성이 컸다. 아니면 레이를 농락하고 잔인하게 버린 놈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둘 다일 수도 있었다. 어제 내내 레이의 행적을 짚어 보며 확신을 품은 터였다. 어디 한번 잡기만 해 봐. 좆을 뭉개 주는 데서 끝나지 않을 테니.
노여움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노점 식당으로 향했다. 축제에는 길거리에서 맛보는 음식이 최고였다. 어떤 최고급 식당도 이런 즐거움은 선사하지 못했다. 식사를 즐기며 길거리 퍼레이드를 관람했다. 레이는 매우 즐거워했다. 붕 뜨는 기분으로 그것을 구경하는데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레오파드였다.
“음. 뭐냐.”
“오늘 파티에서 찍어온 비디오를 방금 쿠퍼헤드와 함께 돌려봤거든. 마넨이 호프먼과 울프삭 경과 악수를 나눴더군.”
“그 외 별다른 건?”
“없지. 그나저나 재미 좋으시냐. 옆에 레드폭스 있다며.”
“음.”
한마디만 하고 재빨리 통화정지 버튼을 눌러 버렸다. 빌어먹을 딱따구리.
쿠퍼헤드에게 《호프먼은 너에게 맡기지.》 하고 문자를 보냈다. 이제 남은 것은 마넨이 제 발로 덫에 빠질 때까지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나는 탁자를 톡톡 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축제가 절정으로 치달았다. 옆에서는 금발을 나부끼는 내 연인이 웃으며 손뼉치고 있었다. 세상을 한손에 움켜쥔 기분이었다.
기분뿐이겠는가.
나는 지그시 웃으며 보드카 잔을 들었다.
마넨에서만 멈추지 않을 예정이었다. 나는 조만간 울프삭 경까지 허수아비로 만들 심산이었다. 울프삭 경이 구레나룻이며 릴리즈를 가까이 하지만 않았다면 아니, 최소한 매음굴 술집 수행 따위의 모욕만 가하지 않았다면 이쪽도 얌전히 수족 노릇에나 만족했을 것이다. 이 심중은 아직 어느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다. 어쩌면 레오파드는 막연히 짐작할지도 몰랐다. 녀석은 내 성깔을 잘 알았다. 나는 화나면 무서웠다.
미소를 지으며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시나리오는 적당히 형체를 갖춰 완성을 앞두고 있었다. 일명, 《울프삭 경의 변신》.
울프삭 경은 7년이나 우리에게 빌어먹을 가면을 씌우고 변신놀음을 강요했다. 이제는 그가 변신할 차례였다. 멋지게 변신을 완료한 울프삭 경을 감상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자 벌써 짜릿했다.
어디 두고 봐…….
나를 화나게 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 줄 테니.
어둠속에서 꽃이 만개한 양 불꽃이 펑, 펑, 터졌다. 환하게 밝아진 허공 저 멀리서 왕궁이 어렴풋이 보였다. 광장 한복판에서 사람들이 삼삼오오 무리지어 춤을 추고 있었다. 스트레이트를 비롯해 게이와 레즈비언도 섞여 있었다. 가벼운 기분으로 일어섰다. “이대로만 있으면 심심하지요? 춤이나 춥시다.” 하며 레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레이의 손을 잡고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광장 한복판까지 갔다. 아마빛 머리카락이 내 주위를 소용돌이쳤다. 일순 숨을 삼켰다. 그에게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웃음이었다. 초승달처럼 휘어진 눈매로 레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휘날리는 머리카락에 미소 띤 입가가 가려졌다가 보였다가 했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온몸을 사로잡았다. 시간도, 음악도, 주변도, 모든 것이 사라졌다. 축포가 명멸하는 하늘 아래에서 나와 레이, 두 사람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표현할 수 없이 어질어질한 감각이었다. 그것은 깨우침과도 같았다.
정신을 차린 때는 잠깐 뒤였다. 내 뒤를 춤추며 스치던 남녀가 “와, 진짜 길다. 눈의 여왕이다, 눈의 여왕.”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불쾌한 기분으로 레이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눈의 여왕이라니.
