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M─ (38/101)

5 .M─

오늘부터 사흘간 건국기념일 연휴였다. 이틀간 울프삭 경을 수행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예정이었다. 이건 시작이었다. 2월 말부터 3월 말까지 온갖 공휴일이 몰려 있었다. 속칭 ‘춤의 절기’였다.

오늘은 그 첫째 날이었다. 고관대작 나리들의 연설과 오페라 관람 등등이 끝나고 나니 여덟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그동안 나는 울프삭 경 옆에서 꿈쩍도 않고 서 있기만 했다.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가이거 부장으로 진급하면서부터 건국기념일은 증오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본격적인 파티로 접어들었다. 눈부신 샹들리에 불빛 아래에서 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 춤추고 마시고 떠들었다. 이 지루한 짓거리를 밤새워 한다니 한숨이 나왔다. 지금쯤 길거리에서 벌어지고 있을 평민들의 난장 놀이판이 몇 배는 더 재미있을 터였다.

이틀에 걸친 여정에서 부장들은 번갈아서 수행을 맡기로 했다. 나는 오늘 수행에 쿠퍼헤드를 동석시켰다.

오늘은 이십여 일의 병상생활을 끝낸 마넨이 처음으로 공식행사에 나서는 날이었다. 나는 쿠퍼헤드에게만 심중을 털어놓은 후, 마넨을 잘 관찰하라고 언질을 준 터였다.

멀찍이서 마넨이 보였다. 문신들에게 둘러싸여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마넨의 옆에는 어김없이 세 마리의 지인들이 달라붙어 있었다. 며칠 전 독배로 보내 버린 스타소프 때문인지 마넨의 낯이 사뭇 편안해 보였다. 주변을 둘러싼 문신들에게서도 웃음이 연신 터져 나왔다.

반면 울프삭 경은 구석에 처박혀 술만 들이켰다.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울프삭 경과 마넨의 포지션이 오늘의 파티에서는 완전히 바뀐 셈이었다. 나는 쓰게 웃어 버렸다.

암, 멋진 한 방이었고말고.

타이밍 한번 절묘했다. 울프삭 경이 우리를 내치고 릴리즈와 규합하려던 바로 그 순간에 마넨이 스타소프를 손봐 주었다. 덕분에 나는 일말의 의심을 깨끗이 접을 수 있었다. 령은 존재했다. 령이 아니라면 그 시점에 마넨이 스타소프에게 독배를 건네기란 불가능했다.

울프삭 경과 릴리즈로선 날벼락을 맞은 셈이다. 그러나 우리는 전화위복이 되었다. 좋기도 하고 아쉽기도 했다. 내 손으로 스타소프의 내장을 깡그리 뽑아 주지 못해서 아쉬웠다.

뭐, 차후를 기약하면 그만이지.

마넨의 독은 스타소프에게 전치 8개월 진단서를 끊어 주었다. 재활치료를 끝내 봤자 얼굴을 못 들고 다닐 것이 뻔했다. 스타소프가 횡액을 당한 장소를 알게 된 마누라는, 병상에 누운 남편을 달달 들볶으며 이혼을 요구하는 중이었다. 마누라 성깔이 보통이 아니었다. 저래서 스타소프가 신혼에도 불구하고 레이에게 들러붙었나 싶을 정도였다. 대원을 급파하여 따온 도청 파일을 듣고 있노라니 퍽 재미있었다.

릴리즈 군단의 태반은 이번 파티에 불참했다. 평소에는 마흔여 명이 연회장 한구석을 점령하고 우쭐대기 십상이었는데 오늘은 열다섯 명에 불과했다. 왕실주재 파티임을 감안하면 그들이 받은 충격타가 가히 굉장했음을 알 수 있었다.

릴리즈 무리에서 구레나룻이 보였다. 쿠퍼헤드는 어제 이렇게 말했다.

