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 ─L. (33/101)

33 ─L.

울프삭을 통해 스네이크와 휘하 부장들의 신상을 채집해 보았다. 본명과 거주지를 알아내 해결사를 급파하여 제거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수확은 없었다.

어이없게도 울프삭은 스네이크의 본명을 까맣게 잊어먹은 상태였다. 오랜 세월 동안 닉네임만 불러 댄 나머지 생긴 현상이었다.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진대 그보다 몇 줄은 더 긴 거주지 주소를 기억할 리 만무했다. 다른 부장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대신 울프삭을 채집하는 과정에서 재미난 정보를 몇 개 뽑아냈다. 이제껏 울프삭의 모사라고 믿어 온 여러 건이 기실, 스네이크와 부장들이 획책한 작품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내 처음 판단이 맞았다. 울프삭은 멍청한 작자였다.

스네이크와 휘하 부장들이 가이거 리더 집단으로 올라선 때가 7년 전이었다. 내가 울프삭에게 품은 인상을 재고한 시기도 7년 전이었다.

인간이란 참 우스웠다. 알면 알수록 추악하고 보잘것없었다. 마넨 경을 통해 여러 귀족들을 살펴볼 때마다 절감하는 사실이었다. 울프삭은 스네이크와 그의 동료들이 짠 모사를 자신의 아이디어라 믿고 있었다. 그것도 철석같이.

울프삭은 자신도 그 정도는 염두에 두고 있었으며, 단지 부하들이 먼저 말을 꺼냈을 뿐이라고 합리화했다. 그와 동시에 부하들을 시기하고 경멸했다. 어리석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큰 그릇이 절대 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울프삭이 재포니카까지 올라온 주요 요인으로 사람들은 두 가지를 꼽았다. 리네아 태후와 개인사병 조직 가이거였다. 그러나 정작 울프삭은 가이거를 과소평가했다. 굳이 가이거가 아니라도 자신은 반드시 재포니카에 올랐으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는 자신의 주제파악은 제대로 하는 마넨 경이 훨씬 현명했다. 두 시간에 걸친 울프삭 탐문은 결국 신통찮게 끝나 버렸다.

스네이크가 본부장을 맡은 지 3년째라는 것, 25년 역사의 가이거에서 최고로 빠른 승진을 거듭한 자라는 정도밖에 알아내지 못했다. 울프삭은 스네이크를 이렇게 평가했다. 젊고(올해 고작 29세였다), 영리하고, 건방지고, 잔인하고, 야심만만하다. 그리고 평민으로만 만족할 놈이 아니다. 언젠가는 자신에게 더 큰 것을 요구하지 않을까. 스네이크는, 위험한 놈이다…….

울프삭은 스네이크 외에도 몇몇 부장들을 경계하고 있었다. 난폭성에서 으뜸가는 6부장 레오파드, 유일한 대학출신에 영리한 2부장 쿠퍼헤드. 몇 개의 명칭이 울프삭에게서 연신 쏟아져 나왔다.

더 깊이 파고들 즈음, 마넨 경이 오늘은 여기서 끝내자고 했다. 내 시한부 인생을 의식한 배려인 듯했다.

“결국 스네이크 제거는 힘들다 이 말이지.”

“그리고 부장들을 다른 직종으로 위장시켜 놓았더군요. 잔뜩 쌓인 책더미? 서류뭉치 같은 게 보였습니다. 그런 식으로 겉보기에는 의심받지 않을 만한 변변찮은 직급을 줘 놓고 신상명세도 모조리 위조해 보안해 놓았는데, 울프삭은 ‘사실 저놈들은 그딴 일에나 어울리지, 흥’ 하며 속으로 멸시하더군요. 부장들 마음속을 채집하나마나 그들이 울프삭에게 품고 있는 불만이 상당할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나저나 놀랍군. 단순 주먹패라고만 생각했는데 말이지. 누가 상상했을까. 울프삭 옆에서 귀족들에게 겁이나 주던 호위병들이 실상 울프삭의 두뇌였다니 말일세.”

