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M─
브라스 밴드의 연주가 절정으로 치달았다. 울프삭 경이 특별히 초청한 밴드답게 연주 솜씨가 훌륭했다. 연주가 끝나자 울프삭 경이 벌떡 일어나 박수를 퍼부었다.
“브라보!”
손짓으로 피아니스트를 불러들여 “레이 찰스가 환생한 줄 알았네.” 하며 어깨를 두들겼다. 쏟아지는 박수 속에서 울프삭 경이 연회장을 돌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의 뒤로 가이거 부장들이 따라갔다.
샹들리에에서 타오르는 수백 개의 촛불이 벌건 불빛을 장대비처럼 쏟아 부었다. 환한 연회장 한복판을 거니는 울프삭 경은 황제같이 당당했다. 이번 연회에는 국왕 크루거도 어엿하게 참석했지만, 그의 존재감은 시종의 손에 들린 은쟁반만도 못했다. 부채를 흔들던 한 귀부인이 울프삭 경과 시선이 마주치자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대화에 여념 없던 두 젊은 문신귀족은 가까이 다가선 울프삭 경을 뒤늦게 깨닫고 사색으로 변해 황급히 뒷걸음질 쳤다.
귀족들에게 울프삭 경은 16세기 러시아 차르 이반 뇌제와도 같았다. 포악한 성정만큼은 울프삭 경과 이반 뇌제는 일맥상통했다. 경에게 만약 아들이 있었다면 그 역시 시답잖은 이유로 부친의 지팡이에 맞아죽었으리라. 그 비극의 현장을 명화로 길이 남겨줄 일리야 레핀 같은 화가가 이 왕국에는 없다는 점만 다를 뿐이었다.
아울러서 귀족들의 눈에 울프삭 경이 항상 거느리는 가이거 부장들은 오프리츠니키처럼 보일 것이다. 이반 뇌제가 창설한 러시아 최초의 비밀경찰. 검은 제복에 말을 타고 모스크바 거리를 활보하며 1만 명에 달하는 귀족들을 학살한 인간 도살자 집단. 솔직히 나로서는 그들에게 비견되고 싶지 않았다. 그것만은 사양하고 싶었다. 가이거가 난폭한 집단이기는 해도 오프리츠니키만큼은 아니었다. 물론 차림새만큼은 이쪽이 오프리츠니키를 압도한다고 인정한다. 특히 빌어먹을 가면.
사신 가면은 울프삭 경이 유명한 가면 제작자에게 의뢰해 만든 작품이었다. ‘최대한 무섭게, 첫눈에 오금이 저리게끔, 자다가도 소스라쳐 일어날 만큼’ 만들라 요구했다고 한다. 가면 제작자는 왕국 대대로 내려오는 토고 가면을 대폭 업그레이드 시킨 버전을 만들어내 울프삭 경을 만족시켰다. 제작비를 지불할 때가 오자 울프삭 경은 사람을 시켜 가면 제작자를 죽여 버렸다. 성 바실 대성당보다 아름다운 성당을 못 만들게끔 건축가의 눈알을 뽑아 버린 이반 뇌제도 울프삭 경의 이 조처에는 고개를 내저을 것이다.
빌어먹을 가면을 쓰고 울프삭 경을 따라다니노라면 이쪽을 쳐다보는 귀족나리들 표정이 제법 볼만했다. 울프삭 경의 의도대로 저쪽에 공포감만은 확실하게 안겼지만, 이쪽은 동물원 원숭이가 된 기분만 맛볼 뿐이었다.
하여간에 취미 한번 고약하다니까…….
나는 울프삭 경을 따라가며 쓰게 웃었다. 저쪽에서 젊은 무신귀족 무리가 보였다. 일명 ‘릴리즈’였다. 울프삭 경이 두 팔을 활짝 펼치며 릴리즈에게 다가갔다.
울프삭 경에게 자식이라고는 결혼한 딸밖에 없었다. 경의 사위는 한때 촉망받던 무신귀족이었으나 십 년 전 자동차 사고로 반신불수 신세가 되었다. 근래 울프삭 경은 양자를 들일 계획을 숙고하는 참이었다. 덕분에 경에게 손바닥을 비비는 젊은 무신귀족들이 요즘 셀 수 없었다. 신진 무신귀족들의 모임인 릴리즈도 예외는 아니었다.