「스타소프 건으로 우리 낙하산 신입부장님께서 릴리즈에서 일약 선두로 급부상하셨다더군.」

그 말대로, 구레나룻을 중심으로 릴리즈가 모여 있었다. 구레나룻이 와인 잔을 흔들며 열심히 떠벌이는 중이었다. 온몸에서 시건방이 줄줄 흘렀다. 저 바텀 놈이 또 내 업무실로 찾아와서 지린내를 풍겨 대는 꼴을 상상하니 벌써 짜증이 났다.

어떤 면에선 잘된 일이지.

스타소프보다는 저 빌어먹을 구레나룻이 훨씬 나았다. 스타소프는 삼십대 중반으로 들어서는 즈음이었고, 여러 조건을 보건대 조만간 정계에서 중대한 입지를 차지할 확률이 높았다. 반면 구레나룻은 이제 겨우 이십대 중반의 애송이였다. 거시기 관리도 제대로 못하는 멍청이였다. 해리 알토넨이 있긴 하지만, 알토넨 가문은 실력행사를 할 만한 힘이 없었다.

이제 저 바텀 놈만 손봐 주면 릴리즈는 진정한 도련님들 친목회로 재탄생하겠군.

나는 냉정하게 웃으며 구레나룻을 응시했다. 시선을 느꼈는지 구레나룻이 이쪽을 흘끗 쳐다보았다.

저 자식이.

일순 전신에서 피가 거꾸로 돌았다. 구레나룻이 느물느물 웃으며 나를 향해 와인 잔을 들어 보인 것이다.

내 옆의 쿠퍼헤드가 “킥.” 하고 웃었다. 눈치 빠른 딱따구리였다. 구레나룻의 저 제스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놓칠 리 없었다. 기분이 좆같았다.

울프삭 경은 묵묵히 술잔만 기울였다. 중간에 왕과 잠깐 대화를 나눈 것이 전부였다. 왕과 대화를 마친 후에도 울프삭 경은 한 시간 넘게 술만 들이켰다.

수확 없이 끝나겠군…….

울프삭 경이 벌떡 일어섰다. 파티가 끝나려면 아직 한참 남았는데도 귀족들과 대충 악수나 나누고 떠나 버릴 심산인 듯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포섭한 왕실 시종들로 하여금 다각도에서 마넨을 도촬해 놓으라 지시해 놓은 터였다. 기왕지사 울프삭 경이 한시라도 빨리 파티를 떠나 주기만 바랐다. 나는 원래 귀족들의 파티를 질색했다.

울프삭 경이 귀족들과 악수치레를 시작했다. 평소와 같은 잘난 척도 없이 건성건성 악수만 나누며 죽 돌았다. 드디어 마넨 차례가 왔다.

두 거물은 잠깐 서로 노려보았다. 이윽고 마넨이 미소를 지으며 먼저 손을 내밀었다. 울프삭 경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저토록 속내를 쉽게 노출하다니, 지켜보는 내가 혀를 찰 노릇이었다.

울프삭 경이 마넨의 바삭바삭한 손을 부러져라 움켜쥐었다. 마넨의 뒤에 기립한 문신들이 일제히 비웃음을 머금었다.

“수고가 많으시구려.”

마넨이 빙긋 웃으며 울프삭 경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철저한 조롱이었다. 울프삭 경은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울프삭 경을 둘러싼 무신들까지 일괄 침묵이었다.

마넨이 이쪽을 흘끗 훑어보았다. 눈동자가 기묘하게 반짝거렸다.

뭘 봐, 이 영감아.

우리에게 가면을 뒤집어씌운 울프삭 경의 악취미가 요즘 들어 참으로 고마웠다. 저 눈초리의 의미는 뻔했다. 감히 고귀한 로터스의 면전에서 “엿 같은 손 당장 거두는 편이 좋을걸. 펜대를 오늘부터 잡기 싫다면 계속 내밀고 있어도 좋아. 근육이란 근육은 모조리 다져줄 테니…….”라고 한 놈이 도대체 누굴까 하는 눈초리였다.

