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L. (35/101)

2 ─L.

머리가 아팠다. 송곳이 관자놀이를 깊이 찌르는 듯했다. 밤새도록 병마에 시달렸다. 몇 주 잠잠하더니 또다시 발작이었다. 소니아가 내게 던지는 말을 잠깐씩 놓칠 정도였다. 왜 그러냐고 자꾸 묻기에 나는 무심코 병마를 털어놓았다.

소니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정말이에요? 그런 병이 있다구요?”

“간단해요. 일종의 수수께끼죠. 이를테면 스핑크스가 낸 문제를 떠올리면 돼요. 아침에는 네 발, 점심에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인 것은?”

“사람.”

“그것과 비슷한 문제예요.”

“흐음…… 정신병?”

“비슷해요.”

“어우. 도대체 뭘까?”

소니아가 담배를 피워 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기를 내뿜으며 천천히 말했다.

“자기야…….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그냥 깨끗이 웃고 치웠을 거예요. 그런데 자기가 하는 말은 왠지 무섭네요. 얼굴은 백짓장 같고 동공도 텅 비어 있구요. 어릴 적부터 그랬단 말이에요, 그럼?”

“지금은 그럭저럭 익숙해요.”

“전혀 익숙한 모습이 아닌데?”

나는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객들이 몰려오는 바람에 대화가 끊겼다. 또 소크라테스 일파였다. 모니터로 빈 룸을 체크하는 동안 스타소프가 이쪽으로 집요하게 시선을 던졌다.

“저치가 자기에게 홀랑 가 버렸나 봐요.”

소크라테스들이 룸으로 들어가자마자 소니아가 한마디 했다.

“아무래도 앞문으로 바꿔 달라고 부탁해야겠네요.”

“앞문 카운터는 훨씬 고달플걸요. 그나마 귀족들이라서 난릴 안 치는 거예요. 자기, 앞문으로 옮기면 큰일 나요. 남자들이 자길 고이 내버려둘 리 없어요.”

소니아의 진지한 말투에 내가 되레 머쓱했다.

“그건 비약 같습니다만.”

“자기 지나치게 순진하네요. 내 말 잘 들어요. 그래도 이 업소니까 자기가 무사한 거예요. 여긴 워낙 잘나가는 곳이라서 아가씨들이 많거든요. 그래서 일반직원한테 손대는 손님들은 업소 측에서 말려 주고요. 곳간에서 인심난다고 나름대론 여유를 부리는 거죠. 자기가 혹여 변변찮은 가게 카운터를 봤다면 벌써 포주한테 해코지 당했을걸요.”

“해코지라뇨?”

“강제로 감금해서 마약에 중독시켜요. 그러곤 마약을 빌미로 매춘을 시키죠. 이 바닥에선 흔한 수법이에요. 그런 식으로 이쪽 길로 들어온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요?”

“그렇군요…….”

소니아가 깔깔 웃었다.

“또 겁먹었군요. 하지만 이건 겁먹어야 해요. 농담이 아니라 진짜 진지한 충고거든요. 자기, 스물일곱이랬죠? 그 나이까지 42번가에서 살았으면서 어찌 그리 순진할까 모르겠네요.”

“집과 헌책방만 들락날락하다 보니까.”

나는 씁쓰레 대답했다. 메사라와의 첫날밤이 뇌리에 되살아났다. 남자들끼리 섹스니까 기껏 더듬고 끝나겠지…… 하는 막연한 짐작으로 허락하지 않았던가. 내 입과 항문이 그런 용도로 쓰일 줄은 조금도 상상 못했다. 순진한 게 아니라 바보였다.

어딘지 즐거운 기색으로 소니아가 담배를 빨며 말했다.

“하긴, 엘리 씨도 그랬어요. 사람과 등지고 사는 자기한테 남자가 생겨서 굉장히 놀랐다구요. 남자 쪽이 자기에게 엄청 열중하는 기색이었다나? 그런데 정말 왜 헤어졌어요? 변태여서 그랬어요?”

“엄청 열중하는 기색이라…….”

그랬나.

“그런 것도 있었고 저도 문제였죠 뭐. 사실은 제대로 시작하지도 못하고 그냥 이상하게 끝나 버렸어요. 그나저나 엘리 씨 눈으로 본 남자의 모습이 흥미롭네요. 내가 생각한 것과는 다른 느낌이라.”

“흐음.”

소니아가 담배연기를 나른하게 뿜으며 허공을 응시했다.

“배심원 제도가 왜 있겠어요.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바가 제각기 다르니까 그렇겠죠. 자기가 남자를 어떻게 봤는지야 잘 모르겠지만 엘리 씨 눈에는 그렇게 보였나 보죠. 내가 막상 목격했다면 또 다를지도 몰라요. 남자가 마음에 들면 내가 낚아챌 궁리에 몰두했을지도. 저는 바람둥이거든요.”