하고많은 미인 중에 하필 그 처참하게 죽은 여자를 감히 내 연인에 빗대다니. 말도 안 되지. 레이가 눈의 여왕이면 그럼, 나는 데이탄즈인가?
나는 눈의 여왕에 얽힌 끔찍한 이야기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한 시절 고문깨나 해 봐서 더욱더 체감하는 비극이었다. 그 시대의 고문이라면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으리만치 가혹했을 것이다. 그런 고문을 두 달이나 당하고 무참한 죽음을 맞이한 여자였다.
데이탄즈는 왕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권위를 떨친 왕이었다. 그러나 위세만 드날리면 뭘 하는가. 자신의 아내가 그 지경으로 죽어갈 때까지 방치해 버린 남자 아닌가. 눈의 여왕이나 데이탄즈나 둘 다 마음에 들지 않는 비유였다.
갑자기 언령이 기억났다. 말이 씨가 된다고 했다. 게다가 레이의 책장에는 눈의 여왕 관련서적이 많았다. 나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으며 빌어먹을 생각을 떨쳐냈다. 불쾌감을 넘어서서 싸한 한기까지 전신으로 뻗어 나갔다. 갑자기 춤이 시시해져 버렸다. 레이가 즐거워해서 어쩔 수 없이 리드해 줬지만, 기분이 울적했다.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 머리카락만 길면 눈의 여왕인가. 레이는 레이고 나는 나다. 그리고 나는 레이의 얼굴도, 이름도 알았다.
춤을 끝내고 길거리를 죽 돌며 쇼핑을 했다. 돈을 물 쓰듯 옷을 사고 구두를 사고 보석을 샀다. 옷이 허름했을 때도 자태가 뛰어나던 레이였지만 날개를 달아 놓으니 눈앞이 아찔했다. 내가 예전에 눈가늠한 대로 밝은 색이 어울렸다. 쇼핑백을 잔뜩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미치도록 즐거웠다. 내가 레이에게 선물을 잔뜩 안길 수 있다는 사실이 황홀했다.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키스했다. 레이를 안아들고 침실로 직행했다. 옷을 벗기고 목걸이를 직접 걸어 주며 말했다.
“사랑합니다.”
레이가 이쪽을 멀거니 응시했다. 나는 타는 듯한 긴장을 느끼며 그를 주시했다.
빛이 부서지는 파란 눈동자에 물기가 찼다.
“정말입니까.”
“예.”
“진심인가요.”
“예. 진심입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불신이 깔린 저 질문이 싫었다. 불안이 들어차는 파란 눈동자에 가슴이 지끈 울렸다.
어떤 수식어를 동원하면 당신을 납득시킬 수 있을까. 이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당신이 던지는 말 한 마디에, 사소한 몸짓 하나하나에 삶과 죽음을 오가고, 온기와 냉기를 느끼며, 기쁨과 분노를 품는 이 감정에 사랑이 아닌 무슨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감정도, 말도, 행동도, 모든 것이 최초였다.
분명했다. 이것은 사랑이었다.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레이를 으스러지게 끌어안았다. 그가 내 어깨에 팔을 휘어 감았다.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말했다.
“예. 저도요.”
나는 한동안 움직임 없이 있었다.
누구에게 하는 말일까. 왕인지 뭔지 하는 놈에게 하는 소리일까. 아니면 포우 메사라에게 던지는 고백일까. 그도 아니면 하룻밤 상대에게 예의상 던지는 말에 불과할까. 이 순간 왜 ‘십 년마다 십 분’이 떠오르는지 알 수 없었다. 슬퍼하며 기다리는 남자와 무심히 모습을 드러내는 정령…….