괜찮았다. 이 가면은 머리카락까지 모조리 가리게끔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마넨이 암만 노려보아도 건질 것은 없었다. 혹시 로터스의 눈알이 투시경이라면 몰라도.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전신이 싸늘해졌다.

그럴 리 없지.

그랬다면 이미 세상은 마넨의 판도였을 터…….

울프삭 경이 총총히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나는 어딘지 찜찜한 기분으로 그의 뒤를 따라갔다.

본부로 가서 옷을 갈아입고 거리로 나섰다.

“별다른 건 없던걸. 평소와 다름없이 문신 패거리와 담소나 나누고 술이나 들이켜고 악수나 하고 끝이던데. 그런데 갑자기 웬일이야. 령이라니.”

쿠퍼헤드는 내가 실패해 버린 언론사 건에 관해 알지 못했다. 그 건까지 쿠퍼헤드에게 털어놓지는 않았다.

“음. 요즘 좀 생각하는 게 있어서.”

“설마 너도 울프삭 경의 장단에 혹해 버렸냐?”

“그렇다고 해 두지.”

“이런. 다른 이라면 몰라도 너만은 그러지 않으리라 봤는데.”

쿠퍼헤드의 황당해하는 반응에 나는 픽 웃었다. 캄캄한 하늘에서 축포가 터졌다. 사람들이 가면과 망토 차림으로 몰려다녔다. 밤거리는 축제로 얼룩덜룩했다.

“이대로 가려고? 술이나 한잔 하지?”

집으로 가려는 나를 동료들이 극구 붙들었다. 오늘의 수행 인원은 나를 비롯해 쿠퍼헤드, 팔콘, 리져드, 개비얼이었다. 모두 미혼이었다. 연휴 첫날은 가족과 함께 보내라는 배려에서 유부남들은 수행 둘째 날로 미뤄 놓은 탓이었다. 지탄을 받는 가이거 부장들도 사람이기는 매한가지였다.

불가항력으로 쿠퍼헤드의 차까지 끌려갔다. 미혼남들이 깊은 밤에 향할 곳이란 뻔했다. 42번가였다.

차를 타고 42번가로 향하는 내내 착잡했다. 그나마 레오파드가 이 자리에 있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만약 레오파드가 있었다면 나에게 스노우 화이트로 가자고 꼬장을 부렸을 것이 뻔했다. 그곳에 갈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섹스를 멀리하고 싶지는 않았다. 레이와의 접점을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42번가 광장은 광란으로 들썩거렸다. 간만에 눈이 그친 맑은 밤이었다. 메두사 목을 높이 치켜든 페르세우스 청동상 주변이 춤추는 사람들로 난장판이었다. 주차할 곳을 찾는 데만도 30분 넘게 걸렸다. 길거리는 축제용 망토와 가면을 파는 노점들로 붐볐다. 기념일의 전통이었다. 어이없게도 가이거 부장 가면의 모조품들도 줄줄이 팔리고 있었다. 노점상 왈 “최고 인기제품”이라고 했다.

우리는 노점에서 망토와 가면을 골랐다. 가이거 부장들 아니랄까 봐 모두 어김없이 사신 가면을 착용했다. 와중에도 서로를 쳐다보며 박장대소했다.

“모처럼의 연휴에도 빌어먹을 가면을 또 쓰고 싶어?”

“스네이크, 그러는 너는?”

길을 걸어가며 서로 배꼽을 잡고 웃었다. 어쨌든 나는 적당히 놀다가 눈치를 봐서 슬쩍 빠져나올 심산이었다. 가면에 망토까지 걸쳤으니 도망가는 나를 어찌 잡으랴…… 했는데 멋지게 빗나갔다.

쿠퍼헤드가 내 옆구리를 붙들고 졸졸 따라왔다. 팔콘, 리져드, 개비얼은 금방 따돌렸지만 쿠퍼헤드는 오늘따라 질기기가 악어가죽이었다.

