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L.
“건방진 깡패 같으니라고.”
마넨 경이 연신 분통을 터뜨렸다. 단단히 마음먹고 가이거 부장들에게 악수를 청했는데 거절당했다고 했다. 상담을 시작하고 지금껏 노성만 내질렀다. 마넨 경이 자세하게 털어놓지는 않았지만, 통화를 시작하자마자 나는 모든 상황을 읽어 버린 터였다. 충분히 노할 만한 상황이었다.
“감히 로터스의 악수를 거부하다니! 작위도 없는 평민, 아니, 주먹질이나 일삼는 깡패 주제에 말이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이놈의 나라꼴이 어찌 돌아가는지…… 허허! 선왕도 내게 이런 모욕은 주지 않았건만!”
휴대전화가 짱짱하게 울렸다. 나는 자작나무 가지로 뺨을 긁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내 눈에 마넨 경과 울프삭은 큰 도둑들이었고, 가이거는 도둑이 키우는 사냥개로만 보일 뿐이었다. 나 역시 마넨 경의 푸들이었다. 10분 안으로는 노성이 그치지 않을 듯했다.
침대헤드에 등을 기대며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마넨 경의 화가 풀리기를 기다리면서 배즙을 마셨다. 몸이 안 좋았다. 배즙 잔을 침대 옆 창턱에 올려놓은 뒤 어제 사온 화분으로 시선을 멀거니 고정했다.
식탁에 놓아둔 화분은 눈이 시릴 만치 푸른색이었다. 화분을 제외하면 이 방의 모든 것이 침울한 잿빛이었다. 시들어가는 정원 같은 이곳에서 화분은 이국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뜨거운 열대에서 막 도착한, 말린 오렌지와 자극적인 계피 향을 풍기는 갈색 피부의 이국인.
한참 뒤에야 휴대전화가 조금 잠잠해졌다.
“이제 진정하셨습니까.”
“……참아야지 어쩌겠는가.”
“무뢰한에게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준비는 잘 되어 가고 있는지요.”
“내가 누군가.”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기다려 보십시오.”
“알겠네.”
“……울프삭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왕세자비 후보감 입양이 순조롭게 추진되어서 기분이 좋고요. 후보가 참한 데다가 자색도 뛰어난가 봅니다. 후보의 집안이 썩 힘 있는 가문이 아니라서 후보가 왕세자비가 된 뒤에도 자신을 넘볼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보는군요. 후보를 왕세자비로 옹립한 다음 맘껏 권력을 휘두를 일만 남았다며 연신 웃어 대고 있습니다.”
“그래, 말이 났으니 말인데 우리 측이 준비한 신붓감도 한번 봐 주게나.”
나는 소리 내어 웃을 뻔했다. 여유롭게 신붓감 걱정이나 하다니 마넨 경이 이번 건에 자신감이 대단했다.
“우리 측 신붓감도 떨어질 수준은 절대 아닙니다. 신앙심이 깊지 않다는 점이 약간 걸리긴 합니다만, 그래도 일단은 가톨릭 신자니까요. 그나저나 제 생각보다 준비가 잘 진행되어 가는 것 같군요.”
“아무렴, 자네가 훈수 두고 내가 발로 뛰는데 날개 돋치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일이지. 그럼, 디데이는 어느 날로 정하면 좋겠는가.”
“경의 뜻대로 하시지요.”
“역시 우린 한 몸이야, 허허. 그날이 좋다, 이거지?”
“그렇습니다.”
“이제 소매를 걷어붙일 일만 남았군. 그런데 놀랐네. 자네가 내놓은 복안이 예전과는 상당히 달라서 말일세.”
“가이거를 상대하는 일이니까요.”
“그 외 또 할 말은 없는가.”
“본부장 스네이크와 사소한 접촉도 불가능하십니까?”
“또 그 소린가? 흐흠, 울프삭 주위를 둘러싼 호위병들 중에 본부장이 섞여 있는 것만은 확실해. 그렇지만 다들 똑같은 제복에 가면을 쓰고 있어서 누가 누군지를 몰라본다네. 흥, 정식 군인이 아니라 계급장도 달려 있지 않고. 그런 깡패들이 왕실을 출입한다는 자체가 웃기는 일이지. 이 내가 악수를 청하는데도 감히…… 이런, 제길!”
