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의 여왕 2-1 .M─ (34/101)

1 .M─

한 시간 내내 탁자를 두들겼다. 리모컨으로 비디오 볼륨을 낮췄다. 다시 한번 구간을 되감았다.

두 달 전, 왕실주재 칵테일파티 도촬(도둑촬영) 파일을 검토하는 중이었다. 촬영 장소는 2층 홀이었다. 아래에서 흥청거리는 귀족들이 훤히 보였다. 가이거에는 이런 파일이 수두룩했다. 이 파일 역시, 가이거가 포섭한 왕실 시종이 매달 바치는 파일 중의 하나였다.

기분이 묘했다. 사실 오늘 이 파일을 검토한 데 별달리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두 달 전, 이 파일을 부장들끼리 형식적으로 돌려보던 중, 쿠퍼헤드가 “시종이 마넨을 짝사랑하나. 화면에 마넨이 유난히도 잡히는군.” 하고 말했던 기억이 남아서였다.

그런데 볼수록 묘했다. 뚜렷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화면에서 또 마넨이 잡혔다. 매일 신는 구두처럼 익숙한 광경이었다.

마넨은 구석에서 지기들과 와인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울프삭 경을 수행할 때마다 마주친 모습이었다. 오십 번, 백 번씩 돌려본 재방송이나 다름없는 저 광경이 지금은 왜 기묘하게 보이는지 알 수 없었다.

드리아스넨, 푸셔, 레빌즈가 마넨을 둘러싸고 있었다. 언제나 마넨 옆을 지키는 무리였다. 주변에서 코트비카가 왔다 갔다 했다. 온실에서 또 왕비와 한바탕하고 온 듯 옷매무새가 살짝 흐트러져 있었다. 나는 픽픽 웃었다. 탁자를 탁, 탁, 두들기며 마넨의 스케줄 표를 훑어보았다.

할 건 다 하는 능구렁이라니까…….

마넨은 의외로 규칙적인 일상을 보냈다. 파티광 별명에 어울리지 않는 패턴이었다. 관사에서 업무를 보고, 문신귀족들과 면담하고, 저녁에는 귀족들의 파티를 쏘다녔다. 파티만 빼면, 어느 착실한 관리의 하루 기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쉬운 놈들이 나를 찾아와야지, 하며 집무실에 처박혀 아랫사람들을 오라 가라 부려대는 울프삭 경과는 딴판이었다.

담배를 한 개비 뽑아 물고 불을 붙였다. 타들어가는 담배 끝을 내려다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드리아스넨, 푸셔, 레빌즈. 언제나 파티에 동행하는 마넨의 수족들이다. 혹시 저들 중에 령이 섞여 있을까.

나는 무심결에 웃어 버렸다. 말도 안 되지.

그렇다고 가능성에서 제외할 수는 없는 일.

사소한 실마리도 놓치지 않을 작정이었다. 마녀의 코트를 떠올렸다. 그저 42번가에 흔한 극빈자 코트라고만 단정했던 그 옷이, 실은 주술사들끼리 물려 입는 코트 아니던가. 레이의 첫인상에 우리가 떠들어 댔던 말이 예상치 못하게 적중해 버린 셈이다.

마넨의 행적을 하나하나 되짚었다. 참 재미났다. 보면 볼수록 거미줄을 방불케 했다. 특히 카운트다운 직후 2주간의 행적이 흥미로웠다.

카운트다운 첫날에는 회계사들을 만났다. 나흘째에는 방송노조협회결성 74주년 기념파티에 참가했다. 방송계는 울프삭 경이 꽉 잡고 있었다. 마넨이 여기에 참석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그런데도 수족들을 거느리고 나타나서는 연거푸 술만 들이켠 뒤 총총히 사라졌다.

그리고 마넨이 내게 들이민 카드는 울프삭 경의 방송국 비리였다. 일주일간 작성한 기사라며 우쭐거렸다. 우연의 일치일까.

아닐 것이다.

실마리가 잡혔다. 파티였다.

겨울이 긴 왕국에서 귀족들에게는 파티가 일상이었다. 하루 평균 세 건의 파티가 벌어졌다. 마넨은 거의 매일 밤 파티에 참석했다. 나는 비디오 화면으로 재차 시선을 던졌다. 마넨이 연회장을 돌며 사람들과 악수 중이었다.