“너 요즘 게이 취미 생겼냐.”

결국 한마디 던졌다. 쿠퍼헤드의 가면 안쪽에서 웃음이 쿡쿡 새어나왔다.

“아니. 할 말이 있어서.”

“음. 이것부터 놓지.”

“용무 끝내고 나서. 령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유가 뭐야? 내가 모르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어?”

“글쎄…….”

나는 말을 흐렸다. 마넨과의 일을 녀석에게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쿠퍼헤드의 용무는 따로 있는 것 같았다. 이쪽을 바라보는 쿠퍼헤드의 눈초리가 날카로웠다.

쿠퍼헤드가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래, 스네이크. 솔직히 말하지. 령 때문은 아니야.”

“그럴 줄 알았어.”

“과연. 어떻게 알았냐.”

“너랑 나랑 칠년이야.”

“칠년이라…… 말 한번 잘했어. 어이, 본부장님. 당신은 다 좋은데 말야. 우리를 지나치게 불신하는 것 아닌가? 이래봬도 너와 내가 칠년이야. 아니지. 우리와 네가 칠년이지. 그런데 지금까지 네가 우리를 신뢰한다는 느낌을 단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어. 그나마 네가 제일 가까이 두는 레오파드도 그러는데 이따금 네가 자기를 쳐다보는 눈빛이 너무 차가워서 몸서리가 쳐진다더군. 오입 취미 아니었으면 가까이 두지 않았을지도 몰라, 이러더라고.”

“본론이 뭐냐.”

“릴리즈 건도 그렇고 우리 앞날도 그렇고, 가이거 부장들의 머리인 네가 몸뚱이인 우리를 신뢰하지 않으면 위험하지 않을까 하는 게 내 생각이야. 몸과 머리가 따로 놀면 곤란하지 않겠어. 머리만 아무리 좋아 봤자 뭐해, 전신마비 환자는 손끝도 달싹일 수 없다구.”

“알았어. 새겨 두지.”

딱 잘라 대답했다. 쿠퍼헤드의 의견은 곧 부장들의 의견이다…… 나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확실했다. 부장들끼리 입을 맞춘 후 쿠퍼헤드가 대표로 나서서 전달한 의견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레오파드의 사적인 넋두리까지 들먹일 리 없었다.

설령 쿠퍼헤드의 단독 의견이라도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대학 출신임을 차치하고도 쿠퍼헤드는 영리하기가 마넨을 뺨쳤다. 언변도 좋고 성격도 호방해서 두루 인심을 샀다. 살인 취미만 나 못지않았다면 어쩌면 지금쯤 본부장 자리에 쿠퍼헤드가 앉아 있을지도 몰랐다.

녀석의 말이 옳았다. 이제껏 울프삭 경 아래에서 우리는 동료이자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라이벌이었다. 그러나 릴리즈 건으로 단합이 무엇보다도 중요해진 현 상황에서는 서로에 대한 시각을 재점검할 필요가 있었다.

전신마비 환자라. 그럴싸한 비유로군.

갑자기 온몸이 싸해졌다. 내가 모르는 자리에서 부장들끼리 입을 맞추는 일 따위는 앞으로 절대 없어야 했다. 그것이 우리의 살길이었다.

쿠퍼헤드가 내 어깨에 팔을 걸치며 쿡쿡 웃었다.

“역시 우리 본부장님이라니까. 한 번 뱉은 말은 철저히 지켜 주시는 본부장님이니까 우린 이제 무조건 믿고 기대겠어. 사흘 뒤 회합이나 가지자구. 어때.”

역시.

나는 픽픽 웃어 버렸다.

어쩔 수 없지…….

인파에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다 보니 벌써 레이의 집이 가까워졌다. 뭔가 가슴이 먹먹했다. 낡고 오래된 그 집은 변함없이 붉은 외벽 가득히 담쟁이덩굴을 외투처럼 껴입고 있었다. 이전과 다른 점이라면 집 앞 대로변에서 넘실거리는 수많은 인파와 웃음소리, 밤하늘을 밝히는 축포였다.

