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 ─L. (41/101)

8 ─L.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곳이 어디인지, 내가 왜 여기 누워 있는지 모두 연유를 알 수 없었다.

하나만큼은 분명했다. 나는 남자와 섹스를 한 것이 틀림없었다. 내 안에서 아직도 페니스가 꿈틀거렸다. 그것이 스르르 빠져나가더니 바지 지퍼를 올리는 소리가 얼핏 났다.

어둠 때문에 눈앞을 분간하기 힘들었다. 상대방의 윤곽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나저나 여긴 대체 어디일까. 호텔이라고 하기에는 곰팡내가 코를 찔렀다.

조금씩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며 상대방의 형체가 잡혔다. 순간 비명을 지를 뻔했다. 눈앞의 남자는 사신 가면에 검붉은 제복코트를 입고 있었다. 가이거 부장이었다.

그가 침대에 걸터앉아 움직임 없이 이쪽을 쳐다보았다. 공포로 내 몸이 마비되는 것만 같았다. 나는 다시 손을 쳐다보았다. 정액이 번들거렸다. 남자가 내 몸속에 저지른 흔적이었다.

나는 고개를 거듭 가로저었다. 아래에 활짝 벌려 세운 허벅지가 보였다. 비로소 몸속의 열기를 느꼈다. 체내가 잔뜩 젖어 있었다. 허벅지 사이도 축축했다. 옷은 가슴까지 걷어 올려져 몸이 반 이상 노출되어 있었다.

이 옷은 도대체…….

붉은 로브였다. 내가 왜 이런 로브를 걸치고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어떻게든 다리를 모아 내리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눈동자만 굴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남자가 벌떡 일어섰다. 침대 옆 테이블에서 장갑을 들어 오른손에 천천히 끼웠다. 테이블에는 장갑 말고도 다른 것이 있었다. 채찍이었다. 왼손까지 장갑을 끼운 후, 남자가 채찍을 들었다. 다시 이쪽을 흘끗 쳐다보더니 몸을 확 돌려 침대를 떠났다. 묵직한 워커 소리가 멀리로 사라졌다.

확실했다. 저 채찍. 가이거 본부장 스네이크였다. 섹스를 나눈 상대가 보통의 부장도 아니고, 스네이크였다. 하나같이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냉정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꼬락서니로 계속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왜 섹스를 했을까. 그것도 하필이면 스네이크와.

혹시 강간?

강간이라면 기억이 비어서 다행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스네이크와 나는 어쩌다가 여기에 함께 있게 되었을까. 되짚을수록 물음표만 잇따랐다.

안간힘을 써서 몸을 일으켰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뭐라 말할 수 없이 이상했다. 소름끼칠 만치 불쾌한 감각이었다. 이제껏 체내사정 뒤에는 바로 잠을 자거나 세척하고는 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아랫배 안쪽이 근질근질했다. 나는 토기를 겨우 억누르며 복도로 나갔다. 사방이 어두침침했다. 내가 나온 룸 바로 옆에 계단이 있었다. 나직한 소음이 아래층에서 새어나왔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소음이 커졌다. 음악과 요란한 신음 소리였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황당했다. 수백 개의 촛불이 일렁이는 드넓은 홀에서 벌거벗은 남녀가 군데군데 얽혀 있었다. 보고 있노라니 얼이 빠질 것 같았다.

“거기, 금발.”

누군가가 대뜸 불렀다.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다가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가이거 부장이 이쪽으로 손가락을 까딱거리고 있었다.

이게 웬 영문이란 말인가…….

부장의 제복코트가 설핏 구겨져 있었다. 그의 발치에 너덧 명의 여자가 벌거벗은 채 흐트러져 있었다. 민망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말이 안 들려? 흐음. ……안 들립니까? 우리, 초면은 아닐 텐데요. 라비린스에서 만났잖아요. 그리고 그때 그 골목에서의 일도 기억나요?”

그제야 깨달았다. 골목에서 내게 시치미 뚝 떼고 접근하던 그 사내였다. 삽시간에 말투를 단정히 바꾸는 저 태도가 되레 섬뜩했다.

나는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악몽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이곳이 귀족의 저택인 것만은 분명했다. 엉켜 있는 남녀들부터 로브를 입은 사람들까지, 모두 귀족 취미가 엿보였다. 문제는 내가 왜 여기에 있느냐는 거였다.

“이봐요.”

