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M─
왁자한 웃음 속에서 나는 위스키 잔만 흔들고 있었다. 부장들과 술자리를 가진 참이었다. 구레나룻과 레오파드의 정사 사진을 부장들에게 쫙 뿌린 다음, 지금껏 위스키만 연거푸 들이켰다. “레오파드, 물건 정말 큰데!”, “아리사 새끼, 표정 좀 봐. 크하하핫!” 해 대는 그들의 말도 별세계 소리 같았다.
기분이 울적했다. 울적하다 못해 아주 좆같았다. 멋들어지게 차인 지 사흘째였다. 파티에 미친 울프삭 경을 수행하느라 그동안 42번가를 한 번밖에 돌지 못했다. 그때도 어김없이 헌책방을 지나치며 레이의 흔적을 더듬었다. 헌책방은 닫혀 있었다. 뭘 하고 있을까, 그 망할 자식은.
자고 있을까.
또 아프기나 한 걸까.
아니면 웃고 있을까.
그러나 내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차였다. 차인 거 아닌가. 그건 끝났다는 의미였다. 내게 남은 레이의 흔적은 쇼핑백에 든 옷밖에 없었다. 그가 딱 한 번 입고 되돌려준 옷이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여전히 실감이 안 났다. 지금도 위스키 표면에 숲처럼 풍성한 머리카락이 겹치고 있었다. 나는 위스키 잔을 거칠게 흔들어 버렸다.
레이는 머리나 식히라는 한 마디만 남긴 뒤 침대에 드러누워 곧장 곯아떨어졌다. 예의 그 무성의하고 고단한 표정으로 깊이 잠들어 버렸다. 그 모습을 밤새 노려보다가 방을 나왔다. 거리에는 세찬 눈바람뿐이었다. 그것뿐이었다.
변함없이 몰아치는 눈바람이 허탈했다. 뭔가 아득한 기분을 맛보며 길거리를 걸었다. 그건 정말 이상한 느낌이었다. 우습기도 하고 비참하기도 하고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차였다.
그것은 다시는 레이를 볼 수 없다는 뜻이었다.
아직도 그 몸이 생생했다. 이따금 짓던 조용한 미소가 눈앞에 뚜렷했다. 휑한 방도 똑똑히 기억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나 버렸다니, 체감이 되지 않았다.
한판의 쇼를 벌인 느낌이었다. 아니, 쇼를 벌인 게 맞았다. 돌이킬수록 확실했다. 눈덩이처럼 불어 가는 감정에 휩싸인 채, 나는 레이와의 어떤 완성을 위해 무의식중에 질주하고 있었다. 그에게서 남루한 가난을 걷어내려 했고, 병색을 지우려 했고, 둘만의 공간을 만들려 했다. 모든 것이 내 원맨쇼였다. 좆나게 멋진 작품이었다. 끔찍하게 웃겼다.
차라리 원나잇스탠드 상대로 남아 있을 걸 그랬나…….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사랑한다. 사랑하고 있잖은가? 증오도 아니고, 혐오도 아니었다. 사랑이었다. 숨길 이유라고는 없었다. 그럴 필요도 없고 숨기지도 못했을 것이다. 고작 원나잇스탠드 상대로 만족할 내가 아니었다. 감정을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도, 잘나신 양반을 만나 좆을 뭉개 줄 계획까지 짜지 않았던가.
휴대전화를 떠올리자 다시금 불같은 질투가 내달렸다. 혹시 레이가 나를 거절한 이유가 그 잘나신 양반 때문이라면…….
나는 위스키를 단숨에 들이켰다. 열이 화끈화끈 치솟았다.
그때 쿠퍼헤드가 재떨이를 이쪽으로 밀며 말했다.
“오늘따라 우리 미남 본부장님, 분위기가 죽이는걸.”
“그런가.”
“한 가닥 머리카락을 이마에 늘어뜨린 채, 담배를 끼운 손으로 위스키 잔을 흔든다라…… 그것도 내내 침묵을 지키며. 한 폭의 그림인데. 무슨 일이라도 있어?”
나는 담뱃재를 털며 픽 웃었다.
“있다면 있지.”
“뭔데?”
“사생활은 묻지 않는 것이 우리 원칙일 텐데.”
“그야 그렇지.”
나는 담배를 비벼 끄고 한 개비 더 뽑아 물었다. 쿠퍼헤드가 라이터를 켜 이쪽으로 건넸다. 작고 붉은 불에 담배 끝을 태웠다. 한 모금 깊게 빨아 토해 내듯 담배연기를 흘렸다.
