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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L.

사랑합니다.

이 얼마나 달콤한 울림인가. 어느 누구도 내게 저런 말을 해 주지 않았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고백은, 깊은 밤 길을 잃은 나그네의 노크처럼 갑작스러웠다.

메사라가 처음이었다. 애끓는 목소리로, 타오르는 눈동자로, 한껏 구애하는 몸짓으로, 사랑합니다……라고.

사랑합니다…….

메사라의 떨리는 입술에서 흘러나온 말은 마치 주술처럼 나를 묶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계약처럼, 전신을 감싸 안았다. 흡사 진실 같았다. 아니, 진실이었다. 의심할 수 없었다.

그는 진심이었다. 그것이 거짓말일 리 없었다. 독이 발린 사과 따위가 아니었다. 부드러운 손짓과 다정한 키스도 진짜였다. 나만의 착각은 아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도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욕망이 아니었다. 정에 굶주려서도 아니었다. 사랑이었다.

기쁘고도 슬펐다. 살고 싶었다. 좀더 그와 오래하고 싶었다. 그와 함께 손을 잡고 눈보라를 일으키는 하늘 아래를 달려가고 싶었다. 그와 함께, 행복해지고 싶었다. 그러나 알고 있었다. 내 바람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니, 불가능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그 고통을 결코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오랜만에 마라타가 기억났다. 그녀는 임종의 자리에서 내게 말했다.

「강해져라. 네 이름처럼, 흐르는 강물처럼 살아라. 그래야 너는 행복해질 수 있어.」

나는 그때 마라타의 유언을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흐르는 강물처럼 살기에는 내 모든 것이 메말라 있었다. 나는 이미 부패하는 시체와 마찬가지였다. 조용히 떠나야 했다. 죽음의 묏자리에서 왼손에는 흙을, 오른손에는 자존심을 움켜쥐고서 소리 없이 식어 가야 했다.

그것이 내 운명이었다. 자작나무숲을 기억하는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마넨 경이 조용히 되물었다.

“……뭐라고?”

“병원에서 결과가 그렇게 나왔어요. 얼마 남지 않았다더군요.”

긴 시간 동안 적막했다.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은…… 그럼 도대체…….”

“글쎄요. 짧은 시간만이 내 앞에 있다는 것뿐.”

“아니…… 젊디젊은 사람이…… 어쩐지 목소리가 이상하더니만…….”

눈앞에 마넨 경의 심중이 훤히 보였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의심하지 마세요. 십 년간 경을 위해 몸 바쳐 왔습니다. 지금에야 병을 핑계대고 경을 떠날 리 없잖습니까.”

“……미안하네.”

“퇴원은 언제십니까.”

“열흘 뒤.”

“생각보다 늦군요. 울프삭의 파티 스케줄은 그 즈음이면 끝날 텐데요.”

“괜찮아. 열흘 뒤 왕궁에서 대규모 연회가 있네. 왕국건립 기념일이라 거의 모든 귀족이 참석하지. 그때 한꺼번에 해치우면 되네.”

“그렇군요. 그럼 그날 연락 주십시오.”

“괜찮겠는가?”

“저는 십 년간 경을 보좌해 왔습니다. 이대로 떠날 생각은 없습니다. 한 건 크게 터뜨려야지요.”

“허허허.”

마넨 경은 침음만 흘렸다. 아직도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딱한 늙은이 같으니라고…….

나는 고소를 머금었다. 마넨 경은 오랫동안 내 상담만 믿고 탱자탱자 시간을 흘려보냈다. 남은 것이라고는 손바닥의 굳은살뿐이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일 것이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그 말만 하고 통화를 끝냈다.

차를 마신 후 밖으로 나섰다. 옆집에서 돈을 빌려 병원비를 갚은 터였다. 한가하게 쉴 여유가 없었다. 옆집 엘리 씨는 “웬일로 돈을 다 빌리려 하냐, 요즘 책가게도 안 될 텐데. 그럼 내 일이라도 좀 도와주지 않으련?” 했다.

잘된 일이었다. 술집 카운터를 지키는 일이라서 마음에 걸렸지만, 똥오줌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얼마 남지도 않은 시간, 빚을 진 채 떠나기는 싫었다. 메사라와의 일로 그런 부분에 신경이 더욱 곤두서 버린 상태였다.

엘리 씨가 소개해 준 업소는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42번가에서 제일 잘 나가는 명소라고 엘리 씨는 말했다. 밀폐된 룸 전용으로 단체손님만 전문적으로 받았다. 접대부를 제외한 일반직원만 백 명이 넘었다. 건물과 복도 외양은 평범하지만, 우연히 들여다본 룸은 무덤덤한 나도 놀랄 만치 화려했다. 술집답게 일반직원 복장도 특이했다. 남녀공용의 차이니즈 복장이었다. 근무 시간은 저녁 9시 반부터 새벽 6시까지였다.

나는 후문 카운터를 맡았다. 카운터 직원은 2주일간 나오지 못한다고 했다. 입장객에게 룸을 지정해 주고, 나가는 객에게는 돈만 받으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다. 출근하면 탈의실에서 일반직원 제복으로 갈아입고, 카운터에 앉아서 죽치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후문은 비교적 한산했다. 사람의 눈길을 질색하는 나에게는 여러모로 조건이 좋은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2주일 급료가 엘리 씨에게 빌린 돈을 조금 넘는 액수였다.