노여움이 불같이 덮쳐들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했다. 나에게 하는 소리라고 단정했다. 레이는 도플갱어를 등지고 달려와 내 품으로 뛰어들지 않았던가. 그리고 지금 이쪽을 응시하는 푸른 눈동자는 진심이었다. 사랑의 감정에 충만히 빛나고 있었다. 거짓이 아니었다. 아니, 설사 왕을 향한 고백이라 할지라도 레이가 정신을 차린 뒤 내 마음을 확인시키면 될 것이다. 나밖에 없었다. 레이를 행복하게 해 주고 지켜 줄 사람은 포우 메사라뿐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이미 내 영혼은 그의 것이었다. 뚜렷이 깨닫고 있었다. 포우 메사라는 레이 아리사에게 사로잡혀 있었다. 그것은 불가항력이었다.
“사랑합니다.”
한 번 더 말했다. 그러며 레이를 안고 서서히 드러누웠다. 그에게 키스하고 애무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사랑합니다, 하고 한없이 귀엣말했다. 굶주린 듯 속삭였다. 그 자체만으로도 벅찬 환희였다.
다음날 레이와 함께 플로레아트로 떠났다. 플로레아트는 마넨의 영지이자 왕국 제일의 관광명소였다. 본부로 출근할 때 위장용으로 사용하는 중형차 대신 최고급 차를 타고서 도로를 질주했다.
이러고 보니 가이거에 입단한 후 참 정신없이 살아왔지 싶었다. 썩어 넘치는 돈으로 호화 아파트니 자동차니 옷이니 보석이니 마구 사들였지만 일에 열중하느라 제대로 써먹지를 못했다. 그놈의 보안 때문에 평소에는 평범한 옷만 입고 평범한 자동차만 타고 다녔다. 일반대원 제복에 걸쳐 입는 사복코트에나 본전을 좀 뽑았을까.
이번 휴가도 공휴일을 제외하면 몇 년 만이었다. 그만큼 내가 가이거 업무를 즐겼다는 말이 될 것이다. 나는 픽픽 웃었다. 속수무책의 사디스트였다. 이런 본모습을 레이에게 어떻게 납득시킬지가 또 고민이었다.
핸들을 꺾으며 흘끗 곁눈질했다. 옆에서 레이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여섯 시간 내리 달렸으니 피곤할 만했다. 나는 지그시 웃었다. 어젯밤의 섹스를 떠올리자 대단히 즐거워졌다.
“다 왔어요. 이만 내리지요?”
예약한 호텔에 차를 세운 뒤 레이를 깨웠다. 로열 스위트룸으로 들어가 여장을 풀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설원과 숲에 뒤덮인 절경이 펼쳐졌다. 이곳에서 풍경을 감상하고 놀이도 즐길 예정이었다. 레이와 함께 모든 것을 누릴 계획이었다. 업무 보고서는 이메일로 전송하라고 쿠퍼헤드에게 지시내린 터였다. 가져온 노트북으로 상황을 파악하며 전화로 설렁설렁 지휘나 하면 끝이었다.
때맞춰 휴대전화가 울렸다. 쿠퍼헤드였다.
“음. 뭐냐.”
“지금 막 호프먼을 만나고 온 참이야. 우리 제안을 올인했다고.”
“호프먼이 울프삭 경과 미팅을 끝내는 즉시 그녀를 구금해. 마넨이 손끝 하나 못 대도록.”
“여부 있겠어. 그럼 울프삭 경에게는 언제 카타콤 건을 털어놓을 셈이야?”
“마넨을 급습하기 직전에 말해야지.”
“역시 우리 본부장님.”
전화를 끊었다. 흥분이 전신으로 몰려들었다. 와인을 마시며 눈의 여왕이 춤사위를 펼치는 바깥을 응시했다.
정말 멋진데.
무심결에 소리 내어 웃었다. 나라는 녀석은 스스로 평가해도 가끔 진저리칠 수밖에 없는 면이 있었다. 사랑에 열중하는 와중에도 음모의 고삐를 절대 놓지 않았다.
