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 .M─ (42/101)

9 .M─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커피 잔을 테이블에 올려놓은 후 조간을 펼쳤다. 술술 페이지를 넘기다가 문득 멈췄다. 구레나룻의 사망 소식이 박스기사로 실려 있었다.

역시…….

나는 싸늘하게 웃었다. 엊그제 마넨은 뫼리케 호텔 개관파티에 참석했고, 거기서 구레나룻과 악수를 나누었다. 그리고 어제, 구레나룻이 사망했다.

하하하.

거실 소파에 몸을 파묻고 재차 기사를 읽었다. 명백했다. 경고였다. 그것도 나를 향한 경고였다. 릴리즈의 리더를 제거하는 동시에 가이거 본부장에게 까불지 말라고 보내는 일종의 경고 메시지. 다름 아닌 구레나룻의 사인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레이 아리사는 뱀에 물려 죽었다.

SNAKE에게……인가. 참 대단했다. 구레나룻은 자신의 자동차 안에서 죽었다. 뱀이 있을 리 없는 대도시에서, 그것도 자동차 안에서 뱀에 물려 죽는다?

누가 봐도 살인이었다. 지금쯤 마넨은 내가 공포에 떨고 있으리라 짐작할 터였다.

흥, 천만에. 나는 지그시 웃으며 커피를 마셨다.

시건방진 늙은이. 내 찌를 덥석 문 것도 모르고 말이야…….

잔뜩 구겨졌던 기분이 덕분에 조금 나아졌다.

어제 레이의 집을 방문했다. 일단 17번가의 저택은 구입해 놓았다. 수리가 끝날 때까지 시간이 걸릴 테니 당분간 레이를 입원시키고 경과를 지켜볼 참으로 그의 집을 찾아갔다. 노크를 수차례 했으나 반응이 없었다. 참다못해 관리실로 내려가 열쇠를 얻어 문을 열었다. 룸은 텅 비어 있었다. 헌책방도 닫혀 있었다. 어디서 또 험한 일이라도 하고 있을까. 갑갑했다. 속에서 뭔가가 지글지글 끓어올랐다.

이웃에게 물어보니 며칠 전 밖으로 나서는 레이를 보았다고 했다. 수표를 줬으니 얌전히 집에 있으려니 짐작했는데 연유를 알 수 없었다.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혹시 실성한 상태로 거리를 헤매고 있을까. 그러다가 또 아무 남자한테나 안기면? 레이는 그토록 싫어하던 가이거의 본부장에게까지 눈웃음치며 안기지 않았던가. 짜증이 확 솟구쳤다. 더는 상상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진정하자.

일단 지금은 출근을 해야 할 때.

자동차를 몰면서 생각에 잠겼다. 마넨과 레이가 엉켜 엉망진창이었다. 머리를 흔들며 담배를 한 개비 뽑아 물었다. 담배에 불을 붙이며 핸들을 꺾었다.

마넨부터 생각해 보자…….

우선, 마넨의 악수에 대해서는 내 가정이 들어맞았음을 확인했다. 더불어 골치 아픈 구레나룻도 깨끗이 정리해 버렸다. 이로써 릴리즈는 완전한 괴사상태로 돌입했다. 꿩 먹고 알 먹고였다. 나는 일석이조를 선호했다. 능률은 어느 분야에서든 중요한 법이다. 릴리즈, 바이바이.

자, 그럼 일명 《카타콤 프로젝트》나 시작해 볼까.

자료실에 들어서니 부장들이 전부 도착해 있었다. 모두 만면이 환했다. 쿠퍼헤드가 신문을 들어 보이며 “여, 본부장님. 이번에도 당신이 적중했어.” 했다. 당연하지. 내가 누구더냐.

엘리베이터를 타고 부장 회의실에 도착해 옷을 갈아입었다. 간단한 회의를 끝낸 뒤 쿠퍼헤드와 레오파드를 불렀다.

“이거 정말 대단해. 솔직히 황당무계하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쿠퍼헤드가 스카치를 들이켜며 혀를 내둘렀다. 레오파드가 담뱃재를 재떨이에 털며 말했다.

“이제 앞으로는 어떡할 셈이야, 본부장님?”

“이중함정을 파야지.”

“이중함정이라면?”

“악수를 통해 마넨이 정보를 얻잖아. 울프삭 경에게 거짓 제안을 한 건 흘릴 셈이야. 마넨에게 덫을 치는 거지.”

“호오.”