“이런. 오윈 씨가 섭섭하겠는데요.”

소니아가 어머, 하면서 손을 휘저었다. 갑자기 복도 한쪽에서 “야, 거기.” 하는 소리가 났다. 스타소프였다.

옆에서 웨이터가 오가고 있었다. 굳이 내가 손님 시중을 들 필요가 없었다. 그냥 못 들은 척했다.

“이게…… 말이 안 들려? 거기 말야, 거기. 긴 금발. 이쪽으로 와 봐. 안 들려? 당장 안 일어 서!”

웨이터가 옆에서 “손님, 저분은 일반직원이십니다.” 하며 뜯어말려도 막무가내였다. 하필 오윈 씨는 자리를 비운 참이었다. 웨이터가 잠깐만 상대하라고 눈짓을 보냈다.

나는 할 수 없이 일어섰다.

“무슨 일이신지요.”

“흐흥.”

스타소프가 나를 아래위로 뜯어보았다.

“손님. 저는 카운터 일을 봐야 합니다. 입장객 안내도 해야 하고요. 별다른 용무가 없으면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용무 있으니까 부른 거 아냐.”

“뭡니까.”

스타소프가 지갑에서 명함을 뽑아 이쪽으로 건넸다. 황당했다.

“거기 내 휴대전화 번호가 있으니까, 오늘밤 일 끝나면 연락해. 바로 차 몰고 달려가지.”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돌려드리겠습니다.”

스타소프의 재킷 윗주머니에 명함을 꽂아 주려 하자 그가 내 손목을 움켜쥐었다.

“뭔 말인지 몰라? 이게…… 어디서. 까불지 말고 받아 둬. 어딜 기어오르려고, 건방진 년.”

그러고는 몸을 휙 돌려 룸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잠깐 우두커니 있었다. 황망할 따름이었다. 건방진…… 뭐? 혹시 성별을 착각했나?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명백한 멸시와 조롱이었다.

갑자기 뒤통수가 엄청나게 아팠다. 모닥불 연기가 밀려든 양 머릿속이 탁했다. 고문의 시간이 가까워 오는 징조일까.

“자기 어떻게 하려구요? 연락할 거예요?”

소니아가 연신 질문을 던졌다. 나는 명함을 휴지통으로 내던져 버렸다.

“기다리든지 말든지. 마음에 들면 소니아가 가져요.”

소니아가 폭소를 터뜨렸다. 엄청난 웃음이었다.

돌이킬수록 건방진 년 운운한 스타소프가 괘씸했다. 마넨 경과 통화하는 도중 스타소프에 관해서 슬쩍 물어보았다.

“자네도 알다시피 스타소프 가문은 지방 마피아들과 연계하고 있지 않은가. 그 덕에 릴리즈에서 제일 손꼽히는 인물이라네. 울프삭까지 제법 눈여겨보는 눈치더군. 흥, 무늬만 귀족인 깡패들끼리 장단이 잘 맞는 셈이지. 그런데 갑자기 스타소프는 왜 묻는가.”

“그놈이라면 혹여 스네이크와 관련이 있을까 싶어서요.”

“왜? 관련 있으면 그놈도 목을 따 버리려구?”

“필요하다면 해야지요.”

“허허허. 이번에 꼭 스타소프와 악수해서 자네 의견을 들어 봐야겠구먼.”

마넨 경이 유쾌하게 웃었다.

“그나저나 퇴원이 나흘 남았군요. 몸은 괜찮으십니까.”

“차도는 없지만 슬슬 일어서야지. 병원에서도 편하게 쉬지 못했다네. 입원한 상태에서 업무도 보고 사람들까지 만나고 하느라.”

“그런데 말입니다.”

“응?”

“왜 제 인적사항을 요즘 다시 추적하시는지요.”

내 돌연한 질문에 마넨 경이 침묵했다.

“경의 의도는 이해하겠습니다. 하지만 보답은 필요 없다고 제가 처음 경을 만났을 때 말했을 텐데요. 그리고 제 병은 돈으로 치료할 수 있는 병이 아닙니다.”

“……미안하네.”

“그럼 왕실 파티가 끝나면 연락 주십시오.”

휴대전화를 창턱에 놓아두고 드러누웠다.

왜? 관련 있으면 그놈도 목을 따 버리려구?

마넨 경의 말이 되살아났다. 물론 필요하다면 할 것이다. 필요하지 않아도 내가 조르면 마넨 경은 사람을 풀어 스타소프를 처치해 줄 터였다.

스타소프……. 귀족답지 않게 험상궂기 짝이 없는 용모였다. 게다가 그 눈빛이며 잡배 뺨치는 행동거지라니.

