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L.
황혼이 깔리는 오후였다. 한기를 가르고 날아온 어느 새가 눈 덮인 나뭇가지에 내려앉았다. 석양에 물든 눈이 붉은색을 띠고 반짝거렸다. 새는 금세 나뭇가지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부리에 젖빛 열매를 물고 있었다.
어디서 열매를 구했을까. 겨우살이 열매일지도 몰라, 하고 나는 무심코 생각했다.
한겨울이면 눈에 가장 잘 띄는 존재. 땅이 아닌 나무에 들러붙어 살아가는 지구상 유일의 반기생 식물. 숙주를 약화시켜 결국 죽이고 마는, 삶과 죽음을 가져오는 식물.
겨우살이는 동지와 초목의 축복, 다산성과 성장력, 하계를 여는 사람을 상징한다. 성탄절에 사람들은 황금빛이 감도는 이 초록식물의 가지를 걸어 놓고 입맞춤하러 모여든다. 겨우살이에 관련된 의식은 이것 외에도 숱하다. 그중 드루이드 교도들의 겨우살이 의식은 매우 유명하다.
수많은 나무 중에서도 떡갈나무에 기생하는 겨우살이는 아주 희귀하다. 드루이드 교도들은 떡갈나무에서 자라나는 겨우살이를 발견하면 태음력의 제6일째에 엄숙한 의식을 치른다. 하얀 예복을 입은 사제는 떡갈나무로 올라가 황금으로 된 낫으로 겨우살이를 잘라내 옷자락에 받는다. 그러고는 하얀 황소를 제물로 바쳐 신에게 번영을 기원한다.
드루이드 사제들은 겨우살이로 만든 음료가 새끼를 낳지 못하는 동물들에게 새끼를 갖게 하고, 모든 독을 풀어 준다고 믿었다. 그들에게 겨우살이 즙은 곧 신의 정액이었다.
옛날사람들은 마녀의 접근을 막고자 겨우살이 가지를 문에 걸어 놓기도 했다. 땅에서 자라지 않는 식물은 마녀의 힘이 미치지 못한다는 미신 때문이었다. 지하세계의 페르세포네에게 봉헌된 가지도 겨우살이였다. 죽은 자들이 관문을 통과하여 산 자들의 세계로 다시 돌아오려면, 먼저 의식을 집행해야 했다. 『아이네아스』에서는 이렇게 노래했다.
《그늘을 드리운 나무에 황금빛 잎과 나긋나긋한 줄기로 된, 지하세계의 페르세포네에게 봉헌된 가지가 숨어 있다. 숲 전체가 이것을 감추고 있으며, 그늘이 음침한 계곡을 덮고 있다. 하지만 그 나무에서 황금빛 잎이 달린 열매를 잡아 뜯은 사람 외에는 땅 밑의 숨겨진 곳을 지나갈 수 없다. 이것은 아름다운 페르세포네 자신이 정한 규칙이다.
첫 번째 가지가 찢어져도, 두 번째는 그렇지 않을 것이고 금덩어리와 같은 잎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럼 이제 눈을 들어 찾아보라. 찾았으면 손으로 잡아 뜯어라. 그것이 스스로 편안하고 손쉽게 당신을 따를 것이다.》
나는 허공을 응시했다. 붉은 하늘 가득히 부유하고 있었다. 한겨울에만 눈에 띄는, 땅에서는 자라지 않는 새하얀 눈보라, 내 주술조차 몰아내지 못하는 눈의 여왕이.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럼 이제 눈을 들어 찾아보라. 찾았으면 손으로 잡아 뜯어라. 그것이 스스로 편안하고 손쉽게 당신을 따를 것이다…….》
갑자기 입원하는 바람에 그간 연락을 받지 못했다고 마넨 경에게 밝혔다. 열흘 뒤에나 퇴원할 것 같다고 하자 마넨 경은 위급상황 아니면 연락을 자제하겠노라고 대답했다.
“악수는 하지 못했어. 건방진 셰퍼드 같으니! 그날 놈이 내게 저지른 대거리만 생각하면…… 아, 머리야.”
휴대전화 너머에서 들리는 음성이 증오와 공포로 벌벌 떨렸다. 얼마 전 병원 휴게실 텔레비전에서 《가이거의 잔혹한 시위진압에 로터스가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아 요양 중》이라는 뉴스를 접했다. 이제 보니 ‘큰 정신적 충격’의 원인이 시위진압 때문은 아니었던 듯했다.