나는 내선전화 수화기를 들었다.

“근래 두 달, 마넨이 참석한 파티와 참석하지 않은 파티를 정리해서 보고서로 올려. 내일 오후까지.”

“아, 돌겠군. 요즘 하루 걸러 파티 보디가드 노릇을 하려니 지겨워 죽겠어. 오늘밤 어때, 스네이크. 스노우 화이트, 오랜만에 가지 않겠어?”

42번가를 도는 내내 레오파드가 툴툴거렸다.

“음. 혼자 가.”

레이의 집 앞에서 일부러 속도를 내며 짤막히 대꾸했다. 혹여 레오파드의 눈에 레이가 띄는 일은 조금도 달갑지 않았다. 저 성격에 레이를 곱게 내버려둘 리 없었다. 레오파드가 “몸이 찌부둥해, 어이 참.” 하며 어깨 관절을 꺾었다.

“근데 뭐야. 요즘 령 추적에 열을 올린다며.”

“음.”

“령은 없다고 딱 잘라 말하지 않았던가.”

“생각이 바뀌었어.”

레오파드가 흐흠, 하고 코웃음을 흘렸다. 자꾸만 이쪽을 흘끔거리는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다.

이윽고 레오파드가 슬쩍 헛기침하더니 지나가듯 말했다.

“……차였다며?”

빌어먹을 촉새.

앞으로 쿠퍼헤드를 플리커(딱따구리)로 불러 줘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침묵을 지키며 좌회전을 꺾었다.

레오파드가 잇따라 헛기침했다.

“도대체 어느 틈에 연애까지 하고 쏘다녔냐? 이거 진짜 놀랄 놀잔데. 우리 본부장님께서 비밀주의자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지만 말이지. 마넨을 때려잡을 궁리에만 몰두하시는 줄 알았는데 연애까지라. 욕심이 너무 많은 거 아냐? 전에 휴대전화의 헐떡헐떡 상대가 그거였어?”

“그렇다고 해 두지.”

“그래서였군. 요즘 우리 본부장님 온몸에서 뿜어 나오는 허무의 이유가.”

그 표현이 묘하게 웃겼다.

“허무해 보였나.”

“뭐어…….”

레오파드가 의자 등에 편안히 기대었다. 재미있어 죽는 기색이 역력했다. 빌어먹을이었다.

“솔직히 인간적으로 보이긴 해. 말이 났으니 하는 소린데, 우리 본부장님은 평소 지나치게 틈이 없었거든. 면상에는 웃음이 그치지 않아, 손맛은 잔인해, 머리도 핑핑 돌아가. 실제로야 어떨지 모르지만, 부장들끼리는 네가 우리 중에서 제일 나이가 어리리라 짐작하고 있어.”

“음. 제대로 봤어. 난 사실 스물한 살이야.”

부장들은 서로 이름은 물론 나이도 알지 못했다. 가이거의 조직도는 매우 간단했다. 일반대원 위에 대장이 있고 그 위에 부장, 그리고 본부장이 있었다. 일반대원으로 한세월 푹푹 썩으면 대장으로 올라갔다. 자기 팀을 가지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각 팀 실적을 조율하여 울프삭 경이 직접 부장을 선출했다.

내가 맡은 팀은 수도의 24번가에 배속되었다. 어찌나 악명을 떨쳤는지 사실 나는 지금도 24번가는 웬만해선 지나가지 않는다. 레이에게 “내가 때려잡은 부랑자들을 일반병실에서 만나면 큰일…….” 운운했던 말도 실은 반 진담이었다.

어쨌든 나는 울프삭 경의 눈에 단박에 띌 만큼 팀을 꾸려냈다. 얼마나 날뛰었으면 우리 팀에 붙은 별명이 사이드와인더(SideWinder:방울뱀)였겠는가. 워커 소리만 울려도 시위대가 꽁지가 빠져라 도망가는 통에, 길거리 생활 마지막 1년은 심심하기까지 했다. 그때부터 뱀하고는 인연이 깊었지 싶다. 본부장에게만 따르는 스네이크라는 명칭이 붙기 전, 부장 시절의 호칭은 바이퍼―‘독사’였으니까.