물론 적당한 선에서 그의 처리를 결정할 생각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마넨 경의 뒤에서라면 어떤 짓도 서슴지 않는 자신이 역겨웠다.

요즘 신경이 부쩍 곤두섰다. 모두 자작나무 탓이었다. 나는 쉽사리 흥분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내가 꼽는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가 냉정함이었다. 암살은 막판에나 뽑을 카드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던 내가 사소한 일로 암살을 고려한다는 건, 분명 어딘가 비틀려 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정신 차려라, 레이 아리사. 즐거운 생각이나 하라고.

나는 업소에서 받은 돈봉투를 꺼내 천천히 흔들었다.

무슨 일이라서 그렇게 신신당부했을까.

어젯밤 일을 끝나고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는데, 매니저가 나를 따로 불러냈다. 내가 일하는 업소, 라비린스에는 일반직원 전문 매니저를 비롯해 총 일곱 명의 매니저가 상주했다. 나를 불러낸 매니저는 영업 매니저 메슨 씨였다.

「무슨 일이신지요.」

「할 말이 있네. 따라 오게.」

메슨 씨를 따라 지하 룸으로 들어갔다. 매니저들과 라비린스 업주 베라 부인이 앉아 있었다. 그 외 몇몇 업소 직원들도 서 있었다. 심각한 회의를 하던 중이었는지 재떨이에 꽁초가 수북했다.

베라 부인이 담배를 비벼 껐다. 한 개비를 또 꺼내 물자 메슨 씨가 불을 붙여 주었다. 베라 부인이 담배를 몇 모금 빤 후 입을 열었다.

「중요한 일 때문에 여기까지 당신들을 불렀어요. 내일은 우리 가게 휴업일이라는 정도는 다들 알고 있겠죠?」

「네, 부인.」

「하지만 지금 모인 사람들은 내일도 출근해야 해요. 이 자리에 내일 접대를 맡을 아가씨들은 부르지 않았지만, 언질은 이미 해 두었어요. 잘 들어요. 내일 오실 손님…… ‘그분’이라고 하죠. 솔직히 말하면 저는 그분을 썩 받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어쩔 수 없죠.」

베라 부인은 찬찬히 직원들을 훑어보며 뜸을 들였다.

「지금부터 설명하겠어요. 원래는 여길 자주 드나드는 귀족들이 그분을 여기서 모시려고 했어요. 접대비도 귀족들이 오늘 선불하기로 했는데, 방금 갑자기 일방적으로 통보하더군요. 그분이 자신들에게 유흥을 베푸는 것으로 계획을 바꿨다구요. 그러니 내일, 카운터에 사람을 앉혀 놓으라고 했어요. 그분이 나가는 길에 접대비를 지불한다고요. 우리의 서비스에 따라 그분이 지불할 금액이 결정될 테니까 알아서 잘 대접하라고 했어요.」

「완전히 협박이지.」

메슨 씨가 소태 씹은 표정으로 말했다. 매니저들 모두 하나같이 분위기가 안 좋았다. 베라 부인을 비롯한 매니저들 모두 중국계였다. 왕국 사람들이 ‘노란 얼굴의 유대인’이라고 부를 만큼 중국계는 금전문제에 철저했다.

베라 부인이 커피 잔을 들며 말했다.

「우리 업소의 서비스는 지불액에 따라 세 단계로 나누어 놓았죠. 귀족이라 해서 따로 잘 봐주진 않았어요. 그런데 상황이 곤란해지고 말았어요.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지요. 일단 최고 레벨로 준비하기로 결정했어요. 그럼 각 팀대로 이야기를 나눠 봐요.」

메슨 씨가 나를 불렀다.

「이야기 잘 들었지?」

「예.」

「그쪽이 자기네 보디가드들을 데리고 갈 테니 내일 우리 업소 보디가드들은 전부 치우라고 요구했어. 되도록이면 신분 노출을 최소화하고 싶다고 하더군. 그러니 자네는 내일 손님들 앞에서 표정관리에 주의해야 하네. 누군지 알아보는 표정을 짓는다거나 하면 곤란해. 포커페이스를 유지해야 하네.」

「알겠습니다.」

「후문에는 자네와 담당 웨이터 네 사람, 그리고 접대부 열일곱 명이 대기할 걸세. 자네는 카운터에서 접대비만 받으면 끝이야. 아마도 그분은 수표로 계산하지 않을까 싶네. 손님들이 떠나는 즉시 자네는 여기로 내려와서 베라 부인께 접대비를 건네게. 그분이 지불한 금액이 우리가 제공한 서비스에서 한 푼이라도 모자라면 그분을 데려온 귀족 새끼들한테서라도 받아내야지. 감히 우릴 어찌 보고……. 알아들었는가.」

「예.」

「그리고 이것 받아 두게. 주급의 네 배를 넣었네. 입막음조로 귀족 놈들이 따로 지불한 돈일세.」

「내일 보고 들은 것은 어디 가서도 떠들지 않겠습니다.」

「원래는 내일 후문 카운터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려 했네. 한데 엘리 부인이 자네는 입이 바위처럼 무겁다며 걱정 말고 카운터를 맡기라고 적극 추천하더군. 바꿔 말해, 자네가 입을 경솔하게 놀리면 엘리 부인이 난처해진다는 뜻일세.」

「걱정 마십시오.」

회의가 끝나자 베라 부인이 일어섰다.