“진정하십시오. 하지만 확실히 무례하긴 했군요.”
“말도 말게. 이 나이에 그런 수모를 당할 줄 누가 알았겠나. 잠을 자면 그놈 목소리가 귓가를 울리고 눈을 뜨면 그놈 눈초리가 생령처럼 돌아다닌다네. 파티에서 울프삭을 호위하며 건들대던 때와 딴판이었어. 일대일로 대면하니까 이거 보통이 아니던걸. 풍기는 분위기며 행동거지며 보통 셰퍼드가 아니야. 언젠가는 단단히 사고 칠 놈이었어.”
“그럼 신진세력과 악수는 하셨는지요.”
“내 몸이 요즘 말이 아니라니까. 자네도 퇴원할 때까지 열흘은 걸린댔으니 우리 함께 일단 몸부터 추스르세. 울프삭은 앞으로도 족히 2주일은 파티 스케줄로 꽉 채워 놓았다네. 열흘 뒤 채집에 나서도 늦지는 않으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열흘 뒤 연락 주십시오. 몸 잘 추스르시고요.”
“허허, 이런 치욕을 태어나서 겪을 줄이야…… 어쨌든 설욕은 차후에 생각토록 하고, 열흘 뒤에 보세.”
나는 휴대전화 전원을 껐다. 침대에 누워 가만히 천장을 응시했다.
입원한 지 일주일째였다. 병원생활이라고 해 봐야 집에서 지내던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제는 종합검진을 받았다. 피 검사나 하고 끝날 줄 알았는데 한참 걸렸다. 입원치료에 종합검진도 포함되는가 싶어 의아해하다가 나중에야 알았다. 남자가 병원 측에 따로 신청한 일이었다.
역시 희한한 사람이었다. 병 주고 약 주는 타입이었다. 병실을 세 번째로 방문한 그날 남자는 내게 오럴섹스를 요구하지 않았던가. 그 변태가 얌전히 있었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지만, 바로 그 다음날 종합검진을 받게 조치했다니.
멍하니 그저께 일을 생각했다. 조금 웃겼다. 남자도 참 어지간했다. 잘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웃음이 나왔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방문을 비교하면 더욱 우스웠다. 남자는 이틀 연달아 병실을 방문했다. 두 번째 방문에는 나를 만지기만 하면서 ‘피곤할 테니까’ 운운하더니, 이튿날에는 태도를 바꿔 ‘이 정도는 힘들지 않겠지요, 빨아 줘요’ 했다.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처음에는 황당하고 무서웠는데 지금은 저런 면이 특이했다. 변태성과 친절함이 절묘하게 섞여 있었다. 굉장히 독특했다.
무개성이 곧 개성(?)인 나하고는 천지차이였다. 전신에서 넘쳐흐르는 활기도 나와는 판이했다. 함께 대화를 나누노라면 웃을 때가 많았다. 남자는 알고나 있을까. 내가 요즘 남자 생각에 골몰하는 때가 잦다는 사실을 말이다. 처음 마주친 때부터 지금까지 함께했던 시간을 돌이키며 생각에 잠기기 일쑤였다.
이런 자신이 씁쓸했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 누군가를 회고하며 시간을 흘려보낼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어딘지 두려웠다. 자꾸만 나를 둘러싸는 이 낯선 감정이 무서웠다. 그에게 길들여진 느낌도 간혹 들었다. 섹스를 지나치게 자주 나눈 탓인가.
머리가 아팠다. 자작나무를 또 떠올려 버렸다. 남자를 생각할수록 자작나무도 함께 되살아났다. 미래가 불투명한 내 상황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견디기 힘들었다.
우울했다.
식사를 한 뒤 책을 읽고 있는데 간호사가 들어왔다. 간호사가 약을 주며 “메사라 씨, 오늘부터 저녁 약은 양이 다르니까 꼭 구분해서 먹으세요.” 하고 말했다.
나는 “예?” 하며 고개를 들었다.
“메사라라니요?”
그러자 간호사가 차트를 들여다보며 “메사라 맞는데.” 하고 중얼거렸다. 이윽고 나는 깨달았다. 내 이름을 알지 못하는 남자가 자신의 이름으로 입원수속을 밟은 것이다. 그 당연한 사실을 이제야 알아차리다니 바보 같았다.
