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M─
폭설이 멎은 오후 늦게까지 병원에 있었다. 레이는 말없이 창문만 쳐다보았다. 예전에도 추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밖으로 나와 먼 곳을 응시하던 터였다. 그 표정이 어둡고 우울했다. 특히 눈빛이 이상했다. 흡사 삶을 포기한 말기 암환자 같았다.
나는 담배를 뽑아 물고 불을 붙였다.
아직 젊디젊은 사람이 왜 저러지.
낯설었다. 나로서는 처음 마주치는 부류였다. 주변에는 힘이 끓어오르는 이들뿐이었다. 뿐이다 못해 넘쳐났다. 울프삭 경을 비롯해 직장동료들 그리고 숱하게 마주치는 적들까지, 모두 장애물 따위 단박에 무너뜨릴 기세로 사납게 질주하는 트레일러 같았다.
저런 레이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멱살을 잡고 흔들고 싶으리만치 싫었다. 이해가 안 갔다. 스물일곱이면 한창 좋을 때 아닌가?
나는 레이가 내 어깨에 팔을 감고 적극적으로 매달릴 때가 좋았다. 생기 넘치게 반응할 때 제일 즐거웠다. 간밤에도 그랬다. 솔직하게 기뻐하고 좋아했다. 마음이 후해진 나는 도를 넘지 않는 선에서 섹스를 끝냈다.
그러나 날이 밝자 레이는 무신경한 태도로 돌아온 정도를 넘어 이쪽을 아예 투명인간으로 취급했다. 실컷 하룻밤을 잘 즐겨 놓고 이게 뭔 꼴인가 싶었다.
웬 다 죽어 가는 표정을 하고 그래…….
하나뿐인 인생, 적당히 즐기며 살아야 제 맛 아닌가?
차가 더럽게 막혔다. 눈이 멎었는데도 도로가 주차장이었다. 나는 닳아 버린 담배를 비벼 끄고 다시 한 개비를 뽑았다. 자욱하게 들어찬 담배연기로 공기가 탁했다. 차 창문을 내렸다. 막 건져낸 익사체처럼 차갑고 축축한 바람이 몰려왔다.
병원에서 레이가 해 준 이야기가 또 떠올랐다.
어느 정령이 있어요. 이 정령은 십 년마다 한 번씩 어딘가에서 눈을 떠요. 언제나 같은 곳에서 눈을 뜨죠. 싸늘한 기운이 흐르는 커다란 저택이에요. 그곳에서 눈을 뜨면 정령은 사람으로 변해 있어요.
그리고 정령을 맞이하는 남자가 있어요. 남자는 자신이 남편이라고 말해요. 사람이 된 정령과 남편은 사랑을 나누죠. 십 분이 지나면 정령은 다시 숲으로 돌아와요. 정령은 왜 그런 일이 생기는지 이유를 알지 못해요. 그저 무심할 뿐……. 그리고 매우 슬퍼하는 남편만 기억에 또렷할 뿐.
그런 일이 오십 년간 반복되죠. 그 뒤부터 정령은 십 분의 환생을 하지 않게 되었어요. 왜 그랬을까요?
「글쎄요?」
나는 커피를 마시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남편이란 작자가 안됐다는 생각밖에. 마누라를 십 년에 한 번밖에 못 보는 데다가 그 짓도 십 분 만에 끝내야 한다는 소리 아닙니까? 바쁘겠는데요, 하하하. 그런데 정령이 왜 오십 년 뒤에는 환생을 하지 않았을까요. 저도 궁금하군요.」
남편이 죽어서겠지요. 인간의 수명은 한정되어 있으니까.
「간단하군요. 그런데 그 이야기의 주제가 뭡니까?」
나도 몰라요.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땐 남편이 불쌍하다는 생각만 했어요. 그렇지만 곰곰이 돌이킬수록 정령이 십 년마다 환생하는 이유가 궁금하더라구요. 그것도 고작 십 분. 그때마다 어김없이 나타나는 남편.
「재혼은 안 했답니까?」
인간에게 무심한 정령이 거기에 관심을 가질 리 없죠.