마넨 경이 벌컥 화냈다. 흔치 않게 욕까지 내뱉는 모습이 기억조차 되살리기 싫은 눈치였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힘들겠지만 울프삭 너머로 스네이크를 한번 투시해 보겠습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가만히 계십시오.”
역시 수확은 없었다. 대신 울프삭에게서 엉뚱한 소득을 얻었다.
“울프삭이 스네이크에게 저를 잡아오라고 들들 볶아 대는군요. 게다가 저와 관련한 이야기만 털어놓으면 스네이크가 무시로 일관하는 바람에 심히 불쾌한가 봅니다. 이거 재미있는데요. 울프삭 주위에 ‘건방진 놈’, ‘감히 나를 어떻게 보고’ 등등의 글자가 가득 쏟아지는군요. 잘하면 울프삭과 스네이크 사이를 이간질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간질?”
마넨 경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어떻게 말인가.”
“우선은 두고 봐야죠. 울프삭은 스네이크를 건방진 놈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능력만큼은 쓸 만하다고 판단하고 있으니까. 은근히 의지도 하고요. 더 지켜봅시다. 우리 쪽에서 가이거 부장들을 아직 상세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니 당장 구체적인 계획을 짜기엔 어렵습니다.”
“그런가.”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스네이크가 울프삭 외의 다른 무신귀족과 손잡았을 가능성도 있겠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어떤 세력이 그를 사주했을 수도 있고요. 요즘 급부상하는 신진 무신귀족들이 있다고 했지요? 파티에 참석하실 때마다 그들과 악수를 빼놓지 마십시오. 스네이크가 몰래 다른 귀족과 야합했다면, 그것을 빌미삼아 놈을 처리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알겠네. 그동안 피로했을 테니 당분간은 푹 쉬게. 모레 아침 전화하지.”
상담을 마쳤을 즈음에는 녹초였다. 나는 시트를 턱까지 끌어올렸다. 화분을 사러 어제 외출했다가 감기가 도진 참이었다. 눈을 감고 차근차근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이번에 우리가 꾸민 모사가 스네이크에게 먹힐 가능성은 반반이었다. 울프삭과 마넨 경의 비리는 백중세를 다투었다. 이쪽 작전이 제대로 먹힌다면 한때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으로 끝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먹히지 않는다면?
음모를 획책할 때는 반드시 최악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스네이크가 혹여 마음을 바꿔 기일을 앞당길까 봐 걱정스러웠다. 그렇게 된다면 마넨 경은 끝장이었다.
나는 칙칙한 천장을 노려보았다.
위험한 승부수다…….
그러나 현재 다른 방법은 없었다. 이번 건은 이제껏 우리가 짰던 모사 중에서 제일 위험했다. 내가 상담을 맡은 후 이렇게까지 아슬아슬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런 게 스릴일까.
어차피 마넨 경은 내 이름도, 집도 몰랐다. 십 년 전에 얼굴 한 번 본 것이 전부였다. 마넨 경이 몰락해도 내가 위험에 처하는 일 따위는 없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끝나면 허무하지.
앞으로의 생사도 불투명한 이 몸, 십 년이나 들인 공을 이제 와서 무너뜨릴 의향은 추호도 없었다. 침대 맡에 놓아두었던 『손자병법』을 들어 천천히 넘겼다.
나는 『손자병법』을 즐겨 읽었다. 일이 풀리지 않을 때는 습관처럼 『손자병법』을 뒤적거리며 방법을 찾았다.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나는 상담을 위한 책을 추천해달라고 마넨 경에게 부탁했다. 마넨 경은 이것저것을 추천해 주었고, 그중에서도 일독을 권유한 책이 『손자병법』이었다.
이후 나는 《전쟁이란 속임수다. 그러므로 능하면서 무능한 듯이 보이게 하고, 가까움을 먼 듯이 보이게 하고, 먼 것을 가까운 듯이 보이게 한다》에 기초를 두고 마넨 경을 상담했다. 『손자병법』의 「시계편始計篇」에 나오는 책략이다. 마넨 경도 내 조언을 적극 활용했다. 그런 면에서 나와 마넨 경은 상성이 잘 맞는 상관과 부하였다.
그러나 이런 이유로, 마넨 경은 문신귀족의 거두임에도 불구하고 은근한 무시를 당했다. 운 좋은 파티광으로 치부하는 이들도 숱했다. 한마디로 멍청한 소리였다. 『손자병법』 「모공편(謀攻篇)」은 이렇게 주창한다.