“간접화법도 있잖아. 너를 안 지 칠 년째지만 이런 모습은 처음이라서 말이지. 한번 말해 봐.”
“간접화법이라.”
나는 가까이서 웃어 대는 부장들을 흘끗 쳐다보았다. 썩 당기지 않았다.
“관두지.”
“흐음…….”
쿠퍼헤드는 더욱 궁금한 기색이었다. 슬쩍 다가오더니 내 귓가로 속삭임을 흘렸다.
“연애?”
대학물 먹은 새끼들은 전부 눈치가 귀신인가. 안면단련에는 도가 터서 다행이었다.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허어.”
쿠퍼헤드가 나직이 휘파람을 불었다. 눈빛에 “이런, 차인 게로군.”이 재빠르게 떴다. 엿 같은 자식이었다. 쿠퍼헤드가 어깨를 으쓱 올리더니 내 잔에 위스키 병을 기울였다.
“시간이 약이야. 안 보면 잊히기 마련.”
“안 보면 잊히기 마련이라.”
그게 문제였다. 보지 말아야 한다는 그 자체가 끔찍해서 미칠 것 같았다. 그런 일은 가능성조차 생각하기 싫었다. 감정을 알지 못했을 때도 틈만 나면 레이를 만나러 달려갔었다. 그렇건만 보지 못한다? 보지 말아야 한다? 다시는 오지 말아라?
“왜?” 하는 의문이 머리에서 자꾸만 떠올랐다. 레이는 내 어디가 싫은 것일까.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웃음이 나왔다. 레이의 입장에서 돌아보니 이유가 참 많았다. 직업도 문제였고, 성적 취향도 문제였다. 첫날밤부터 단추를 잘못 끼운 사이였다. 그럴까. 그래서였을까. 괴로웠다. 그의 눈에 들지 못한다는 사실이 미치도록 고통스러웠다.
그와의 만남들을 돌이켜보았다. 한심했다.
차일 만했다. 차이고도 남았다. 나라도 찼을 것이다.
「……고등어 좋아해요?」
황혼이 내려앉는 오후였다. 나는 길목을 흔들흔들 걸어가는 퀴퀴한 코트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순간이 레이와 내가 둘만의 관계로 발전한 계기가 되었다. 삭막한 출발이었다. 허탈했다. 웃음만 나왔다.
변태 기구를 가방에 챙겨 넣고 레이의 집으로 흥얼흥얼 향한 기억이 살아났다. 황당해하던 레이의 반응이 압권이었다. 미간을 중앙으로 모으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말을 잊은 채 멍하니 있었다. “여긴 왜 온 거죠?” 하는 레이에게 나는 무엇을 핑계 댔던가. 다름 아닌 성병검사 결과 아니던가. 제기랄.
꽃도 아니고, 보석도 아니고, 옷도 아니고, 가방에 온갖 변태 기구와 성병검사 서류를 챙겨들고 레이를 찾아가 너스레란 너스레를 다 떨어 댔다. 한마디로 추태였다. 회상하자니 기가 막혔다. 엿 같았다.
참 무신경한 사람이었다. 인형눈알을 달면서 나는 레이를 슬쩍 떠보았다. 인형눈알을 달아 주는 일 수락한 거 내게 혹시 마음이 있어서였냐고, 그렇게 물었다. 레이는 표정 하나 안 바꾸고 “착각도 가지가지네.” 하며 픽 웃었다.
왜 내가 레이를 떠보았을까. 어떤 원나잇스탠드 상대에게도 그런 식의 수작을 건 적은 없었다. 그때 이미 감정이 그에게로 주체할 수 없이 쏠리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장난으로 치부하고 치웠지만, 레이의 “착각도 가지가지네.” 대답에 느꼈던 설핏한 분노만은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있었다.
증오심이 들끓었다. 나 자신이 미치도록 재수 없고 한심했다. 기억을 돌이킬수록 내 언행 하나하나가 유리조각처럼 가슴을 찢어발기며 꽂혀들었다.
차라리 처음처럼 그가 싫어하든 말든 상관 않고 달라붙는다면.
픽 웃어 버렸다. 못할 것이다. 나는 레이의 온몸을 드리운 어둠이 싫었다. 그런 짓을 한다면, 나도 어둠의 일부가 되는 것이었다. 우스웠다. 감정을 깨닫기 전에는 그에게 온갖 욕망을 쏟아 부을 수 있었다. 어떤 거리낌도 없었다. 섹스를 하고, 키스를 나누고, 손을 잡고, 대화를 주고받고, 눈썰매를 타고, 길을 걸었다. 그 모든 것을 레이와 함께 나누었다.