「금슬이 좋은 부부였나 보군요. 그러니까 정령이 되어서도 십 년마다 환생하여 남편에게 나타나지 않았을까요.」
반대일 수도 있겠지요.
「반대라뇨?」
남편이 아내에게 큰 죄를 지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뒤늦게 후회했는데 그땐 마누라가 꼴깍한 상태다? 그래서 벌을 받는 거다?」
레이는 이렇게 말했다. 정령이 속 편해 보인다고 했다. 십 년에 한 번씩 십 분만 환생하여 한 남자를 만나러 가는 데는 큰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금슬이 좋아서이든, 남편이 죄를 지어서이든, 혹은 아내 쪽이 죄를 지어서이든, 정령은 그저 무심할 뿐이니 무슨 상관이겠냐고.
「하지만 남편은 속앓이가 굉장할 것 같은데요.」
「그것도 정령이 알 바는 아니지요.」
뒤에서 경적이 울렸다. 나는 급히 핸들을 잡았다. 그새 차 행렬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몇 분도 못 가서 또 멎었다. 세 시간 안에 집에 도착하기는 그른 듯했다.
담배를 끄려고 보자 재떨이가 국화꽃이었다. 바닥을 굴러다니는 비닐봉지를 집어 재떨이를 비웠다. 담배를 또 뽑아 물고 불을 붙였다. 라디오 볼륨을 높이자 마넨의 소식이 나왔다. 집에서 요양하던 마넨이 엊그제 병원으로 옮겼으며 아직까지는 차도가 없다고 했다.
나는 픽픽 웃었다. 마넨의 쇼가 가소로울 따름이었다. 의원선출 대회를 염두에 둔 개수작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날 회동 때 열 받아서 드러누웠는지도?
여기에 생각이 닿자 상당히 즐거워졌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담배를 깊이 빨았다.
정령이라…….
확실히 속이야 편하겠군.
같은 사내로서 남편에게 동정을 금치 못할 따름이었다. 말이 되는가. 십 년마다 십 분 만나는 것도 모자라 그 짓거릴 오십 년이나 지속한다? 말이 오십 년이다. 그 긴 시간 동안 고작 다섯 번 만나는 것이다. 지옥 아닌가?
상상조차 끔찍했다. 그런 일은 가능성조차 제기하기 싫었다. 아주 불쾌한 이야기였다. 뚜렷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되씹을수록 내부에서 뭔가가 들끓었다.
남편이 아내만 기다리며 그 긴 세월을 기다렸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분명 재가를 했으리라 추측했다. 재가하고는 십 년마다 옛 마누라를 만났겠지. 세월이 멈춰 버린 아내와 짧은 밀회를 즐기는 것도 색다른 맛이었을 테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그게 사람이 견딜 일인가.
궁상이다, 궁상…….
혀를 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딴 괴담을 진지하게 읊조리는 레이가 측은했다. 저러고 사니까 그 나이까지 극빈자 신세를 면치 못하는 것이다. 나처럼 바쁘게 살아 봐. 그따위 청승맞은 이야기에 몰두할 여력이나 생길지.
다음 방문 때는 레이에게 눈썰매나 태워 줄까 고려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눈썰매를 마지막으로 타 본 지가 언제인지 아득했다.
자동차 행렬이 다시 움직였다. 나는 한결 가벼워진 기분으로 핸들을 잡았다. 눈썰매를 탈 때 레이에게 잘나신 양반에 대해 슬쩍 캐묻기로 마음먹었다.
출근 첫날 구레나룻은 부장들에게 온종일 무시당했다. 당연했다. 부장 전원이 여기 오기까지 3년이나 길바닥에서 구르고 깨졌다. 아무나 차지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같잖은 자부심으로 치부해도 상관없었다. 가이거는 일반대원에서 대장으로 올라가는 데만 평균 2년은 걸렸다. 공무원도, 정식군인도 아닌 우리는 기껏 대장, 부장, 본부장 따위의 직급이나 달고 다녀야 했다. 그러나 그 직급을 따기까지 들인 노고를 생각하면 이 정도 자부심은 당연했다.