시간을 흘려보내며 손끝으로 카운터 테이블을 톡톡 쳤다. 내게 남은 시간이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것은 분명했다. 알아본 결과가 그랬다. 자작나무 그림도 그것을 증명했다.

그럼 고문이 닥쳐올 시기는 언제쯤일까.

한 달 뒤……?

두 달 뒤……?

일순간 펑, 소리와 함께 앞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앗!”

나는 화들짝 놀랐다.

“무, 무슨…….”

건너편에서 여자가 카메라를 내리며 웃었다.

“호호호, 굉장히 놀라는군요. 사진 처음 찍어 보는 분 같아요.”

“예.”

“어머…….”

여자가 붉게 칠한 입술을 동그랗게 말았다. 이 업소에서 일하는 매춘부였다. 여자가 카운터로 몸을 구부렸다.

“저는 소니아라고 해요. 사진 찍었다고 불쾌하진 않았죠?”

여자, 소니아에게서 풍기는 향수 냄새가 거북했다. 내가 눈길을 피하자 소니아가 재미있다는 듯 깔깔 웃었다.

“그런데요, 남자 분에게 이런 말은 실례려나. 보통은 예쁘다는 표현 굉장히 싫어하더라구요. 그렇지만 예쁘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얼굴이에요. 자기 알아요? 자기가 여기 온 첫날에 업소 직원들이 난리였어요. 굉장히 신비롭게 생긴 사람이 왔다고, 숲속 정령 같다면서요.”

소니아가 카메라를 들어 보였다.

“제가 이래봬도 사진에 취미가 있어서 한번 찍어 봤어요. 그런데 그쪽, 한 번도 사진을 찍어 보지 않았다는 말, 혹시 거짓말 아니에요?”

“아닌데요.”

나는 말을 흐렸다. 여자가 얼른 떠나 주었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매춘부답게 소니아는 눈치가 빨랐다.

“어머, 신기한 분이네. 그럼 이 사진, 내일 현상해서 보여 줄게요. 기대해도 좋을걸요. 제 사진은 꽤 인정받거든요.”

“……감사합니다.”

다음날, 소니아가 사진을 건네주었다. 나는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기묘한 기분이었다. 낯설고 이상했다. 메사라가 했던 말이 아니라도, 주변 사람들이 가끔 던지는 말로 내 머리카락이 금발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목구비가 이럴 줄은 몰랐다.

이게 메사라가 사랑한 사람인가.

그는 이런 사람을 좋아했단 말인가.

이렇게 생긴 이를 끌어안고, 키스했던가.

타인을 훔쳐보는 감상을 품으며, 사진을 멀거니 응시했다. 가슴 한쪽이 아려오는 느낌이었다. 메사라의 숨결과 손짓이 폐부를 찢으며 올라오는 듯했다.

“좀 흔들렸어요. 그쪽이 소릴 지른 탓이에요, 칫.”

소니아가 툴툴거렸다. 나는 “아뇨, 잘 나왔어요. 고맙습니다.” 했다.

“어때요? 사진으로 보는 자기가 무지하게 희한하지 않아요? 그래서 저는 셀프사진을 자주 찍어요. 각도에 따라 굉장히 다르게 나오거든요.”

“그러네요. 정말 딴사람 같아요.”

“후후. 그렇죠?”

소니아가 이쪽으로 몸을 밀착했다. 나는 헛기침하며 고개를 돌렸다. 이런 반응이 그녀를 더욱 자극한 듯 소니아가 킥킥 웃었다.

“그, 그나저나 여기에 귀족들이 좀 드나드는 것 같던데요. 보통 손님들은 앞문으로 들어오던데, 간혹 후문으로 들어오는 손님들은 대부분 귀족들 맞죠?”

나는 화제를 돌리려 안간힘썼다.

“어머, 눈썰미가 의외로 좋으시네요. 맞아요. 평민으로 위장한 귀족들이 여기 많이 찾아와요. 귀족이라고 매일매일 칵테일 파티만 즐길 리 있나요. 가끔은 평민들 방식으로 음란하게 놀고 싶겠죠. 게다가 여긴 42번가에서도 화끈하기로 소문난 곳이거든요. 그런데 정말 어떻게 알았어요? 혹시 전생에 홈즈였어요?”

“홈즈라면 저도 좋게요.”

나는 쓰게 웃었다. 마넨 경의 일을 봐주며 어쩔 수 없이 귀족들에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자기가 봐도 이 업소 보통이 아니죠? 여기 사장이 중국계예요. 그래서 직원 옷도 차이니즈 스타일로 입히고, 업소 인테리어도 풍수에 맞춰서 했다나. 이 업소에서 일하는 여자들도 유난히 동양계가 많아요. 저도 부모님이 베트남 사람이에요. 동양여자의 방중술에 환상을 품은 멍청한 백인남자들이 우리의 먹잇감이죠.”

소니아가 내 어깨에 대뜸 팔을 둘렀다.

“그리고…… 저는 여기서도 소문난 여자예요. 궁금하지 않아요?”

때맞춰 들이닥친 객들 덕분에 상황을 간신히 모면했다. 소니아가 아쉬운 표정으로 “아이. 그럼 좀 있다가 봐요.” 하며 일어섰다. 아무래도 소니아에게 내가 게이임을 밝혀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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