“그의 마음을 들여다본 저도 몰랐던 사실인걸요. 자기암시까지 그렇게 뛰어난 인간이었을 줄이야.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입니다. 울프삭 측의 실질적 두뇌도 파악했고, 그의 반석이 모래나 다름없다는 것도 확인했으니까요. 그럼 퇴원은 일주일 남았습니까.”

“그렇다네. 사실 아직도 몸이 안 좋아. 마음도 안 편하고. 자네가 마음에 걸려 견딜 수가 없네. 내가 자네 덕을 얼마나 많이 봤는가. 아무것도 보답하지 못해서 씁쓸하지 뭔가.”

진심이었다. 마넨 경의 이런 점이 문신귀족을 이끈 원동력이었다. 울프삭에게는 없는 큰 장점이었다. 그래봤자 국민의 고혈을 빨아먹는 흡혈귀 종자라는 점에서는 울프삭과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마음만으로도 고맙군요. 몸조리 단단히 하십시오. 일주일 뒤부터는 어쩔 수 없이 술을 잔뜩 드셔야 할 터이니.”

“끔찍하구만. 허허, 자네에게 이런 말을 할 때가 아니지.”

“신경 쓰지 마십시오. 조만간 우리도 바빠지겠군요.”

“며칠 뒤 연락하겠네. 편히 쉬게나.”

휴대전화를 던져 버리고 침대로 털썩 쓰러졌다. 온몸에서 비 오듯 땀이 흘렀다. 두 시간을 집중했으니 당연했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메사라…….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그 이름에 웃고 말았다.

사랑이라니.

곱씹을수록 기묘했다. 사랑이라니.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니. 단순히 그를 원하는 것일 뿐이라고만 치부했는데. 성욕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폄하하기도 했는데. 그 정체가 사랑이라는 엄청난 감정일 줄이야.

그가 보고 싶었다. 푸른빛이 흩어지던 나체를 생각했다. 입술에서 한숨처럼 새던 담배연기가 그리웠다.

인간이란 참 우습다고 울프삭을 채집하며 비웃었지만, 기실 그건 나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원칙이었다. 이제껏 나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사랑의 허무함과 유한성을 나만큼 똑똑히 아는 이도 없다고 오만을 떨었다.

어둠이 깔린 빈 방이 하나도 외롭지 않았다. 문틈에서 새는 타인의 웃음소리도 희미했다. 안개가 내린 숲처럼 누구 한 사람 보이지 않았고,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다. 알고 싶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노크 소리를 기억했다. 처음에는 조용히, 그러다가 조금씩 커지고 나중에는 부서질 것처럼 격렬했다. 어쩔 수 없이 문을 열었다. 그곳에 메사라가 있었다.

성가시리만치 끈질긴 남자였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애타게 갈구했다. 사소한 기척에도 귀를 기울였다. 삐걱거리는 판자바닥의 울림이 문 앞에서 멎어 주길 기대했다. 어느 것도 없었다. 적막뿐이었다.

왜 우습게 봤을까. 이토록 자제하기 힘든 감정일 줄은 미처 몰랐다. 가혹했다. 차라리 독살스러웠다. 생기 없는 빈 방이 소름끼쳤다. 손가락 사이로 떨어지는 모래알처럼, 산산이 흩어져 버린 그의 흔적이 그리웠다. 한 움큼의 기억마저 아득한 먼 곳으로 달아날까 두려웠다. 무엇인가가 목을 죄어 눌렀다. 쉽게 꺼지지는 않을 것이다. 기억은 정오의 일광 아래서 타오르는 잎처럼 뜨거웠다.

그랬을까. 너도 이래서 포기하지 못한 거였을까. 그러나 문득, 문에서 노크 소리가 울린다면 나는 재차 잔인한 말을 내뱉을 것이다. 반드시 그래야 했다. 나는 너 같은 실수를 저지를 수는 없다. 지금의 이 감정은 중독과도 같았다. 아무리 달콤해도 언젠가는 끊어져 버릴 감정이었다. 그러리라고, 억지로 확신했다.

그에게 예정된 시간만을 내동댕이치고서 떠날 수는 없었다. 내 미래는 불투명했다. 책임 없는 행동은 하지 말아야 했다. 자작나무숲을 목격한 나는 그것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우습다. 메사라는 어쩌면 벌써 다른 사람을 품에 안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결국은 지겨운 되풀이였다. 이 웬 신파극이란 말인가. 어쩔 수 없었다. 인간이란 우습고 추악하고 보잘것없는 존재니까.