열 받은 부장들과 저녁에 단체모임을 가졌다.
“게이라고?”
보드카를 마시던 재규어가 박장대소했다.
“잘 빠진 몸매도 구경하고, 울프삭 경의 눈에도 들고, 흐흠. 어쩐지 나보고 가면을 좀 벗어 보지 않겠냐며 훑어보더라니.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겠는데.”
리져드가 샤쉴릭을 뜯으며 코웃음을 쳤다.
“그나저나 말이야, 그 자식이 릴리즈에서 빠르게 한자리 꿰찬 이유를 접했거든. 어제 보고서로 들어왔더라고.”
레오파드에게 부장들의 눈길이 쏠렸다. 나는 보드카 잔을 흔들며 말했다.
“보고서로 들어올 만큼 특이한 사항이야? 단순히 집안 좋고 인물 잘나서가 아니라?”
“그것도 이유긴 하지. 한데 아주 재미난 이유가 또 하나 있더라고. 그놈 왈 자기가 아리사 가문 12대의 환생자라나 뭐라나, 그렇게 떠들고 다닌다더군.”
“누구의 환생? 푸하? 그건 또 뭔 헛소리야? 하여튼 귀족나리들이란…….”
부장들이 실소했다. 레오파드가 담배에 불을 붙이며 으쓱 어깨짓했다.
“뭐, 귀족나리들께서 혈통, 계보, 이런 거에 목숨 걸잖아. 아리사 가문의 12대면 샤이칸 아리사라고 하더라고. 카더라 통신이긴 한데, 도련님이 어릴 때 좀 남다르긴 했나 봐. 그 집안이 그때만 해도 재력이 대단하진 못했는데, 도련님이 샤이칸 아리사가 숨긴 보물을 찾아내서 지금 이렇게 부귀하게 되었대나 어쨌대나…… 믿겨져?”
즉각 “아니.”, “전혀.”, “개수작 말라고 해.” 등등의 반응이 빗발쳤다.
“라스푸친이 따로 없군.”
나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었다.
레오파드가 팔을 들어 흔들었다.
“라스푸친이면 물건도 내 팔뚝만 하게? 바지 앞섶 보니까 그렇게 튼실한 물건은 아니던걸, 후후후. 어쨌든 그런 이유로 릴리즈 멤버들을 좌라락 녹여 놓았대. 귀족들이 그거 유난히 좋아하잖아. 전생 찾기 놀이. 그런데 도련님께서 용맹을 떨친 샤이칸 아리사의 환생이라니 혹할 수밖에.”
“그런 잡소릴 진지하게 믿는단 말이야, 귀족나리들이?”
벌쳐가 어이없어하며 웃었다. 그때까지 줄곧 조용하던 쿠퍼헤드가 불쑥 중얼거렸다.
“티베트식 놀이인가…….”
쿠퍼헤드는 부장들 중 유일하게 대학을 졸업했고 소속도 정보부였다. 나는 담배를 한 개비 뽑아 물었다.
“갑자기 웬 티베트?”
“티베트와 이 나라 왕실은 깊은 관련이 있거든. 티베트에 흥미로운 전통이 있어. 티베트 불교를 대표하는 종파인 겔루크 파의 법왕이 달라이 라마인데, 이 달라이 라마를 뽑는 방식이 상당히 이채롭지. 그게 뭔지 알아?”
“우리가 알 리 있나.”
“바로 전생활불(轉生活佛)이야. 즉 달라이 라마가 환생한 자를 찾아 법왕에 올리는 거지. 달라이 라마가 죽으면 레팅 린포체라 하여 ‘영적 스승’이라는 의미를 지닌 섭정이 달라이 라마의 환생자를 찾을 때까지 업무를 관장하고.”
세상에 정신 나간 놈들이 참 많았다.