충동적으로 간호사에게 남자의 이름을 물었다. 남자가 풍기는 분위기만큼 이름의 어감도 날카로운 면도날 같았다.
포우 메사라Four Messara.
정신없이 흔들려 눈을 떴다.
“괜찮아요?”
뭐가 뭔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시공을 초월한 여행에서 현실로 안착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누군가가 이쪽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남자, 아니 포우 메사라가 망막에 서서히 잡혔다.
포우…….
아직도 익숙하지 않았다. 스펠링부터 섬뜩했다. 일반적으로 흔히 쓰이는 포우POE가 아닌 FOUR라니. 동양적인 미신이 유독 많은 왕국에서는 숫자 13보다 4를 불길하게 여겼다. 4는 죽음을 가리키는 기호였다.
“그쪽이 가위에 눌려 있기에 깨웠습니다. 눈꺼풀을 떨면서 이상한 잠꼬대도 하고. 한참을 흔들었는데도 반응하지 않더군요.”
“예…….”
새벽 한 시였다.
“언제 왔어요?”
“자정을 넘겨서. 여기 지나치는 길에 잠깐 들렀지요. 막 도착했는데 그쪽이 난리더군요. 온몸에 식은땀을 흘려 대며 경련하고. 이상한 말도 중얼중얼하고.”
“가위가 심했나 보네요.”
“가위만은 아닌 것 같던데. 잠꼬대 내용이…….”
나는 남자의 말을 중간에서 끊었다.
“악몽을 꿨나 보지요.”
남자는 잠자코 이쪽을 쳐다보았다.
침묵이 흘렀다.
“참, 그런데 그쪽 이름 말이에요.”
어색해진 내가 말을 꺼냈다.
“간호사에게 그쪽 이름을 물었어요. 포……우 메사라라고.”
“아, 예. 제 이름으로 입원수속을 밟았습니다. 그쪽 이름을 몰라서 제 이름으로도 되겠느냐 했더니 상관없다고 하던데요. 대신에 입원비를 선불로 치러야 했지만, 하하. 그런데 여기 온 지 일주일이 다 되어 가는 지금에야 제 이름을 물었다니 너무 뒷북 아닌가요.”
남자가 웃으면서 코트를 벗었다.
“이름이 특이하더군요. 보통은 Poe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Four라서요.”
“아, 역시 그렇지요? 어릴 때 이름 때문에 지긋지긋하게 놀림 받았죠. 예전에도 말했잖아요, 덕분에 신나게 권투시합을 즐겼다고. 할 수 없지요. 문맹에 가까운 부모님이 제대로 쓸 줄 아는 포우라곤 Four밖에 없었으니까. 이상하면 그냥 메사라라고 불러요. 저도 장의사들이나 좋아할 숫자로 불리는 건 별로예요.”
“예…… 메사라, 메사라.”
무심결에 계속 중얼거렸다. 포우도 그랬지만 메사라도 쉽게 달라붙지 않는 이름이었다. 남자…… 아니, 메사라가 코트를 의자에 걸치고서 앉았다.
“메사라도 좀 특이하죠? 아버지의 핏줄을 거슬러 올라가면 크레타 섬이 나오나 봅니다. 내 성의 Messara에 지금은 묵음 S가 하나 끼여 있지만, 원래는 Mesara였을 겁니다. 크레타의 평원 이름이라더군요. 그것도 가장 비옥한.”
“별로 지중해 사람 같은 용모는 아닌데요.”
내 말에 메사라가 자신의 금발을 쓸어 올리며 웃었다.
“하하하, 그렇죠. 오랜 세월 복잡하게 피가 섞였을 테니까요. 심지어 제 외가 쪽으로는 코사크인도 있었다고 들었으니까. 그런데 제 이름만 밝히려니 좀 억울한데요. 그쪽 이름은 뭐죠?”
메사라가 막판에 기습하듯 물었다.
“음…… 레이 아리사Lay Arisa.”
“아. 레이 아리사. 레이, 레이.”
메사라가 음미하듯 내 이름을 되씹었다. 어쩐지 능글맞았다.
“그런데 아리사라…… 만만찮게 특이한 성인데요.”