울프삭 경이 릴리즈 멤버들과 빠짐없이 악수를 나누며 어깨를 두들겼다. 무신귀족의 거두 앞에서 젊은 무신귀족들은 그다지 위축되는 기색 없이 당당했다.
오늘도 고생이 많군.
나는 눈앞의 애송이들을 살펴보며 코웃음 쳤다.
릴리즈가 가소로울 따름이었다. 이름부터가 폭소감이었다. 백합들 좋아하네. 후하게 쳐 봐야 오이꽃들이었다. 뻔한 아부를 싫어하는 울프삭 경 앞에서 제 딴에는 당당하게 행동하고자 용쓰고 있었지만 내 눈을 속이지는 못했다.
그래도 개중에 한 인물이 눈에 띄었다. 짙은 구레나룻에 체격이 훌륭했다. 릴리즈에서 처음 대면하는 남자였다. 분위기부터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울프삭 경도 사내가 꽤 인상적이었는지 한 마디 던졌다.
“자네는 누구지? 처음 보는데.”
“영광입니다. 레이 아리사라고 합니다. 이탈리아에서 유학을 마치고 막 귀국했기에 아직은 많이 서툽니다. 지도편달 부탁드립니다.”
나는 하마터면 박장대소를 터뜨릴 뻔했다.
레, 레이 아리사?
“그런가. 아리사라면 혹시 아르카일 아리사 경?”
“예, 제 부친 되십니다.”
“반갑군. 아리사 경이 장남을 어찌나 칭찬하던지 내 그렇잖아도 궁금하던 차였네. 이거 직접 실물을 보니 그럴 만도 한데. 껄껄.”
“과찬이십니다.”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폭소를 삼켰다. 울프삭 경은 구레나룻이 퍽 마음에 든 듯 연신 말을 걸었다.
“부탁할 일 있으면 내 집무실로 찾아오게나.”
울프삭 경이 구레나룻에게 마지막으로 건넨 말이었다. 키워 줄 의사가 충분하다는 뜻이었다.
이거 일이 좀 어이없게 돌아가는데.
나는 웃음이 가시는 것을 느꼈다. 울프삭 경이 초면부터 상대방에게 호의를 보이는 일은 드물었다. 아리사 가문은 전통적으로 명망 높은 무신가문이었다. 정쟁에서 우위를 확보하려면 가문의 세는 필수요건이다. 울프삭 경도 변변찮은 가문의 남자를 양자로 들일 생각은 전혀 없을 것이다. 일단은 구레나룻을 관찰할 필요가 있었다.
구레나룻이 와인 글라스를 흔들며 가이거 부장들을 차례대로 훑어보았다. 그 눈빛이 몹시 시건방졌다. 재수 없기가 하늘을 찌르네, 하다가 무심코 깨달았다.
저 자식 보게……?
부장들을 아래위로 훑어보는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다. 타고난 게이인 내가 저 눈빛의 의미를 알아차리기는 어렵지 않았다. 별안간 눈물 나게 웃겨 왔다. 미치게 웃겼다. 가난뱅이 아리사와 귀족나리 아리사의 공통점을 코앞에서 목도하고 있자니 끔찍스레 코믹했다.
나는 입술을 재차 악물었다. 그래도 자꾸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자칫하다간 정말이지 사고 칠 것 같았다. 울프삭 경이 마침 릴리즈 앞을 떠나 줘서 불상사는 간신히 면할 수 있었다.
울프삭 경의 시선이 별안간 한곳에 머물렀다. 한 무리의 문신귀족들이 푸른 실크 로브를 바닥까지 길게 늘어뜨리고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선두에서 마넨이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울프삭 경의 입가에 심술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잠깐 마넨을 쏘아보더니 이윽고 성큼성큼 그쪽으로 다가갔다.
또 시작이군.
하여간에 유치하긴…….
나는 비웃음을 흘렸다. 마넨의 앞에 멈춰선 울프삭 경이 그를 아래위로 뜯어보았다. 건들건들한 태도가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마넨의 뒤에 서 있던 젊은 문신귀족의 낯이 벌게질 정도였다.
