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M─ (36/101)

3 .M─

기분이 엉망이었다. 진창바닥에 거꾸로 처박힌 느낌이었다.

핸들을 잡은 대원 때문에 가면도 벗지 못하고 있었다. 울프삭 경의 술자리 호위를 마치고 본부로 가는 길이었다. 내가 직접 지프를 몰았다면 핸들을 마구 내리쳤을 것이다.

지프 안이 조용했다. 레오파드와 쿠퍼헤드가 동석하고 있었다. 그들도 내리 침묵을 지켰다. 술자리 수행의 모욕감 때문일 테지만 신경 쓸 마음은 들지 않았다. 담배 생각만 간절했다. 본부에 도착하자마자 가면을 벗어 내동댕이쳤다.

담배를 뽑아 물고 불을 붙였다. 잔에 보드카를 들이부었다. 손이 가늘게 경련했다. 보드카를 들이켜다가 잔을 벽으로 던져 버렸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 났다.

레이였다. 후문 카운터에 서 있는 그를 본 순간 하마터면 이성을 잃어버릴 뻔했다. 오늘만큼 빌어먹을 가면에 감사한 적이 없었다.

하필 왜 그 자리에서.

접대부는 아니었다. 접대부였다면 나는 아마 미쳐서 날뛰었을 것이다. 그 자리에서 레이를 살해하고 나도 자살해 버렸을지도 몰랐다. 그러고도 남았다.

웃긴다는 걸 안다. 그와 나는 이미 끝난 사이다. 레이가 얼굴을 팔든 웃음을 팔든 내가 상관할 권리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제가 되지 않았다.

담배를 깊이 빨았다. 레이에게 비틀비틀 걸어가던 스타소프가 눈앞에 되살아났다. 끔찍하게 볼만했다. 잠든 레이를 훑어보던 눈초리하며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손짓하며 추하기 그지없었다. 홀랑 넋이 빠져 있었다. 부장들만 아니었으면 당장 레이를 깔아 눕히고도 남았을 기세였다.

작자가 추태를 부리는 내내 전신에서 피가 거꾸로 돌았다. 당장 달려들어 놈의 눈알을 뽑고, 손가락 마디마디를 부러뜨리고, 혀를 도려내고 싶어 미칠 것만 같았다.

내가 관찰한 바로는 레이는 타인의 눈길을 싫어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매우 괴로워했다. 나도 섹스 때 외에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으려 조심했었다. 그런 레이를 스타소프는 벌건 눈으로 빤히 쳐다보았다. 레이에게는 그 자체가 엄청난 고문이었을 것이다.

원칙대로라면 가만히 있어야 했다. 무조건 참아야 했다. 끓어오르는 살의를 억눌렀어야 했다. 업무 원칙이 그랬고, 레이와 나는 막을 내린 사이였다. 고초를 당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었다. 그러나 레이의 물기 젖은 눈동자를 마주치는 찰나 머리가 텅 비어 버렸다. 내 눈앞에서 머리카락이 피처럼 뚝뚝 떨어져 내렸다.

행동이 먼저였다. 정신을 차린 것은 뒤였다. 대노한 울프삭 경은 룸으로 나를 불러 호통을 쳤다. 몸뚱이에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친 애송이 귀족들과 매춘부들 앞에서 나는 장장 20분간 온갖 상소리로 모욕당했다. 울프삭 경을 진정시킨 자는 엉뚱하게도 스타소프였다. 한 대 맞고 나서야 이성이 돌아온 듯 뒤늦게 수습에 나섰다.

스타소프는 라비린스를 나설 때 카운터 직원을 다그쳐 레이의 거처를 알아냈다. 작자가 레이에게 추근거리는 모습을 상상하자 머리가 타올랐다.

아니, 그보다는 다른 이유겠지.

나는 쓰게 웃었다. 휘청거리며 걸어가는 스타소프에게 내가 겹쳤다. 지켜보는 이들만 없었다면 스타소프와 다를 바 없이 굴었을 것이다. 도망가는 레이를 뒤쫓아 갔을 것이다. 그러고도 남았다. 나 또한 주정뱅이므로. 사랑이라는 알코올에 절은 주정뱅이.