《최고의 병법은, 사전에 적의 의도를 간파하고 이를 쳐부수는 일이다. 그 다음의 방법은, 적의 동맹 관계를 분단시켜 고립시키는 일이다. 그 다음의 방법이 싸우는 일이다. 그리고 최하의 방법이 성을 공격하는 일이니, 성을 공격하는 것은 다른 방법이 없을 때 한다.》
어쨌든 지금 내가 할 일이라곤 이 건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기를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다음 일은 미뤄놓기로 했다. 나는 상담노트를 정리한 후 바로 잠들었다.
창밖에서 새는 싸움 소리로 잠이 깼다. 막막할 만큼 깊은 밤이었다. 마넨 경과 통화를 한 때가 대낮이었다. 꽤 많이 잤건만 그래도 졸음이 몰려왔다.
잠을 다시 청하려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방이 건조하면 화분에 물을 자주 줘야 한다고, 꽃집 주인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억지로 몸을 일으키자 뒤통수가 아파 왔다.
배즙을 한 잔 끓여서 마셨다. 숙면으로 열은 가셨지만 아랫배에 뭔가가 쌓인 양 온몸이 무거웠다.
속병이라도 생겼나.
잔을 내려놓고 화분에 물을 주었다. 별안간 어제 일이 기억났다. 화분을 사서 집으로 돌아가는데 뒤에서 요란한 경적소리와 함께 고함이 터졌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려다가 흠칫했다. 건너편 옷가게 창문에 뒤쪽 도로가 훤히 보였다.
자동차 운전석 창밖으로 상반신만 뻗은 한 사내가 이쪽으로 소리치고 있었다. 금방 기억해냈다. 남자의 ‘친구’였다. 마침 신호가 걸려 차는 멈춰 있었다.
나는 못 들은 척 걸음을 빨리해 자리를 벗어났다. 전신에서 소름이 돋았다.
“한심하다, 한심해.”
마넨 경의 뒤에서 모사를 획책해 봤자 뭐하는가. 실제로 맞닿는 폭력에는 딱정벌레처럼 무력하기만 했다. 겁쟁이에, 왜소한 체구에, 그리고, 그리고, 손꼽자니 셀 수 없어서 관둬 버렸다. 게이바를 들락거리며 남자들과 엉킨 자신이나 탓했다.
침대에서 나온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건만 오한이 들었다. 침대로 다시 기어들어가다가 문득 남자를 생각해냈다. 내일은 남자와 인형눈알을 단 지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그날, 간다면서 코트를 입더니 돌연 다가와서 내게 키스했다. 그러고는 침대로 직행했다. 오전 내내 남자에게 시달렸다. 가혹한 짓은 당하지 않았지만 힘이 넘치는 남자를 받으면서 몇 번이고 정신을 잃을 뻔했다. 나는 오럴로도 충분히 만족하는데 남자는 체내삽입까지 가야만 직성이 풀리는 듯했다.
거기에다가 내 표정을 관찰하는 것도 즐겼다. 남자에게 떠밀리다가 간간이 눈을 뜨면 어김없이 남자가 나를 쳐다보며 웃고 있었다. 다른 때는 안 그러는 사람이 섹스할 때는 예외가 없었다. 예의 그 야릇한 미소였다. 내리깐 눈으로 입매만 슬며시 올리고 흡사 음미하듯 쳐다보았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 같았다. 그래, 스노우 화이트에서 처음 만났던 그날 밤에도 남자는 그런 식으로 웃으면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것이 어떤 때는 굉장히 잔인해 보여서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오싹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변태니까 당연한가. 희한한 사람이었다. 무섭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했다. 겉은 멀끔한데 어쩌다가 변태가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섹스 취미만 빼면 주변 사람들에게 되레 인기가 높을 것 같았다.
그래도 둘이서만 할 때는 그럭저럭 멀쩡(?)했다. 부드럽게 애무할 때는 몸이 녹는 쾌감을 선사해 주었다. 심하게 덤비지만 않으면 체내삽입도 나쁘진 않았다. 그리고 남자와 함께 뒹굴고 있노라면 자작나무도 깜빡깜빡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어쨌든 남자는 그날 원 없이 즐겼다.