울프삭 경을 흘낏 쳐다본 마넨이 미소를 지으며 와인 잔을 치켜들었다. 흔들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여유로운 몸짓이었다. 나는 마넨이 참으로 능구렁이라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마넨을 노려보던 울프삭 경이 짐짓 고개를 갸웃거렸다. 곧 비죽 웃으면서 자신의 잔을 마넨의 잔에 부딪쳤다.
“와인이라……. 나는 한 번도 재즈와 와인을 함께 즐긴 적 없소. 원래 재즈란 흑인들이 선술집에서 맥주를 나누며 흥겹게 연주한 것이 시작이거든.”
울프삭 경이 보란 듯 제 손에 쥔 맥주잔을 높이 쳐들었다. 마넨이 담담히 대꾸했다.
“경의 몸속에 흑인의 피가 흐르고 있는 줄은 여태껏 몰랐구려. 그리고 여긴 선술집이 아니오.”
“흑인…….”
울프삭 경의 안면이 왈칵 일그러졌다.
크으.
내 이럴 줄 알았지.
언제나 이랬다. 마넨이 주먹으로는 울프삭 경을 절대 이길 수 없듯, 울프삭 경은 입으로는 마넨을 절대 이기지 못했다. 그럼에도 울프삭 경은 번번이 승산 없는 싸움에 투지를 불태웠다. 나는 소리 죽여 웃었다. 이런 때만큼은 애꿎은 부장들에게 사신 가면을 씌워 놓고 “멋지군! 카리스마 넘치는군! 예술작품이 따로 없군!” 얼간이처럼 찬탄해 댄 울프삭 경의 악취미가 고마웠다.
마넨도 어지간해.
요즘 울프삭 경은 법관 에밀렌의 몰락에 기분이 좋았다. 연일 파티를 벌이며 흥청대는 나날이었다. 파티라면 절대 빠지지 않는 마넨은 울프삭 경의 파티에도 어김없이 참석했다. 진정 능글맞은 너구리였다.
그래봤자 일주일이지…….
나는 지그시 마넨을 응시했다. 길고 흰 수염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우아한 로브 차림이었다. 파티광이라는 별명이 무색하리만치 고귀한 자태였다. 내가 저 우아한 로터스의 귀에 “내가 당신 딸년의 가랑이에 코트비카의 똥오줌을 퍼부어 줬지.”라고 속삭이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제법 볼만할 것이다. 하하하.
어차피 저 늙은이의 몸뚱이에 수의를 직접 입혀 주며 지금의 말을 속삭여 줄 생각이었다. 때가 멀지 않았다. 상상만 해도 짜릿했다.
마넨이 와인 잔을 느슨히 내려놓았다. 갑자기 이쪽으로 시선을 던지며 빙긋 웃었다.
“언제나 경을 호위하느라 자네들도 수고가 많군. 오늘 나와 악수 한번 하지 않겠는가.”
마넨이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반응하지 않았다. 순간적이었지만, 마넨의 눈동자를 설핏 스친 빛이 꺼림칙했다.
“뭐하고 있소! 감히 로터스의 악수를 거부하는 게요!”
이쪽이 가만히 있자 젊은 문신귀족이 소리쳤다. 울프삭 경이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마넨과 나를 번갈아보았다. 내가 한 방 먹여 주기를 노골적으로 기대하는 눈치였다.
흐흠…….
뭐, 가끔은 아첨해도 나쁘진 않겠지.
나는 깨끗이 결정하고 입을 열었다.
“거절하겠습니다. 혹여나 로터스의 장갑에 독이 묻어 있다면 호위 업무에 차질이 생길 테니까요. 여기 전 부장들이 저와 같은 생각일 겁니다.”
한순간 마넨의 낯빛이 뻣뻣하게 굳었다. 울프삭 경이 큰 소리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 하여튼 내 호위병들의 충성심이란!”
한참 웃어 댄 울프삭 경이 아직도 손을 거두지 못한 채 이쪽을 노려보는 마넨의 어깨를 툭 쳤다.
“그럼 다음에 보세. 로터스.”