희미한 여명이 창문 블라인드 사이로 흘러왔다. 일곱 시였다. 24시간 전 이맘때 본부로 차를 몰며 나는 무엇을 꿈꾸었던가. 하얀 눈으로 뒤덮인 공원에서 일어나는 행복한 우연을 망상했다. 내게로 흩어지는 아마빛 머리카락을 부축하며 새로운 출발을 한다, 따위를 상상했다. 그리고 우연은 이뤄졌다.

단, 철저한 조롱의 무대를 준비하고서. 하얀 공원 따위가 아닌 오물로 얼룩진 술집에서.

그 침침한 터널을, 나는 추악한 음모의 가면을 쓴 채 “따라오십시오.”라고 말하며 앞장서 걷는 아마빛 머리카락을 뒤따라갔다. 복도를 뛰어가는 그를 쳐다만 보았다. 공포로 들어찬 파란 눈동자에 어떤 목소리도 내지 못했다. 갈망하던 부축 대신 채찍 든 손으로 그를 떠밀어냈다. 그게 끝이었다.

나는 보드카를 병째 들이마셨다. 어쨌거나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스타소프를 처치하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릴리즈를 뭉개 주기로 작정한 터였다. 스타소프는 릴리즈에서 알토넨과 함께 선두를 달렸다. 적당한 본보기가 될 것이다. 이번 기회에 릴리즈가 제 주제파악을 똑똑히 하게끔 주물러 줄 생각이었다. 무신귀족, 무신귀족 하지만 그 손에 피를 얼마만큼이나 묻혔는지도 의문이었다.

기껏 도련님들 친목회 주제에.

나는 코웃음 쳤다. 릴리즈는 울프삭 경만 구워삶으면 만사형통이라고 믿고 있었다. 울프삭 경을 조종해 부장들을 쫓아내고 가이거를 자기들 손아귀에 넣을 심산이었다. 엄청난 착각이었다.

현 가이거는 울프삭 경이 통제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그것을 똑똑히 깨우쳐 줄 작정이었다. 스타소프라는 회초리로 저 건방진 버르장머리를 단단히 고쳐 주기로 결심했다.

레이에게 년, 년, 해 댄 것만으로도 놈은 죽어야 했다. 레이는 그 호칭을 싫어했다. 첫날밤 레오파드와 내가 호텔에서 그렇게 불렀을 때, 레이가 당장 옷을 입으며 나가 버리려 한 기억이 뚜렷했다. 년이라고 부르자마자 일그러지던 그 표정은 그 이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담배에 불을 붙이려다가 멈칫했다.

레오파드의 말에 열이 치올랐던 이유가 그거였나…….

하하하. 이런.

게이들 사이에서 바텀에게 년이라고 부르는 일은 사실 흔했다. 퀸이라든가 아가씨라든가 년이라든가 불렀다. 그렇게 불러 달라고 요구하는 바텀도 숱했다. 심지어 구레나룻까지 그랬다. 레오파드가 내 반응에 성질을 부린 건 당연했다. 나는 고소를 머금었다.

“있어?”

노크가 울렸다. 레오파드였다.

“식사 안 해?”

쿠퍼헤드도 함께 업무실로 들어왔다. 둘이 문을 잠그더니 가면을 벗고 나란히 담배를 뽑아 물었다.

어제저녁 식사자리에서 십상시 이야기를 꺼냈다. 부장들의 분노는 굉장했다. 거의 미쳐 날뛰었다.

그럴 만했다. 우리는 울프삭 경이 재포니카에 오르기까지 지대하게 공헌한 주역이었다. 당연히 한자리 얻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건만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니 펄펄 뛸 수밖에 없었다. 특히 유부남인 벌쳐, 스터젼, 재규어가 가장 노했다. 마누라와 새끼들이 눈앞을 스친 것이 틀림없었다.

“어쩔 셈이야.”

쿠퍼헤드가 불쑥 말했다.

나는 냉정하게 머리를 굴렸다. 아무도 믿지 않는다, 이것이 내 원칙이었다.

“뭘?”

레오파드가 흐흐흐, 하며 “또 저러시네.” 했다. 쿠퍼헤드가 담배 끼운 손가락을 가볍게 흔들었다.

“우리끼린 이야기 끝냈어. 본부장님 결재만 기다리고 있다구.”

“구체적으로 말해 봐.”

“릴리즈.”

나는 어깨를 으쓱 올렸다. 보드카를 따르려다가 멈칫했다. 잔을 깨 버린 걸 깜빡 잊어먹고 있었다.