“왕국을 건립한 태조가 티베트에서 건너왔다는 설이 있거든. 때문에 왕국은 초창기부터 동양적인 법제와 전통이 강했다고 해. 왕국의 로터스가 섭정에 준하는 강력한 권한을 휘두르게 된 연유도 티베트의 레팅 린포체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학설도 있지. 어쨌든 그래서 귀족나리들께서 옛날부터 전생 놀이에 관심이 많았다고 하더군. 우리가 보기엔 웃음거리에 불과하지만 막상 그들은 굉장히 진지할걸.”
나는 담배를 빨다 말고 기침을 쿨럭 거렸다. 폭소가 터졌다. 레이와 나눈 대화가 떠올라 자제할 수가 없었다.
“뭐야, 스네이크? 내 말이 그렇게 웃겨?”
쿠퍼헤드가 벌게진 낯으로 말했다. 나름대론 진지하게 늘어놓은 설명에 박장대소가 돌아오니 열 받은 모양이었다.
나는 보드카를 마시며 웃음을 삭였다.
“아아, 다름 아니라. 네 말대로라면 그럼 잘난 우리 왕은 사실 티베트에서 건너온 동양인이라는 소리잖아? 이거 정말 배꼽 잡는 이야긴데.”
“뭐, 그렇지. 왕실에서 내려오는 태조 초상화를 보면 영락없는 동양인이야. 왕실 측이야 당시 초상화 기법이 다 그랬다고 박박 우기지만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격이지. 어딜 봐도 동양인인 왕 옆에 서 있는 개국공신들은 전부 코 뾰족한 색목인이거든, 흥.”
부장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다들 주먹으로 테이블을 쳐대며 데굴데굴 굴렀다. 나도 담배를 한 개비 또 뽑아 물며 고소했다. 이러다가 진짜로 구레나룻이 울프삭 경의 양자가 될지도 모르겠군.
쿠퍼헤드의 말대로라면 제법 교묘하지 않은가. 귀족들에게 금방 호감을 얻어낼 화제로 접근하여 재빠르게 한자리 꿰어찬다라. 구레나룻의 속셈이 훤히 보였다. 조만간 울프삭 경 앞에서도 ‘사실 나는 샤이칸의 고귀한 환생자다’ 운운할 것이다. 구레나룻이 혹시 전생에 라스푸친 아니었는지 진지하게 의심스러웠다.
쿠퍼헤드가 내 잔으로 보드카를 따르며 말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또 있어. 샤이칸 아리사는 당시 왕실 외척으로 개인사병 조직을 만들었단 말씀. 일명 샤칸사. 울프삭 경이 바로 그 샤이칸 아리사의 개인사병 조직을 본 따서 가이거를 창단했고 말이야. 외척에 개인사병 조직까지 울프삭 경과 샤이칸은 비슷한 점이 많아. 도련님이 진짜 샤이칸의 환생자라면 울프삭 경에게 관심이 쏠리겠지. 자신을 얼마나 능가할지 원조로서 당연히 궁금하지 않겠어?”
그 말에 지프 구석에 처박혀 벌벌 떨던 구레나룻이 떠올랐다. 나는 픽픽 웃었다.
“어림없는 수작. 놈은 그저 사기꾼일 뿐.”
“당연하지.”
레오파드가 잔을 들었다. 부장들이 빙긋 웃으며 다함께 잔을 부딪쳤다.
보드카를 한 번에 남김없이 들이켰다. 나는 아리사, 아리수, 뇌까리며 언제쯤 구레나룻을 골탕먹여 줄까 궁리했다.
코트를 벗어던졌다. 간만에 술을 진탕 퍼마셨더니 골이 지끈거렸다. 넥타이를 느슨히 풀며 소파에 앉았다.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왕세자비 건과 의원선출 대회까지는 아직 시일이 넉넉했다. 선왕 훙서 이후 지금껏 울프삭 경은 왕실과 확실한 외척지연을 맺지 못했다. 최근 친인척에게 입양시킨 시골처녀가 왕세자비로 오르지 못하면 큰일이었다. 자칫 마넨에게 울프삭 경의 세가 밀리는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었다. 어디까지나 0.1퍼센트의 가능성이었다. 그 전에 마넨은 내 손에 죽을 테니까.