쿠퍼헤드와 레오파드가 동시에 휘파람을 불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보드카를 잔에 들이부었다.

쿠퍼헤드가 말했다.

“거짓 제안은 또 뭔데?”

“내가 당했던 대로 똑같이 돌려주려고. 레오파드는 무슨 의민지 알겠지.”

“아무렴.”

레오파드가 씨익 웃으며 잔을 들어올렸다. 쿠퍼헤드가 미간을 찡그리며 나와 레오파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나는 느긋하게 보드카를 음미했다. 맛이 괜찮았다. 마넨을 어찌 찢어 주고 짓이겨 줄까…… 하하하. 상상만 해도 짜릿했다. 바로 그때였다. 딱따구리가 무심히 말했다.

“아. 그런데 말이야. 그 금발. 꼭 묻고 싶었는데 그냥 스치는 사이 맞아?”

나는 하마터면 보드카를 내뿜을 뻔했다. 용케 내뿜지는 않았지만 사레가 들려 버렸다.

“뭐? 금발?”

레오파드가 예민하게 반응했다. 나는 기침을 하며 보드카를 내려놓았다. 쿠퍼헤드가 이쪽을 아연히 주시했다.

이런 빌어먹을. 안면단련이라면 도가 튼 내가 이렇게 티를 내 버리다니. 그것도 하필 레오파드가 있는 자리에서.

레오파드가 험상궂게 다그쳤다.

“쿠퍼헤드 너까지 레드폭스를 만났단 말이야? 어디서?”

“어디서긴…….”

쿠퍼헤드가 우물쭈물했다. 입이 근질근질해서 미치려는 기색이었다. 저 염병할 딱따구리가 한번 주둥이를 놀리면 아무도 못 말렸다. 나는 급히 담배를 피워 물고 창가로 걸어갔다. 뒤에서 딱따구리가 주둥이를 딸깍대는 소리가 요란했다. 레오파드의 씨근덕대는 숨소리도 열기를 더해갔다.

“……내 물건도 마음 같아서는 밟아 짓뭉개고 싶었겠군?”

내가 소파로 돌아와서 앉자 레오파드가 으르렁거렸다. 쿠퍼헤드가 담배를 한 개비 뽑다가 멈칫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레오파드하고도 금발이 잤어?”

나와 레오파드는 침묵했다.

울프삭 경의 낯이 꽤나 볼만했다. 끝내주게 구겨져 있었다.

그러게 우리나 믿고 따를 일이지…….

나는 거두절미하고 용건을 꺼냈다. 울프삭 경의 면상이 더욱 구겨졌다.

“카타콤 발전소 건을 스캔들로 키워 보자?”

“그렇습니다. 아시다시피 원자력 발전소는 시설에 문제가 발생할 경우 파급효과가 아주 크죠. 고도의 기술력이 집중되는 첨단시설인 동시에 대표적인 혐오시설입니다. 부실업체에 공사를 맡겼다간 국민의 분노를 한 몸에 딱 받기 좋은 기피시설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마넨이 이 원자력 발전소 입찰에 부정을 저지를 참인가 봅니다. 이미 돈거래까지 끝냈다고 합니다.”

“흐흠.”

울프삭 경이 낮게 침음했다.

“마넨이 받은 쿠키 금액이 얼마인가?”

“이천오백만 탈란텐. 그쪽 업체에서 이번 입찰에 혈안이 된 터라, 과감하게 투자했나 봅니다.”

내 말에 울프삭 경의 미간으로 깊은 주름이 졌다.

“더 자세히 설명해 보게.”

“예. 이번 카타콤 발전소 입찰 방식은 턴키Turn-Key, 즉 업체에서 설계부터 시공까지 전부 짠 후 발주처에 최종적으로 계획서를 내놓는 방식으로 진행된다고 합니다. 발주처에서 원하는 성능에 따른 설계를 한 다음, 견적과 금액 및 시공기간을 산출하여 제출 후 심사를 받는 거죠. 발주처, 다시 말하여 정부에서는 설계, 공사기간, 금액을 두루두루 보고 적정한 업체를 고르는 것이 절차입니다. 그런데 마넨이 여기에서 부정을 저지르려는 겁니다. 하자가 있는 설계와 공사기간 및 하급 자재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금액을 산출한 업체를 통과시키려고요.”

“그 업체 이름이?”