레오파드가 부서진 유리잔을 흘끗 쳐다보았다.

“뭐, 저것만 봐도 우리 본부장님 결재는 뻔한데 뭘 물어.”

“직접 들어야지.”

쿠퍼헤드가 딱 잘라 말했다. 나는 바에서 새 잔을 꺼내 보드카를 따르며 질문했다.

“우리끼리라면 누구누구야?”

“본부장님만 뺀 모두.”

레오파드가 말했다. 내가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질문은 단지 확인 작업일 뿐이었다.

우연의 일치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내가 운이 좋은지 알 수 없었다. 내 휘하의 부하이자 동료들은 희한하리만치 나와 상통하는 구석이 많았다. 적에게는 잔인하고 동료에게는 관대했다. 솜씨도 뛰어났다. 마음먹은 일은 방법을 불사하여 반드시 해치웠다. 모욕당하는 것도 싫어할뿐더러 한번 당하면 배로 쳐서 갚아 줘야 후련해했다. 분노하면 아무도 못 말렸다. 그런 녀석들이 7년 전 가이거 본부에서, 그것도 열한 명이나 모인 것이다.

레오파드와 쿠퍼헤드의 앞에 잔을 내려놓았다. 차례로 보드카를 붓고 잔을 권했다. 그러며 지그시 웃었다. 7년간 한솥밥을 먹은 저들이 이 미소의 의미를 모를 리 없었다.

“기다려 봐.”

우리는 웃으며 잔을 부딪쳤다.

사복으로 갈아입고 부장들과 함께 본부를 나섰다.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며 생각에 잠겼다. 스타소프를 언제쯤 처리할까. 빠르면 빠를수록 좋을 것이다. 그리고 내 손으로 직접 처리해 버릴 작정이었다. 그런 대어를 일반대원에게 내줄 수는 없었다. 내가 손수 낚아 회를 쳐야 했다. 상상만 해도 짜릿했다. 그것도 울프삭 경께서 제법 예뻐하는 귀족나리 아닌가. 벌써부터 흥겨워 죽는 나라는 녀석은 역시 도리가 없었다.

이러니 레이가 싫어할 수밖에…….

픽 웃으며 스테이크를 썰었다. 이쪽을 살펴보던 재규어가 후후후, 웃으며 “아까부터 싱글거리는데, 제법 즐거운 생각에 몰두하시나 봐?” 했다.

나는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음. 즐거운 생각 맞아.”

스터젼이 “뭔데?” 하고 재빨리 물었다. 과연 릴리즈 제거에 가장 몸이 달아 버린 유부남 클럽이었다.

나는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말했다.

“오늘밤 텔레비전에서 내가 좋아하는 미니시리즈를 해 주거든. 저번 회가 하도 아슬아슬하게 끝나서 말이지. 오늘밤에 어떻게 전개될지 생각 중이었어.”

“하하.”

유부남들이 실실 웃었다. 나는 레오파드에게 흘끗 눈길을 던졌다.

오늘은 울프삭 경의 파티 수행이 없었다. 내 짐작에 스타소프는 오늘밤 또 레이한테 추근거리려 들 터였다. 그렇다면 빨리 움직여야 했다.

“레오파드도 같이 보기로 했지, 아마.”

“당연하지. 나도 그 시리즈의 팬이야. 벌써부터 기대되는걸.”

레오파드가 잔을 들어올렸다. 역시 쓸 만한 동료였다.

스타소프가 자택을 나서서 42번가로 향했다. 밤 10시 40분이었다. 행선지가 라비린스였다. 후문으로 들어가더니 카운터를 둘러보았다. 레이를 찾는 것이 틀림없었다. 작자가 오늘 바로 레이를 집적대리라 짚은 내 예상이 적중했다.

“저 양반이 레드폭스에게 단단히 반했나 봐.”

레오파드가 중얼거렸다. 나는 쿠퍼헤드도 동행시킬 것을 그랬나 하고 잠깐 후회했다. 그러나 이번 작품에 필요한 배우는 두 명이어서 어쩔 수 없었다. 아울러서 레오파드는 난폭성과 완력에서 나와 함께 으뜸을 달릴 만큼 솜씨가 빼어났다.