「지금이면 일반직원들도 모두 퇴근했을 테니 후문으로 가죠. 내일 손님을 맞이할 연습을 잠깐 해 봅시다.」

후문에서 직원들과 배석 및 인사차례 등등을 정하고 연습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어느 고관대작이 오기에 저렇게 난리법석인지 궁금했다.

어쨌거나 나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엘리 씨에게 빚을 갚고도 몇 주 그럭저럭 꾸려나갈 돈이 갑자기 굴러들어왔다. 나는 돈 봉투를 창턱에 올려놓고 시트를 끌어당겼다.

‘남자 쪽이 자기에게 엄청 열중하는 기색이었다나?’

소니아의 말이 되살아났다.

열중.

그 한마디가 왜 이토록 달콤하게 울리는지 알 수 없었다. 이제는 먼 과거인데도 말이다. 처음, 헌책방에서 돌연히 방울 소리가 울렸을 때는 그저 귀찮기만 했는데. 그때는 고개도 들지 않고 돈이나 들고 나가라 말했는데. 성격 한번 이상한 변태네,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는데.

돌이킬수록 우스웠다. 알 수 없는 어딘가가 욱죄여 왔다.

끝난 일이다. 쓰라리지만 그것이 진실이다. 막을 내린 건 나 자신이고, 메사라도 더는 찾아오지 않는다. 남은 것은 스러져가는 시간과 침울한 멍에뿐이다.

괜찮을 것이다. 볼 사람도 없으니까 조금은 울어도 되겠지.

밤 2시 20분이었다. 예정시간을 훌쩍 지났건만 밖은 잠잠하기만 했다. 느슨한 침묵이 복도에 흘렀다.

나는 카운터 바 앞에 서 있었다. 30분 넘게 이러고 있자니 좀이 쑤셨다. 이게 무슨 꼴인가 싶었다. 접대부들은 아까부터 간간이 어깨를 움직이거나 짜증을 내고 있었다.

카운터에서 내선전화가 울렸다. 요리부였다.

“아직도 도착 안 했나? 이것 참 곤란한데.”

“도착하면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지체 높은 양반이기에…….

나는 혀를 차며 전화를 끊었다.

동원된 접대부들은 속칭 ‘로즈’들로서, 업소에서 최고로 비싼 아가씨들이었다. 별명은 유치하지만 용모와 몸매는 일류모델을 뺨쳤다. 하릴없이 복도에서 객들이나 기다릴 급이 아니었다. 심지어 매니저는 나한테까지 옷매무새 단정히 하라며 성화를 부렸다. 기껏 카운터지기 옷차림까지 신경 쓰다니 오늘의 손님께서 대단한 나리임은 분명해 보였다.

나는 다시 한번 후문을 쳐다보았다. 활짝 열린 유리문 밖에는 깊고 차가운 어둠만이 깔려 있었다.

문득 이상하다고 느꼈다. 지나치게 조용했다. 후문 앞은 골목이었다. 대로변과 이어지는 골목이라 행인들이 자주 오갔고, 미로처럼 갈라진 샛길에서는 취객의 고성방가가 흘러나오곤 했다. 평소에는 시끄럽기 일쑤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행인은 물론이고 사소한 기척마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기분이 나빠졌다. 나는 귀를 기울이며 어둠을 응시했다. 정적 속에서 점차 희미한 기척이 일었다. 호루라기 음과 워커 소리였다. 순간 뚜렷한 직감이 뇌리를 스쳤다.

울프삭인가.

전신이 싸늘하게 식었다. 가이거 대원들이 이쪽으로 접근하는 행인과 취객을 족족 차단하는 것이 확실했다. 반경 일 킬로미터를 깡그리 막는 듯했다.

나는 요리부로 전화를 돌렸다.

“곧 도착하겠습니다. 준비하십시오.”

내 말에 로즈들이 재빨리 자세를 바로잡았다. 팽팽한 적막이 실내를 감돌았다. 보슬비가 내리는 밤이었다. 30분 넘게 열어 놓은 후문에서 차디찬 습기가 끊임없이 밀려왔다. 그러나 나는 추위도 느끼지 못한 채 가만히 있었다.