나와 레오파드는 승진 동기였다. 함께 나란히 고문부장으로 올라와서 자료부에서 처음 만났다. 그 전까지는 길거리에서 시위대를 때려잡으며 각개전투에 매진해 온 터라 일면식도 없었다. 다른 부장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이후 7년 가까이 얼굴을 맞대다 보니 대충 알게 된 사실이 몇 가지 있었다. 이를테면 쿠퍼헤드는 자신의 학력을 대놓고 떠들어 댔다. 재규어와 벌쳐, 스터젼은 유부남이었다. 나와 레오파드가 게이라는 것도 다들 아는 사실이었다.

나는 레오파드의 나이를 서른하나, 서른둘로 예상했다. 부장들의 추측은 정확했다. 나를 본부장직에 앉히며, 울프삭 경이 “가이거에서 최단기간에, 그것도 제일 젊은 나이로 본부장에 오른 이가 자넬세. 나도 모험을 하는 거니 잘해 보게나.” 했으니까. 뭐,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

내가 최단기간에 본부장으로 승진한 데는 독사 시절에 해치운 몇 건의 암살이 주효했다. 지하실에 처박혀 1년간 고관대작나리들 살가죽을 성심성의껏 발라냈더니 그게 또 울프삭 경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당시 울프삭 경은 정적들의 암살을 주도하던 중이었다. 나는 암살 전문으로 배속되었고, 모든 건을 성공적으로 해치웠다. 스물여섯 살 되던 해의 봄, 울프삭 경이 나를 불렀다. 그러고는 술잔을 권하며 “앞으로 자네는 SNAKE야.”라고 말했던 것이다.

“정말 놀랐어. 좀 신기하기도 하고. 솔직히 머릿속에 연애 같은 걸 넣고 다닐 녀석으로는 안 보였거든. 뭐, 사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감도 잘 안 잡히는 녀석이기도 했지만.”

“그랬나.”

“게다가 차였다니.”

레오파드가 흐흐흐, 웃었다.

“뭐…… 허무를 뿜어내는 본부장님도 나쁘진 않다구. 지금에야 고백하는데, 미소 띤 사디스트 본부장님은 이따금 숨이 막혔거든. 그나저나 오늘도 스노우 화이트는 건너뛸 참인가. 나는 아래가 엄청 꿉꿉한데.”

“음. 혼자서 가.”

레오파드를 스노우 화이트에 내려 주고 떠났다. 비로소 레이의 집으로 향했다. 오늘도 창문에 불이 켜져 있었다. 나는 자동차를 멈추고 창문을 응시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여전히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깊은 겨울밤이었다. 어둠속으로 한없는 적막이 깔렸다. 42번가에는 변함없이 눈의 흔적이 가득했다. 진창 바닥에 가득 찍힌 구두자국이 어지러웠다. 깃털만 떨어뜨리고 날아가 버린 새처럼, 길목에는 어느 행인도 보이지 않았다.

창문이 촛불처럼 일렁거렸다. 며칠 전 레이가 중년여자와 집을 나선 때가 아홉 시경이었다. 시계를 보았다. 8시 45분.

요즘 레이는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42번가다. 42번가에서 할 수 있는 밤일이란 거의 정해져있다시피 했다. 그러나 나는 레이를 잘 알았다.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담배를 뽑아 불을 붙였다. 한 모금 길게 당겨 마셨다. 손가락에 낀 담배로 핸들을 규칙적으로 두들겼다.

령의 추적을 마넨부터 시작하고자 작정한 지금, 42번가 정찰은 사실상 무의미했다. 그런데도 이곳을 찾아온 이유는 뻔했다.

이대로 끝내야 할까.

하나는 분명했다.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그러나 두려웠다. 또다시 거절당할까 봐 무서웠다. 안 보면 잊힌다고 했던가. 그럼 안 봐야 하건만, 저놈의 등불 하나 보겠다고, 머리카락 몇 올 보겠다고 끝끝내 찾아오고 말았다. 갑자기 엉뚱하게도 레오파드의 말이 귓전에 되살아났다.

인간적이라…….

그랬던가. 내 나이 이제 스물아홉. 29년간 타고난 천성에 몸을 맡기고 폭풍처럼 내달려왔다. 그리고 처음이었다. 이런 감정을 품은 것은.