그런데 설마 진짜 오랴?
나는 곯아떨어졌다.
노크 소리가 커지다 못해 쾅쾅 울렸다. 할 수 없이 부스스 일어났다. 눈앞이 어질어질 돌아갔다. 느릿느릿 걸어가 겨우 문을 열자 아니나 다를까 남자였다.
질기기도 하셔라…….
어딘지 우스운, 아니, 허탈한 기분까지 느꼈다. 사흘 뒤에 오라고 했더니 정확히 사흘 뒤에 왔다. 설마 진짜 오랴 싶었는데 진짜로 왔다. 정말이지 할 일 없는 사내였다.
남자는 상기된 안색이었다. 긴 시간 노크를 무시당해서 화난 듯했다.
“집에 있는데 왜 문을 안 열었습니까.”
잔뜩 열 받은 어투였다. 자다가 막 깬 내 꼴을 보고도 짐작이 안 가는가.
“보면 몰라요?”
남자가 곧장 내 이마에 손을 갖다 대었다.
“안 아파요. 그냥 자고 있었어요.”
내가 그의 손을 탁 쳐내자 남자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잠이 덜 깨어 머리가 탁한 와중에도 남자의 눈초리는 선명하게 시선 속으로 파고들었다. 분노를 숨기지 않고 쏘아보는 회색 눈동자가 한여름 정오의 태양처럼 날카로웠다.
남자가 방으로 들어섰다. 당당한 태도가 집주인을 넘어서 아예 남편 행세였다. 깡패 같았다. 아니, 깡패 같은 게 아니라 저자는 깡패 맞았다.
가이거니까.
‘두 사람 건너면 가이거에게 맞은 시위대, 세 사람 건너면 가이거에게 죽은 시위대’가 무심코 떠올랐다. 나는 팔짱을 끼며 벽에 등을 기댔다.
저자가 원하는 일이야 뻔하지.
남자가 곧 내게 저지를 짓을 예상하니 벌써 머리가 아팠다. 완전히 싫지는 않았다. 3분의 2는 좋았다. 문제는 남은 3분의 1이었다. 남자와 그 친구가 해 댄 짓을 내가 어찌 감당했는지 지금은 신기할 정도였다. 당시 병마 때문에 정신이 살짝 나가 있어서 요행이었다.
남자가 코트를 벗다가 말고 이쪽을 응시했다. 이내 저벅저벅 다가서서 양손으로 내 어깨를 잡았다. 엄청난 힘이었다. 남자의 그림자가 나를 덮쳤다.
아…….
남자의 팔을 밀어내려 애썼다. 난폭하기 짝이 없는 키스였다. 남자가 나를 뒤로 콱 몰아세웠다. 벽으로 등이 바짝 닿았다. 내 머리카락을 움켜쥐고서 남자가 각도를 고정했다. 사나운 키스가 천천히 부드럽게 변해 갔다. 입술을 애무하듯 누르며 혀로 샅샅이 훑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짙어지고 농밀해졌다. 흡사 연인처럼 다정했다.
나에게 몸을 밀착한 남자에게서 냄새가 풍겼다.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차가운 바깥 공기 그리고 설핏 섞인 피 냄새였다. 옷 너머로 꿈틀거리는 근육이 돌덩이같이 단단했다.
쓰디쓴 무력감이 전신을 감쌌다.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이런 키스는 나도 좋았다. 무의식중에 남자의 어깨를 양팔로 휘어 감았다. 남자가 내 상의를 걷어 올려 가슴을 애무했다. 손바닥으로 느리게 쓸며 만졌다.
남자가 입술을 떼어내더니 아래로 내려갔다. 찌르르한 감촉이 내 유두를 직격했다. 나는 신음을 토해 내며 고개를 젖혔다. 긴 시간 진하게 애무한 남자의 입술이 가슴에서 떨어졌다. 남자가 내 머리를 눌러 무릎을 꿇게 했다. 바지 바깥으로 페니스의 형체가 완연했다. 그것은 분명하게 나를 욕망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침을 삼켰다. 이런 자신에게 잠깐 놀라 버렸다. 명백한 충동이었다. 저것을 빨고 싶었다. 남자의 시큼한 정액을 삼키고 싶었다. 아래로 파고들 저 단단한 물건을 원하고 있었다.
“어서.”
남자가 하복부를 내 입술에 밀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