“웬 거예요?”

“웬 거라뇨. 초콜릿 케이크죠. 맛이 궁금하지 않아요?”

맛이 궁금하지 않아요, 에서 무심결에 메사라가 떠올라 버렸다. 나는 쓰게 웃으며 초콜릿 케이크를 한 조각 베어 물었다. 소니아가 바짝 다가앉았다.

“저는요, 이상한 습관이 있어요. 그게 뭔지 알아요?”

“뭔데요?”

“저는 맛있는 음식을 먹는 꿈을 자주 꿔요. 그리고 일어나자마자 꿈에서 먹은 음식을 먹지 않으면 미쳐 죽어요. 전생에 요리사였거나 아니면 굶어죽은 사람이었나 봐요. 오늘은 초콜릿 케이크를 먹는 꿈을 꿨지 뭐예요? 굉장히 달달한 맛이 꿈에서도 생생했어요. 그래서 일어나자마자 미친 듯이 케이크를 구웠죠. 어때요? 달지 않아요?”

“사실 좀 그렇긴 했어요.”

소니아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신기하고 재미난 장난감을 바라보는 듯한 눈초리였다. 소니아는 여러 부분에서 메사라를 연상시켰다. 손재주가 좋고 호기심도 많았다.

아, 또 메사라 생각이다.

나는 케이크를 한 조각 더 자르며 고소를 숨겼다. 소니아가 컵에 우유를 따르며 말했다.

“자기가 게이라고 말했을 때 말이죠.”

“아, 예.”

“사실은 미리 알고 있었다면 화낼 거예요?”

“예?”

소니아가 웃었다.

“엘리 씨가 말해 줬어요, 옆집에 굉장히 특이한 사람이 산다구요. 자기를 말하는 거예요. 궁금하지 않아요? 나는 다른 사람이 날 어떻게 보는지 궁금할 때가 많은데.”

“제가 특이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만.”

“어머, 역시 특이하네. 특이하죠. 자기같이 생긴 사람은 잘난 척하기 십상이거든요. 얼굴값을 한다고나 할까, 후후. 그런데 되게 조용하다면서요? 사람들하고 교분도 거의 없고. 마치 유령 같다고 했어요. 이 동네에선 그것만으로도 사람들 눈에 띄기에 충분해요.”

“씁쓸한 평간데요.”

나는 우유를 마시며 당혹감을 죽이려 애썼다. 얼굴값이라.

반대의 이유라고 한다면 소니아는 이해할 수 있을까.

“어머,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어쨌든 엘리 씨가 그러더라구요. 얼마 전부터 웬 남자가 자기 집을 들락거렸다고. 첫눈에도 보통 사이가 아니라고 보였다나요. 그래서 이웃끼리 자기를 두고 봉 잡았다고 숙덕댔대요, 후후후. 남자가 키도 되게 크고 미남이었다면서요. 돈도 제법 있어 보이더라고 말하던데. 하긴, 자기 같은 사람을 남자들이 곱게 내버려둘 것 같진 않아요. 어머, 왜 자꾸 눈길을 피해요? 귀여워라…… 여자들은 원래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많아요. 연애 문제는 더더욱요. 눈길 피하지 말아요.”

“……눈길 피하는 건 그냥 습관이에요.”

뺨이 화끈화끈했다. 메사라와의 행위 중에 내질렀던 소리를 혹여 엘리 씨가 들었다면, 하는 생각까지 들자 창피해서 견딜 수 없었다. 고개를 돌렸지만 소니아가 집요하게 눈빛을 마주쳤다. 아예 내 양 뺨을 붙잡고서 시선을 고정시켰다. 짓궂기 짝이 없었다. 메사라의 여성 버전이었다.

“자기, 그 남자와는 헤어졌죠?”

“귀신이군요.”

어색하게 대답하자 소니아가 한숨을 쉬었다.

“귀신은요, 뻔하죠. 내가 자기 애인이라면 이런 험한 곳에서 일하는 걸 마냥 내버려두지 않을 거예요. 자기도 딴생각에 빠지는 모습이 자주 보이고.”