“메사라 같은 깊은 내력은 없어요. 나는 고아예요. 내 호적을 처리한 직원이 동양인이었어요. 그 직원에게 아무거나 생각나는 대로 성을 적으라고 부탁하자 아리사로 하자고 했어요. 모국의 강 이름을 왕국에 걸맞게 변형한 이름이라나. 원래는 아리수Arisu래요. 그 직원 왈 세상의 도시를 흐르는 모든 강 중에서 아리수처럼 큰 강은 없으리라고 자긴 생각한댔어요.”
“국수주의적인 발상이로군요.”
“국수주의적인 발상이라도 고맙지요. 뒤에서 사람들이 줄서서 기다리는데도 내 성을 작명하느라 오 분이나 시간을 들여 고민해 줬으니까요.”
“하하하,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괜찮은 이름이기도 해요. 귀족 중에는 아리사 가문도 있으니까요.”
“그쪽 가문도 핏줄을 거슬러 올라가면 동양인이 맨 마지막에 나오나 보지요, 뭐.”
“동양인…… 하하. 하하하하하.”
갑자기 메사라가 박장대소했다.
“하하하. 아리사 경이 들으면 펄펄 뛰겠군요. 핏줄에 자부심이 강한 고관대작 나리께서 얼마나 열 받을까요.”
“펄펄 뛰기야 하겠어요. 인종차별주의자 티 내면 돌 맞는 세상인데.”
“그도 그렇군요. 그나저나 이거 오늘 재미난 거 배웠습니다. 아리수와 아리사라…… 하하하.”
메사라는 아리수, 아리사, 연신 중얼거렸다. 이상하리만치 즐거워했다. 한동안 그러다가 벌떡 일어나더니 문을 잠갔다.
또 시작이다…….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내 환자복 단추를 푸는 메사라는 그저 태연했다. 날렵한 동작으로 침대로 올라오더니 옆에 드러누워서는 내 가슴을 만졌다. 그러며 언제나 했던 대로 생각에 빠졌다. 덩달아 나도 생각에 잠겼다.
메사라는 마지막 방문에서 이틀 만에 이곳을 찾아왔다. 그 이틀간 나는 메사라를 기다리며 여러 차례 시계를 쳐다보았다. 그를 기다리는 자신이 당혹스러웠다. 자꾸 이러는 이유에 관해서도 고민했다. 그의 집요한 태도 때문인지, 역한 욕구를 채우는 전 단계까지는 친절한 매너 때문인지, 거듭된 하룻밤으로 내가 진짜 게이가 되어 버려서인지, 인간의 관심에 오랫동안 목마른 탓인지, 그저 남근을 향한 욕망일 뿐인지.
그 고민도 이제는 접었다. 어떤 이유든 앞으로 더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메사라를 원한다는 감정에만 충실하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곧 죽을지도 모르니까. 나는 자조적으로 생각했다.
“참, 그런데.”
메사라가 말했다.
“아까 들어오는 길에 당직 간호사에게 들러서 물어봤더니 종합검진 결과가 나왔던데요. 왜 여태껏 찾아가지 않았습니까?”
“잊고 있었어요.”
“자기 몸인데 너무 관심이 없군요. 잠깐 훑어봤더니 별 이상은 없다고 나왔습니다. 혈압이 낮지만 심한 편은 아니었고.”
“뭐, 그럴 줄 알았어요.”
나는 건성건성 대꾸했다. 입으로는 이쪽을 생각해 주는 척 말하면서도 딱딱한 하복부를 노골적으로 밀착하는 메사라에게 고소가 나왔다.
포우…… 죽음의 기호.
나도 모르게 죽음과 몸을 섞어 왔던 셈인가. 왠지 의미심장했다. 어떤 면에서는 그는 누구보다도 내게 어울리는 상대였다.
메사라가 내 손을 끌어내려 자신의 하복부를 더듬게 했다. 단단하고 커다란 물건이었다. 이것이 나를 파고들 때를 기억했다. 점차 기분이 고조되었다. 메사라가 혀로 내 귓불을 핥았다. 오싹한 쾌감이 전신으로 퍼졌다. 길게 키스를 나누었다. 나는 키스가 좋았다. 섹스보다 좋았다. 얼굴을 드리우는 메사라의 그림자가 좋았다. 키스를 하며 내 귀와 목덜미를 쓸어 훑는 손짓이 좋았다. 가까이 닿는 숨결이 좋았다.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옷의 감촉이 좋았다.