뒤에서 부장이 돌연 내 어깨를 잡았다. 그대로 내 몸을 홱 돌려 자신에게로 향하게 했다. 은제가면 너머로 갈색 눈동자가 얼핏 보였다. 목소리만큼이나 단정하고 지적인 눈초리였다. 짧은 침묵 뒤 가면 너머에서 나직한 웃음이 샜다.

“후후. 누가 죽이기라도 한답니까?”

“어…….”

나는 넋 나간 음성을 흘렸다.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괴물도 말을 하는가?’ 따위의 엉뚱한 의문만 머릿속을 감돌 뿐이었다.

부장이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시종으로 여기 온 모양인데…… 그런데 꼴이 엉망이로군요. 머리도 흐트러져 있고, 옷도 구깃구깃하고. 아까 저기 계단에서 내려왔죠? 누군가와 함께 섹스라도 했나 보지요?”

노골적인 질문이었다. 뺨으로 피가 몰렸다. 어쨌든 이자의 말에 내가 여기에 시종으로 왔다는 사실은 알아냈다.

“아, 그, 글쎄요…….”

황급히 물러서려 했다. 그러나 부장이 내 어깨를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일순간 화가 치솟았다.

“제가 섹스를 하든 말든 손님께서 상관할 바는 아니라고 봅니다만.”

“호오.”

부장이 나직이 코웃음 쳤다. 그러나 곧 “뭐, 그도 그렇군요.” 하며 내 어깨에서 손을 떼어냈다.

“어쨌든 그쪽을 부른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혹시나 해서요. 그러니까…….”

갑자기 저쪽에서 짜악, 하는 소리가 터졌다. 채찍 소리였다. 부장이 소리가 난 쪽을 흘끗 쳐다보았다.

언제부터인가 멀찍이 떨어진 곳에 스네이크가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흡사 유령 같았다. 뒤엉킨 나체의 숲에 우뚝 솟은 저 모습이 섬뜩할 만큼 괴이했다.

그가 오른손을 천천히 들어 까딱거렸다. 부장이 스네이크와 나를 번갈아 보더니 어깨를 으쓱 올리며 걸어갔다. 스네이크가 자신에게 다가서는 부장을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기회였다. 어디로든 피해야 했다. 그러나 몇 걸음 옮기지도 못해서 “잠깐 거기 있어요.” 하며 부장이 뒤에서 잡았다. 조금 전까지 저만치에 있던 인간으로는 믿을 수 없으리만치 움직임이 재빨랐다.

“무, 무슨 일입니까.”

“왜 그렇게 떱니까? 전할 말이 있어서죠.”

“전할 말이라니요.”

“우리 본부장님이요. 아까 즐거웠다고 전해 달라던데요. 그런데 그쪽 상태가 좀 안 좋은 것 같다고 했어요. 둘이 합의하고 즐겼는데 끝나고 나서 그쪽 반응이 되게 이상했다고요. 괜한 오해는 하지 말라고 했어요.”

“예…….”

합의하고 즐겨? 스네이크와? 내가?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것. 성의 표시라면서 받으라고 하던데요.”

부장이 내 손에 뭔가를 쥐여 주었다. 수표였다.

“이런 건 받을 수 없어요. 그냥 가져가시지요.”

“후후후. 그냥 곱게 받는 게 좋을 겁니다. 우리 본부장님 무서운 사람입니다. 굉장히, 말이지요.”

“…….”

할 수 없이 수표를 받았다. 부장이 가 보라고 손짓했다. 급히 걸음을 옮겼으나 막막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는지, 어떻게 하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 모두 아득할 뿐이었다.

돌연 누군가가 내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레이? 레이? 아까부터 찾았어요.”

가면을 썼지만 목소리는 소니아였다. 나와 마찬가지로 붉은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갑자기 어디로 사라졌어요? 얼마나 찾았는데요!”

“아, 소니아…….”

“일단 지하로 내려가요, 어차피 쟁반을 갈아야 하니까. 자기, 가면은 잃어버렸어요? 여기선 맨얼굴로 돌아다니면 안 된다고 주의를 받았잖아요.”

“기억 안 나요. 내가 왜 여기 있는지부터 잘 모르겠어요.”

“어머나.”

소니아가 로브자락을 들어 올리다가 주춤거렸다. 그녀가 내 손을 잡아끌고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는 술 창고와 주방으로 이어져 있었다. 술 창고 구석구석에서 시종들이 담배를 피우며 쉬고 있었다.

소니아가 가면을 벗으며 로브 후드를 젖혔다.

“역시……. 오늘 내내 자기 이상하단 생각은 했어요. 정말 아무것도 기억 안 나요?”