전통적으로 왕세자비 선출에는 왕비의 입김이 드셌다.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았다. 왕비의 불륜사진이라면 내 업무실에 넘쳐흘렀다. 매일아침 왕비에게 시녀가 뚜껑이 달린 은쟁반에 샐러드를 올려 바쳤다. 노출수위가 가장 높은 불륜사진을 선정해 샐러드 접시 아래에 끼워 보내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어쩌면 부녀가 나란히 사이좋게 입원하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하하하. 이거 기대되는걸.
가벼운 기분으로 서재로 향했다. 컴퓨터 앞에 앉아 고급 저택을 물색했다. 엊그제, 병원에서 집으로 향하는 내내 헤아렸다. 레이가 궁상떠는 꼴을 더는 봐주기 싫었다. 뭐든 적당해야 봐줄 만한 법이다. 십 년마다 십 분이 어쩌고? 돌이킬수록 어이가 없었다. 이쯤 되면 중증이었다. 궁상의 황제였다.
퇴원하는 대로 레이를 정부로 들어앉힐 계획을 굳혔다. 동거는 내 신분상 어림도 없으니 관두었다. 우선 레이의 거주지부터 옮기기로 했다. 나는 42번가의 그 집이 아주 좆같았다. 초인종도 없는 문부터가 염병이었다. 노크를 하노라면 레이의 이웃들이 이쪽을 흘끔흘끔 곁눈질했다. 흡사 저글링에 열중하는 서커스 원숭이 쳐다보듯 했다. 진정 빌어먹을이었다.
마침 매물이 몇 건 있었다. 레이와 헤어져도 집은 그의 소유로 해 줄 심산이었다. 이왕 하는 선물, 헤어진 후에도 레이가 나를 두고두고 그리워하게끔 괜찮은 집을 골랐다. 이 정도는 대가로 지불해야지 싶었다.
17번가의 저택이 적당할 듯했다. 본부와 가깝고, 전망도 빼어나고, 시세도 죽 올라갈 가능성이 컸다. 내친 김에 집을 더 골라 보았다. 세 채를 구입해 두 채 남기고, 한 채는 레이에게 주기로 결정했다.
나는 모니터의 저택 사진을 잠자코 응시했다. 단장하면 꽤 쓸 만해 보였다.
내 덕에 팔자 핀 줄이나 알아…….
나는 담배를 뽑아 물며 지그시 웃었다.
어둠속에서 가로등 불빛이 긴 줄을 그으며 사라졌다. 저녁 일곱 시였다. 오늘도 레오파드는 42번가 정찰에서 빠졌다. 연일 파티를 여는 울프삭 경 때문에 요즘에는 나 혼자서 42번가를 정찰하기 일쑤였다.
며칠 만에 폭설이 그친 날이었다. 42번가는 웃음과 분내에 사로잡혀 있었다.
령…….
나는 자동차를 몰며 생각에 잠겼다.
마넨에게 실패를 경험한 후, 령에 대한 내 생각을 처음부터 재검토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간 레이의 입원이다, 구레나룻이다 뭐다 해서 정신이 없었다. 간신히 여유를 되찾은 때가 오늘이었다.
나는 라디오 볼륨을 낮추고 담배를 뽑아 물었다. 담배에 불을 붙이며 교차로를 꺾어 들어갔다.
마넨에게 기습을 당한 뒤 집요하게 머릿속을 헤집었던 것은 ‘어떻게?’ 한마디였다. 보안은 철저했다. 그렇다면 내부의 적뿐이었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동료 레오파드에게도 디데이를 닷새 앞둔 시점에야 본심을 털어놓았다. 투입한 대원들도 내 사람이라 확신하는 놈들, 그중에서도 입이 무거운 독종들뿐이었다. 심지어 투입 대원들이 전체적인 그림을 파악하지 못하게끔 개별적으로 배치했다.
그럼 검사들만 남는다. 그러나 그들은 남김없이 마넨에게 수장당하고 말았다.
필터까지 닳아 버린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한 개비를 또 뽑아 불을 붙였다. 깊숙이 한 모금 빨아 당겼다.
지혜는 우연에 의존해야 하는 법이라고 했나…….