나도 모르게 창문을 응시했다. 불은 꺼져 있었다.

레이는 나가서 놀고 있을까. 기분이 묘했다. 이런 축제의 밤에도 그는 집에 틀어박혀 깊이 잠들어 있을 것만 같았다. 어쩌면 자느라 불을 꺼 놓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나저나 스네이크. 요즘 잘돼 가?”

“뭐가.”

“뭐기는. 차인 후 뒷수습.”

“……이 자식이.”

그렇잖아도 레이의 창문을 눈앞에 둔 참이었다. 농담으로 넘기기엔 기분이 엄청나게 안 좋았다. 내 음성에 설핏 섞인 노기에 쿠퍼헤드가 움찔했다.

“아. 알았어.”

쿠퍼헤드가 양손을 활짝 흔들며 진정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나는 급히 정신을 차렸다. 무의식중에 주먹을 날릴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쿠퍼헤드가 다시 내 어깨로 팔을 두르며 너스레를 떨었다.

“몰라. 인생사 모르는 거야. 우연이 중첩되면 그건 우연이 아니다, 못 들어 봤냐. 혹시나 또 만나게 되면 주저하지 말고 말 걸어 봐. 혹시 알아?”

제 딴에는 신경 써 준답시고 하는 말이겠지만 코웃음만 나왔다.

우연이라…….

오물로 얼룩진 술집 복도가 생각났다.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말라는 하늘의 엄포였다.

“뭐, 그래도 정말 놀랐어. 우리 본부장님께서 설마 연애를 할 줄이야. 그날 나도 에이, 설마, 하며 넘겨짚었는데 그게 적중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스네이크라는 그 호칭대로, 전신을 타고 흐르는 피도 냉혈일 줄 알았다구. 말이 났으니 말인데 네 유일한 단점은 성 정체성뿐이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거든. 하긴, 그것도 어울리긴 해. 사디스트와 게이 취미라…… 어울리는 조합 아닌가.”

“게이가 듣기엔 기분 나쁜데.”

“후후후, 그도 그렇…… 어.”

쿠퍼헤드가 웃다가 시선을 어딘가로 고정했다. 그를 따라 무심코 고개를 돌리던 나는 그대로 굳었다. 등골까지 서늘해졌다. 아마빛 머리카락이 보였다.

캄캄한 골목에 파묻혀 느슨히 서 있었다. 어둠속에서도 아마빛 머리카락만은 램프 불처럼 또렷하게 빛났다. 레이였다. 몇 걸음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에서, 나에게 이리 오라고 손짓하듯 우두커니 서 있었다.

숨도 쉴 수 없었다. 어처구니없게도 방금 코웃음쳐 버리고 말았던 쿠퍼헤드의 말이 귓전을 스쳤다.

우연이 중첩되면 그건 우연이 아니다…….

“이봐요, 괜찮아요?”

쿠퍼헤드가 레이를 향해 말을 던졌다. 내 옆구리를 슬며시 잡아끌고 골목으로 향하며 속삭였다.

“스타소프가 치근대던 그 사람 맞지?”

레이는 골목 벽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가면도 망토도 없었다. 여전히 퀴퀴한 코트차림이었으나 후드는 쓰고 있지 않았다. 아마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펄펄 나부꼈다. 창백한 낯빛이 선명했다. 숨까지 가쁘게 몰아쉬었다.

눈앞에서 레이가 완전히 드러났다. 가슴이 벅차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레이다.

레이였다.

뭐라고 말을 걸지? 출근길 내내 몇 번이고 상상하지 않았던가. “아니, 이게 웬 우연입니까.” 하고 너스레를 떤다, 그리고는 한적한 곳에 그를 데려가 말을 붙이며 조심스럽게 새 출발을 한다…….

