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L.
병실을 방문한 메사라가 눈썰매를 타자고 대뜸 말했다.
“웬 눈썰매?”
“웬 눈썰매라뇨? 그렇게 열심히 바깥을 쳐다보면서 저건 안 보였나 봐요?”
메사라가 창밖을 턱짓했다. 병원 왼편 언덕이 눈썰매를 타는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언덕 꼭대기 조명탑에서 뿜어 나오는 노란 불빛이 주변을 환하게 밝혔다.
“이 밤에요?”
“뭐 어때서요? 이 밤에도 사람들이 저렇게 많이 나왔잖아요. 간만에 내일 아침까지 눈이 안 온다고 사람들이 난립니다. 간호사도 요양환자는 눈썰매 타는 정돈 상관없다고 하던데요. 같이 나가죠. 나도 눈썰매 타 본 지는 오래되어서 근질근질하네요.”
“혼자서 타요. 나는 눈썰매 한 번도 타 본 적이 없거든요.”
“아, 예. 눈썰매를 한 번도 타 본…… 예?”
메사라가 커피를 삼키다 말고 쿨럭거렸다. 나는 쓰게 웃었다. 저런 반응이 당연했다. 눈의 나라에서 눈썰매를 한 번도 타 본 적 없는 사람은 얼음집에 살지 않는 에스키모나 다름없었다.
메사라가 황당해하며 이쪽을 응시했다.
“아니, 정말로 눈썰매를 한 번도 안 타 봤어요?”
“예.”
“얼음낚시는요? 스케이트는요? 스키는?”
“모두 한 번도 안 해 봤어요.”
“혹시 외국 스파입니까?”
“하나도 안 웃기는 농담이군요. 그리고 바깥에 입고 나갈 외투도 없어요.”
“정말인가 보네요. 이야, 이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오늘 눈썰매를 태워 줘야겠는데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옆 병실에서 외투를 빌려올 테니까.”
강제로 끌려나오다시피 밖으로 나섰다. 눈썰매장은 인산인해였다. 병원 앞이라 환자들도 드물지 않았다. 얼굴이 퉁퉁 부은 젊은이들이 걸친 코트 아래로 환자복 바지가 드러났다. 가이거에게 두들겨 맞아 입원한 부랑자들일 것이다. 저런 꼴을 하고도 신나게 눈썰매를 타는 모습이 어딘지 웃겼다.
메사라는 몹시 흥겨워하며 썰매를 골랐다. 이런 게 마찰력을 줄이는 썰매라느니, 저런 썰매는 겉보기만 좋을 뿐 재미는 없다느니 하고 떠들었다.
기운도 넘치시지…….
낮에는 시위대를 때려잡으러 다니고, 밤에는 나를 찾아와 흥청거렸다. 대단한 체력이었다. 손재주가 뛰어나고 눈썰미도 좋고 호기심까지 넘쳤다. 여러 모로 부러울 때가 많았다.
메사라의 큰 단점이랄 수 있는 역한 취미가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고소를 머금었다. 나름대론 공평한 세상인가. 뭐, 혼자서 타기는 뭣할 테니 동행이나 해 주자…… 그래서 별생각 없이 눈썰매를 탔다.
스타트 10초 만에 후회했다. 눈썰매에서 평생 지를 고함을 다 친 듯했다. 내 반응에 메사라가 마구 웃었다.
“하하하! 그렇게 눈 감으면 더 무섭죠. 눈 뜨고 앞을 쳐다봐요.”
메사라는 연달아서 세 번이나 눈썰매 코스를 돌았다. 세 번째에는 나도 익숙해져서 즐거웠다.
“어떻습니까? 재미있었어요?”
정신을 차려 보니 온몸이 땀투성이였다. 가서 잠이나 자겠다는 나를 메사라가 붙들었다. 바로 근처에 일식집이 있더라며 억지로 끌고 갔다. 메사라는 참치회를 주문했다. 난생 처음 젓가락을 잡아 보았다.
“식탁 위의 서커스랄까요. 검지를 잘 움직여야 합니다. 이렇게 해 봐요.”
메사라가 젓가락 잡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서툴기 짝이 없는 내게 그가 또 배꼽을 잡았다. 어쩔 수 없다며 종업원에게 포크를 부탁했다.
“별걸 다 아는군요, 그쪽은.”
“제가요?”
메사라가 능숙히 젓가락을 놀리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글쎄요. 뭐, 이 정도는 기본 아닙니까? 맛있는 음식이라든가 적당히 즐거운 놀이라든가. 그나저나 회 어떻습니까.”
“맛있어요.”
“흠…….”
메사라가 특유의 코웃음을 흘렸다.
“식도락에는 관심이 없나 봐요, 그쪽은.”
“진짜 맛있는데요.”
“표정은 그게 아닌걸요. 그냥 배나 채우려 먹는 사람 같은데요.”
“참치회는 처음이라서 그래요.”
“처음일수록 호기심을 품어야 자연스럽지 않습니까.”
그 말에 나는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런가요? 호기심을 품어야 자연스러운가요?”
