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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M─ (24/101)

24 .M─

라이트크로스를 먹인 복서는 두 달 뒤 내게 복부를 맞아 쓰러졌다. 내게 처음으로 패배를 안겨 준 복서는 그날 두 번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마넨은 내게 귀중한 선물을 선사했다. 그것은 패배였다.

깨끗이 인정하기로 했다. 나는 오만했다. 물론 이대로 쓰러져 있을 의향은 추호도 없었다. 패배를 딛고 일어서서 마넨을 역습할 기회를 노리기로 했다. 내게 복부를 맞아 쓰러진 복서는 비장이 터져 즉사했다. 그처럼, 마넨을 기필코 제거해낼 수단을 강구하기로 마음먹었다. 자신 있었다.

울프삭 경이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며 나를 불렀다. 경의 집무실에 들어선 순간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웬 뺀질뺀질하게 생긴 놈이 집무실 물소가죽 소파에 앉아 있었다. 레이 아리사, 내가 총애하는 몸뚱이와 동명이인인 구레나룻이었다. 그렇잖아도 그저께 레이를 입원시킨 참이었다. 오늘 하필 저놈을 보다니 밥맛이었다.

“재포니카께선 나가셨네. 십오 분 뒤에 돌아오신다고 말씀하셨네.”

구레나룻이 말했다. 나는 고개도 끄덕이지 않았다. 레이와 이름이 같다는 사실만으로 놈은 나에게 악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태도에서 줄줄 흐르는 시건방도 재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지금 이쪽을 훑어 내리는 저 게슴츠레한 눈빛이 역겨웠다. 아주 노골적인 눈초리였다.

“앉지 그래? 그렇게 서 있으면 다리 아플 텐데.”

목소리도 죽이게 끈적거렸다. 나는 놈이 바텀이라는 데 백만 탈란텐을 걸었다.

“괜찮습니다.”

“하긴, 평민이 귀족 건너편에 앉으면 무례하지. 예의가 깍듯하군.”

작자가 시위대나 문신귀족이었으면 지금 당장 고문소 직행이었다.

“자네가 가이거 본부장인가? 스네이크라고 불린다지? 말은 많이 들었네. 우리 릴리즈 동기들도 가이거 부장들이라면 엄지를 치켜세우더군. 굉장한 사내들이라고 말이지.”

15분은 빌어먹게도 안 갔다.

“눈동자가 회색이군. 아주 날카로워. 그 가면 아래 얼굴이 궁금한데? 업무 중에는 가면을 전혀 벗지 않는다며? 지금은 나밖에 없는데 좀 벗어 보지 않겠나?”

이쪽을 깨나 우습게 보았는지 더럽게 치근거렸다.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가이거 본부장이 어떤 놈인지 전혀 모르는 모양이었다. 나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안 됩니다. 울프삭 경의 뜻이니까요.”

놈의 발기한 아랫도리를 목도하자니 눈이 썩었다. 저렇게 체구 커다란 털북숭이는 전혀 취향이 아니었다.

마침 마넨 때문에 심기가 안 좋던 참이었다. 저토록 원하니 깔아 놓고 피스트 퍽을 확 해 버릴까 하는 충동이 들끓었다. 덩치만큼 커다랄 구멍에 쑥쑥 처넣어 주면 되레 좋아하며 질질 쌀 것 같았다. 피스트 퍽도 놈에게 과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늦게 울프삭 경이 들어왔다.

“오래 기다렸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오셨습니까.”

조금 전과는 딴판으로 구레나룻이 정중하게 일어섰다.

크으.

끼리끼리 논다더니…….

두 사람을 살펴보자니 고소가 나왔다. 울프삭 경이 구레나룻을 마음에 들어 하는 이유를 깨달아버렸다. 쌍둥이 같았다. 행동거지도 그랬지만 구레나룻의 용모까지 젊은 시절의 울프삭 경과 흡사했다. 나름대론 노스탤지어를 느낀 셈인가, 하하하. 다른 건 성적 취향뿐이고?

부장들을 훑어보며 군침을 삼키던 구레나룻이 떠오르자 끝장나게 웃겼다. 아랫배가 근질근질했다.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울프삭 경이 이쪽으로 눈길을 보냈다.

“이미 서로 대면했지만 다시 소개하지. 이쪽은 레이 아리사. 아리사 군, 이쪽은 가이거 본부장 스네이크. 인사 나누게.”