그러나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미동 없이 그를 뚫어지게 응시할 뿐이었다. 나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뇌까렸다.

진정해라, 포우…….

기회다. 드디어 기회가 온 것이다.

그토록 갈구하던 기회가.

쿠퍼헤드가 레이의 뺨을 손등으로 건드렸다.

“스네이크, 이 사람 좀 봐. 어디 다친 것 같은데.”

비로소 레이가 서서히 눈을 떴다. 어둠을 삽시간에 거두며 파란 눈동자가 드러났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다음 순간, 레이가 가까이 다가선 쿠퍼헤드를 보고 흠칫하며 몸을 떨었다.

“히잇…….”

파리한 입술에서 신음이 새어나왔다. 명백한 공포였다.

그때야 나는 아차 했다. 뒤늦게 우리가 무슨 꼴인지 깨달았다. 제복만 걸치지 않았을 뿐 그때와 똑같은 차림이었다. 이런 꼬락서니로 라비린스에서 스타소프에게 봉변을 당하는 레이를 방관하지 않았던가. 상대가 누구든 좋은 인상은 아닐 게 뻔했다. 심지어 쿠퍼헤드가 이쪽더러 ‘스네이크’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레이는 정세에 관심이 많았다. 가이거 본부장의 전통적인 호칭이 스네이크라는 사실을 모를 리 없을 것이다.

낭패감이 몰려왔다. 귓가에 누군가의 조롱 띤 웃음이 스쳤다.

이런 빌어먹을.

레이가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거의 쓰러지다시피 휘청거렸다. 그 모습에 쿠퍼헤드가 어깨를 으쓱 올렸다.

“왜 그러는 겁니까. 우린 그쪽을 도와주려는…… 엇, 조심해요.”

쿠퍼헤드가 재빠르게 레이의 오른팔을 잡아 부축했다. 레이가 고개를 떨어뜨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쿠퍼헤드가 이쪽을 향해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스네이크. 보고만 있지 말고 여기 좀 잡아 봐.”

확인사살이었다. 좆같았다.

그때 별안간 골목 안쪽에서 고함이 터졌다.

“거기 있었군!”

“야, 이 새끼들아. 금발한테서 손 놔. 그 새끼 우리 거야.”

사내들이 날랜 걸음으로 다가왔다. 쿠퍼헤드가 “일행입니까?” 하며 가볍게 어깻짓했다. 사내들의 인상이 하나같이 고약했다. 그들 중 한 놈은 이마에서 피까지 흘리고 있었다.

“일행이지, 아무렴. 일행이기만 할까.”

“얼른 그 손 떼라니까. 우린 그 자식하고 볼일이 있다구.”

별다른 반응 없이 쿠퍼헤드가 사내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일행이 아닌 것 같은데…….”

쿠퍼헤드의 웃음 띤 목소리에 사내들이 대노한 기색으로 외쳤다.

“이 피 안 보여? 금발 새끼가 형광등으로 내 이마를 박아 놓았다고!”

“쓸데없이 기사님 흉내 내지 말고 저리 꺼져. 왜, 너도 우리한테 꽂히고 싶냐? 그 덩치에는 1미터짜리 바이브도 모자라겠는데!”

“곱게 손 놔. 우린 금발하고 보통 사이가 아니란 말이야.”

“푸하하하하!”

사내들이 박장대소를 하며 허리까지 음란하게 놀렸다.

곧바로 알아차렸다. 스노우 화이트에서 레이와 하룻밤을 보냈던 변태들이었다. 축제에 나온 레이를 발견하고 쫓아온 모양이었다. 쿠퍼헤드가 “흐흠.” 하다가 레이에게 “도와드릴까요?” 하고 슬쩍 물었다.

레이가 바짝 고개를 쳐들었다.

“필요 없습니다.”