“그래 보입니까.”

메사라 생각만은 아닌데…… 하며 웃었다. 그러면서도 병원에 가라는 둥, 인형눈알 일보다는 책가게 일이 더 낫지 않느냐는 둥, 하던 메사라가 또 떠올라 버렸다. 참 지겨운 연상반응이었다. 게다가 가슴 한구석의 이 울림은 또 뭔가.

“어머, 의미심장한 미소. 자기는 좀체 알 수가 없어요. 이래봬도 눈치에는 도가 텄다고 소문 자자한 여자인데, 나는. 어쨌거나 봉은 세상에 널려 있으니까 의기소침해하지 말아요. 어, 어머. 저기 내 봉이 오네요.”

소니아가 황급히 내게서 손을 뗐다. 바로 요염하게 웃으며 자세를 꼬았다.

소니아가 열중하는 남자가 저쪽 복도에서 걸어왔다. 업소 후문을 지키는 보디가드 오윈 씨였다. 서른다섯에 곰처럼 건장한 체격이었지만 이 바닥에서는 보기 드물게 사람이 좋았다. 소니아가 후문을 자주 얼쩡거리는 이유가 오윈 씨 때문이었다.

그가 이쪽을 흘끗 쳐다보더니 저벅저벅 걸어왔다. 소니아와 잠깐 눈길을 부딪치더니 커다란 손으로 초콜릿 케이크를 반 이상 집어 들어 한입에 삼켰다. 그야말로 황소처럼 우적우적 씹었다.

“좀 달군.”

오윈 씨는 한마디만 하고 후문으로 나가 버렸다. 소니아가 킥킥 웃었다.

“자기, 저이에게는 눈길 주면 안 돼요. 내 남자니까.”

“하하. 알았어요.”

소니아의 윙크에 나는 웃고 말았다. 그때 후문 앞이 시끄러워졌다. 객들이 몰려오는 모양이었다.

나는 일어서다 말고 멈칫했다. 객들의 낯이 눈에 익었다. 금방 기억해냈다. 롭 스타소프와 해리 알토넨, 그리고 몇몇 무신귀족이었다. 마넨 경이 언급한 신진세력 릴리즈 멤버들이었다.

나는 룸을 지정해 주며 그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모두 사복차림이었다.

“귀족들이군요.”

복도 안쪽으로 걸어가는 그들을 응시하며 무심코 말했다. 소니아가 케이크 접시를 치우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어떻게 알았어요?”

“텔레비전에서 봤어요. 그런데 이 후문으로는 유난히 귀족들이 많이 들어오는 것 같군요. 앞문 사정을 모르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귀족 전용창구 아닐까 싶을 만큼요. 하긴, 처음부터 이상했어요. 후문은 보통 주차장과 연결되는데, 여긴 나가 봤자 골목길이잖아요.”

나는 후문 바깥으로 눈길을 보냈다. 건물들 사이로 길게 이어진 골목길 멀찍이서 대로변이 보였다.

“저 골목길은 자동차가 오갈 수 있을 만큼 꽤 넓어요. 이 후문으로 들어오는 귀족들은 대부분 저 골목길에 자동차를 세워 두더군요. 골목길에서 바로 대로가 이어지니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여기 업소를 들락거릴 수 있죠.”

“흐음.”

소니아가 케이크 접시를 내려놓으며 카운터에 다리를 꼬아 앉았다. 나는 아차, 싶었다. 그녀가 편한 나머지 말을 지나치게 많이 해 버린 것이다.

소니아가 담배를 한 개비 뽑아 불을 붙였다. 도넛 모양의 연기가 입에서 새어나왔다. 그녀가 도넛연기를 손가락으로 뭉개며 천천히 말했다.

“자긴 참 특이해요.”

“별로…….”

“별로긴요. 솔직히 말해서 자길 맨 처음 봤을 때 어딘지 넋 나간 사람 같았거든요. 엘리 씨도 이웃끼리 자기가 비정상 같다고 숙덕숙덕했대요.”

그만 나는 피식 웃었다. 소니아가 급히 한손을 흔들었다.