“예.”

소니아가 담뱃갑을 꺼내 한 개비 뽑아 물었다. 내게도 “자기도 한 대 피워요.” 하며 한 개비 내밀었다. 거절하는 내게 억지로 담배를 물리고 불을 붙였다.

“무조건 피워요. 담배는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어 주거든요. 자기 같은 사람은 가끔 담배를 피울 필요가 있어요. 그러니까 말이죠, 어젯밤 메슨 씨가 가면무도회 시종 일을 저에게 소개해 줬어요. 저는 엘리 씨에게 전화해서 자기에게 이 일을 전해 달라고 했고. 그건 기억해요?”

“기억은 나는데…….”

나는 멍하게 말했다.

“하지만 거절했잖아요. 무도회 일 같은 건 내키지 않는다고, 소니아한테 전해 달라고 엘리 씨한테 말했는데요.”

“그래요, 저도 엘리 씨한테 그렇게 연락받았어요. 그런데 오늘 아침 집합장소로 자기가 떡하니 나와 있었어요. 얼마나 황당했는데요. 게다가 자기, 오늘 내내 이상했거든요. 별로 잘 웃지도 않던 자기가 계속 싱글싱글 웃고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구요. 가면무도회, 하하, 이러면서요. 제가 얼마나 진땀을 뺐는지 알아요?”

온몸으로 한기가 퍼져 나갔다. 소니아가 “괜찮아요?” 하며 나를 부축했다. 그래도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소니아의 말대로라면 나는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줄곧 정신이 나가 있었다. 게다가 가면무도회라며 웃었다고?

최악이었다. 내가 병마에 완전히 사로잡혔다는 징조였다. 때가 멀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공포가 전신을 찌르듯이 파고들었다. 무섭다…… 죽기 싫었다. 이대로 심장이 멎어 버려 허망하게 떠나기는 싫었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오만이었다. 이렇게까지 크나큰 두려움이 엄습할 줄은 정말 몰랐다.

“자기야. 괜찮아요? 어? 그런데 이건 뭐예요? 어머.”

소니아가 내 손에서 펄렁펄렁 떨어지는 수표를 들어 올렸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히익…….” 하다가 소리 낮춰 말했다.

“이, 이, 이천 탈란텐. 이건 어디서 났어요?”

머리가 멍한 와중에도 정신이 바짝 들었다. 이천 탈란텐?

스네이크가 성의 표시랍시고 던진 수표가 이렇게 거액일 줄이야. 황당했다.

소니아가 내 옷차림을 뜯어보더니 흐흥, 하며 웃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자기가 굉장히 마음에 들었나 봐요. 로즈들도 한 달은 죽어라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인데. 호호호.”

나는 씁쓰레한 기분으로 수표를 챙겼다. 화대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큰 액수였다. 어쨌든 이 돈으로 병원에 가 보기로 했다. 뜻하지 않게 스네이크가 내게 도움을 준 셈이었다. 돌아가는 정황이 기가 막혔다.

의사는 내 말에 어이없어 하는 반응을 보였다. 당연했다. 일단 한 달 뒤 입원예약을 하고 병원을 나왔다. 내 예상대로라면 대략 그 즈음부터 고문이 시작될 터였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돈도 생겼으니까, 일단 해 봐야지.

일부러 집까지 걸어가며 생각을 정리했다.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사람이란 참 우습다. 여유가 있을 때는 나름대로 자존심을 챙기며 죽겠노라 굳게 다짐했는데, 정작 징후가 닥치자 당장 아등바등 몸부림치는 내 모습이 같잖기 짝이 없었다.

스네이크가 던진 수표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어떻게 하고 있었을까. 돈이란 게 참 무서운 존재구나, 하며 쓰게 웃었다. 이래서 귀족들이 황금전쟁에 미쳐 날뛰는가.

메사라.

메사라 때문일까. 이토록 죽기 싫은 것은.

그를 보고 싶었다. 그를 만나서, 나도 당신을 사랑하노라고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내 앞날은 불투명했고, 이 상태로 메사라의 앞에 나타나서 무책임하게 흔들어 놓을 수는 없었다. 그러지는 말아야 했다.

벌써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 가슴이 아팠다. 이기적이라는 걸 안다. 메사라는 성욕이 강하고 자유분방한 남자였다. 잠자리 취미가 고약하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인기를 많이 끌 타입이었다. 그런 그가 아직까지 내게 목매고 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게다가 흐른 시간이 얼마인가.

일단은 살고 보자.