그러고는 주저 없이 몸을 홱 돌렸다. 안면에 기쁨이 가득했다. 덕분에 울프삭 경에게 언론사 건을 털어놓기 쉽게 되었다. 나는 비웃음을 머금었다.
“뭐야? 그런 일을 꾸미고 있었어?”
레오파드가 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그런데 왜 내가 이제껏 몰랐지?”
“최소한의 인원만 투입한 데다가 보안도 철통이었으니까. 네가 몰랐다고는 할 수 없지. 슬쩍 떠보지 않았던가.”
“그래도 이렇게 큰 건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걸. 이거 섭섭한데. 내가 너를 알고 지낸 지가 칠 년인데 말이야. 아무리 극비리에 진행한 작품이라지만 디데이를 고작 사흘 앞둔 지금에야 이야기를 꺼낸다라. 심한 거 아냐.”
“울프삭 경에게도 아직 말하지 않았어. 조만간 해야지. 투입한 대원들도 개별적으로 나눠서 전체적인 그림은 다들 모르는 상태야. 작품의 전체 개요는 부장들 중에서도 너한테 처음 털어놓았어. 기분 풀어.”
“네가 점심을 같이 하자기에 뭔가 할 말이 있으려니 싶긴 했어. 그래, 좋아. 다 좋다고. 그럼 마지막으로 네가 거둘 개런티는 얼마나 되는 거야?”
“뭐기는.”
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웃자, 레오파드가 “역시.” 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가만히 레오파드를 관찰했다. 친구이기 전에 가이거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경쟁자였다. 레오파드는 내가 자신을 믿어서 심중을 털어놓았으려니 짐작하겠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확실한 내 사람인지 이 기회에 시험해 볼 참이었다.
레오파드는 금방 웃음을 지었다.
“좋아, 본부장님. 이거 꽤 스릴 넘치는걸. 그럼 내가 할 일을 던져 줘. 뭐든지 끝장나게 처리해 주지.”
나는 지그시 웃었다.
“그럼 이것부터 봐.”
마넨의 신문을 레오파드에게 건넸다. 레오파드가 “이게 뭐.” 하며 신문을 훑어보았다.
“이건 아침에도 부장들끼리 돌려보지 않았던가.”
“이 부분을 주목해. 이스트에덴 신문사에 우리 대원들이 상주해 있다는 내용의 기사야.”
“이스트에덴이라……. 크게 다루지는 않았군. 간단한 박스기사잖아. 뭐, 울프삭 경을 비꼬는 논조는 여전하고. 후후, 이 표현 괜찮은데. ‘가이거 대원들의 휘하에서 이스트에덴 편집국은 침묵의 미덕을 지키고 있다’라…….”
“디데이에 불시에 마넨을 체포한 다음 놈의 신문사를 강제로 휴간시킬 작정이야. 그럼 사람들이 구입할 신문은 구독률 2위를 달리는 이스트에덴뿐이지. 그때를 위해 미리미리 이스트에덴을 캐스팅해서 물밑 작업을 해 놓았는데 그새 냄새를 맡았더군. 마음에 안 들어. 한 번은 저쪽이 가볍게 긁어 주지 않을까 익히 예상했지만 말이야.”
“흐흠.”
레오파드가 신문을 내게 건넸다.
“저쪽에선 이 건을 크게 생각지 않는 것 같군. 우리 계획을 꿰고 있다면 돼지 멱따는 소릴 벌써 내지르지 않았겠어?”
“너는 이스트에덴을 맡아. 어차피 눈감고 아옹이지만 벌써부터 이러면 작품에 깊이가 떨어지지. 울프삭 경을 적당히 비난하는 사설을 신속하게 올리도록 해.”
“이스트에덴은 가이거와 관계없는 균형 바른 신문이다?”
“그렇지.”
우리는 빙긋 웃으며 잔을 부딪쳤다. 레오파드가 술잔을 흔들며 말했다.
“그럼 울프삭 경에겐 언제 말할 셈이야?”
“지금은 파티에 여념 없잖아. 깜짝선물로 선사할 생각이야.”
“하여간 우리 본부장님은 대단해. 혹시 이걸 염두에 두고 마넨의 악수에 엿을 먹이셨나.”