“어머, 기분 나빠하지 말아요. 아니면 그만이잖아요. 어쨌든…… 제대로 봤어요. 여긴 귀족을 위해서 일부러 만든 후문이 맞아요. 후문 쪽 복도의 룸들은 귀족 전용이구요. 처음 이 업소가 입주했던 곳은 이렇진 않았어요. 업소 규모가 커지면서 이 건물을 새로 짓고 이사했는데, 처음부터 귀족 고객을 의식하고 설계했다나 봐요.”

“뭐…… 텔레비전에서 본 귀족들이 자주 들락거려서 이래저래 추측한 것뿐입니다.”

“글쎄? 자기 눈빛이 보통 날카롭지 않던데요? 조심해요, 귀족은 의심이 많거든요. 아까처럼 시선을 빛내며 유심히 쳐다보지 말아요. 안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나도 모르게 입 모양으로만 “예…….” 했다. 소니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 겁은 많군요. 그런데 자기 눈썰미, 대단히 뛰어나요. 연예인이라면 모를까, 텔레비전에서 귀족들을 보더라도 실물까지 바로 알아보진 못하잖아요. 그나저나 귀족들 상대하다 보면 어이없는 일 많이 겪어요. 귀족이라 해서 아랫도리가 별달리 특별하진 않더라구요, 칫.”

“그들도 사람이니까 당연하지요.”

“게다가 멍청하구요. 여기 동양계 여자들이 많이 일하잖아요? 귀족 고객들은요, 다섯 중에 둘은 꼭 이런 질문을 해요. ‘동양 여자들은 섹스할 때 현악기를 뜯으며 시를 읊는다던데 진짜야?’ 멍청한 주제에 변태 지수는 높구요. 특히나 아까 그 사람들,”

소니아가 갑자기 음성을 낮춰 속삭였다.

“소문난 변태들이에요. 여긴 문신, 무신 가리지 않고 오는데, 그중에서도 알아주는 악동들이에요. 어떻게 하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아뇨, 썩…….”

나는 민망하게 웃음을 흘렸다. 이런 내 태도가 소니아의 장난기를 더욱 자극한 모양이었다. 소니아가 어린 소녀처럼 손을 입가에 대고 내게 속삭였다.

“저치들 가장 곤란한 취미가 뭐냐면요.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반드시 테이블로 아가씨들을 전부 올라서게 해요. 그리고는 거기에다가 달걀을 품게 해요. 거기요, 거기에다가. 상상이 가요?”

나는 뜨악해서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러면서 꼬꼬댁하라고 마구 손뼉 치죠. 암탉은 암탉답게 놀아야 한다나…… 우리끼리는 저치들을 소크라테스라고 불러요.”

“저런 변태들에게 웬 소크라테습니까.”

“왜긴요, 마누라 등쌀을 못 이겨 여기서 한풀이하는 한심한 족속이라는 뜻이죠. 그리고 자기도 알죠?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시고 피를 토하며 캭 죽었어요.”

“하하. 깊은 뜻이 있는 별명이었군요.”

소니아가 담배를 비벼 끄며 어깨를 으쓱 올렸다.

“여기선 저렇게 놀고 왕궁에서 점잔 빼는 꼴을 보면 코웃음만 나와요. 그 괴상망측한 변태취미라니…… 자기 같은 사람은 상상도 못하겠죠.”

메사라가 내게 해 댄 짓이 떠올라, 나는 무심결에 “글쎄요…….” 했다. 소니아가 담배를 한 개비 더 뽑다가 주춤거렸다.

“어머? 자기 혹시?”

나는 급히 정신을 차렸다. 소니아가 산전수전 겪은 업소 여자임을 잠깐 놓쳤던 것이다. 뺨으로 피가 몰렸다.

소니아가 후, 후, 하며 헐떡거림 같기도 하고 웃음 같기도 한 숨을 몰아쉬더니 폭소를 터뜨렸다.

“어머! 어머! 미치겠어요. 자꾸 머리에서 떠오르잖아요. 정말 자긴 특이한 사람 맞다니깐요!”

“저도 미치겠군요.”

나는 씁쓰레 웃으며 대꾸했다. 힘없는 내 반응이 그녀는 되레 즐거운 모양이었다.