도둑을 뒤쫓던 어느 프랑스인 형사 이야기를 되새겼다. 소금이 섞인 커피를 주저 없이 실마리로 단정하여 추적한 끝에 도둑을 잡아냈다고 했던가. 그러나 나는 프랑스인 형사 따위가 아니었고, 직관도 신봉하지 않았다. 우연은 더더욱 믿지 않았다. 과학사에서 이따금 일어났던 기념비적인 발견을 제외하면, 어떤 결과든 필연의 소산이었다.
그러나 방법은 현재 이것뿐이었다. 나는 머리를 차갑게 식혔다. 있는 것을 그대로 직관하려 노력했다. 비밀이 샐 가능성은 없었다. 바늘구멍만큼도 없었다. 그런데도 비밀이 새어나갔다. 그럼 남은 것은 하나였다.
소금이 섞인 커피를 찾으러 나설 수밖에.
자동차를 세우고 매음굴로 나섰다. 주변을 느리게 둘러보며 걸음을 옮겼다. 이래봤자 ‘검은 얼룩이 진 흰 벽’이라든가 ‘물건의 푯말이 뒤바뀐 청과물 가게’가 나올 리 만무했지만, 그래도 나는 시간을 들여 천천히 걸어갔다. 축축하고 쌀쌀한 밤이었다. 경관 무리가 순찰 봉을 흔들며 지나갔다. 여자들이 루주가 번진 입술로 교태를 부리며 남자를 잡아끌었다. 낡은 레코드점 앞 스피커에서 시끄러운 록뮤직이 쏟아졌다. 지면이 울릴 정도로 소리가 컸다.
한참 걷다 보니 어느새 인적이 뜸한 골목이었다. 주변에서 눈에 띄는 사람이라고는 골목 어귀에 웅크린 거지뿐이었다. 미동도 않는 그 모습이 부서진 조각상 같았다. 까마귀의 날갯짓처럼 거칠고 쓸쓸한 바람이 골목길을 관통했다. 비좁은 골목길 안쪽에는 칠흑 같은 어둠만 깔려 있었다.
골목을 빠져나가려다가 주춤거렸다. 조금 떨어진 모퉁이로 시선이 쏠렸다. 모퉁이 경계선이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짙은 어둠속, 우두커니 주저앉은 누군가의 윤곽이 투박한 붓질 자국처럼 드러났다.
내 시선을 잡아 끈 것은 엉뚱하게도 그가 걸친 코트였다. 하필 레이의 퀴퀴한 털코트와 흡사했던 것이다.
세상천지에 저 끔찍한 코트가 또 존재할 수 있다니. 저러고 있으니 레이와 판박이로군.
나는 묘한 흥미를 품으며 모퉁이로 향했다. 다가설수록 상대방의 형체가 명확해졌다. 퀴퀴한 털코트를 걸친 채 한손에는 백양나무 지팡이를 쥔 노파였다.
하하하.
이거 그때가 생각나는걸…….
스노우 화이트에서 처음 레이를 만난 날이 기억났다. 저 괴상망측한 코트를 입고 우리 앞에 돌연 나타났다. 그 첫인상이 어찌나 음침하던지, 레오파드와 나는 한동안 종종 그날을 회고하며 “흡사 마녀 앞에서 침을 삼키며 카드점 결과를 기다리는 듯한 기분이었어.” 하고 떠들었다.
눈앞에 드러난 노파의 코트는 레이의 코트와 비슷한 정도가 아니었다. 완전히 똑같았다. 커다란 후드와 몸의 형태가 드러나지 않는 투박한 커팅, 발등까지 덮는 긴 길이, 심지어 듬성듬성 털을 좀먹은 자국까지도.
전신을 휘감은 털코트에서 눈에 띄는 것은 노파의 얼굴뿐이었다. 코는 갈고리처럼 구부러졌고, 세월이 깊게 새겨진 입술과 인중은 쭈글쭈글했다. 저렇게 생긴 노파가 음산한 털코트를 걸치고 있으니 꼭 마녀 같았다.
나는 잠시 노파를 내려다보았다.