“당연하지.”
“과연.”
레오파드가 엄지를 들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좋아, 이 건은 내게 맡겨 놔. 오늘 안에 멋지게 처리해서 연락하지. 참, 그런데 어제 42번가에서 말이야.”
“……응?”
바빠서 어제는 레오파드 단독으로 42번가를 정찰하라 시킨 터였다. 레이 때문에 레오파드가 42번가를 언급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멈칫거렸다.
레오파드가 눈동자를 은밀하게 빛내며 말했다.
“누굴 본 줄 알아? 그년 말야, 그년.”
“그년이라니.”
“누구긴, 레드폭스지. 화분을 들고 어딘가로 걸어가더라구. 코트 때문에 먼데서도 바로 알아봤지. 내가 소리를 치는데도 훌쩍 가 버리지 뭐야. 운전 중만 아니었으면 당장 끌고 가서 신나게 박았을 텐데. 아, 정말 아쉬워. 레드폭스는 왜 바에 안 나타날까 몰라. 이 서방님께서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데 말이야.”
나는 잔을 내려놓았다. 잔뜩 고무된 기분이 삽시간에 구겨져 버렸다. 앞에서 연신 입맛을 다셔대는 레오파드의 면상으로 하마터면 주먹을 박아 넣을 뻔했다.
“왜 자꾸 년, 년, 하고 부르냐?”
“응?”
레오파드가 지나가는 웨이터의 엉덩이에 시선을 팔며 건성으로 대꾸했다. 저런 모습도 시건방지기 짝이 없었다.
“왜냐구? 아아, 전에도 네가 따졌지, 참. 뭐어……. 하지만 레드폭스 같은 타입이야말로 년이라고 불러 줘야 어울리지. 년이지, 년. 안 그러냐? 먹음직스레 작은 몸매에 여자보다 반반한 얼굴하며. 만질 맛 나는 부드러운 가슴하며. 자그마한 젖꼭지하며. 흐흐. 무엇보다 그 뜨거운 가랑이하며.”
레오파드가 레이의 나체를 떠올리는 듯 눈짓으로 허공을 더듬으며 흐흐흐, 웃었다. 음흉하게 눈초리를 붉혀 대는 저 꼴을 보고 있자니 속이 지글지글했다. 왜 이렇게 심사가 뒤틀리고 열 받는지 나도 알 수 없었다.
“안 봐도 뻔하지. 눈에 딱 보인다고. 어릴 때는 엄마 립스틱도 입술에 발라 보고 여자 옷도 몰래몰래 입었을걸. 바비 인형에 옷 갈아입히면서 놀고 말이야. 머리 긴 것 좀 봐. 어지간한 정성 아니면 그렇게 못 기르지.”
“그리고.”
“나이가 들어선 남자 좆을 떠올리며 딸치고 그랬겠지. 기억해? 네가 그년 젖꼭지 만져 주면 좋아서 질질 싸 댔잖아. 초짜 주제에 구멍에 두 개 처넣고 흔들어도 헐떡헐떡 신음하고 말이야. 바에서 말만 걸면 아무하고나 좋아라 나가 버리고. 남자에게 가랑이를 벌리려고 태어난 놈이지, 한마디로. 그러니깐 년이지, 년.”
“그리고? 계속 말해 봐.”
“어, 그러니까 그년은 이 서방님이…….”
그제야 레오파드가 이쪽을 보고 주춤했다. 잠깐 굳은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손을 확 내저으며 말했다.
“알았어요, 우리 본부장님! 예, 놈입니다! 놈이라니깐요. 이런 제길! 별것으로 다 시비네.”
레오파드가 보드카를 꿀꺽꿀꺽 들이켰다. 시건방이 뚝뚝 떨어졌다. 몇 초만 더 있다간 손에 든 나이프로 레오파드의 혀를 잘라 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오늘밤 연락해.” 한 마디만 던지고 바로 레스토랑을 나왔다.
지겨운 눈발이 몰아쳤다. 인도와 도로를 막론하고 흙탕물과 뒤섞인 눈덩이가 썩어 가는 송장처럼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오후 두 시였다. 곳곳의 성당에서 일제히 종소리를 쏟아냈다. 진회색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는 수많은 말발굽에 짓밟히는 전장처럼 삽시간에 무수한 종소리로 들어찼다.