괜찮았다. 울프삭 경을 수행해 온 7년간, 귀족들의 무능력과 추악함을 지겹게 목도해 왔다. 1년의 반 이상이 눈으로 뒤덮이는 이상기후에 시달렸으나 풍부한 자원의 혜택으로 왕국은 세계적으로도 부국으로 손꼽혔다. 그 부의 75퍼센트를 귀족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작위가 남발된 탓도 있었지만 돈이라면 절대 놓치지 않는 그들의 탐욕이 제일 큰 원인이었다.
단호하게 확신했다. 마넨이 카타콤 발전소 건을 놓칠 리 없다. 단시일 내에 그리폰 사와 협상을 시도할 것이다.
그것이 귀족의 천성이었다. 내가 폭력과 음모에 심취하는 본능을 타고났듯, 저들은 부에 중독된 종자들이었다. 그런 작자들이 귀족이랍시고 나라를 주물럭댔으니 제대로 돌아갈 리 없었다. 울프삭 경 옆에서 내가 해도 저보다는 백배 낫겠다고 혀를 찬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을 정도였다.
문득 정신을 차렸다. 레이가 옆에 서 있었다. 나는 그를 끌어안으며 키스했다.
“샤워할까요?”
며칠 동안 달콤한 시간을 보냈다. 어제는 레이와 함께 신나게 눈밭을 굴렀다. 십대 시절에도 하지 않았던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까지 하며 뛰어놀았다.
오늘은 호텔 파티에서 친해진 레이먼드 부부와 함께 플로레아트를 죽 드라이브했다. 그 와중에도 마넨에게 감탄해 버렸다. 영리한 늙은이였다. 울프삭 경은 굴지의 우라늄 광산을 소유하고 있지만 그도 언젠가는 바닥이 날 것이다. 그러나 관광자원은 초반 투자만 끝내면 그 뒤부터는 돈을 쓸어 담는 일뿐이었다.
플로레아트는 세계 각지에서 온 관광객으로 붐볐다. 울프삭 경이 마넨을 몰락시키려 안달복달하는 이유도 그의 재산 때문이었다. 정적을 제거하면 그 재산을 갖은 방법으로 몰수한 후 자신이 취득하는 것이 귀족들의 오랜 수법이었다.
“박물관은 안 들릅니까? 여기 박물관은 왕국에서 규모가 제일 큰데요.”
레이먼드 씨가 말했다.
“글쎄요. 여기까지 와서 미술품을 감상하고 싶진 않아서요. 박물관 앞에 내려 드릴까요?”
“천만에요, 사실 저희 부부는 그쪽에 그다지 관심 없거든요. 아이스 스포츠와 자연이 최고죠, 이런 곳에서는. 그럼 저 앞 숲은 어떻습니까. 호수가 맞닿아 있어서 절경이랍니다.”
레이먼드 부부는 좋은 가이드였다. 드넓은 평원에 외딴섬처럼 들어선 고적한 숲 앞에 차를 세웠다. 자동차에서 내려 레이와 함께 오솔길을 천천히 거닐었다. 눈으로 덮인 숲 너머에서 반짝거리는 호수가 보였다.
“아름답다…….”
레이가 멍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빙긋 웃으며 그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레이에게 말을 걸려는 찰나 휴대전화가 울렸다. 쿠퍼헤드였다.
“음. 뭐냐.”
“긴급이야. 마넨이 움직임을 개시했어. 어제 측근을 풀어 그리폰 사와 접촉했다더군.”
“대충 내용을 말해 봐.”
“단단히 밀어줄 테니 섭섭하지 않게 보답하라고 노골적으로 말하던데. 그리폰 사는 들뜬 기색으로 반응했고. 뭐, 울프삭 경과 마넨을 동시에 라운딩했으니 입찰은 따 놓은 당상이라고 판단했겠지. 이메일로 도청자료를 전송했으니 확인해 봐. 어쨌든 본부장님도 신혼여행에서 슬슬 돌아와야겠어.”
피가 뜨겁게 끓었다. 먹이를 사냥하러 갈 때면 언제나 느끼는 감각이었다. 전신으로 절정의 흥분이 거미줄처럼 퍼져 나갔다.
하하하.
드디어 시작인가.
“그것 외에는 별다른 일은 없고?”