이제는 가이거 대원들의 고함이 여기까지 뚜렷하게 들렸다. 멀리 떨어진 대로변에서 우르르 몰려다니는 가이거 대원들이 작게 보였다. 골목으로 들어서는 행인들을 다짜고짜 쫓아내고 있었다. 얼추 백 명은 동원한 것 같았다.

심지어 골목 샛길을 가로막는 지프까지 보였다. 대로변으로 이어지는 입구마저 지프로 막아 버리자 골목길은 검은 바닷물이 들어찬 양 컴컴해졌다.

하필 울프삭이라니. 이 웬 얄궂은 만남이란 말인가.

나는 곧 웃고 말았다.

하여간에 멍청한 종자였다. 저 꼴이면 어린아이도 울프삭이 42번가에 납셨거니 알아차리고도 남았다. 어느 귀족들이 울프삭을 이곳까지 모셨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이 입막음조로 뿌려 댄 돈은 허공으로 날아간 셈이었다.

나 같은 가난뱅이에게야 소중한 공돈이긴 하다만.

비웃음을 머금다가 움찔했다. 어둠이 깔린 골목 깊숙이에서 홀연 그림자 같은 윤곽이 나타났다. 포석을 밟는 워커 소리가 뚜벅뚜벅 잇따랐다. 밤안개를 헤치며 다가올수록 점차 분명한 형체를 갖추었다. 장신의 사내들이었다.

다음 순간 오싹해졌다. 가이거 부장들이었다. 하나같이 은제가면을 쓴 사내들이 섬뜩한 차림새로 어둠속에서 저벅저벅 걸어오는 광경이 가히 압권이었다. 다들 굉장한 장신에 위압적인 체격이었다. 무시무시했다. 중세시대 처형지에서 검은 두건을 쓴 사형집행인들이 다가설 때 죄수가 맛보았을 공포감을 똑똑히 이해하는 순간이었다.

복도에 대기하던 접대부들과 종업원들도 모두 압도당한 듯 숨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나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라는 메슨 씨의 말을 되새기며 허리를 바로 폈다.

몇 명일까.

울프삭에게서 채집해낸 부장들의 호칭은 다섯이었다. 본부장 스네이크 휘하 레오파드, 쿠퍼헤드, 벌쳐, 재규어. 울프삭이 특히 경계하는 부장들이었다.

어둠속에서 사신들이 모습을 완전히 드러냈다. 총 열한 명. 저기서 누가 스네이크일까. 저자일까.

선두의 남자가 도드라졌다. 유일하게 채찍을 쥐고 있었다.

그들이 후문 안쪽으로 들어섰다. 채찍을 쥔 남자가 우뚝 멈춰 섰다. 그가 이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렸다. 나는 흐트러진 모습이 아니길 바라며 카운터 밖으로 나섰다.

평소에는 룸 번호만 알려주면 그만이었지만 오늘은 룸까지 안내해야 했다.

“따라오십시오.”

한마디만 던지고 룸으로 향했다. 뒤에서 바짝 따라오는 워커 소리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지정된 룸은 후문에서 이어지는 복도 안쪽에 있었다. 카운터에서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룸 앞에 도착했을 때 흥건한 땀으로 옷자락이 등에 착 달라붙어 버렸다.

나는 문을 열었다. 그러자 채찍을 쥔 남자가 손가락을 딱, 쳤다. 부장들이 좌우로 복도에 늘어섰다. 그 움직임이 기계처럼 일사불란했다.

나는 다시 후문으로 돌아갔다. 복도에 미동도 않고 늘어선 사신들 사이를 걷노라니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내 뒤로 채찍을 쥔 남자가 따라왔다.

저자가 스네이크로구나…….

카운터로 되돌아가서 섰다. 비가 내리는 후문 밖에서 왁자한 웃음이 터졌다. 우산을 쓴 귀족들에게 둘러싸인 울프삭이 보였다. 나는 무심결에도 미간을 찡그렸다.

무리 중에 하필 스타소프가 있었다. 스타소프를 엿 먹인 때가 어제였는데 오늘 또 마주치다니 기분이 찝찝했다.

울프삭을 둘러싼 귀족들은 하나같이 젊었다.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릴리즈였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릴리즈는 울프삭과 나란히 술집행차를 할 만큼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 저들은 울프삭에게 손바닥을 비벼 대느라 분주한 모습이었다.

이건 웬일일까.

“어서 오십시오.”

라비린스 직원들이 일제히 인사했다. 스네이크는 울프삭을 향해 가볍게 고개만 까딱거렸다. 그러고는 몸을 휙 돌려 선두에서 울프삭과 릴리즈를 룸까지 이끌고 갔다. 릴리즈가 벌써부터 로즈들을 끌어안으며 소란을 피웠다. 울프삭은 “오랜만에 평민 스타일로 놀려니 이거 떨리는걸.” 하며 흐흐흐, 웃었다. 육십을 넘은 양반이 참으로 주책이었다.