나는 머리를 식히려 애썼다. 처음이다. 처음의 의미는 두 번째, 세 번째도 있다는 뜻이다. 레오파드는 “부장들끼리는 네가 우리 중에서 제일 나이가 어리리라 짐작하고 있어.”라고 했다. 그 말대로 나는 아직 젊었다. 그리고 나는 십 년마다 찾아오는 십 분을 위해 긴 세월을 인내할 수 있는 작자는 절대 못 됐다. 죽을 때까지 아마빛 머리카락에 파묻혀 실컷 뒹굴어야 만족할 놈이었다. 그것이 나였다.

그러나 아마빛은 저 먼 곳으로 도망가 버렸다. 나는 차였고, 우리는 끝났다.

필터 끝까지 닳아 버린 담배를 차창 밖으로 내던졌다. 담배가 포물선을 그리며 눈으로 얼룩진 바닥에 부딪쳤다. 담배 끝에 맺힌 불은 검은 흔적만 남기고 곧 사그라졌다.

저렇게 될 것이다. 감정도 언젠가는 소진될 순간이 올 것이다. 와야 했다.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그러나 실은, 지금 당장이라도 차 문을 박차고 계단을 뛰어올라가고 싶었다. 문을 활짝 열고서 금발의 폭포에 몸을 내맡기고 싶었다. 타오르는 입술을 부딪치고 싶었다. 레이와 엉켜 미친 듯이 구르고 싶었다.

피가 나올 듯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때 창문에서 불이 꺼졌다. 나는 황급히 자동차에 시동을 걸었다. 철문을 비집고 나올 과거의 망령에 혼을 뺏기기 두려웠다. 얼이 빠져 내 젊은 피가 얼어붙게 내버려둘 순 없었다. 망대에 제 발로 걸어간 덴마크의 어느 왕자처럼, 알면서도 파국으로 돌진하는 어리석은 실수 따위는 하지 말아야 했다.

안개 같은 어둠을 헤치고 나아갔다. 사무치는 그리움이 전신을 감쌌다. 어느덧 눈이 떨어졌다. 차창 밖에서 눈보라가 산산이 흩어졌다. 보도에 흉터처럼 긁힌 구두자국이 삽시간에 눈으로 뒤덮였다.

기다리기로 했다. 할 수 있다. 나는 인내심이 강한 남자였다. 저곳을 더는 찾지 않을 것이다. 그의 흔적도 되살리지 않겠다. 차츰차츰 지우기로 결심했다. 핸들을 움켜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캄캄한 어둠을 노려보았다.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언젠가는 레이가 할퀴어 놓은 흉터도 시간이 덮어 줄 것이다. 기필코 그래야 했다.

문을 잠그고 빌어먹을 가면을 벗어 내던졌다. 보드카를 잔에 들이부었다.

부하가 제출한 보고서를 두 시간 동안 훑어보았다. 마넨의 스케줄 표에서도 익히 느낀 바지만, 이 보고서도 꽤 기묘했다. 마넨이 참석한 파티와 참석하지 않은 파티가 기록된 대조표였다. 보고서를 살펴볼수록 흡사 007을 추적하는 기분에 사로잡힐 정도였다.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앞에서 돌아가는 비디오를 노려보았다. 화면에서 마넨이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별다른 말도, 행동도 없었다. 무성의한 눈길로 연회장을 가끔 둘러보는 것이 전부였다.

다시 한번 보고서에 눈길을 주었다. 하루 평균 세 건 열리는 귀족파티에서, 마넨은 울프삭 경이 참석하는 파티를 최우선으로 참석하는 듯했다. 흡사 스토커같이 울프삭 경의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녔다.

왜지? 울프삭 경은 마넨만 보면 노골적으로 으르렁대지 않았던가. 물론 입심에서는 마넨에게 언제나 져 왔지만. 설마 그 쾌감을 누리기 위해서?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뭔가가 있었다. 손가락으로 보고서를 톡, 톡, 때렸다. 마넨의 일거수일투족에서 주술사로 의심되는 인물과의 접촉은 없었다. 실마리는 비디오에서 잡을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뚜렷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예감이 그랬다.