나는 천천히 팔을 뻗어 그의 목을 감아 안았다. 몸과 몸이 밀착했다. 메사라가 속삭였다.
“잠깐.”
그러고는 일어나 옷을 벗었다. 천연덕스러우리만치 태연한 동작이었다. 그의 육체는 적당히 잘 짜인 근육질이었다. 일부러 키운 과시용 몸매가 아닌, 거듭된 거친 나날로 저절로 다져진 육체. 어쩌면 처음부터 저 모습으로 태어난 듯한 착각까지 들 만치 자연스러운.
메사라가 시트를 아래로 끌어내렸다. 정액을 묻히지 않기 위한 조처일 것이다. 그가 침대로 올라와서는 내 다리를 벌리며 말했다.
“그쪽이 오늘 매우 적극적입니다? 상대가 환자라고 해서 적당히 멈출 수 있는 놈이 아니라는 정도는 잘 알 텐데.”
“적극적인가요.”
“그럼요. 소극적이면 이럴 수는 없지요. 후후후.”
메사라가 내 발기한 아래를 툭 건드리며 웃었다. 그러며 내 다리 사이로 고개를 파묻었다. 무의식중에 다리가 떨려 왔다.
죽음과 평원…….
이런 때 그는 Four가 아닌 Mesara였다. 몰아세울 때는 흡사 사신처럼 잔인하면서도 달콤하게 애무할 때는 비옥한 대지 같았다. 긴 시간 끝에 나는 절정을 맞았다.
메사라가 예의 그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내 표정을 즐겼다. 나를 일으켜 앉히더니 자신의 하복부를 내 입으로 밀착시키며 짓궂게 말했다.
“빨고 싶죠?”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낯으로 피가 몰려들었다.
“빨고 싶죠? 말해 봐요. 듣고 싶습니다.”
“예…….”
창피함이 역력한 내 어투에 메사라가 하하하, 웃었다. 내 턱을 잡더니 느리게 성기를 삽입했다. 시큼한 냄새가 풍기는 크고 단단한 물건이었다. 내가 성기를 빠는 동안 엎드린 엉덩이 사이로 메사라의 손이 들어왔다. 오일이 천천히 발렸다. 체격이 크고 팔이 유난히 긴 메사라가 즐겨하는 방식이었다. 메사라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딴생각에 빠질 때는 종종 있었지만, 끝까지 시간을 들여 리드했다. 오일을 바르면서도 애무를 늦추지 않았다.
착각에 빠져 버릴 것만 같았다. 어쩌면 그가 나를 섹스 상대 이상으로 여길지도 모른다는 한심한 착각.
베갯잇 아래 삐죽이 드러난 메모지를 발견했을 때처럼, 문득 기억났다. 메사라와 관계를 맺었던 첫날밤.
그때도 그는 친절했다.
「너무 아파하는 거 아닙니까. 이거 난감하네요. 어디를 제일 느껴요?」
뒤에서 삽입해 온 메사라가 말했다. 입으로 정신없이 찔러 오는 친구의 성기로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동의한 행위였지만, 직접 시작해 보니 엄청났다. 입과 항문으로 동시에 삽입당했다. 수치심에 앞서 고통으로 뼈가 뒤틀리는 것 같았다. 입을 가득 메운 성기로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앞뒤로 흔들렸다.
「피는 안 나는데…….」
메사라가 중얼거리며 내 몸 구석구석 쓸어 만졌다.
「좀 낫습니까? 허리에 힘 빼고 여기에 집중해 봐요.」
그때도 메사라는 지금과 같았다. 입으로는 걱정하면서도 삽입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대신 계속 어디냐고 물으며 내가 반응하는 곳을 찾았다. 그러면서 친구와 함께 나를 긴 시간 탐했다.
갑자기 머릿속이 탁해졌다. 담배연기가 들어찬 듯 어둡고 짙었다.
메사라가 담배연기를 길게 흘렸다. 썩 좋지 않은 표정이었다. 역한 취미를 충족시키지 않은 채 섹스를 끝낸 탓 같았다. 이마로 몇 가닥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눈썹까지 닿았다. 일견 냉정한 눈초리 깊숙이에서 불만이 일렁거렸다.