스네이크가 문을 닫고 룸 앞에 섰다. 안에서 요란한 소리가 터졌다.

나는 비로소 풀려오는 긴장을 느끼며 의자에 앉았다. 복도에 늘어선 부장들은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흡사 석상 같았다. 가까이 다가오기만 해도 귀족들이 까무러친다던 마넨 경의 말이 이해가 갔다.

이런 자들과 몇 시간 동안 같이 있어야 한단 말이지.

나는 물을 마셨다. 물잔을 든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불현듯 차갑게 밀려오는 바람에 정신을 차렸다.

바짝 긴장한 나머지 후문도 안 닫고 있었다. 급히 일어서서 문을 닫고 카운터로 돌아왔다. 부장들 쪽에는 눈길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며 의자에 앉았다.

앉아 있는 내가 유리문에 비쳤다. 쓰게 웃고 말았다.

이게 무슨 꼴이냐.

매니저가 머리카락으로 바닥을 쓸 참이냐고 호통을 치는 통에 머리카락을 천으로 묶은 상태였다. 거기다가 옷도 베라 부인이 오늘 하루 특별히 빌려준 고급스런 차이니즈 의상이었다. 타인의 눈에는 제법 쓸 만한 밤의 꽃으로 보일 꼬락서니였다.

한심했다. 사내자식이 이런 꼴로 술집에 앉아서 참 잘하는 짓이었다. 마라타가 살아서 지금 내 모습을 보았다면 병석에 드러누웠을 것이다.

그것도 하필 울프삭을 위한 단장이었다니. 내가 현재 노리고 있는 가이거 부장들과 몇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한다니.

기분이 묘했다. 오늘 말고도 저들을 길거리에서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때도 겁이 났는데 가까이서 마주치니 보통 분위기가 아니었다. 차림새를 떠나 저들 자체가 섬뜩했다. 나는 저들이 얼마나 무서운 짓을 저질렀는지를 잘 알았다. 독살을 선호하는 마넨 경과 달리 저들은 암살수법도 잔혹하기 짝이 없었다. 경찰도 가이거는 건드리지 않았다. 건드리기는커녕 친밀한 관계였다. 경찰은 연일 길거리에서 난동을 부리는 시위대를 매우 싫어했다. 가이거가 문신귀족들을 납치해 고문하고 살해하는 행위에도 방관으로 일관했다.

눈앞의 저들은 그 가이거의 리더집단이었다. 처음으로 실감이 났다. 나는 실로 무서운 사내들에게 대적하고 있는 것이었다.

만약 저들에게 내가 꼬리를 밟혀서 잡혀갔더라면……?

신께서는 레이 아리사에게 겁 많은 성격을 부여하셨다. 머리에 드는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당장 전부 때려치워 버릴까.

어차피 시한부 인생이라고 털어놓았으니.

오페라가 울려 퍼졌다. 라비린스의 복도에는 언제나 음악이 낮게 깔렸다. 대개 오페라나 교향곡 따위였다. 나는 음악을 흘려들으며 자동적으로 상념에 빠졌다.

그나저나 저들은 이런 술자리까지 따라다닌단 말인가.

아귀가 맞지 않았다. 귀족들의 파티 수행은 그렇다고 쳐도, 하찮은 술자리까지 부장들이 호위하다니.

울프삭이 저들을 경멸하고 무시한다는 사실은 익히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저들은 울프삭의 실질적인 두뇌다. 이런 대접에 모욕감을 품지는 않을까.

늘어서 있는 부장들이 유리문에 비쳤다. 설핏한 움직임도 없었다. 룸 앞을 지키는 스네이크부터 카운터 좌측 끝까지 전원 우뚝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울프삭이 지켜보지도 않건만 내리 침묵이었다. 잡담은커녕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겉모습만 보자면 충성심으로 단단히 무장한 부하들이었다.

아리아가 메아리를 울렸다.

「영원토록 버림받고, 영원토록 빈궁하고, 영원토록 파괴될 것이다…….」

딱 내 이야기네.

나는 피식 웃었다. 시간이 흘렀다. 벌써 네 시 가까웠다. 룸의 소란이 카운터까지 들렸다. 종업원들이 부지런히 룸을 오가며 술을 날랐다. 눈앞이 조금씩 가물가물했다.

어느새 의자에 등을 기대어 고개를 늘어뜨린 채 졸고 있었다. 누군가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부드럽고 다정한 손짓이었다. 이렇게 머리카락을 훑어 주는 이는 한 사람뿐이었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황급히 눈을 떴다.