나는 길목을 천천히 걸어가며 생각에 잠겼다. 레오파드의 말을 곱씹을수록 레이의 처참한 상황이 싸늘히 다가왔다. 유학을 마치고 막 돌아왔다던 동명이인이 떠오르자 그 대조가 더욱 선명해졌다.
고아 출신인 레이는 립스틱을 가진 모친을 두지도 못했다. 비좁은 방에 인형상자를 가득 쌓아둔 이유는 생계유지 때문이었다. 언젠가 한 생각이지만, 그의 작은 체구도 빈곤한 생활의 결과물일지도 몰랐다. 레오파드의 말을 듣는 내내 둔기로 뒤통수를 후려 맞는 것 같았다. 파리한 낯빛으로 인형을 만지던 레이의 모습에 레오파드의 비웃음이 겹쳤다. 전신이 차갑게 식었다.
그러나 내가 레오파드를 비웃을 입장이던가. 지친 레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아랫도리 해결에만 열중한 내가 레오파드와 다른 점이 무엇인가.
어차피 레이는 인간쓰레기야.
매춘을 하든 막노동을 하든 돈을 버는 방법은 널렸다. 인형눈알을 붙이는 것도 그의 선택이었다. 내가 굳이 신경 쓰고 자시고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반반한 얼굴과 몸뚱이를 제외하면 일고의 가치도 없는 인간이었다.
갑자기 레이의 신상정보가 떠올랐다. 열두 살부터 열일곱 살까지 그는 숱하게 병원을 출입했다. 하필 신경성과 관련한 그 많은 병을 앓은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을까.
“내가 왜 이런 생각이나 하지.”
짜증스럽게 내뱉을 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검찰에 심어 놓은 대원이었다.
“음. 뭐냐.”
“긴급보고를 드리려고요. 오늘 브레디 여검사가 저에게 털어놓은 이야깁니다. 두 달 전, 여검사에게 신세를 진 남자가 있었답니다. 그런데 열흘 전 그 남자가 뜬금없이 여검사의 업무실로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마침 그곳에 우리 대원이 한 명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남자가 자기 생일이라면서 검사에게 저녁을 대접하는 등 달착지근하게 굴었다는군요. 그래서 하룻밤을 같이 지냈는데 남자가 대뜸 아까 업무실에서 가이거 대원 같은 사람을 봤는데 요즘 뭐하느냐고 묻더랍니다. 그래서 무심코 요즘 가이거 측과 비밀리에 추진하는 일이 있긴 하다고 털어놨답니다. 브레디 검사는 그 말밖에는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기분 나쁜 예감이 몰려왔다.
“검찰 측에 있던 우리 대원은 사복 근무였을 텐데 남자가 어찌 알아본 거지?”
“남자가 분위기로 알아보았다고 말했답니다.”
“검찰 쪽의 문신 스파이들 동향은?”
“평소보다 더 뜸합니다. 일주일 전부턴 쥐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습니다. 검사에게 접근하는 낌새도 전혀 없다고 합니다. 이번에 입수한 정보도 브레디 검사가 요즘 문신귀족의 뇌물이 씨가 말랐다고 투덜대다가 겨우 떠올리고 제게 털어놓은 이야깁니다.”
“팀에서 당장 브레디 검사를 빼서 구금해. 오늘 바로 그 남자의 신병을 확보해서 연락해. 내가 직접 취조한다.”
통화를 끝낸 뒤 곧장 회계사 담당팀으로 연락했다.
“어찌 됐나.”
“그저께 출국했습니다.”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저에게 ‘알로하’ 하며 연락하더군요. 지긋지긋한 눈의 여왕 치마폭을 떠나 하와이 하늘 아래에 있자니 눈물이 난다고요.”
“오늘은?”
“아침에 호텔로 전화를 걸었는데, 여자와 섹스 중이라며 헉헉대던데요.”
“계속 연락해. 여차하면 증인으로 다시 잡아와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통화정지 버튼을 눌렀다. 나는 본부 앞 공원을 천천히 산책하며 고문부에서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열흘 전에는 쥐새끼를 풀고, 오늘은 이스트에덴 신문사를 건드렸다라…….