“혹시 령이라고 아는가?”
어딘지 우스워서,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노파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후드 그늘에 파묻힌 탁한 개암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이윽고 쭈글쭈글한 입술이 동굴처럼 열리면서 어둠을 긁는 듯한 음성이 새어나왔다.
“알다마다요. 제가 바로 령인걸요.”
“…….”
하마터면 노파에게 확 덤벼들 뻔했다.
“네가 령이라고? 그럼 나를 잘 알겠군? 얼마 전 나를 멋지게 엿 먹였잖아.”
나는 일부러 한껏 빈정거렸다. 노파가 눈을 깜박거렸다. 개암색 눈동자에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크으…….
그럼 그렇지.
저 노파가 ‘소금이 섞인 커피’일 리가.
아니, 애당초 우연하게 실마리를 얻고자 거리로 나선 짓부터가 어리석었다. 픽픽 웃다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노파를 똑바로 응시했다. 백내장이 낀 개암색 눈동자는 맹하고 탁했다. 자신을 령이라고 밝힌 이 노파는 삼류 마녀가 분명했다.
“령 아니란 거 다 알아. 뭐, 여기까지 왔으니 카드점이나 쳐 볼까?”
“저는 카드점이 아닌뎁쇼. 구슬 정령의 목소리를 듣는답니다.”
“아무거나 상관없어.”
“뭘 보고 싶으십니까요?”
나는 머리를 굴렸다. 우습게도 단번에 레이가 떠올랐다. 어지간히도 마음에 드는 몸뚱인가 보았다.
“글쎄? 나름대론 연애사업?”
“연애사업이라…….”
마녀가 히죽 웃으며 품에서 수정구를 꺼냈다. 나는 조금 놀랐다. 털코트 밖으로 수정구가 드러난 순간, 낡고 때 묻은 그림같이 남루한 골목으로 별안간 찬란한 광채가 서린 것이다. 어느 소녀가 성냥불을 켜자 나타났다던 크리스마스트리의 수많은 촛불이 이만큼 빛났을까.
“운이 좋수, 젊은이. 내가 이래봬도 연애 전문으로 이름을 떨친다네. 딱 오늘까지만 42번가에서 영업하고 떠나려 했는데 젊은이가 날 만났구려.”
마녀의 싹 달라진 말투에 나는 고소를 머금었다.
“왜 떠나는 거지?”
“몰라서 묻소? 이 나이 되어서 석유공장에나 끌려가고 싶진 않다오. 하여튼 말세야, 말세. 42번가가 우리 주술사들 사이에선 한때 메카로 꼽혔는데 그것도 옛말이라니까…… 쯔쯔.”
마녀가 혀를 차며 수정구를 문질렀다. 늙고 비쩍 마른 손은 고목 껍질처럼 거칠었다. 나는 생각에 빠졌다. 주술사들 사이에서 42번가가 메카로 꼽혔다라…….
여기서 영업하는 주술사들이 유난히 많은 이유가 매춘부 고객들 때문으로만 단정한 터였다. 혹시 다른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돌연 마녀가 탄성을 터뜨렸다.
“이거 재미있군! 죽음과 삶이라? 흐흥.”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한 명은 죽음이고 한 명은 삶이야……. 이거 흥미만점인데. 젊은이, 어떻게 이 아가씨를 만났수?”
아가씨라는 말에 나는 비웃음을 흘렸다. 뭐, 굳이 게이라고 밝힐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나저나 죽음이라……? Four이자 타고난 사디스트이며 매일매일 손에 피를 묻히는 나를 가리키는가.
“그래, 한 명은 죽음 맞아. 그런데 삶이라는 건?”
“에너지가 펄쩍펄쩍 흐르는구려.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돌아다니고 난리야. 대단해, 호호호.”
돌팔이 마녀였다. 창문이나 쳐다보기 일쑤인 레이에게 에너지가 펄쩍펄쩍 흐른다라. 레이가 들먹인 ‘십 년마다 십 분’이 또 떠올라 실소가 터질 뻔했다. 어쨌든 재미있었다.