“대개는 그렇지요. 아, 물론 다수의 성향을 강요하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시죠.”
“무슨 뜻인지 알아요.”
메사라는 더는 말을 던지지 않았다.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담배를 뽑아 물고 불을 붙였다. 종업원이 다가와서 “여긴 금연입니다.” 했다. 메사라가 “잠깐 자리 좀 비우겠습니다.” 하며 밖으로 나갔다. 나는 쓰게 웃었다.
처음일수록 호기심을 품어야 자연스럽다라…….
씁쓸했다. 참 삭막하게 살아왔구나, 내가.
사막을 가 보지 못한 자는 모래의 뜨거움을 알지 못한다. 바다를 가 보지 못한 자는 바닷물의 짠맛을 알지 못한다. 내가 딱 그 짝이었다.
맛을 음미하고자 음식을 먹는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 끔찍하기만 한 폭설이 유희도구가 될 수 있다는 생각도 눈썰매를 타기 전까지는 하지 못했다. 방에 처박혀 병마에 시달리는 동안, 놓쳐 버린 것이 지나치게 많았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창밖을 쳐다보았다. 눈썰매장 언덕을 따라 하얀 자작나무숲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차라리 몰랐다면 더 좋았을 것을…….
병원으로 돌아가면서 메사라와 나는 침묵했다. 언덕을 내려가는 인파가 소란스러웠다. 가족 단위도 많았고 병원에서 나온 환자들도 섞여 시끌시끌했다.
“……오늘,”
나는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고마웠습니다.”
“흠.”
메사라가 또 특유의 코웃음을 흘렸다. 뭔가 다른 말을 기다리는 듯했으나 나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가슴 한구석에 구멍이 난 것만 같았다. 솔직히 비참했다.
몰아치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갈가리 나부꼈다. 그 모습이 검은 해수의 흐름에 따라 일렁이는 해초 같았다. 죽어서 부패해도 인간의 치아와 머리카락만은 오래 남는다고 했던가. 이십칠 년 인생에서 키워 온 것이라고는 머리카락뿐임을 깨닫자 자신이 측은해졌다.
같잖은 자기연민이었다. 동정할 가치가 없는 인생인데도 모닥불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자기연민이 혐오스러웠다.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을 탓하기 어려운 것이 인간의 습성이니까. 나는 그런 굴레에서 벗어날 만큼 초연한 인간이 아니었다.
갑자기 메사라가 옆에서 내 허리를 감아 안았다. 언덕을 내려가는 대학생 연인처럼, 한쪽 팔로 내 허리를 껴안아 끌어당겼다. 우습게도 기분이 가라앉았다. 메사라의 다정한 몸짓이 좋았다. 결국에는 또 이를 드러낼 역한 취미를 알면서도, 반쯤은 속아 주고 싶었다.
어쩌면.
어쩌면…….
하찮은 기대감을 품는 자신이 우습고 한심했다. 메사라는 잔인하고 이기적인 가이거 대원이다. 입으로는 괜찮냐고 물으며 계속 내 몸으로 욕구를 해결하던 남자다. 처음부터 그랬고 지금도 그랬다.
정신 차려, 레이.
잊으면 안 돼. 자작나무숲을 떠올려.
“와아. 저렇게 머리가 긴 사람은 처음 봐.”
앞에서 뛰어오던 아이가 이쪽을 쳐다보며 소리쳤다. 나는 급히 정신을 차렸다. 메사라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사람들이 쳐다보고 있어요. 그거 알아요?”
“이놈의 머리카락 때문이겠지요.”
나는 낭패감을 느끼며 말했다.
“하하하. 머리카락 때문만은 아닐 텐데……. 하긴, 머리카락이 제일 눈에 띄긴 해요. 밤에도 눈부시게 빛나는 금발이니까.”
“금발인가.”
“이런 밤에는 은발처럼 보이기도 하지요.”
“그런가 보군요.”
나는 시큰둥이 대꾸했다.
문득 메사라의 그림자가 가까이 닿았다. 천천히 입술이 포개졌다. 부드럽고 따뜻한 키스였다. 나는 눈을 감았다. 입술로, 그 안쪽으로 파고드는 열기를 느꼈다. 한없는 어둠에 에워싸인 감각 속에서 그 감촉만은 생생하게 느꼈다. 가슴 속으로 빨갛게 달아오르는 불이 침입하는 듯했다. 메사라의 손짓이 내 뺨에서 턱으로 내려갔다.
시간이 정지한 것 같았다. 인파의 시끌시끌한 소리도 멀리 떨어졌다. 잔혹한 남자였다. 끝내 내게 헛된 기대를 품게 만들어 버리는.
메사라가 다시 내 허리를 끌어당겼다. 그러고 말없이 언덕을 내려가다가 돌연 방향을 바꿨다.
“저기 호텔이 있어요.”
그가 짓궂게 속삭이며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쓰게 웃고 말았다.
그래. 이런 남자지.
메사라와 걸음을 맞춰 가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멀리서 자작나무숲이 보였다. 눈처럼 하얀 숲에서 차디찬 바람이 흐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