그것이 먼저였다. 지금부터라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병마에 대비해야 했다. 공중전화 박스로 들어가서 소니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에게 2주일간만 거취를 부탁했다. 내 병증을 어렴풋이 알고 있는 소니아는 바로 수락했다.

공중전화 박스에서 나오며 하늘을 응시했다. 눈의 여왕이 머리카락을 흩날리고 있었다. 눈앞이 시리리만치 희디흰 빛깔이었다.

“오늘 파티에서 아리사와 악수했네. 어떤가.”

“한번 보겠습니다.”

아리사의 심중을 읽노라니 어이가 없었다. 황당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아리사가 확실하게 스네이크를 포섭……했나 봅니다. 파티를 베풀어서요. 릴리즈와 가이거와의 단합을 공고히 했다고 확신하고 있군요.”

“허허. 이것 참 미칠 노릇일세!”

마넨 경이 펄펄 뛰었다. 내가 곧 떠날 입장에 처한 마넨 경으로서는 이합집산 구도가 이로울 터였다. 스타소프 암살도 그 일환이었다. 그런데 릴리즈가 되레 가이거와 손을 확실하게 잡았다니 갑갑할 만했다. 아울러서 오늘 내가 던질 말도 마넨 경에게는 폭탄에 가까웠다.

“뭐라.”

“한 달 뒤 입원합니다. 그때부터는 경과 연락이 불가능합니다.”

휴대전화 너머에서 물을 꿀꺽꿀꺽 삼키는 기척이 일었다. 분노와 절망이 넘실넘실 흘러왔다. 나는 마넨 경이 진정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럼 내가 어쩌면 좋겠는가.”

“경께서 원하는 대로 하시지요.”

“역시 그렇군.”

“조간을 기다리겠습니다.”

그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황량한 바람이 창문 틈새로 기괴한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어제 짐을 챙겨 소니아의 집으로 옮겼다. 지금 내 상태로는 누군가가 옆에 붙어 있는 편이 좋았다. 밤에는 소니아가 일터로 떠났지만 낮에는 내리 나와 함께 있어 주었다. 눈물 날 정도로 그녀가 고마웠다.

침대로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내 부탁대로 소니아는 밖에서 문을 잠그고 떠났다. 또 정신이 오락가락해져도 어딘가로 뛰쳐나가지는 못할 터였다.

충격이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가면무도회장으로 뛰어갔다니. 내가 그런 증세까지 보이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이제껏 그런 증세는 최소한 내 기억으로는 한 번도 없었다.

최소한 내 기억으로는…….

온몸의 체온이 차갑게 내려갔다. 과연 내 기억을 신용할 수 있을까. 나도 모르는 새 이런 일이 종종 있었을지도 몰랐다. 더는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암만 골몰해 보았자 부딪치는 것은 희뿌연 절망뿐이었다.

멍하니 텔레비전을 곁눈질했다. 소니아가 즐겨 보는 미니시리즈가 방영되는 중이었다. 「눈의 여왕」이었다. 몇 년을 주기로 되풀이해서 제작되는 인기 역사극이었다. 야사에 기록되어 내려오는 이야기였다. 실화인지 아닌지로 지금도 의견이 분분했다. 대중이 좋아하는 모든 요소가 들어 있었다. 짧고 쉽고 재미있었다. 자극적이고 잔인하고 외설적이었다.

나는 저딴 이야기에 열광하는 대중들이 구역질났다.

토하리만치 역겨웠다.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껐다. 우울한 기분으로 시트를 뒤집어썼다. 모레 조간이나 기다리기로 했다. 마넨 경은 내일 당장 일을 벌일 심산이었다.

스네이크…….

그나저나 정말 그 인간도 대단하네.

나는 수표를 꺼내 팔랑팔랑 흔들며 생각에 잠겼다. 가난뱅이 레이 아리사는 생각지도 않은 돈이 생기면 곧잘 이런 짓을 했다. 궁상이네, 하며 킥킥 웃었다.

스네이크와 ‘레이 아리사’라.

그날 나와 섹스하지 않았던가? 그새 귀족 아리사하고도 했단 말인가.

아리사의 온몸에서 우수수 쏟아져 나오던 음란한 단어를 되살리면 낯만 달아올랐다.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행각이었다. 주먹을 항문에 쑤셔 박는다니. 그런 짓을 당하면서도 즐거워하던 아리사가 정말 이상해 보였다.