그러나 사랑이라고 인지한 그 순간, 모든 것을 놓쳐 버렸다. 새처럼 날아갔다. 남김없이 전부 잃었다. 얼굴조차 보지 못하는 신세로 전락해 버렸다.
이 모든 것이 사랑이 낳은 엿 같은 결과였다. 별별 고관대작의 살가죽 뜯어내기를 일삼은 이 사디스트가, 고작 가난뱅이 때문에 이토록 괴로워한다니. 하하하, 제기랄. 지치리만치 웃음만 나오는 상황이었다. 괴롭고, 아이러니하고, 웃겼다.
사랑이 이렇게 잔인한 마술임을 알았다면 처음부터 발을 뺐었으리라…….
“일에만 열중해. 너는 본부장에만 그칠 놈이 아냐.”
쿠퍼헤드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나는 담뱃재를 털었다.
“그래야지.”
위스키 잔을 흔들며, 마넨을 찢어 죽이는 상상에 몰두하려 애썼다.
우선 령의 체포 작업부터 들어갔다. 령은 있다. 그렇게 믿기로 했다. 이번의 패배로 확실히 체감한 사실이었다.
내가 마넨에게 패배한 원인은 령의 존재를 계산에서 제외한 탓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렇다면 형식적인 정찰에만 매달릴 여유가 없었다. 령이 실체 없는 유령선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나는 도전을 좋아했다. 그리고 레이에게 차인 지금, 도전의 대상이 정복하기 힘들수록 내게 도움이 될 터였다.
자, 그럼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일단 타임라인을 처음부터 재구성했다. 내가 짠 구체적인 계획을 알아내는 데만도 열흘은 걸리리라 자신한 터였다. 그러나 마넨의 대처를 판단컨대 그들의 준비는 얼추 잡아도 카운트다운 들어간 때부터 시작한 것이었다.
협상 당일 마넨이 했던 말을 되살렸다. 방송국 비리 기사를 ‘일주일간’ 준비했느니 운운했었다. 회계사들 처리도 희한했다. 어떻게 하와이에서 목을 딸 수 있었을까. 해결사를 고용하는 데만도 하루는 걸렸을 터.
분명 내가 카운트다운 들어간 시기에서 하루이틀 차이였다. 그 시점에 계획의 세부적인 사항까지 모두 마넨 측으로 새어나간 것이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당연한가.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신비의 영역을 다루는 자가 령이니까. 나만 해도 마녀의 예언이 적중되는 꼴을 겪지 않았던가.
더는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근래에 있었던 마넨의 모든 행적을 다시 한번 샅샅이 검토했다. 월척이 하나 걸렸다. 카운트다운 첫날이었다. 갑작스레 마넨이 회계사들을 불러 저녁식사를 같이 했다.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기억났다. 마넨과 회계사들의 만남을 보고받았던 그날 나는 즉시 부하를 풀어 도청까지 지시했다. 결과는 별것 없었다.
마넨은 회계사들에게 “다음 분기에도 나를 위해 애써 달라”고 했다. 그러고는 간단히 악수만 하고 헤어졌다. 몰래 촬영한 비디오 기록에서도 마넨에게서 별다른 낌새는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다음 분기 회계를 위해 마넨이 회계사들을 불렀다고만 판단하고 치워 버린 터였다.
나는 손끝으로 탁자를 툭, 툭, 쳤다. 냄새가 났다.
뭘까, 이건.
내선전화가 울렸다. 고문부였다.
“본부장님, 준비되었습니다.”
엘리베이터 내려가는 소리가 철컹철컹 울렸다. 자동적으로 생각에 빠졌다. 지우려고 지우려고 아무리 애써도 틈만 나면 레이가 떠올랐다. 가슴 한구석에 멍울이 진 듯 갑갑했다. 도대체가 자제가 되지 않았다. 진심으로 엿 같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신음이 흩어지는 고문소 복도가 펼쳐졌다. 저 소리를 들으니 그나마 기분이 나아졌다.
이런 도리 없는 녀석이니까 레이가 싫어했겠지. 그는 눈썰미가 뛰어난 사람이니까. 이런 제기랄.
나는 채찍으로 애꿎은 벽을 짜악 후려갈겼다.
문을 열자 고문관들이 고개를 숙였다. 나는 천천히 내부를 둘러보았다. 고문실 한쪽 구석에 주술사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벌벌 떨고 있었다. 피라미는 빼 버리고, 42번가에서 제법 이름난 알짜배기들만 모아 잡아오라 시킨 터였다. 가까이서 주술사들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흐흠…….