“반갑네.”

“반갑습니다.”

짤막하게 악수를 교환했다. 구레나룻의 손에도 털이 수북했다. 이놈이 가이거 부장이라면 반드시 ‘베어’로 불러 줘야 할 것이다.

“그나저나 저를 부르신 이유는 무엇인지요.”

“별일 아닐세. 레이 아리사 군이 가이거에 큰 흥미를 보여서 말이지. 한번 이쪽 일을 해 보고 싶다지 뭔가.”

“귀족 자제분께서 말입니까?”

“그렇다네. 대견하지 않은가.”

울프삭 경이 구레나룻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귀족인데도 가이거에 관심을 품다니 말이야. 아리사 군 왈, 아랫사람들 일을 알아야 윗사람 일도 잘해내지 않겠냐고 하더군. 젊은 친구들을 많이 봐 왔지만 이렇게 근본부터 야무진 친구는 처음이라니까…… 껄껄.”

몸매가 잘빠진 사내들이 많아서겠지.

폭소가 물밀 듯이 아래를 치고 올라왔다. 진심으로 빌어먹을 가면이 고마웠다.

“이쪽 일이라면 어떤 일을 하고 싶습니까.”

“일단 가이거 본부를 견학할 기회를 주었으면 하네. 해외에서는 볼 수 없는 개인사병 조직이라 흥미를 많이 느끼고 있지.”

구레나룻의 말에 나는 소리 없이 비웃음을 흘렸다. 이탈리아 유학까지 갔다 온 놈이 ‘간판은 달기 나름’이라는 말도 모르는가. 개인사병 조직 좋아하네. 가이거가 정치깡패 집단이라는 사실은 길거리 개도 알았다. 하기야 울프삭 경의 눈에 들기 위해서라면 무슨 아부를 못하겠는가. 그런 점에서는 잔머리가 제법이었다.

체격 탄탄한 남자들도 구경하고.

꿩 먹고 알 먹고,인가?

구레나룻을 데리고 울프삭 경의 관사를 나섰다. 울프삭 경의 관사는 왕실 문장인 머리 두 개 달린 황금 매가 뾰족한 삼각지붕 끝에 매달린 고색창연한 16세기 건축물이었다. 정문 앞에 우뚝 선 ‘머리를 손에 든 성인’ 조각상만 아니면 동화책에서 쏙 빠져나온 과자궁전 같은 그 관사 바로 옆에 가이거 본부가 있었다. 조각상은커녕 사소한 몰딩 장식마저 일절 배제된 간결한 건축물이었다.

원래 이곳에는 17세기에 지어진 오페라 하우스가 있었는데, 1939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한다. 귀족들한테까지 맑시즘이 유행하던 시대답게 새로 들어선 건물은 바우하우스 양식이었다. 가이거 본부는 수백 년 지난 건축물이 즐비한 이 거리에서 물에 뜬 기름처럼 겉돌았다.

나는 본부로 들어서며 구레나룻에게 말했다.

“아랫사람들 일이 궁금하다고 하셨죠? 그럼 제일 아래층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지하 고문소부터 시작했다. 피바람은 2년 전에 적당히 멎은 참이라 고문소는 한가했다. 물고문 당하는 부랑자 몇 십 마리밖에 없었다. 인간의 심폐능력이 어디까지 도달하는지 실컷 구경시킨 다음, 3층까지 대충 돌았다. 4층부터는 부장 휘하 직속부하 전용이었다. 온갖 음모와 비밀정보가 난무하는 곳이었다. 보안을 고려해 3층까지만 돌고 거리로 나갔다.

“어디 가는가? 여기 말고 다른 데도 본부가 있나?”

“길거리야말로 가이거의 진정한 고향이라 할 수 있죠. 시위대 진압하러 갑니다. 천 단위까진 대장들만 출동해서 지휘하지만 만 명 이상이면 부장들이 나섭니다. 게다가 이번 시위 현장은 왕궁 앞 광장이라는군요.”

내가 탄 지프 꽁무니로 가이거 대원들을 잔뜩 실은 트럭과 트레일러가 줄줄이 따라왔다. 두 시간 걸려 도착한 왕궁 앞 광장이 멀리서도 암울했다. 흐린 하늘 가득히 연기가 시커멨다. 시위대가 진압봉을 휘두르는 경관들과 뒤섞여 사방팔방 뛰어다녔다. 거리 바닥에서 깃발과 찢어진 팸플릿이 밟히고 흩날렸다. 바리케이드는 무너진 지 오래였다.