나는 의자에 깊숙이 등을 파묻었다. 화면 속 마넨은 우울해 보였다. 저런 우울한 표정 역시 자주 봐 온 모습이었다. 어찌나 침울한지 부장들끼리 마넨을 일컬어 “몰락해 가는 문신거두” 하며 평소 비웃을 정도였다. 언제나 활달하게 웃어 대는 울프삭 경과는 판이했다. 저러려면 마넨이 왜 하루가 멀다 하고 파티를 들락거리는지 알 수 없었다.

…….

나는 보드카 잔을 내려놓았다. 몽둥이에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내가 이렇게 멍청이였다니. 기가 찼다. 이 상식적인 의문을 어째서 놓치고 있었을까. 눈뜬장님이라는 어구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보고서를 들어 주르륵 훑었다. 조금씩 윤곽이 드러났다. 그렇다. 007이었다. 정체를 숨기고 잠입한 007의 행보와 똑같았다. 단지 마넨은 정체를 숨기지만 않았을 뿐이다.

마넨은 가이거 같은 정보조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사 관련에서는 놀라우리만치 기민한 행동력을 보였다. 거기에서 잡힌 실마리는 카운트다운 시기에 참석한 두 건의 파티뿐이었다.

마넨이 곧 령이라면……?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나는 웃고 말았다.

그러나 혹시 모르지.

동양 영화에서는 흔히 나오지 않는가. 몸에서 아우라 같은 광채를 뿜어 대며, 타인에게 자신의 능력을 전수하고 떠나는 스승이라든가 동료라든가.

령이 마넨에게 제 능력을 넘기고 죽었다면?

주술사다. 보통 주술사도 아니고 령이었다.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헛웃음이 나올 만큼 황당한 가능성이었다. 가능성이 들어맞을 확률도 낮았다. 코트비카의 죽음이 있잖은가.

다른 것이 있었다. 분명 저 위에서 체스 판을 움직이는 투명한 손이 있었다.

“문 좀 열지.”

돌연한 노크 소리에 나는 급히 정신을 차렸다.

이런 제기랄. 한창 생각이 뻗어나가는 즈음이었는데 방해를 받다니. 그것도 하필 훼방꾼이 구레나룻이었다.

급히 가면을 쓴 다음 문을 열었다. 구레나룻이 업무실로 들어섰다. 면상에 불쾌한 심기가 뚜렷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무슨 일이라니…….”

숭숭한 털이 부끄러울 정도로 달짝지근한 음성이었다.

“자네와 내가 이럴 사이야? 요즘 왜 업무실에만 처박혀 있는 거지?”

“일이 많으니까요.”

냉정한 내 태도가 작자를 더 달아오르게 한 모양이었다. 끈끈한 눈빛이 맹렬히 쏟아졌다. 나는 채찍을 쥔 손에서 힘을 빼려 노력했다.

“울프삭 경께서 저에게 내린 일이 있습니다. 한창 업무 중이었는데요. 죄송합니다만 별다른 일이 아니라면 이만 나가 주시지요.”

“아앙…….”

작자가 몸을 떨며 신음했다. 나는 하마터면 채찍을 날릴 뻔했다.

지나쳤다고 판단했는지 구레나룻이 금방 험, 험, 했다. 눈치가 빠른 덕분에 목숨을 건진 줄은 알기나 할까, 저 빌어먹을 놈.

“흠. 어쨌든 할 일 없이 온 건 아닐세. 아까 재포니카의 집무실에 들렀는데 거기서 지시를 받았네. 오늘밤에 부장들이 비밀리에 재포니카를 호위할 일이 있다고 하셨네.”

기분이 확 구겨졌다. 비밀리에 호위할 일이면 내게 직접 지시를 내려야 옳지 않은가?

“재포니카께서 릴리즈 멤버들과 함께 조촐한 모임을 가지기로 하셨다네. 릴리즈 중에 롭 스타소프와 해리 알토넨이라고 알겠지.”

당연히 알고 있었다. 릴리즈의 핵심 멤버이자 부상하는 젊은 무신세력에서도 단연 주목받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오늘밤 재포니카를 모시고…….”

갑자기 구레나룻이 말을 흐렸다. 잠깐 미간을 찡그리더니 입을 열었다.

