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 ─L. (21/101)

21 ─L.

지금쯤 선물이 도착했을 것이다. 회계사들을 살펴본 첫 순간부터 나는 그들이 곧 도피할 계획임을 알았다. 도피처는 하와이였다.

나는 마넨 경에게 하와이로 사람을 급파하라고 했다. 마넨 경이 고용한 해결사들은 솜씨가 뛰어났다. 우선 회계사들을 호텔에 감금한 다음 온몸을 멍투성이로 만들었다. 그러고는 “가이거의 고문을 이기지 못해 어쩔 수 없이 거짓장부를 만들었다”고 고백하는 비디오 시디를 제작했다.

그런 뒤 회계사 중 한 놈의 목을 따서 비디오 시디와 함께 이쪽으로 신속히 보냈다. 나머지 둘을 살려 둔 까닭은 계속 감시전화를 걸어오는 가이거를 속이기 위해서였다. 물론 지금쯤이면 그들도 요단강을 건넜을 것이다.

오늘밤 마넨 경은 스네이크를 만날 예정이었다. 약속대로 오늘 아침 전화한 마넨 경은 “가이거에서 저녁에 긴급회동을 가지자고 전갈이 왔다”고 전해 왔다. 나는 회동에서 반드시 스네이크와 악수를 나누라고 말했다. 이제 내게 남은 일은 마넨 경의 협상 능력을 믿고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오늘 오랜만에 헌책방을 열었다. 불황은 여전했지만 집에만 틀어박혀 있자니 지긋지긋했다. 나는 배즙을 마시며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문에서 자작나무가 우두커니 나를 쳐다보았다. 그 뒤로 펼쳐진 거리는 황야처럼 쓸쓸했다.

나는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우리가 거둔 승리는 어디까지나 반쪽 승리였다. 스네이크가 마음을 바꿔 날짜를 하루만 앞당겼다면 이쪽이 끝장났을 것이다.

가이거 본부장이라.

스네이크…….

으스스한 어감부터가 기분 나빴다. 나는 스네이크를 사주한 신진세력이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내 바람이 들어맞는다면 일은 쉽게 해결된다. 신진세력을 암살해 버리거나 혹은 울프삭과 스네이크를 이간질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스네이크 개인이 추진한 일이라면 문제가 달라진다. 정체가 비밀에 싸여 접근은커녕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존재. 마넨 경을 통해 상대방의 생각을 채집하여 모사를 획책해 온 나로서는 대단히 부담스러운 상대였다.

게다가 머리도 좋고 추진력까지 뛰어났다. 심지어 막강한 부하들과 탄탄한 자본까지 한손에 움켜쥐고 있었다. 스네이크가 다시 한번 날뛸 가능성을 헤아리면 골치만 아팠다. 엿을 먹이지 말아야 할 상대에게 엿을 먹인 기분이었다. 찝찝했다. 하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오늘 어떻게든 마넨 경은 스네이크와 악수해야 했다. 그것이 마넨 경도 속 편하고 나도 속 편한 길이었다.

나는 멀거니 창밖을 응시했다. 어제 식당에서 남자와 주거니 받거니 한 대화가 또 생각났다. 오늘 내내 어제의 대화를 떠올리며 시간을 보냈다. 주로 듣기만 했지만, 그래도 마넨 경 외의 사람과 그렇게 많이 떠든 경험은 어제가 처음이었다.

역시 특이한 사람이었다. 언변이 뛰어났다. 유머감각까지 넘쳤다. 감정이 메마른 나조차 몇 번이고 웃음을 터뜨렸다. 학교에서 공부는 안 하고 권투시합만 하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제일 웃겼다. 그 이유가 자기 이름을 놀려먹는 놈들 때문이었다며 넉살을 떨었다.

남자가 고등학교까지 졸업했다는 사실에는 조금 놀랐다. 가이거 대원들은 슬럼 출신에 기초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자가 대부분이라고 알고 있었다. 남자가 자신이 평범하고 화목한 가정에서 큰 어려움 없이 자랐다고 말할 때는 많이 놀랐다.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는데도 가이거를 직업으로 삼고, 심지어 변태이기까지 하다니 놀라울 뿐이었다. 여러모로 희한하고 재미난 사람이었다.

이름이라…….

나는 창문에 비치는 자작나무를 응시했다. 사람이 사물을 지각할 때 본능적으로 하는 행위가 이름을 붙이거나, 이름을 알려고 하는 것이라고 어느 책에서 읽었다. 설리번 선생이 헬렌 켈러에게 제일 먼저 가르친 것도 모든 사물에는 이름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문득 어느 문구가 생각났다.

《이름이란 뭐지? 장미라 부르는 꽃을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아름다운 그 향기는 변함이 없는 것을…….》

과연 그럴까.

갑자기 기침이 터졌다. 나는 입을 막으며 허리를 숙였다. 한참이 지나도 기침이 그치지 않았다. 아침부터 그랬지만 갑자기 머리가 엄청나게 무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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