오늘의 시위대는 1만7천 명으로, 요 근래 최대 규모였다. 의원선출 대회까지는 계속 이럴 터였다. 수집한 정보에는 마넨이 수도의 길거리 부랑자들은 물론이고 전국 조직폭력배들까지 죄 긁어모아 시위를 사주했다고 나왔다. 기분이 안 좋던 참에 딱 걸린 먹잇감이었다.

우선 가스탄부터 대거 살포했다. 그런 다음 방독면과 쇠파이프로 중무장한 대원들을 우르르 내보냈다. 혈기 넘치는 대원들의 주먹과 쇠파이프 아래에서 시위대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물 만난 고기 같았다. 나는 직접 지프를 몰며 확성기에 연결된 무선기로 “저놈 대가리부터 조져!”, “왼쪽 여섯 명 때려잡아!”, “가스탄 더 뿌려!” 등등을 외치며 맹렬히 지휘했다. 이번에 출동한 부장들은 나와 레오파드를 비롯해 벌쳐, 쿠퍼헤드, 재규어 총 다섯이었다. 팀별로 다섯 방향에서 올가미처럼 꽉 쥐어짰다. 보는 족족 두들겨 잡았다. 아주 짜릿했다.

네 시간 만에 업무를 마쳤다. 꽁꽁 묶인 시위대가 경관들에게 졸졸졸 끌려갔다. 구급차에 중상자들을 실어 나르는 병원 직원들의 낯이 기쁨에 차 있었다. 시위로 병원이 연일 만원사례였다. 가스탄 제조업체도 큰 호황을 누렸다. 이 짓거리도 내수경기에 나름의 활기를 부여하는 산업이었다.

“대강 끝났습니다. 즐거운 견학이었는지요.”

내 말에 구레나룻은 입술만 달싹거렸다. 허옇게 뜬 면상으로 지프 한구석에 처박혀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악에 받친 부랑자들과 폭력배들이 네 시간 내내 지프를 따라오며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주먹과 각목으로 창문을 쾅쾅 두들겼다. 악귀에 둘러싸인 기분이었을 것이다.

“이탈리아에서는 보기 힘든 광경이지요?”

“그, 글쎄. 나, 나, 나, 나름대로 흥미롭군.”

구레나룻이 넥타이를 고쳐 매며 말했다. 나는 코웃음 쳤다.

“귀족 자제분이 흥미를 가질 일이 못 됩니다. 이렇게 험한 일은 저희 평민들이나 할 짓이지요.”

“그런데 왜 삼층까지만 돌았는가? 본부는 총 칠층이던데.”

“보안 때문입니다. 울프삭 경도 사층부터는 견학을 허용하지 않았을 겁니다.”

“무슨 업무를 총괄하기에 보안이 그렇게 철통같은가?”

“울프삭 경에게 직접 물어보십시오.”

구레나룻은 입을 다물었다. 꼴에 눈치는 빨랐다.

울프삭 경 관사 앞에 구레나룻을 내려 주고 본부로 직행했다. 업무실에서 제복코트와 가면을 벗어던진 뒤 보드카로 목을 축였다. 간만에 소리를 질러서 목이 칼칼했다.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어제 레이를 방문했을 때 그가 부탁한 것이 대뜸 떠올랐다. 집에서 휴대전화와 충전기를 갖다달라고 했다. 휴대전화는 타인과의 소통을 위한 도구다. 레이가 그런 도구를 가지고 있다니 놀라웠다. 심지어 휴대전화가 울리자마자 나를 떨쳐내며 욕실로 후다닥 뛰어가기까지 했다.

나는 탁자를 손가락으로 탁, 탁, 두들겼다.

나 말고 딴 남자라도 있나.

순간 탁자를 두들기던 손가락이 정지했다.

하하하.

이런…….

기가 차서 웃어 버렸다. 설핏 스친 감정이 어처구니없었다. 명백한 질투였다. 그러나 내가 질투에 사로잡힐 자격이나 있던가? 처음 관계를 맺은 날부터 레이가 초짜임을 알면서도 갖은 짓을, 그것도 레오파드와 함께 저지르지 않았던가.