그러고는 쿠퍼헤드의 손을 확 뿌리쳤다. 어딘가 얻어맞은 듯 복부를 움켜쥔 채 뛰기 시작했다. 황급히 뛰어가던 레이가 내 어깨에 부딪쳤다. 펄럭거리는 아마빛 머리카락이 눈가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는 사라졌다.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갈구하던 우연이 허망하게 끝났다.

끝났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너무 짧았다. 원망스러우리만치 삽시간에 끝나 버렸다. 뭔가 계속 멍했다. 꿈을 꾼 것만 같았다. 누군가에게 철저히 조롱당한 기분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악취가 썩어 가는 골목이 있었다. 그리고 고함을 치며 레이를 뒤쫓는 사내들과, 어쩔 거냐 하는 눈초리로 이쪽을 응시하는 쿠퍼헤드뿐이었다. 내 옆으로 사내들이 지나치려 했다.

“우왓!”

한 놈이 돼지 멱따는 소리를 지르며 엎어졌다. 놈이 고개를 홱 쳐들어 이쪽을 노려보았다.

“발은 왜 걸고 지랄이야, 이 멀대같은 놈아!”

일행이 주춤주춤 멈춰 섰다. 전부 다섯이었다.

쿠퍼헤드가 한손을 까닥거리며 내게로 걸어왔다.

“스네이크, 뭐하려고?”

나는 대꾸하지 않고 엎어진 놈을 한손으로 들어올렸다. 단숨에 놈의 얼굴로 주먹을 박아 넣었다. 비명이 허공을 갈랐다. 나는 멈추지 않고 연발타로 갈겼다. 이빨이 우수수 튀어나왔다. 얼마 못 가 놈의 얼굴은 분간하기도 어려웠다. 나는 놈을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한쪽 팔을 붙잡아 비틀어 버리며 등을 걷어찼다. 뻑 하고 척추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동료의 횡액에 나머지 놈들이 놀라며 달려들었다. 보고만 있을 쿠퍼헤드가 아니었다. 수적으로 우세해 봤자 갈고닦은 우리에게 적수가 되지 못했다. 순식간에 길바닥은 수없이 쏟아지는 핏물로 질펀하게 젖어들었다.

괜찮았다. 그렇잖아도 레이에게서 이야기를 듣자마자 언젠가는 반드시 놈들을 추적해 좆을 뭉개 주겠노라고 결심한 터였다. 마침 기분도 끔찍스레 안 좋았고 기회까지 찰나로 끝나 버렸다. 무대도 완벽했다. 이곳은 골목에서 사람이 죽든 살든 아무도 신경 안 쓰는 42번가였고, 오늘은 축제의 밤이었다. 더불어 우리는 가면에 망토차림이었다. 노점상이 말했다시피 “최고 인기제품”인 가이거 부장 모조품 가면을 쓴 사람만 이 거리에서 수백 명에 달했다. 목격자가 백 명 있어 봤자 경찰이 건질 실마리는 없었다.

마음 푹 놓고 잔인하게 밟아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놈들의 좆은 뭉개진 딸기파이로 변해 버렸다. 칼과 채찍만 있었다면 갈고닦은 고문 실력까지 유감없이 발휘했을 것이다.

이제 쿠퍼헤드는 날뛰는 나를 지켜만 보고 있었다. 골목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을 솜씨 좋게 쫓아내며 망을 봐 주었다. 덕분에 나는 놈들의 좆뿐 아니라 팔다리까지 모조리 부러뜨릴 수 있었다. 마지막 놈 손마디마저도 남김없이 꼬아 놓은 후, 망토 끈을 느슨히 풀며 내뱉었다.

“가지.”

끄응끄응 하는 신음 소리를 뒤로 하고 신속하게 골목을 벗어났다. 쿠퍼헤드는 목 관절을 꺾으며 한마디만 던졌다.

“이제 속 좀 풀렸냐.”

왜 그랬냐고 묻지는 않았다. 과연 영리한 녀석이었다. 딱따구리만 아니었다면 레오파드보다 더 가까이 두었을 것이다. 벌써부터 부장들과의 회합자리가 골치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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