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L. (37/101)

4 ─L.

공포가 가시자 불같은 노여움이 전신을 치달았다. 모두 자작나무 탓이었다. 평소라면 냉정을 유지하려 노력했을 것이다.

지금 나는 분명히 문제가 있었다. 스타소프에게 강간까지는 당하지 않았다. 나는 결과만 그럭저럭 괜찮으면 과정이야 어떻든 넘어가 버리는 성격이었다. 보통 때였다면 ‘재수 없는 하루였네’ 하고서 깨끗이 잊었을 터였다.

그러나 집에 와서도 두 시간 내내 룸을 빙빙 돌며 숨만 몰아쉬었다. 온몸이 불길에 타오르는 것 같았다. 자작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서 몇 번이고 노려보았다. 노여움이 사그라지기는커녕 뚜렷해지기만 했다.

결국 이성을 잃고 마넨 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유를 막론하고 무조건 스타소프를 처치해 달라고 조를 작정이었다. 해 줄 것이다. 해 주고도 남았다. 내 말이면 껌뻑 죽는 양반이었다.

내가 마넨 경에게 전화를 거는 일은 드물었다. 그것도 이른 아침이었다. 마넨 경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퇴원을 며칠 앞둔 그가 이 아침에 휴대전화를 켜 놓았을 리 없었다.

치닫는 분노로 휴대전화를 집어던질 찰나 문에서 노크소리가 났다. 엘리 씨였다.

“메슨 씨가 레이 씨와 통화를 원한다면서 갑작스레 내게 전화를 걸지 뭐유.”

엘리 씨가 자신의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이 시간에 웬일이십니까. 아까는 감사했습니다.”

“감사는. 자네 잘못이 아닌데도 업소에 더는 나오지 말라고 해서 되레 이쪽이 미안했지. 어쨌든 자네 휴대전화 번호를 몰라서 엘리 부인을 통해 연락했으니, 빨리 용건을 말하고 끊어야겠네.”

“무슨 일인데요?”

“잘 듣게. 자네에게 행패를 부린 그 귀족 말인데, 나를 집요하게 다그쳐서 자네 집주소를 알아냈다네. 미안하네.”

잠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여기 사람들이야 다들 그렇고 그래서 하는 말이니까 기분 나쁘게 듣진 말게. 어쨌든 부유한 귀족나리 아닌가. 마음에 들면 적당히 상대해 주고 최대한 얻어내든가, 그럴 생각이 없다면 당분간은 몸을 피하게. 이 바닥에 있으면 사람 보는 눈만 생겨서 말일세. 그 귀족이 보통 놈이 아니더라고. 자기 말을 곱게 안 들으면 자네를 죽이고도 남을 기세였어.”

“알겠습니다. 언질 고맙습니다.”

전화를 끊은 다음 창밖을 살펴보았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거리에서 인적은 없었다. 아무리 스타소프라지만 술자리가 끝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여기까지 찾아올 리는 없었다. 지금은 숙취로 뻗어 있으리라 짐작했다.

나는 급히 옷을 걸쳤다. 마넨 경에게 메시지를 보낸 후 엘리 씨를 찾아갔다. 소니아의 전화번호를 가르쳐달라고 부탁했다. 지금 내가 몸을 의탁할 사람이라고는 소니아뿐이었다. 소니아는 흔쾌히 수락했다. 그녀가 정말 고마웠다.

소니아의 집은 여기에서 30분 거리였다. 길을 걸어가며 생각에 잠겼다.

스타소프를 최대한 서둘러 제거해야 할 것 같았다. 내 짐작이 맞는다면, 울프삭은 가이거 부장들을 몰아내고 그 대신 릴리즈와의 규합을 도모하고 있었다. 그런 속셈이 아니라면 한갓 술자리 따위에 부장들을 수행시킬 리 없었다. 스네이크의 격한 반응도 그 모욕감의 발로일 것이다.

어차피 마넨 경도 스타소프의 처리를 고려하던 참이었다. 내가 마넨 경에게 스타소프에 대해 슬쩍 물어보았을 때 그런 이유로 유쾌해했던 것이다. 릴리즈의 핵심멤버인 스타소프의 제거는 사실상 정해진 결과였다.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마넨 경이었다.

“무슨 일인가, 이 아침부터.”

나는 바로 용건을 꺼냈다.

“스타소프를 처치하십시오. 최대한 빨리.”

“내일 아침 신문을 기다리게.”

마넨 경은 전화를 깨끗이 끊었다. 가타부타 묻지도 않았다. 내 말 들어서 나쁜 일은 이제껏 없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래서 울프삭이 마넨 경을 따라잡지 못하는 것이다.

소니아의 집에서 하루를 보낸 뒤 조간을 펼쳤다. 작은 박스 기사가 실려 있었다. 문신귀족들과 술을 마시던 중, 스타소프가 심장마비를 일으켜 긴급 호송되었으나 중태에 빠졌으며 몇 달간 병상 신세를 지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별명값을 했군. 소크라테스처럼 독배를 마시고 쓰러져 버렸으니.

기분이 복잡했다. 스타소프 제거를 결정한 이유는 기실 개인적인 분노가 가장 컸다. 마넨 경과 통화를 끝내고 몇 시간 만에 후회한 터였다.

나는 신문을 접어 옆으로 치워 버렸다.

신경 쓰지 말자.

마넨 경은 역시 영리한 사람이었다. 대놓고 손을 써 버린 것이다. 이왕 할 경고, 확실하게 하는 편이 나았다. 릴리즈는 당분간 술잔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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