하여튼 사내라는 족속이란…….

보드카를 들이켜며 혀를 찼다. 이 내가 질투를 다 느끼다니, 그 몸뚱이가 어지간히도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러나 레이는 내게 무신경하게 일관했다. 심지어 아직까지 내 이름조차 물어보지 않았다. 그렇건만 휴대전화라.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라.

그 고리타분한 친구가 여자를 사귀면서 동시에 나를 만나지는 않을 것이다. 확실했다. 남자가 분명했다. 얼마나 잘나신 양반이기에 그 레이를 푹 녹여 놓았는지 궁금했다. 잘나신 양반이 아마빛 머리카락을 탐하는 상상까지 미치자 피가 끓었다. 아예 전신을 거꾸로 돌아가다시피 했다.

이따위 망상에 몰두하는 자신이 배꼽 빠지게 웃겼다. 엿 같았다. 길거리 부랑자도 이러지는 않을 것이다. 보드카를 연속으로 들이켜며 냉정함을 되찾으려 애썼다. 그래도 진정이 쉽지 않았다.

내선전화가 울렸다. 나는 급히 정신을 차리고 수화기를 들었다. 울프삭 경이었다.

“이번 견학이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아리사 군이 말하더군.”

당연히 인상적이지.

“그랬습니까? 역시 남다른 인물인가 봅니다.”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역시 내 안목은 정확하단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그 친구를 임시직으로 가이거 부장에 한번 올려 놓고 업무를 시켜 볼까 생각해. 어떤가?”

마시던 보드카가 사레 걸릴 뻔했다. 나는 “예?” 하며 젖은 입술을 닦았다.

“당장 본격적인 업무는 시킬 수 없겠지만 수습을 겸해서 슬슬 돌려 봐도 나쁘진 않지. 머리가 좋은 친구야. 아까 나와 대화를 나누는데 귀국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친구가 이쪽 판을 훤히 꿰고 있더라고.”

“보안 문제가 걸립니다만.”

“내가 그래서 일부러 그 친구를 눈여겨보지 않았나. 외국서 막 귀국한 참이라 문신귀족들과의 연계 가능성은 백 퍼센트 배제해도 좋을 깨끗한 친구지. 가이거 부장이라고 대외적으로 밝히지만 않으면 보안 문제도 거뜬하고. 참 괜찮은 친구라니까. 내 젊은 시절 생각도 나고. 나도 저 나이 때는 길거릴 뛰어다니며 활개쳤지…… 껄껄. 뭐 어차피 자네들 업무라고 해 봐야 거기서 거기 아닌가. 뭘 그리 정색해?”

결국 한마디 했다.

“그렇게 대단한 인재라고 어찌 자신하십니까?”

“직감일세.”

크으…….

나는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이 이상의 말은 소용없었다. 알겠습니다, 하고 통화를 끝내 버렸다. 보드카 잔을 남김없이 비운 후 벌떡 일어섰다.

사복코트를 걸치고 업무실을 나섰다. 부장 회의실에서 전용 엘리베이터를 탔다. 죽 내려가면 1층의 자료부가 나왔다. 미로를 방불케 하는 본부 내에서 가장 으슥한 장소였다. 명색이 자료부지, 신문이나 스크랩하는 일이 고작이었다.

가이거 대원의 64퍼센트가 문맹이다. 일반대원들이 본부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삼삼오오 모여 권투시합이나 하는 것이 전부였다. 일반대원이 신문을 읽으러 자료부에 들르는 일 따위는 없거니와 규칙상 출입금지이기도 했다.

바로 그 자료부에서 근무하는 전원이 자료부원으로 위장한 가이거 부장들이었다. 아침에 신문 한 뭉치 들고 출근해 간단히 업무를 끝낸 다음 엘리베이터를 탄다. 도착하는 장소는 부장 회의실이었다. 거기서 빌어먹을 가면과 부장들 전용의 제복코트로 변장하는 것이다.

