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 .M─ (30/101)

30 .M─

처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그때의 떨림을 기억했다. 레이가 후드를 젖힌 첫 순간, 가슴 한구석에서 일어나던 미동을 기억했다. 레오파드의 제의에 두말없이 일어서는 레이에게 품었던 어슴푸레한 실망감도 기억했다. 레이의 아래로 삽입한 순간, 내가 처음임을 확신하며 느낀 유치한 만족감도 기억했다. 밤이 거듭될수록 감정은 커져만 갔다. 그러나 나는 그 감정의 이름을 몰랐다.

마녀가 보였다. 프랑스인 형사처럼 무작정 거리를 걸어가던 내 앞에 우연히 나타난 어느 노파. 어둠이 장악한 어느 골목에서 마녀는 하필 레이의 코트와 똑같이 생긴 퀴퀴한 코트를 걸친 채 웃고 있었다.

그쪽이 아가씨를 참 좋아하는구려…… 쯔쯔쯔.

마녀의 속삭임은 마술처럼 나를 사로잡았다. 그것은 단서였다. 마치 소금이 섞인 커피를 건네듯이, 감정의 파편을 헤매는 내게 확신을 가지라는 듯이, 소리를 질렀다.

인생에 돌이킴이란 존재하지 않아. 모든 비극은 어둠속을 떠도는 바람처럼 되돌아온다네.

속삭임은 조각칼처럼 깊고 날카롭게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그때마저 나는 그 감정의 이름을 몰랐다.

가벼운 마음으로 병실 문을 연 순간, 창턱에 앉은 레이가 시야로 들어왔다. 가슴이 철렁하던 이유가 그 위험한 상황 때문만은 아니었다. 대수롭지 않게 “왔어요?” 하는 목소리에서 문득 향기를 맡았다. 익숙한 냄새였다. 그건 바로 죽음이었다.

그때야 비로소 보였다. ‘흰 벽에 진 검은 얼룩’이. 그것은 마치, 오랫동안 눈앞을 가리고 있던 장막이 확 치워지는 듯한 감각이었다. 잇따르는 또 하나의 발견. ‘물건의 푯말이 뒤바뀐 청과물 가게’.

마녀가 가리킨 죽음은 내가 아니었다. 레이였다. 삶이 나였다. 에너지가 넘치고 사방으로 뛰어다니는 Messara가 삶이었다.

죽음이 지나치게 강하네.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보여.…….

곧바로 알아차렸다. 뒤이어 본능적으로 부정했다. 그 실체를 의심했다. 난생 처음으로 느끼는 이 감정의 정체를 믿을 수가 없었다. 홧김에 섹스를 저질러 버렸다.

레이는 내게 이름조차 묻지 않았고 우리의 관계는 내 일방적인 수작질로 지속되어 왔다. 레이에게는 잘나신 양반이 존재했다. 나는 주변인일 따름이었다. 저따위 상극빈자가 나를 뒤흔드는 주범이라는 사실도 용납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섹스 후 무시당하며 똑똑히 깨달았다. 온몸으로 지각했다. 알량한 자존심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거절당하는 괴로움이었다.

시트를 뒤집어쓴 레이에게 말을 던졌다. 어떤 대답도 없었다. 그런 그가 끔찍하게 싫었다. 더 끔찍한 것은 희디흰 시트였다. 시트를 뒤집어쓴 저 모습이 주검 같았다. 몇 시간에 걸쳐 그를 설득하고자 애썼다. 마지막까지 실패했다. 그 순간에야 나는 절망이라는 감정을 이해했다.

결국 집으로 돌아갔다. 설마, 하는 의심의 찌꺼기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나로서도 머리를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밤새워 생각을 거듭했다. 미로를 헤매는 느낌만 맛보았다. 만취 상태로 독살스런 달빛 아래를 걸어가는 것만 같았다. 의심과 놀라움과 노여움이 범벅된 복잡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어떤 감정이 있었다. 그것은 한없이 거대하고 무거운 감각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사그라지기는커녕, 오래될수록 향이 짙어 가는 술처럼 강해지기만 했다. 나는 그것의 이름을 알았다. 이제는, 그 이름을 알았다. 그러나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기에는 망설임이 들었다. 두렵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했다.

이튿날 병원에서 레이가 떠나 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떠나 버렸다. 이 한 마디에 의심은 남김없이 증발하고, 그 빈자리로 확신이 들어찼다. 떠나 버렸다……. 그것은 마치 최면처럼 내 안의 무엇인가에 주문을 걸었다.

레이의 집으로 미친 듯이 자동차를 몰았다. 치닫는 분노 속에서도 감정은 더더욱 명확해졌다. 눈을 뜨고 뚜렷하게 형체를 잡아 갔다. 그리고 샅샅이 해답이 나왔다. 이유를 알 수 없이 시시때때로 치솟던 열기의 정체가. 처음에는 우습기만 하던 그의 궁상이 왜 점차 참을 수 없으리만치 싫어졌는지도.

나는 레이의 온몸에 베일처럼 서린 어둠이 증오스러웠던 것이다. 그 베일을 내 손으로 거두어 버리고 싶었다. 그 빈자리에 신부의 면사포 같은 흰 빛을 씌워 주고 싶었다. 퍼즐같이 조각을 붙여 나가는 마녀의 예언이 두려웠다. 그것이 언령이 되지 말아 주길 간절히 바랐다.

처음이었다. 감정도, 말도, 행동도, 모든 것이 최초였다. 소름끼치는 떨림이 온몸을 파고들었다. 레이의 집으로 향하며 몇 번이고 연습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레이의 눈동자가 정지했다. 어둠속에서 돌연히 쏘아오는 전조등 불빛에 놀라 얼어붙은 행인처럼, 그냥 그렇게 멈추었다. 간절히 기대했던 기쁨도, 승낙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텅 비어 있었다.

메마른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럴 리 없어요.”

레이가 내 손을 떨쳐냈다.

“머리를 식히는 게 좋겠군요, 메사라.”

무성의한 어투였다.

마녀의 예언은 적중했다. 기어코 과녁을 맞히고 말았다. 내 연애사업은 시작도 못해 보고 검은 커튼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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