“직설적으로 설명하지. 그들이 평민들 스타일로 화끈하게 대접하겠다고 재포니카께 청했다더군. 42번가에 ‘라비린스’라는 업소가 있다네. 귀족들 사이에서는 이미 명성이 자자한 암흑가 업소지. 자네도 알고 있겠지?”

물론이었다. 그곳에 대원을 풀어 촬영해 온 귀족들의 음란파티 사진만도 저기 캐비닛에 수백 장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진들을 돌려보며 낄낄대는 것이 부장들의 취미이기도 했다.

나는 싸늘하게 웃었다. 이 지린내 나는 놈에게 한 방 맞았구나.

울프삭 경이 왜 요즘 부쩍 부장들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는지 삽시간에 깨달았다. 릴리즈 때문이었다.

의심이 많은 울프삭 경은 릴리즈를 눈여겨보는 동시에 경계심도 품고 있었다. 릴리즈 또한 경계와 아부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다리기 하는 태도를 취해 왔다. 그러던 릴리즈가 별안간 노골적으로 울프삭 경에게 손바닥을 비벼 대니, 가이거 부장들이 하찮아진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변화의 주역은 눈앞의 구레나룻이었다.

겉보기에 가이거는 주먹패에 불과했다. 구레나룻이 부장으로 들어온 애초 목적도 사내 몸이나 맛보고 울프삭 경의 비위나 맞추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가이거 업무를 직접 목격한 뒤 구레나룻은 놀란 것이다. 그래서 친목 운운하며 멤버십 룸으로 오라는 둥, 암캐로 불러 달라는 둥 수작을 지었다. 가이거를 손아귀에 넣고 주물럭거리려는 목적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놈의 속내가 눈에 훤히 보였다.

울프삭 경은 2년 전부터 집무실에 처박혀 고함이나 치는 게 전부였다. 그동안 나는 울프삭 경 휘하의 수많은 수족을 비밀리에 포섭했다. 울프삭 경의 업무에도 스리슬쩍 관여하여 커미션을 챙겨 직속부하를 양성했다. 나로서는 릴리즈와 친목을 다져도 그만 안 다져도 그만이었다. 한마디로 아쉬울 게 없었다.

그것을 저 바텀 녀석은 뒤늦게 깨닫고 릴리즈에게 달려가 꼬불친 것이다. 릴리즈 측에서는 위협을 느낀 것이 분명했다. 갑자기 태도를 싹 바꿔 우르르 달려와 울프삭 경을 요란하게 접대하려는 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노여움이 치달았다. 한심했다. 007 마넨은 울프삭 경을 백배는 뛰어넘는 능구렁이였다. 그것도 모르고 젊은 놈들 장단에나 놀아나는 울프삭 경이 한심하다 못해 기가 막혔다.

“라비린스라면 굳이 부장들까지 나설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만. 일반대원들로도 충분합니다.”

“흐흠? 지금 자네가 장소를 고르는 겐가? 왕실 연회장이든, 매음굴 술집이든 자네들이 하는 일은 매한가지 호위업무일 텐데…… 설마, 격조 높은 연회장이 아니라서 싫은가?”

구레나룻의 눈빛이 야릇하게 변했다.

“자네에겐 유감스럽겠지만, 스타소프가 재포니카께 요청했다네. 반드시 가이거 부장들이 호위해 줬으면 한다고 말일세. 재포니카께선 청을 수락하셨네. 그러니 오늘밤 라비린스에서 재포니카를 호위하도록 하게. 자네와 부장들, 모두 빠짐없이 말일세.”

피가 거꾸로 돌았다. 애송이들이 기고만장을 넘어서 아예 날고뛰었다.

“십상시라고 아는가.”

대뜸 구레나룻이 문자를 썼다.

“……모릅니다.”

나는 질근질근 씹듯이 내뱉었다. 열이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구레나룻이 웃었다.

“평민이니까 당연히 모르겠지. 주먹 출신이 오죽하겠는가.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새겨 두게. 십상시는 총 열 명의 환관을 뜻하지. 환관이란 중국 왕궁에서 근무하는 시종들이네. 거세를 한 종자들. 그렇다고 아무나 환관으로 뽑진 않았어. 잘생기고 재주 많고 영리한 사람들만 환관으로 뽑힐 수 있었다네. 흔히 생각하는 추악한 외모의 환관 이미지와는 상당히 다르지.”

“그래서요?”