주술사란 종자는 참 특이하게 생겼군.
희한했다. 깜깜한 골목에서 마주친 마녀도 그랬지만, 여기 모인 주술사들도 하나같이 보통 괴상한 용모가 아니었다. SF 프로덕션 디자이너가 심혈을 기울여 스케치한 괴물 같았다.
나는 의자에 느긋이 기대어 앉았다. 손가락으로 탁자를 탁탁 치며 주술사들을 계속 살펴보다가 멈칫했다.
“……거기, 할멈. 앞으로 나와.”
턱짓으로 맨 안쪽의 마녀를 가리켰다. 마녀가 엉금엉금 기어오다시피 앞으로 나왔다. 나는 찬찬히 마녀의 코트를 훑어보았다. 레이의 코트와 흡사했다. 아예 똑같았다.
“그 옷?”
“이, 이 옷은…… 물려받았는데요.”
무심결에도 찬물을 뒤집어쓴 느낌이었다.
“주술사들끼리 물려 입는 옷인가?”
“네. 저희끼리요.”
나는 마른침을 넘겼다. 뭔가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그럴 리는 없었다. 절대 아니라고 단정 지었다. 인형눈알이나 붙이는 레이가 주술사일 리 없었다. 그의 집에도 주술도구는커녕 필요한 살림살이조차 부족하지 않았던가. 42번가에는 주술사들이 원체 많았다. 헌책방을 물려받았듯이, 안면 있는 주술사에게서 옷을 얻었거나 쓰레기통에서 주워 입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처음 레이를 만난 후, 레오파드와 내가 종종 떠들어 댄 “마녀 앞에서 카드점 결과를 기다리는 기분이었어.”가 나름대로 핵심을 찔렀던 셈이다. 주술사 전용코트를 입고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제기랄, 웃음이 나왔다.
그나저나 생각지도 않은 문제가 생겼다. 어쩌면 레이가 저 코트 때문에 주술사로 오인 받아 잡혀갈지도 몰랐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속을 진정시키며 주술사들을 살펴보았다. 모두 공포에 질린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손가락을 딱, 쳤다. 부하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녹음기 버튼을 눌렀다.
“본론을 꺼내지.”
주술사들이 바닥에 철퍽 엎어지다시피 무릎을 꿇었다.
“령에 대해서 아는 것, 전부 말해 봐.”
침묵 속에서 주술사들이 서로 눈짓을 교환했다.
나는 손끝으로 탁자를 톡톡 치며 느리게 말했다.
“하나도 남김없이. 우리가 가진 정보는 령이 이상야릇한 영역을 다룬다는 정도야. 그 외 알려진 것이라고는 없으니, 자네들에게서 단서를 수집할 수밖에.”
“려, 령이라면…….”
무리에 섞인 한 중년남자가 말했다.
“어쩌면 여기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냉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자세히 설명해 봐.”
“령은 평범한 주술사로 위장하고 지냅니다. 아니, 평소에는 그저 평범한 주술사에 불과하지요. 령에게서 능력을 이끌어내는 건 고객의 눈썰미에 달려 있다고 하더군요.”
주술사들이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름난 주술사들에게는 령이라는 소문이 으레 따라붙지요.”
“령은 역사가 깊은 주술집단입니다. 그렇지만 그 실체는 아무도 몰라요. 듣기로는 극소수의 후계자만 양성한다고 들었을 뿐. 그러나 이것도 사실인지는 불확실하죠.”
나는 주술의 종류에 대해서도 물었다.
“이루 말할 수도 없이 많지요. 사물을 이용한 것부터 시작해 정령에게서 속삭임을 받는다든가 직접접촉을 한다든가.”
“령이 어떤 주술을 구사하는지는 저희도 알 수 없고요.”
“그러나 가장 극점이라면 소위 눈빛만 봐도 모든 것을 꿰는 거겠지요.”
이 말에 나는 하하하, 웃었다.
“눈빛만 봐도 모든 것을 꿰뚫는다?”
“그렇습니다. 한 번 쳐다보기만 해도 모든 것을 알아내고 이루는 거죠. 주술도구도 쓰지 않고 말입니다.”
“그건 초능력 아닌가.”
“비슷하지요. 사람들이 주술에 기대는 행위 자체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어떤 힘에 의지하는 거니까요.”