“그리폰 사입니다. 마넨에게 접근한 그리폰 사는 PQ, 즉, 부적격 업체에 불이익을 주기 위한 제도에서 수없이 점수를 깎아먹은 불량업체입니다. 그리고 설계심사를 맡는 대학교수들을 마넨이 사주할 예정이라는 정보도 얻었습니다. 허락만 내려 주십시오. 확실하게 조져 드리겠습니다.”

“음…….”

우물쭈물하던 울프삭 경이 넌지시 말했다.

“혹시, 그리폰 사가 이쪽에게 접촉할 낌새는 없던가?”

“이미 이쪽을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칼같이 거절해서 돌려보냈죠.”

“아니, 왜!”

“아까 설명했다시피 심각한 불량업체라서요. 원자력 발전소처럼 위험천만한 시설 공사를 불량업체에 맡기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마넨을 잡을 미끼로나 써먹어야지요.”

시치미 뚝 떼고 말했다. 울프삭 경이 붉으락푸르락해진 면상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고민 되겠지. 나는 소리 없이 웃었다.

이번 정부 발주공사는 원자력 발전소를 무려 다섯 기나 잇따라 건설하는 대규모 프로젝트였다. 한국과 일본 정부는 국책 차원에서 카타콤 공사를 따내고자 왕국으로 사절단을 보내려 할 만큼 천문학적인 금액이 투입될 예정이었다. 울프삭 경도 중간에서 한몫 단단히 챙길 수 있는 기회였다. 그 기회를 뻥 차 버리라고 하니 마음이 몹시 무거울 것이다.

“알겠네. 생각을 좀 해 보지.”

울프삭 경이 토라진 어투로 말하며 한손을 홱 내저었다. 나는 웃으면서 업무실로 돌아갔다. 바로 직속부하를 불렀다. 그때와 똑같이 할 참이었다.

디데이는 2주일로 잡았다. 대원들을 급파하여 그리폰 사 로비스트들에게 접근하라 지시했다. 검사들도 불러 모은 다음 마넨과 그리폰 사의 밀월관계를 뒤져 보라 운을 뗐다. 이스트에덴 신문사 측에도 연락을 돌렸다.

마지막으로 쿠퍼헤드와 레오파드를 제외한 전 부장들을 불러 모아 진지하게 계획을 털어놓았다.

울프삭 경에게 일단 이야기했는데 영 탐탁지 않아 하는 기색이다. 그러나 내 판단에 이번 건은 마넨의 목을 따 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그래서 이쪽에서 따로 준비할 생각인데 너희가 울프삭 경의 옆을 지키며 잘 좀 부채질해 보아라. 나와 레오파드, 쿠퍼헤드는 뒤에서 작품 준비에만 몰두할 예정이다. 디데이는 2주일 뒤다.

부장들은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나는 당분간 울프삭 경 주위를 얼씬도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내 짐작이 맞는다면, 령은 악수 말고도 심중을 꿸 수 있는 다른 수단이 있었다. 마넨과 내가 악수를 하지 않았는데도 령은 디데이 일시와 언론사 계획을 뚫었다. 그러나 령이 악수를 통하지 않고도 ‘정확하게’ 사람의 마음을 꿰뚫을 수 있다면, 마넨이 굳이 회계사들을 만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마넨에게 회계사들과의 악수가 필요했던 이유는 내 계획의 구체적인 사항까지는 알지 못한 탓이라고 추측했다.

자석을 떠올렸다. 가까이 있는 철은 확 빨아들이지만 멀리 있는 철은 일부밖에 빨아들이지 못한다. 령의 능력도 그렇지 않을까.

악수를 한 상대는 확실하게 훑어내지만, 악수를 하지 않은 자는 어렴풋이 잡아낸다…… 이것이 내 추리였다. 직감도 그것이 정답이라고 외쳤다. 나는 의자에 편안히 몸을 파묻었다. 괜찮았다. 이번 건에는 이중으로 덫을 쳐 놓았다. 여기에 마넨이 걸려들든 걸려들지 않든 무조건 죽은 목숨이었다.

령을 향한 증오심이 들끓었다. 어느 놈도 나를 이렇게까지 골치 아프게 하지는 못했다. 이런 멋진 놈과 알게 모르게 7년이나 부대끼고 있었다, 이 말이지. 하하하.

상관없었다. 마지막에 웃는 것은 항상 나였다. 언제나 그랬다.

기다려라.

웃으면서 창밖을 응시했다. 이제 내가 2주일 동안 할 일이라고는 마넨의 대처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 시간에 레이를 찾아볼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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