“그런데 십상시는 환관 중에서도 보통 무리가 아니었지. 왕비와 태후의 치마폭에 숨어 나라를 통치하고 온갖 짓을 일삼았다네. 한마디로 분수를 모른 종자들이었지. 그렇지 않은가? 환관이면 환관답게 차나 끓이고 청소나 할 일이지 어디 나라 일을 관장하고 음모를 꾸민단 말인가. 심지어 거사까지 자행하여 관리들을 죽이길 일삼았다네. 그래서 어찌 되었는지 아는가.”

“모른다고 아까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만.”

십상시를 지금 누구에게 빗대는지 불 보듯 뻔했다. 나였다. 우리였다. 가이거였다. 작자의 혓바닥을 뽑아 버리고 싶어서 환장할 지경이었다.

구레나룻이 길게 웃었다.

“의기 넘치는 관리들에게 주살 당했다네. 한마디로 중용이 얼마나 귀한 가치인지 알려주는 역사의 교훈이랄까. 사람은 자기 분수를 알고 살아가야 하는 법.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무슨 의민지 잘 알아들었으리라 보네. 그럼 새벽 두 시에 출발일세.”

그 말만 남기고 구레나룻은 업무실을 떠나 버렸다.

나는 문을 잠그고 가면을 벗어 내동댕이쳤다. 보드카를 단숨에 들이켰다. 입가를 타고 흐르는 보드카를 훑으며 책상을 내리쳤다.

이 새끼들, 감히 우릴 견제하려 들어?

재포니카는 내 작품이었다. 부장들과의 합작품이었다. 이것은 오만이 아니다. 멍청한 울프삭 경은 우리가 아니었다면 절대로 재포니카까지 오를 수 없었다.

울프삭 경이 재포니카까지 올라가게 된 몇 건의 중요한 사건들도 기실 나와 부장들이 ‘개발’한 기획이었다. 숱한 모사와 암살이 우리 머리에서 나왔고 우리 손에서 마무리되었다. 나는 울프삭 경이 아집을 버리고 우리 말에만 귀를 기울였다면 벌써 왕국을 손에 쥐었으리라 지금도 확신했다. 마넨? 옛날에 보냈다. 원한다면 울프삭 경의 머리에 왕관도 씌워 줄 자신이 있었다.

울프삭 경 또한 무의식중에도 그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되레 우리를 베일에 가려놓는 데 유난히 철저를 기한 것이다. 보안 운운했지만, 본심은 따로 있었다. 평민들에게 기대어 출세한 자신의 하찮은 알몸을 타인에게 들키지 않으려 한 몸부림이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같잖은 가면을 씌워놓고 호위병으로 멸시나 당하게끔 유도했다. 나는 그 심사를 빤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가만히 있었던 이유는 울프삭 경이 나를 등용한 은인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우리를 내치려 한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릴리즈를 끌어들인다? 분수나 지켜라? 기껏 술집 행차에 보디가드 노릇이나 해라? 그것이 너희가 해야 할 진짜 일이다?

좆같았다. 십상신지 십생신지 뭔지의 비유를 돌이키자 열이 들끓었다. 보드카를 한 잔 더 들이켰다.

머리를 식히려 노력했다. 괜찮았다. 견제를 한다는 것은 곧 우리의 가치가 만만찮다는 반증이니까. 마넨 이전에 릴리즈부터 뭉개 버리기로 결심했다. 기다려라, 개자식들아. 나를 감히 건드려?

휴대전화로 부장 전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저녁을 같이 하며 바람을 불어넣을 작정이었다. 장소를 정한 후 의자에 털썩 기대앉았다. 나는 숨을 고르며 노여움을 가라앉혔다. 이런 때일수록 필요한 것은 얼음보다 차가운 이성이었다.

잔에 보드카를 붓고서 흔들었다. 눈을 감고 보드카를 마셨다. 알코올 기운이 조금씩 퍼져 갔다. 닫힌 시야가 천천히 아마빛으로 젖어갔다. 나는 픽 웃었다.

또냐…….

놔두기로 했다. 미치도록 회고하다 보면 언젠가 소진될 날이 오겠지. 보드카를 목구멍으로 넘겼다. 맛이 쓰디썼다.