나는 머리를 식히며 차창 밖을 노려보았다. 후문을 빠져나오던 스타소프가 한 무리와 부딪쳤다. 안면 있는 귀족들인 듯 어깨를 두들기며 한동안 떠들었다. 어둠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썩 절친한 사이는 아닌 듯했다. 스타소프가 그들에게서 자꾸 몸을 빼려고 했다. 그들이 스타소프를 억지로 끌고 라비린스로 들어갔다. 잠깐 술자리를 할 분위기로 보였다.

마지막 축배니까 자비롭게 기다려 주지.

나는 웃었다. 흥분이 전신으로 지끈거리며 퍼져나갔다. 지체 높은 귀족나리를 처치할 때는 언제나 이랬다.

“저 새끼, 유부남이지? 그것도 신혼 아닌가? 그런데 남자취미까지 키우고 있었어?”

레오파드가 담배를 잇새에 끼우며 말했다.

“알 게 뭐야.”

“하긴, 레드폭스의 어제 꼴을 보아하니 수도승도 허리가 녹겠더구만.”

“그랬나.”

“죽이지 않았어? 옷차림하며 묶은 머리. 초라한 옷을 입은 꼴만 봐 오다가 그렇게 차린 모습을 보니까 절로 입이 벌어지더군. 난 처음엔 접대부로 거기서 일하나 싶었다니까. 라비린스가 언제부터 게이까지 취급했나 하면서 고갤 갸웃거렸다구.”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레오파드가 레이를 언급할 때마다 속이 불편했다. 레오파드는 나와 레이 사이를 몰랐다. 모르는 놈더러 입 닥치라 고함칠 수는 없었다. 웬만해선 여기서 그쳐 주지 하고 바랄 뿐이었다.

레오파드가 연기를 뿜으며 말했다.

“쿠퍼헤드도 말하더라고. 남자취미가 없는 자기가 봐도 혹했다고. 난 말이야, 좀 놀랐어. 레드폭스가 스타소프에게 하도 콧대 높게 굴어서 말이지. 그 자식, 엉덩이 가볍기로 스노우 화이트에서 명성을 떨쳤잖아.”

“명성?”

“아메리칸 풋볼 시합 잊었어? 눈썰미 있는 놈들은 그 음산한 코트가 바에 들어오는 즉시 골대로 뛰어가느라 바빴다고. 스노우 화이트에서 떠도는 레드폭스 별명이 ‘선착순’이야. 몰랐냐?”

나는 쓰게 웃었다. 레이의 말대로라면 그 눈썰미 있는 놈들 전부가 변태였다. 그러고 보니 스타소프도 만만찮은 변태였다.

나도 거기에 포함되고.

“후우…….”

레오파드가 연기를 길게 뿜으며 담배를 비벼 껐다.

“하나 물어도 돼?”

“음. 뭔데.”

“어제 스타소프를 날려 버린 거 말야. 그거 단순히 울프삭 경에게 열 받아서만은 아니지?”

침착한 어조였다. 평소라면 흐흐흐, 해야 할 놈이 저러는 건 뭔가를 눈치 챘다는 뜻이었다. 내가 안면근육 단련에 도가 튼 놈이라서 다행이었다.

“우리 본부장님 차 버린 상대가 레드폭스였어?”

더는 참기 힘들었다. 나는 담배를 뽑아 물고 불을 붙였다.

“……역시 그랬군. 귀신같은걸. 철두철미한 비밀주의자인 줄은 익히 알았지만 말이지. 냉정이라면 으뜸이신 본부장님께서 아까는 왜 저랬냐고 쿠퍼헤드가 말하지만 않았으면 나도 그냥 지나칠 뻔했다구.”

레오파드가 낯을 일그러뜨렸다. 어이없음과 기가 막힘으로 범벅이 된 얼굴이었다. “허허. 허허허.” 하며 허탈하게 계속 웃었다. 레이에게 먼저 접근하고 열중한 쪽은 레오파드였다. 그런데 내가 뒤에서 수작을 지었다니 기가 막힐 만했다.

레오파드가 담배를 한 개비 더 뽑아 물었다.

“어쩐지 이상했지. 그때 눈치를 챘어야 했어.”

“그때라니.”

년, 년 할 때 화냈던 일을 말하는 건가.

“레드폭스하고 두 번째로 잤을 때.”

“그게 뭐?”

예상을 어긋난 말에 나는 레오파드를 흘끗 곁눈질했다.