“우리는 그 능력을 ‘오르키투니카Orcitunica’라고 부릅니다. 수많은 마법의 식물 중에서도 가장 위험하게 꼽히는 것이 양귀비입니다. 악마나 지옥의 대왕 오르쿠스가 입는 제복은 반드시 양귀비의 붉은색으로 물들이는데, 그래서 양귀비를 ‘오르키투니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주술사들에게 오르키투니카는 악마의 재능이라는 뜻으로 통합니다.”
“어린아이도 흔히 쓰는 주술 중에 밀랍이나 짚단으로 인형을 만들어 이름을 적어 놓고 저주를 퍼붓는 수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르키투니카는 그런 의식이 필요 없습니다. 그저 떠올리기만 하면 모든 것이 이뤄지죠.”
“오르키투니카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눈으로 투시를 한다든가, 사물을 손으로 만져서 기록을 읽어낸다든가…… 하지만 저는 진짜 오르키투니카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오르키투니카라면 사실 주술 수련도 필요 없을 겁니다. 오르키투니카 자체가 엄청난 능력이니까요. 옛날에는 오르키투니카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식이 오르키투니카일 경우, 부모가 아이를 버리거나 주술로 외려 오르키투니카를 묶어 놓는 방법을 쓰는 경우가 흔했습니다.”
“문명이 발달하며 오르키투니카도 사라졌다고나 할까요. 컴퓨터 자판에 익숙해지면 손 글씨를 제대로 못 쓰게 되는 원리와 비슷하죠.”
나는 픽픽 웃었다. 벌떡 일어나며 부하에게 지시했다.
“이름난 주술사들이란 주술사들은 따로 특별히 모아 감금해. 옷이란 옷은 모조리 벗기고 끼니 외에는 어떤 물건도 만지지 못하도록 해.”
그러고는 근래 두 달간 수집한 마넨의 비디오 기록과 스케줄 보고서도 남김없이 가져오라 일렀다.
주술사들과의 면담에서 그럭저럭 수확은 있었다. 눈으로 투시를 한다라. 한 번 쳐다보기만 해도 모든 것을 알아낸다라. 웃기는 소리였다. 령의 능력이 그 정도라면 지금껏 마넨은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코트비카는 내 손에 죽었다. 에밀렌도 새벽에 잠옷 바람으로 잡혀갔다.
분명 이쪽에서 정보를 빼낸 다른 경로가 있을 것이다. 그 경로는 카운트다운 첫날에 마넨이 회계사들을 만났던 이유와 관련이 있으리라 판단했다.
오늘도 단독으로 42번가를 정찰하며 레이의 헌책방을 지나쳤다. 헌책방은 변함없이 닫혀 있었다. 그다음은 레이가 거주하는 연립주택으로 향했다. 5층 창문에서 불이 새어나왔다. 나는 오랜 시간 창문을 응시했다.
왜.
못 만나는 거지.
차에서 내려, 5분도 안 돼서 도착할 수 있는데. 그곳에 당신이 있는데. 여기서 차문을 박차고 한달음에 계단을 뛰어 올라가 노크를 하고서 문을 열면, 바로 그곳에 당신이 있는데. 단 5분도 안 걸리는데.
나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으로 창문을 지켜보았다. 갑자기 불이 꺼졌다. 일순간 터질 듯이 심장이 고동쳤다.
몇 분이 흘렀을까, 연립주택의 철문이 스르르 열렸다. 어둠속에서 그림자가 서서히 빠져나왔다. 중년 여자였다. 바로 그 뒤에서 레이가 따라왔다. 예의 퀴퀴한 코트와 후드로 온몸을 뒤집어쓴 모습이었다. 그러나 머리카락 몇 가닥이 후드 아래로 삐져나와 나풀거렸다. 짙은 어둠속에서도 그것만은 명확하게 보였다.
핸들을 쥔 손으로 힘이 꽉 들어갔다. 당장 달려가서 레이를 끌어안고 싶었다. 후드를 확 젖혀 아마빛 머리카락을 만지고 싶었다.
역시 그랬다. 레이를 보는 순간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확연히 알 수 있었다. 그를 포기할 수 없었다.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새로 출발하여 그와 함께 완성을 이루고 싶었다.
두 사람은 천천히 길목을 걸어갔다. 한참 걸어가다가 어느 모퉁이를 꺾어 돌아가 골목으로 사라졌다.
어디로 가는 걸까. 레이라고 마냥 놀지만은 않을 것이다. 헌책방도 닫았으니 어딘가로 일을 하러 떠난 것일까.
나는 자동차에 시동을 걸었다. 느린 속도로 도로를 헤쳐 나갔다. 레이가 들어간 골목을 지나치면서 그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둠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