“글쎄. 어제 파티에서 마넨이 만취할 때까지 퍼마시더군. 기분이 안 좋아 보였어. 그런 꼴로도 악수는 열심히 해 대더라고, 후후후.”
“좋아. 오늘밤 안으로 수도로 돌아가지. 내일 보자구.”
전화를 끊고 레이의 손을 잡았다. 아쉬움과 흥분이 교차했다. 즐거운 여행도 끝인가. 뭐, 어차피 여행은 앞으로 자주 오면 그만이었다.
마넨은 내게 끝내주는 패배를 안긴 늙은이였다. 나는 그의 마지막 순간을 철저히 즐겨 줄 작정이었다. 일생에 한 번뿐인 기회였다. 사랑도, 음모도 둘 다 놓칠 수 없었다.
“오늘 집으로 돌아가야 해요. 갑자기 일이 생겨서 말입니다. 여기만 구경하고 호텔로 돌아가지요.”
“그렇군요.”
레이가 아쉽게 한숨지었다.
며칠간 레이를 관찰했지만, 뭐랄까 참 묘했다. 정신이상이라는 단어가 무색하리만치 멀쩡하고 조용했다. 이웃이 증언한 삿대질이니, 욕설이니 따위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었다. 되레 평화로워 보였다. 일명, 《우울과 궁상이 사라진 레이》랄까.
희한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런 모습도 레이가 지닌 천성의 일부일 테니까. 사람의 내부는 간단히 도식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를 돌이킬 때마다 절감하는 사실이었다.
레오파드가 언젠가 나에게 물었다.
「부장님은 어쩌면 그토록 절묘하게 웃음과 잔인이 공존할 수 있으셔? 보통 난폭한 놈은 절제를 잘 못하는데 말이야.」
그때 나는 대답했다.
「무슨 짓을 하든 최소한의 철학은 있어야 하는 법이지. 그것이 개똥이라 할지라도 말이야.」
레이도 비슷할 것이다. 지금껏 그를 둘러싼 어둠이 차분하고 조용한 천성을 가리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나만 제대로 알아봐 주면 완벽할 텐데 말이지.
행복한 와중에도 울적했다. 형용할 수 없이 씁쓰레한 기분이었다. 내가 누군지 알겠냐고 몇 번이고 물었다. 그때마다 레이는 조용히 웃으며 “남자.”라고만 대답했다. 내가 누군지 궁금하지도 않은 눈치였다. 스노우 화이트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레이는 이랬다. 만남을 반복하는 내내 이름 한 번 묻지 않았다. 병원에서야 간호사에게 물어서 이름을 알았다고, 더듬더듬 말해 왔다.
제정신이 아니니까, 하며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레이에게 가볍게 키스하며 속삭였다.
“이번 일 끝나면 한 번 더 오죠. 그때는 좀 더 오래 놀 수 있을 겁니다.”
레이와 함께 길을 누비며 저 앞의 레이먼드 부부에게로 갔다. 오후 세 시였다. 수도까지는 여덟 시간이 걸렸다. 미적거릴 여유가 없었다.
“죄송합니다만 급한 일이 생겼습니다. 아무래도 오늘은 이만 돌아가야 할 것 같네요.”
“아, 그래요? 죄송할 게 뭐가 있습니까. 덕분에 편하게 여행을 즐겼는데요. 우리 부부까지 태우고 운전하느라 메사라 씨가 고생하셨습니다. 저녁은 제가 사지요.”
“그렇다면 감사합니다.”
“이것만 구경하고 가지요. 조금만 더 가면 나오거든요.”
레이먼드 씨의 여유에 조바심이 나서 “뭔데요?” 하고 물었다.
“데이탄즈의 무덤이요. 권위를 떨친 왕인데도 무덤은 정작 검소하게 만들었답니다. 당시에는 왕의 무덤을 아주 특이하게 만들었어요. 뭔지 아십니까?”
“모르는데요. 역사에는 관심이 없어서요.”