“흐엇…….”

무의식중에도 바람 빠진 신음이 샜다. 스타소프였다. 흡사 포박된 양 내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첫눈에도 스타소프는 술에 푹 절어 있었다.

“오늘따라 끝내주게 꾸몄는걸. 그래도 몸매가 더 드러나는 옷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워. 응?”

스타소프가 히죽거렸다. 나는 급히 잔을 들어 물을 마셨다. 경련하는 손가락 사이로 물이 줄줄 샜다.

저 작자가.

“내가 어젯밤 몇 시간을 기다린 줄 알기나 해?”

술김에도 부장들을 의식했는지 스타소프가 음성을 낮춰 말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룸에서 나오던 종업원이 이 광경에 흠칫했다.

“묻고 있잖아. 왜 대답이 없어? 몇 시간 기다린 줄 알기나 하냐니깐?”

취기로 완연한 눈초리가 붉었다. 나는 진정하려 애썼다.

“모릅니다.”

스타소프가 하하, 웃었다. 내 대답에 잔뜩 열 받은 기색이었다. 종업원이 이쪽으로 주춤주춤 다가섰다.

“저기, 손님. 이분은 접대부가 아니라 일반 직원…….”

종업원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스타소프가 몸을 홱 돌렸다. 빡 소리가 터졌다. 술에 절었는데도 동작이 아주 날렵했다.

“술이나 날라, 이 천한 종자야!”

찔끔거리던 종업원이 허둥지둥 도망갔다. 스타소프가 낄낄거리며 카운터 바에 팔을 괴고 상체를 바짝 들이댔다. 나는 의자를 뒤로 뺐다. 이쪽을 집요하게 훑는 눈초리가 끔찍했다. 콧수염 아래로 끊임없이 뿜어 나오는 술 냄새가 구역질났다.

스타소프가 이빨을 긁어 대듯 내뱉었다.

“내가 준 명함 어쨌어.”

“없습니다.”

“……없어?”

“버렸습니다.”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평소라면 침묵을 지켰을 것이다. 그러나 사소한 치근거림에도 암살을 고려하리만치 나는 요즘 부쩍 예민해진 상태였다. 자제가 되지 않았다.

스타소프의 눈가가 바르르 떨렸다.

“이 천한 게 감히 나를 무시해?”

“천한 것에게 달라붙는 귀족의 모습도 보기 안 좋습니다. 룸으로 돌아가십시오.”

짝, 하고 뺨에서 소리가 터졌다. 잠깐 뒤에야 나는 정신을 차렸다.

“일어나, 이년. 당장 일어나.”

“놓으…….”

의자가 바닥으로 엎어졌다. 스타소프가 막무가내로 나를 카운터 바에서 끌어냈다. 찰나 머리가 지끈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물잔을 움켜쥐었다. 곧바로 스타소프의 면상으로 물을 부어 버렸다.

“이게!”

스타소프가 술이 확 깬 얼굴로 눈을 크게 떴다. 갑자기 내 머리카락을 꽉 움켜쥐더니 질질 끌고 갔다. 머리를 묶은 천이 떨어졌다. 순식간에 머리카락이 출렁거리며 흩어졌다.

소란에도 불구하고 부장들은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다. 어떤 일이 벌어지든 상관하지 않을 생각인 듯했다.

“이게…… 가만히 있지 못해? 갈보 따위가 어딜 날뛰고 있어? 내가 누군지나 알아?”

스타소프가 발버둥치는 나를 뒤에서 꽉 잡고 입까지 틀어막았다.

“섭섭하지 않게 팁 줄 테니까 곱게 따라와. 남자 경험이 처음은 아닐 거 아냐. 감히 누구 앞에서 숫처녀 행셀 해, 이 갈보 년. 얌전히 팬티 벗고 다리나 벌려. 비싸게 쳐 준다니까.”

기운이 엄청났다. 그를 뿌리치려 안간힘썼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스타소프가 얼마 안 가서 멈춰 섰다. 울프삭의 룸에서 조금 떨어진 객실 앞이었다.

“야, 야. 문 열어.”

문 앞에 한 부장이 서 있었다.

“문 열라니까? 지금 바쁜 거 안 보여? 귀머거리야? 엉?”

부장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스타소프가 씩씩거렸다. 뒤에서 잡혀 스타소프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부르르 떠는 몸에서 노기가 뚜렷했다.

“천한 것들이란 하나같이…… 에잇.”

스타소프가 내 입에서 손을 떼어내 문손잡이를 잡았다. 틈을 놓치지 않고 팔꿈치로 그의 복부를 후려쳤다.

“윽!”

스타소프가 주춤거렸다. 나는 황급히 뒤돌아 복도를 뛰었다.

“이년이!”