“내가 그때 피스트 퍽 하고 싶다고 했잖아.”

“음. 그거. 그런데.”

“이 자식이……. 하여튼 그때 네가 안 된다고 했었어.”

“체구가 너무 작잖아.”

“언젠 큰놈 작은놈 가려서 주먹 박으셨냐, 본부장님?”

“…….”

뭔가 가슴이 갑갑했다. 레오파드는 더 캐물어보고 싶지만 참는 기색이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담배가 필터까지 타고 있었다. 담배를 급히 비벼 끈 후 한 개비를 더 꺼내 물었다.

어쨌든 끝난 사이다.

룸미러를 곁눈질했다. 나와 레오파드는 길거리 잡배로 변장하고 있었다. 덥수룩한 수염에 옷도 남루했다. 번호판을 위장한 자동차는 왕국에서 가장 흔한 종류였다. 업무가 끝나면 드라실 강 샐릭스 대교에 버릴 작정이었다.

시나리오는 간단했다. 일단 목격자가 반드시 있어야 했다. 원래는 스타소프를 미행하면서 적당한 장소를 물색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놈이 마침 라비린스로 들어가기에 고민 않고 라비린스 후문 앞 골목으로 정해 버렸다. 후문을 지키는 보디가드를 비롯해 행인들이 많은 장소였다.

우선 길거리 깡패처럼 놈에게 돈을 갈취하려 접근한다. 스타소프는 훈련받은 무신이다. 저항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둘 중 한 명이 스타소프에게 두들겨 맞아 준다. 그러자 당황한 다른 놈이 주머니칼을 꺼내들어 스타소프를 위협한다. 스타소프는 호락호락 물러서지 않고 더욱 거세게 달려든다. 세 사람이 얽혀 다투는 도중 우연히(?) 주머니칼이 스타소프의 복부를 벤다. 그게 하필(!) 깊은 자상을 남겨 스타소프의 창자가 길바닥으로 주르르 쏟아진다. 당황한 길거리 깡패들은 후다닥 도망가 버린다…….

이것이 오늘의 상영작이었다. 일명, 《떨어진 꽃 한 송이》.

두들겨 맞는 쪽은 레오파드, 나는 주머니칼을 맡기로 했다. 레오파드는 맷집이 좋았다. 나는 총을 비롯한 각종 무기에 일가견이 있었다. 우발을 위장하여 스타소프의 창자를 뽑아 주려면 어지간한 솜씨 아니면 불가능했다. 괜스레 끼어들 협객 따위는 걱정하지 않았다. 이곳은 42번가였다.

괜찮았다. 이왕 제거하리라 마음먹은 것,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까불 때 종아리를 때려 줘야 했다. 코흘리개 때 버릇을 고치지 않으면 어른이 되어서도 정신을 못 차리기 마련이다. 의심? 해라. 당연히, 반드시 해야 했다. 의심은 인간의 마음에 조심성을 틔워 주는 가장 효과적인 씨앗이었다.

그리고 릴리즈는 조심성을 기를 필요가 있었다. 릴리즈 입장에서는 자기네가 시건방을 떤 하루 만에 이쪽이 강수를 두리라고는 예상 못할 터. 얼이 빠진 그들의 면상을 파티 수행 때 느긋이 즐겨 줄 작정이었다.

감히 누굴 깔보고…….

매음굴 술집을 나서다가 길거리 깡패에게 최후를 맞이한 귀족나리라. 이거 제법 멋진 헤드라인이 뽑히겠는걸. 하하하.

자동차 좌석에 몸을 눕히다시피 기댔다. 싸구려 자동차라 좀 불편했다.

“어이, 본부장님. 뭔가 낌새가 이상해.”

레오파드가 무심히 말했다.

“음. 뭐가.”

“웬 삐뽀삐뽀가 후문 앞으로 달려가는데.”

나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레오파드의 말대로였다. 라비린스의 직원들이 우왕좌왕하는 후문 앞에 구급차가 불빛을 빛내며 멎었다. 기묘한 예감이 몰려왔다. 나는 긴장감을 느끼며 후문 안쪽을 주시했다. 복도에서 누군가가 부축되어 나왔다. 가슴팍을 움켜쥔 채 입에서 거품을 뿜고 있었다. 스타소프였다.

나는 차갑게 웃었다.

령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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