수학문제 풀듯 이런저런 가능성을 하나씩 따져 보았다. 작품 진행에 단 2주일의 기간을 소요한 이유는 보안 때문이었다. 시간을 오래 끌면 긴장이 풀리고 정보도 새어나가기 마련이다. 나는 낭비를 극도로 싫어했다. 준비는 비밀리에 철저히, 실행은 눈 깜빡할 사이에 끝내 버리는 것을 좋아했다. 최소한의 시간에 최소의 인원으로 최대한 효과를 얻는 것이 이번 작업의 핵심이었다.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신병확보 완료됐습니다. 지금 바로 오시면 됩니다.”
제복코트를 걸치고 빌어먹을 가면을 썼다. 업무실을 나서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고문소로 향했다. 한심한 차림새를 하고 고문소 복도를 걷노라면 별별 생각이 떠오르기 일쑤였다. 고문소 복도는 길고 어두웠다. 복도에 빽빽이 난 작은 창에서 피 냄새가 드라이아이스 연기처럼 흘러나왔다. 곳곳에서 신음이 새고 남자들의 고함이 터졌다.
지금같이 폭력과 음모라는 추악한 행위가 순탄일로를 달릴 때면 나는 이따금 이상한 감각에 사로잡힌다. 흡사 내가 신에게 특별히 선택받은 운명을 타고난 것 같은 그런 느낌. 어디까지나 착각일 뿐이었다. 나는 픽 웃으며 장갑을 꼈다.
신께서 나 같은 사디스트를 선택할 리 없지.
고문실 문을 열었다. 벌거벗은 사내가 고문관들에게 둘러싸여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 잠깐 사내를 응시했다. 겁에 잔뜩 질려 있었다. 오래 안 끌고 자백을 얻어낼 수 있을 듯했다.
책상에 사내의 프로필이 기록된 서류가 있었다. 귀족들의 파티에 자주 불려 다닌 가수였다. 귀족 여자들과 불륜 및 추문으로 몇 차례 신문 가십란을 장식한 적도 있었다. 오래전 십대소녀를 강간한 전적이 소문으로 퍼지면서 최근에는 일이 끊겨 경제사정이 궁핍해졌다. 프로필만 보면 여자에게 돈이나 뜯는 카사노바에 불과했다.
나는 손끝으로 툭툭 책상을 두들기다가 말했다.
“시간 없으니까 살가죽 바르기로 들어가.”
사내의 면상이 누렇게 떴다. 다가서는 고문관들을 쳐다보는 눈동자로 격한 공포가 서렸다. 처음부터 사내가 살아서 돌아갈 가능성은 추호도 없었다. 사내의 선택은 끔찍하게 죽느냐, 덜 끔찍하게 죽느냐, 둘 중 하나뿐이었다.
비명이 허공을 난자했다. 사내의 몸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보통은 고양이 채찍이 첫 순서였지만, 나는 되도록 빨리 이 건을 마무리할 참이었다.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이 생활 하면서 갈고닦은 것은 직감밖에 없었다. 예감이 좋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았다.
2주일이다. 혹여나 낌새를 눈치 챌 가능성을 계산하고 정한 기간이었다. 저쪽이 우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기획․개발하고 있는지 알아내는 데만 최소 열흘은 걸리리라 자신했다.
그리고 마넨이 진상을 알아냈을 때,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조처는 깨끗이 목을 씻고 기도나 하는 일밖에 없었다. 나는 붕대가 풀리듯 사내의 발치에 주르륵 쌓여 가는 살가죽을 주시했다.
오늘은 레이나 만나러 갈까…….
마침 그를 방문한 날에서 딱 나흘째고.
사내가 시끄럽게 통곡했다. 팔뚝의 일부만 도려냈을 뿐인데도 벌써 난리였다. 스파이로서는 자격미달이었다. 그래도 꼴에 가수라고 비명소리 하나만은 제법 낭랑했다. 저 꼴을 음미하고 있자니 잔뜩 구겨졌던 기분이 조금씩 좋아졌다.
나는 레이에게 직접 목걸이를 걸어 주는 상상을 하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