“그래서? 어떨 것 같은가?”
“글쎄…… 죽음 쪽을 더 살펴봐야겠어. 구슬 정령과 대화를 나눠 볼 테니 잠깐만 기다리시우, 젊은이.”
마녀가 눈을 감으며 미간을 경련했다. 어깨를 바르르 떠는 그 모습은 흡사 육체에 다른 혼이라도 깃든 양 보였다.
이러니까 여자들이 혹하지…….
나는 속으로 비웃으며 마녀가 늘어놓을 헛소리를 기다렸다.
“으음.”
마녀가 입술을 경련했다.
“죽음이…… 굉장히 강해. 삶이 어떻게 해 보기엔 죽음이 지나치게 어둡고 강해.”
당연하지, 이 할망구야.
내게 아랫도리를 꽂히며 어쩔 줄 몰라 하던 레이가 떠올랐다. 나는 치미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죽음이 지나치게 강하네.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보여. 저기, 젊은이. 자네한텐 그 아가씨가…… 안타깝지만 그게…… 그 아가씨는 젊은이하곤…….”
“혹시 내 연애사업은 전망이 나쁘다? 한마디로 꽝이다, 이런 뜻인가?”
나는 슬슬 불쾌해져서 말했다.
“으음. 그보다 더 안 좋아.”
마녀가 장탄식했다. 더 말하고 싶은데 참는 듯한 눈치였다.
불현듯 머리끝까지 열이 솟구쳤다. 지폐 몇 장을 마녀의 얼굴로 확 뿌려 버리고 벌떡 일어섰다. 완전히 기분이 잡쳐 버렸다. 피가 거꾸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허허허.”
마녀가 고개를 저으며 지폐를 챙겼다. 나는 몇 걸음 가다가 멈춰 섰다.
“그런데 할멈. 그 코트는 어디서 샀지?”
“이 코트? 왜? 그건 왜 물어, 젊은이?”
“내가 아는 사람도 그 코트를 입고 다니거든.”
그러자 마녀가 야릇하게 웃었다.
“글쎄…… 이건 이 바닥에선 흔히 물려 입는 코트야.”
42번가 극빈자 전용코트라 이 뜻인가?
“잘해 보시오. 잘해 봐.”
마녀가 품으로 수정구를 넣으며 중얼거렸다. 나는 걸음을 떼지 못한 채 침묵했다. 어딘지 마음에 계속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마녀가 백양나무 지팡이를 짚으며 일어섰다. 휘청거리는 움직임에 비해 걸음은 빨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녀는 골목을 빠져나갔다. 음산하고 새카만 털코트가 불빛을 반짝거리는 거리로 파묻혔다.
멀어지는 마녀에게서 탄식이 새어나왔다.
“그쪽이 아가씨를 참 좋아하는구려…… 쯔쯔쯔.”
나는 몸을 돌려 반대방향으로 향했다. 무의식중에 걸음이 빨라졌다. 분노가 점점 치달았다. 안쪽에서 뭔가가 들끓었다. 조금씩 파동을 확장하던 그것이 전신을 삽시간에 휘감았다. 심장이 화염에 휩싸이는 기분이었다.
홀연 귓전으로 어느 속삭임이 다가섰다.
“인생에 돌이킴이란 존재하지 않아. 모든 비극은 어둠속을 떠도는 바람처럼 되돌아온다네. 그것이 숙명이야, Messara.”
반사적으로 멈칫했다. 급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마녀도 보이지 않았고, 골목 어귀에 웅크린 거지마저 자취를 찾아볼 수 없었다. 어둠만 불빛에 스러지고 있었다. 꿈을 꾼 기분이었다.
차를 몰고 집으로 가는 내내 속삭임이 귓가를 맴돌았다. 《인생에 돌이킴이란 존재하지 않아. 모든 비극은 어둠속을 떠도는 바람처럼 되돌아온다네. 그것이 숙명이야, Messara…….》
곱씹을수록 불쾌했다. 집으로 향하면서 담배 한 갑을 비웠다. 나는 전신을 감싼 노여움이 환청을 일으켰다고 단정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