시큰둥한 메사라와 달리 이쪽은 녹초였다. 그의 팔에 머리를 기댄 채 엎드려서 간신히 숨만 쉬고 있었다. 한 시간 넘게 한 섹스로 아래가 얼얼했다. 메사라는 몸속에 사정하는 것을 즐겼다. 이번에도 세 번 모두 체내에 사정했다. 그에게 오럴은 전희에 머무르는 듯했다.
나는 어딘지 우스운 기분을 느꼈다.
“이 정도로는 역시 성에 안 차나 봐요.”
“뭐…….”
메사라가 담배연기를 뿜으며 중얼거렸다.
“어쩌겠습니까. 아무래도 환자니까 내가 양보해야지요.”
환자를 상대로 한 시간에 걸쳐 삽입섹스를, 그것도 전부 체내사정을 하고서 “양보”라. 참 대단했다. 처음 관계를 맺은 날, 삽입을 조금도 중단하지 않으며 괜찮냐고 물어오던 메사라가 재차 떠올랐다. 나는 고소를 머금었다.
하긴 나도 바보였다. 남자끼리 섹스해 봤자 더듬는 것이 고작이겠거니, 막연하게 추측하고 따라나섰던 자신이 웃겼다. 매음굴에 살면서, 하물며 이 나이까지 게이섹스에 무지했던 자신이 한심할 뿐이었다.
내가 소리 내어 웃은 모양이었다. 메사라가 흘끗 이쪽을 곁눈질했다. 왜 웃지, 하는 눈빛이었다.
이윽고 메사라가 담배를 비벼 끄고 일어났다. 담배를 한 개비 더 뽑아 물며 창문으로 걸어갔다. 창턱에 걸터앉아 담배에 불을 붙이고 창문을 살짝 열었다. 습하고 쌀쌀한 공기가 베일처럼 흘러들어왔다. 메사라가 창밖으로 담뱃재를 털며 밤하늘을 응시했다. 저러고 있는 모습이 그저 자연스러웠다. 그의 입술에서 흰 연기가 한숨처럼 흘렀다.
푸른빛이 흩어지는 그의 나체가 문득 아름답다고 느꼈다. 체모가 거의 없는 미끈한 육체였다.
메사라가 옷을 입는 모습을 보다가 나는 눈을 감았다. 고단한 수면이 몰려왔다.
“씻고 자는 편이 좋을 텐데요. 여긴 병원입니다.”
메사라가 내 어깨를 흔들었다.
“귀찮아요. 알 게 뭐예요.”
곧바로 곯아떨어졌다. 눈을 떴을 때는 정오가 가까웠다. 나는 환자복 차림으로 시트를 덮고 있었다. 메사라는 의자에 앉아 신문을 넘기고 있었다.
“그쪽이 잘 때 내가 대충 뒤처리했어요. 그래도 제대로 씻어야 합니다.”
참…… 입으로는 말도 잘하지.
“오늘은 시위대 때리러 안 가요?”
“일요일이잖아요. 우리도 별다른 일 아니면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은 쉽니다. 어차피 지금 나가면 차가 밀려 하루 종일 도로에 갇힐 테니까요.”
그러고 보니 폭설이 굉장했다. 우박까지 섞인 눈발이 창문으로 파도처럼 부딪쳤다. 멀리 떨어진 전나무 숲이 눈보라에 잠겨 희미하게 보였다. 나는 충동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갑니까? 조금 있으면 점심 오는데. 아침도 안 먹었잖아요?”
“라운지요.”
“라운지라뇨?”
“오층에 실내 라운지가 있어요.”
“거긴 왜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메사라를 무시하고 라운지로 갔다. 2층 병실보다 5층 라운지에서 전나무 숲이 더 잘 보였다.
눈보라가 세차게 몰아쳤다. 흩날리는 눈발 속에서 전나무 숲이 신기루처럼 일렁거렸다. 마치 하얀 커튼이 나부끼는 창문 같았다. 눈보라가 덮쳐들 때마다 전나무 숲이 사라졌다. 눈보라가 이따금 바람에 밀려나면 금세 녹색 빛을 띤 무성한 숲이 솟아났다. 우울한 쾌감이 일었다.
“뭘 그렇게 봅니까?”
메사라가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