입술로 훑고 싶었다. 그 흰 피부를. 손끝으로 갈고리처럼 긁고 싶었다. 한여름의 숲같이 풍요로운 머리카락을. 뭐하고 있을까, 그 자식은. 내 생각은 조금이라도 떠올리기나 할까.

이 비굴한 바람이 웃겼다. 언제였을까. 레이를 혼자서만 품고 싶다고 욕망한 첫 순간이. 기억은 나지 않는다. 중요하지도 않다. 사랑은 수학 따위가 아니니까.

아직도 어렴풋한 희망을 거는 나에게 코웃음만 나올 따름이었다. 이를테면 이런 상상이었다. 길거리에서 우연찮게 레이를 마주쳐서는 “아니, 웬일입니까.” 하고 너스레를 떨며 “이것도 우연인데 한번 식사나 같이 하죠.” 하고서 그를 데리고 식당에 간다, 그러며 새로 운을 터 본다, 따위였다. 그런 공상을 오늘 출근길 내내 했다.

출근길에는 센타우레아 파크가 있었다. 뉴욕의 센트럴파크를 흉내 낸 면적 3.2㎢의 큰 공원이었다. 이 공원 경계선과 본부가 위치한 17번가가 맞닿아 있었다. 대로를 따라 차를 몰다 보면 공원을 노니는 연인들이 보였다. 저치들은 뭐하는 작자들이기에 팔자 좋게 아침부터 공원이나 노닐까, 하고 생각할 때가 많았다. 오늘은 문득 우연을 꿈꾸었다.

업무가 잘 풀리지 않으면 본부를 나와 센타우레아 파크를 산책하는 것이 내 습관이었다. 눈에 잠긴 공원을 걷다가 모퉁이에서 누군가와 부딪친다. 아마빛 머리카락이 공중에서 나풀거리고, 무의식중에 나는 그를 안아 부축한다. 그 사람은 레이였다. 레이는 하필 다리를 삐어 버리고, 나는 그를 데리고 근처 식당에 가서 다리를 찜질해 준다…… 그러며 조심스럽게 새 출발을 한다, 이것이 오늘 아침 출근길 내내 해 댄 망상이었다.

이런 스토리로는 어딜 가도 퇴짜감이다. 나는 살가죽이 찢어지고 비명이 터지는 스플래터 호러물이나 집필해야 할 시나리오 작가였다. 알고 있다. 그런 달콤한 우연은 일어날 리 없었다. 단지 실낱같은 내 희망일 뿐이었다.

인생에 돌이킴이란 존재하지 않아. 모든 비극은 어둠속을 떠도는 바람처럼 되돌아온다네. 그것이 숙명이야…….

망할 마녀.

심지어 어젯밤은 궁상스런 꿈까지 꿔 버렸다. 깊이 잠드는 것이 습관이라 꿈을 거의 꾸지 않는데 그건 소름끼치리만치 생생했다. 그것도 레이가 말한 빌어먹을 ‘십 년마다 십 분’과 흡사한 스토리였다. 아니, 한술 더 떴다.

나는 어둠속에 우두커니 앉아 실의에 빠진 채 술을 연거푸 들이켜고 있었다. 오래 전에 가 버린 마누라 초상화 앞에 앉아서는 온몸을 짓누르는 좌절감에 괴로워했다. 그러면서 ‘찰나라도 좋으니 한 번만…… 십 년마다 십 분이라도 좋으니 한 번만……’ 하고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꿈이라서 다행이었다. 절로 오마이갓 했다. 레이한테서 나까지 궁상이 옮아 버린 모양이었다.

다시 한번 기분이 잡쳐 버렸다. 나는 조금 남은 보드카를 남김없이 들이마셨다.

빗소리가 시끄러웠다. 천천히 창문가로 다가가 밖을 내려다보았다. 먹장구름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하늘은 어둠과 바람, 빗물이 장악하고 있었다. 창문을 열자 축축한 바람이 몰려왔다. 나는 담배를 한 개비 뽑아 물고 불을 붙였다.

일곱 시 삼십 분에 부장들과 저녁모임을 같이 하기로 했다. 십상신지 십생신지 이야기를 던져 주고 부장들을 흥분으로 몰아갈 작정이었다.

나는 나직이 투덜거렸다.

“새벽 두 시, 라비린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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