“허허허. 굳이 관심을 줄 만큼 멋진 풍습은 아닙니다. 이 왕국은 유난히 동양적인 전통이 짙은 국가죠. 당시 왕의 무덤을 꾸미는 형식도 전형적인 동양풍이었어요. 바로 순장이죠. 왕이 죽으면 시종들을 비롯해 심지어 생존한 왕비까지 무덤에 넣고 생매장을 했습니다. 명예로운 죽음이라고 당시 사람들은 생각했답니다. 그 풍습이 16세기까지 내려왔죠.”
“그것 참 고약하네요.”
멀리서 무덤이 보였다. 잿빛 묘석 하나만 외롭게 찬바람을 맞고 있었다. 레이먼드 씨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쳤을 법했다. 레이의 손을 잡고 천천히 무덤을 돌았다.
“그런데 데이탄즈는 화려한 치세에도 불구하고 무덤은 평범히 만들라고 지시했죠. 심지어 순장도 하지 말라고 유언했어요. 그 시대에는 가히 파격적인 조치여서 귀족들끼리 갑론을박을 벌였을 정도였답니다. 덕분에 생존해 있던 왕비며 시종들은 목숨을 건졌지만 말입니다.”
“전쟁 때 잔뜩 죽였으니 마지막 가는 길에는 자비를 베풀고 싶었나 보지요.”
레이먼드 씨가 껄껄 웃었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어쨌든 그 탓에 눈의 여왕을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두고두고 빌미를 주었지요.”
“빌미라뇨?”
나는 시계를 초조히 보며 말했다. 벌써 네 시 가까웠다. 아무래도 저녁식사는 사양해야 할 듯싶었다.
레이먼드 씨가 무덤을 둘러싼 숲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자작나무숲이잖습니까. 왕은 자신의 무덤으로 이곳을 특별히 지정했거든요. 지금은 숲이 울창하지만 당시에는 이곳이 몇 그루의 자작나무만 덩그러니 있던 황무지였다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눈의 여왕은 진위가 확실한 이야기가 아니라서, 그 팬들은 정사에 실린 몇몇 기록을 추적하며 추리하기를 즐기지요. 이 무덤도 단서 중의 하나죠.”
나는 무심코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덤 주변으로 희디흰 자작나무숲이 무성하게 둘러싸고 있었다.
“참혹하게 숨진 전처를 황무지에 매장하라고 별생각 없이 명령한 왕 아니었습니까? 그랬던 왕이 자신의 마지막 자리를 자작나무 몇 그루만 있을 뿐인 황무지로 정했으니 뭔가 의미심장하죠. 후세 사람들이 온갖 해석을 퍼부을 수밖에요. 물론 왕이 전처를 언급한 기록은 그림을 보았을 때만 남아 있으니 진실이야 아무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그렇군요. 저, 이만 아무래도 가 봐야겠는데요. 오늘 안에 수도까지 도착해야 해서요. 죄송합니다.”
“아, 이런. 제가 메사라 씨를 너무 오래 붙들고 있었군요. 이만 갑시다.”
레이먼드 부부와 함께 무덤가를 빠져 나왔다. 레이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나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울창한 자작나무숲에 홀로 웅크린 무덤이 쓸쓸해 보였다. 황량한 바람이 내 어깨를 스쳤다. 찌릿한 느낌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기분이 굉장히 나빠졌다.
출근 준비를 한 후 메이드에게 전화해 일찍 오라고 부탁했다. 레이를 혼자 두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오늘부터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예정이었다. 짬이 나는 대로 레이를 입원시켜야 할 것 같았다.
“어디 나가지 말고 있어요. 저녁에 바로 돌아오겠습니다.”
“몇 시쯤요?”
“여덟 시까지는 돌아오겠습니다.”
키스를 나누고 집을 나섰다. 며칠 만에 일터로 나가려니 이것도 아주 짜릿했다.
그것도 마넨을 잡으러 가는 길 아닌가.
하하하.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가이거 본부가 저만치서 모습을 드러냈다. 지끈한 흥분이 전신을 타고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