“후후. 그 장신의 미남이 짓궂었나 봐요. 정말 겉만 봐서는 모른다니까…… 하여튼 자기는 몸조심 좀 해야겠어요. 오윈 씨가 그러는데 자기는 변태들이 줄줄 따라붙겠다고 하던데요. 흐르는 분위기가 너무 야릇해서 걱정스럽댔어요.”

“그럴지도.”

나는 짧게 수긍해 버렸다. 스노우 화이트에서 만난 상대 중 어느 한 명도 정상적인 인간이 없었다. 심지어 메사라까지 변태였다.

이제는 아예 배꼽을 잡아 대는 소니아를 응시하며 나는 쓰게 웃었다. 불만스런 눈빛으로 담배를 피워 대던 메사라가 떠올랐다. 갈증이 났다. 그가 보고 싶었다. 미치도록 간절히.

복도에서 토악질 소리가 터지는 통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나는 얼른 일어서서 그쪽으로 다가갔다. 하필 소크라테스 일파의 한 명이었다. 롭 스타소프였다.

소니아의 주의를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그를 부축했다. 귀족전용 룸이 몰린 복도라 드문 편이긴 했지만, 이런 것도 내가 해야 할 일의 하나였다.

“괜찮으십니까, 손님. 고개 올려 보시죠.”

스타소프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길거리 잡배를 방불케 하는 험상궂은 용모의 삼십대 남자였다. 내가 알기로는 스타소프 가문은 선대에서 돈으로 작위를 사서 귀족에 올랐다. 원래는 지방에서 악명을 떨치던 러시아계 마피아 가문이었다.

복도의 가죽소파에 간신히 그를 앉혔다. 옷에 묻은 오물을 타월로 닦았다. 스타소프가 실눈으로 허공을 더듬었다. 입술을 비롯해 콧수염까지 오물이 흥건했다.

입술에 묻은 찌꺼기를 닦아 주다가 멈칫했다. 스타소프가 내 가슴을 만지고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제법 몽글몽글한데.”

히죽거리는 음성이 소름끼쳤다. 취기는 온데간데없이 빛이 또렷한 눈초리였다. 스타소프가 내 손목을 확 낚아챘다.

“무, 무슨 짓입니까, 손님.”

“뭔 짓이긴. 여기서 일하면서 웬 순진한 척이야.”

스타소프가 내 머리카락을 움켜쥐고서 자신의 하복부에 밀착시켰다. 입술에 발기한 그것이 닿았다. 떨어지려 안간힘썼지만 무신귀족답게 힘이 엄청났다.

“이게…… 가만 못 있어? 팁 줄 테니까 귀엽게 빨아 봐.”

“손님.”

옆에서 저음이 울렸다. 오윈 씨였다.

“많이 취한 것 같습니다. 일어서시지요.”

오윈 씨가 눈짓했다. 나는 황급히 떨어져서 카운터로 달려갔다. 스타소프를 룸으로 넣은 후 오윈 씨가 이쪽으로 왔다.

“앞으로 이런 일 생기면 소리 질러. 어차피 내 일이 교통정리니까 부담 갖진 말고.”

“감사합니다.”

소니아가 쿡쿡 웃었다. 후문으로 나서는 오윈 씨를 지켜보며 “우리 저이 멋지죠?” 하고 속삭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윽고 소니아는 “어휴, 가 봐야겠어요.” 하며 일어섰다. 날카로운 힐 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텅 빈 복도에 룸에서 새어나오는 분탕질 냄새만 흘렀다. 뭔가 굉장히 고독했다. 빗소리를 깨달은 때는 조금 뒤였다.

나는 활짝 열린 유리문 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비가 내렸다. 겨울밤에 드물게 보는 가랑비였다. 문 앞에서 오윈 씨가 담배를 뽑아 물고 불을 붙였다. 그 모습에 또 누군가가 겹쳤다. 회색빛 담배연기가 축축한 바람에 섞여 흩어졌다.

저 멀리 골목 사이로 보이는 거리가 쓸쓸했다. 빗물을 맞으며 침묵하는 건물들이 외롭게 늘어선 묘석 같았다. 마음이 자꾸만 어딘가로 내달렸다. 유리문에 내가 비쳤다. 눈에는 물기가 가득 고여 어둠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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