이 애꿎은 짓거리는 모두 울프삭 경이 고안해낸 것이었다. 부장들에게 뒤집어씌운 꼴사나운 가면도 그렇고, 이따위 식의 절차도 그렇고, 젊은 시절에 변신영웅 만화 꽤나 본 것이 확실했다. 진정 좆같았다. 단언컨대 울프삭 경은 부장들에게 가면을 씌운 본연의 목적을 까맣게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부장들의 신상보호는 이제 핑계일 뿐이었고, 귀족들을 겁주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어쨌든 이런 이유로 부장들끼리는 안면을 틀 수밖에 없었다. 자료부원으로 기재된 부장들의 이름과 신상명세는 모두 가짜였으나, 얼굴만큼은 숨길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얼굴만 아는 상태에서 서로 닉네임으로 부르는 한심한 나날이 벌써 7년째였다. 선대 부장들이 7년 전 갑자기 단체로 사표를 내고 퇴직해 버린 이유가 울프삭 경에게 가면놀음을 중지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일언지하에 퇴짜를 맞은 탓이라는 루머가 괴담처럼 떠돌았는데,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자료부에 도착하니 레오파드가 신문을 읽고 있는 중이었다. 신입부장 이야기도 할 겸 녀석과 함께 식당으로 나섰다. 예상대로 레오파드는 펄펄 뛰었다.

“건방진 새끼! 길거리부터 시작해서 삼 년이나 걸려 올라온 우릴 젖히고 당장 부장에 골인해? 울프삭 경이 돌아 버린 게 틀림없군!”

레오파드는 주위 이목 때문에 차마 고함치지는 못하고 애꿎은 스테이크만 잘근잘근 씹었다. 스테이크를 써는 나이프에서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래, 어떤 자식이래? 성질머린 어찌 돼 보였어?”

“잔머리는 제법이던걸. 눈치도 빨라. 용모는 울프삭 경 젊은 시절이 연상되고. 만만한 놈은 아니었어.”

“흥, 울프삭 경에게 손바닥 비비는 솜씨부터 만만하진 않군. 이거 기상천외한데. 귀족 도련님께서 가이거 부장을 하겠다고 자청했다라……. 이러다가 놈이 진짜로 울프삭 경의 양자로 들어가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르겠어.”

“당장 큰 문제는 보안이지. 울프삭 경은 우리가 부장으로 있으면서 뒤에서 한 짓을 모르잖아. 우리가 독자적으로 몇 년간 정보수집에 열을 올렸다는 사실을 그 새끼가 눈치 챌 가능성이 커. 놈이 그 정보를 빼돌려서 공을 세우면 우리 입장에선 죽 쒀서 개 주는 격이지.”

“당분간은 시위대 진압에나 돌려야겠군.”

“아, 그리고.”

나는 씨익 웃었다.

“게이야.”

“뭐?”

레오파드가 스테이크를 입에 가져가다가 멈칫했다.

“네가 없을 때 경의 호위를 하다가 놈을 처음 봤거든. 부장들 몸매를 훑어보는 눈빛이 죽이던걸. 오늘 울프삭 경의 집무실에서 잠깐 단둘이 있었는데 노골적으로 침을 흘려 대더군. 내 짐작엔 틀림없이 바텀이야.”

“흐흐흐흐.”

레오파드가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웃었다.

“이거 잘못하면 동침하라는 명령을 받는 거 아니야.”

“가능성을 제할 순 없지. 그쪽은 평민이라면 무조건 멸시하니까. 어때, 레오파드. 동침을 요구하면 할 거냐.”

“귀족나리 똥구멍에 좆을 박는 귀한 경험 아닌가. 마다할 이유야 없지.”

나는 어깨를 으쓱 올렸다.

“그럼 그 비싼 똥구멍은 네게 양보하지.”

“털북숭이거나 덩치가 큰 놈인 게로군.”

“어찌 알았냐.”

“너랑 나랑 오입을 한 지가 몇 년인데 네 입맛을 아직 모를까.”

“역시.”

우리는 웃으며 잔을 부딪쳤다.

다음날 업무를 끝낸 후 42번가로 향했다. 레이의 집에서 휴대전화와 충전기를 챙겼다. 잠깐 머리를 굴린 나는 레이의 휴대전화를 켰다. 화면에 비밀번호 입력창이 떴다. 레이의 개인신상자료를 검색할 때 외워 놓은 그의 생일 네 자리를 쳐 넣었다. 맞지 않았다. 잘나신 양반을 불러내 좆 대가리를 뭉개 주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하하하. 이거 운까지 좋으신 양반인걸. 어쨌든 오늘은 레이를 방문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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