스네이크는 작정하고 그를 만족시킨 모양이었다. 과연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남자였다. 엄밀히 말해서 몸을 판 격 아닌가. 매춘 행위나 다름없었다. 고작 세 번의 만남이었지만 스네이크가 풍기던 분위기를 헤아리면 의외였다. 귀족 아리사는 그에게 노골적으로 잠자리를 요구했다. 영화에 자주 나오는 장면에서, 스네이크 같은 남자가 그런 일을 당하면 보통은 주먹을 불끈 움켜쥐고 치욕으로 몸을 부르르 떨지 않던가?

하긴, 영화와 현실은 별개지. 나는 머리만 긁적거렸다.

어쨌든 스네이크가 나한테까지 아리사에게 해 댄 짓을 가하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상상만으로도 무서웠다. 그랬더라면 나는 걷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메사라와 그의 친구가 내 아래에 페니스를 동시에 꽂았을 때를 떠올렸다. 다음날 오전까지 일어나지 못하기 일쑤였다. 주먹은 페니스 두 개를 합친 것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스네이크의 주먹을 헤아려 보았다. 역시 두려운 짓거리였다.

아리사의 심중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메사라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메사라가 자신의 친구와 함께했던 행위가 자동적으로 연상됐다. 나는 메사라를 사랑하지만, 그의 고약한 섹스 취향까지 미화할 마음은 없었다.

메사라는 변태였다. 그 점은 메사라 자신도 인정했다. 메사라와 그의 친구는 내게 별짓을 가했다. 허락을 받은 후, 가볍게 구타하기도 했고 이상한 기구도 자주 사용했다.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그들이 절대 빼먹지 않은 행위는 내 아래에 자신들의 페니스를 동시에 삽입하는 것이었다. 첫날부터 그 짓을 내게 저질렀다. 그것은 엄청난 감각이었다. 아래가 뻥 뚫린 듯한 착각에 사로잡힐 정도였다. 무섭기도 했고 황당하기도 했다. 이런 행위가 가능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 무서웠던 것은 경악하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웃던 메사라였다. 예의 그 입 꼬리만 올리는 미소로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얼굴을 돌리자 턱을 잡아 자신에게로 고정시켰다. 집요하게 눈길을 맞추며 웃음을 지었다. 그 탓에 나는 첫날밤부터 메사라에게 나쁜 인상을 받아 버렸다.

그랬는데 지금은 그를 사랑하고 있다니. 메사라가 내 어깨를 붙잡고서 ‘사랑합니다’ 하던 순간이 눈앞에서 되살아났다.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황당했다. 인생이란 참 알 수 없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돌이켜보니 나와 일대일 만남에서는 그도 많이 노력한 것 같았다. 불만스레 담배를 피워 대던 메사라가 떠오르자 재차 웃음이 나왔다.

스네이크와도 기묘한 인연이었다. 그는 알고나 있을까. 하룻밤에 두 명의 레이 아리사를 안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어찌 보면 기이하기까지 했다. 스네이크와 나는 여러 번 마주쳤다. 아니, 그의 존재를 인식하기 이전에도 어떤 면에서는 계속 마주치고 있었던 셈이다. 마넨 경과 울프삭의 각기 참모로서.

그런 그와 섹스를 하다니 내가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던 모양이었다. 기억에 없어서 천만다행이었다. 떠오르는 기억이 전무하니 별다른 감흥도 들지 않았다. 기억이 무서운 존재인 이유는 이래서일 것이다.

스네이크와 합의하에 섹스를 즐겼다? 믿기지 않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강간을 당했다면 몸에 흔적이 남아 있을 터였다. 최소한 허벅지에는 멍 자국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몸에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게다가 그의 돈으로 살길을 모색하다니. 이런 아이러니가.

“참 기가 막힌다, 기가 막혀.”

나는 쓴웃음을 흘렸다. 궁상도 이런 궁상이 있을까. 눈물 날 만큼 한심하고 웃기는 인생이었다.

어쨌거나 가이거는 되도록 건드리지 말라고 마넨 경에게 조언하기로 결심했다. 현재의 가이거는 마넨 경이 건드릴 만한 규모가 아니었다. 잘못하면 이쪽이 된통 맞을 수도 있었다. 스네이크는 영리하고 잔인하며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풍기는 분위기부터 오싹했다. 직접 맞부딪칠 때마다 실감했다.

적으로 돌리면 안 될 남자였다.

게다가 나와 마찬가지로 정체가 베일에 싸여 있었다. 암살할 방도도 없었다. 한 달간 적당히 마넨 경을 상담해 주고 이 지긋지긋한 음모의 인생을 막 내리기로 작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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