뒤에서 분노 가득한 음성이 바짝 따라 붙었다. 복도 모퉁이를 꺾으면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스타소프가 고래고래 고함쳤다.

“거기! 거기 너! 저년 붙잡지 않으면 재포니카께 좋은 꼴 못 볼 줄 알아!”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모퉁이에 서 있던 부장이 설핏 움직였다. 믿을 수 없었다.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재포니카’라는 단 한마디로 당장 움직이는 저 모습에 공포가 치달았다.

바로 어깨에 압력이 왔다. 삽시간이었다. 부장이 내 어깨를 잡아 확 돌려세웠다. 그러고는 곧장 앞으로 거칠게 떠밀어 버렸다. 하마터면 스타소프에게 안길 뻔했다. 나는 균형을 잃은 채 몇 번 휘청거리다가 간발의 차이로 벗어났다. 스타소프가 벌게진 눈초리로 이쪽을 훑어보며 “오, 이거 재미있는걸?” 하고 키들거렸다. 나는 후문 쪽으로 되돌아 뛰었다.

“거기, 카운터 좌측 놈. 당장 저 갈보 잡아서 내게 진상해. 안 그러면 재포니카께서 제법 화내실 거야. 옷 벗기 싫으면 고이 말 들으라구.”

스타소프가 유쾌하게 외쳤다. 재포니카를 언급하자마자 단박에 바뀐 부장들의 반응에 재미를 들린 듯했다. 곧바로 카운터 좌측의 부장이 후문 앞을 막아섰다. 아주 깨끗한 움직임이었다. 심장이 가슴을 박차고 튀어나올 것 같았다. 나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뒤에서 스타소프가 히죽거리며 천천히 걸어왔다. 좌우로는 사신들이 늘어서 있었다. 조금의 틈도 없었다. 쇠창살이었다.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자, 자. 이제 그만 하자고. 나를 모시는 게 영광인 줄도 모르고, 이년이.”

스타소프가 와락 끌어안을 태세로 다가왔다. 그를 뿌리치고 앞으로 뛰어갔다. 나는 반쯤 이성을 놓친 채 울고 있었다. 모퉁이를 돌려다가 멈칫했다. 어깨를 무섭게 떠밀어 버린 부장이 있었다. 나는 반대편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울프삭의 룸이 있었다. 알고는 있었으나 나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문득 누군가에게 부딪쳤다. 아래로 늘어뜨린 시선에 채찍이 보였다.

스네이크였다.

“야, 야. 거기. 그년 좀 잡고 있어. 이거 참, 갈보 년 팬티 하나 벗기기가 이리 수고로워서야.”

스타소프가 비로소 누그러진 태도로 걸어왔다. 스네이크는 미세한 움직임도 없었다.

“자. 자. 이제 가자고.”

스타소프가 뒤에서 나를 끌어안으며 가슴을 더듬었다. 나는 초점이 잡히지 않는 시선을 위로 향했다. 흔들리는 허공이 서서히 형체를 잡아갔다. 무엇인가가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회색 눈동자였다.

나는 무의식중에 중얼거렸다.

“……도와줘요.”

“이년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스타소프가 코웃음 쳤다.

그때였다. 스네이크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아니, 움직였다. 낌새조차 느끼지 못하리만치 빠른 동작이었다. 단숨에 스타소프의 멱살을 움켜쥐어 공중으로 들어올렸다. 무시무시한 힘이었다. 스타소프가 “이, 이게 무슨.” 하고 얼빠진 음성을 흘렸다. 스네이크가 룸의 문을 확 열어젖혔다.

음악과 웃음소리가 쾅쾅 쏟아져 나왔다. 룸에 있는 사람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모두 알몸이었다. 벌거벗고 주사를 부리던 울프삭 일당이 아연한 낯으로 일시에 동작을 멈췄다.

울프삭이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다가 내려놓았다.

“뭐, 뭐냐?”

스네이크가 스타소프를 룸으로 내동댕이쳤다. 그러고는 문을 꽝 닫아 버렸다. 룸 안쪽에서 짧은 시간 침묵이 이어졌다. 스네이크가 내 팔을 확 움켜쥐고서 카운터로 향해 걸어갔다. 거의 달리다시피 했다. 그가 나를 카운터로 거칠게 떠밀어 넣었다.

나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멀어지는 워커 소리를 깨달은 때는 잠시 뒤였다.

복도 저편에서 기척이 났다. 메슨 씨와 종업원이었다.

“이야기 들었네. 많이 놀랐나. 카운터는 내가 지키지.”

메슨 씨가 종업원에게 눈짓했다. 종업원의 부축을 받아 간신히 일어섰다. 복도 모퉁이를 돌 때 뒤쪽을 곁눈질했다.

스네이크가 룸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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