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L.
부스스 눈을 떴다. 잿빛 아침햇살이 커튼 틈을 비집고 멈칫멈칫 들어서고 있었다.
인형!
부리나케 몸을 일으키다가 주저앉았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자극이 굉장했다. 비로소 남자와 어젯밤에 나눈 행위가 기억났다. 낯이 화끈거렸다.
나쁜 자식.
약속대로 육체적으로 심한 고통은 주지 않았다. 대신 남자는 내게 굴욕감을 요구했다. 스노우 화이트에서 만난 남자들과 뒹굴면서 곧잘 생각했지만, 섹스에도 역사가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상상도 하지 못할 짓거리들이 섹스라는 미명하에 발명되는 동안 얼마나 긴 시간이 소요되었을까. 그것을 역사 기록의 방식으로 기술해 발간하면 단번에 베스트셀러가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지.
기운 빠지도록 남자를 상대한 뒤 잠깐 눈을 붙였다가 그만 곯아떨어진 모양이었다. 나는 초조히 가운을 걸치다가 멈칫했다. 베갯잇 아래로 메모가 삐죽이 나와 있었다.
《인형은 제가 전부 처리했습니다. 그럼, 사흘 뒤에 보겠습니다.》
웬 사흘……?
뒤늦게 기억이 떠올랐다. 사흘 안에 납품해야 하므로 여기 찾아오려면 사흘 뒤에 오라고 남자에게 말했었다.
진짜 어이없는 남자다……. 나는 투덜거리며 침대에 누워 버렸다.
그래도 인형은 처리해 주어서 좋았다. 기브 앤 테이크는 확실한 자였다. 인형도 전부 끝냈고, 덕분에 사흘간 할 일이 없어졌으니 푹 쉬기로 했다. 나는 시트를 목까지 끄집어 올렸다. 자동적으로 어젯밤 일이 뇌리에 되살아났다.
원래 그랬지만 남자는 어젯밤에도 참 모질었다. 처음 두 번은 그토록 다정하게 해 주고는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단계에 이르자 인정사정없이 몰아세웠다. 그러나 나를 애무할 때는 간간이 딴생각에 빠지던 남자가, 그 단계에서는 무서운 집중력을 발휘하던 모습에 한편으로는 고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내 아래에 이상한 기구를 단단히 삽입했다.
「지, 지금 뭘 넣는 거죠?」
「별것 아닙니다. 관장도구죠. 고무선이라서 안쪽이 다치진 않아요. 깊이 들어가겠지만 힘들 정도까진 아닙니다. 엉덩이 내리지 말아요. 시트 더럽히고 싶지 않으면.」
「그, 그걸로 뭘 하려고…… 아. 아!」
몸 깊숙이 차가운 액이 주입되었다. 남자가 짓궂게 말했다.
「지금은 구멍 꽉꽉 오므리는 편이 좋습니다. 잘못하면 흐를 테니.」
연속해서 액이 몸속으로 쏟아졌다. 출렁거리는 이물감에 구토가 나왔다.
「그만 넣, 넣어요. 다 찼어요.」
「다 차긴요. 더 넣을 수 있습니다. 단단히 조여요. 안 그러면 흘러내려서 시트 젖는다니까요.」
「어,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데요…….」
「십오 분요. 그 정도까진 견딜 수 있을 겁니다.」
그런 다음 남자가 또 이상한 기구로 아래를 막았다. 십 분이 지나자 아랫배가 아파서 견딜 수 없었다. 그제야 남자의 의도를 깨닫고 하얗게 질려 버렸다. 다리를 꼬며 어떻게든 참으려 애쓰는 나를, 남자가 부드럽게 애무했다. 그것이 더 견디기 힘든 자극으로 다가왔다.
남자가 벽시계를 흘끗 쳐다보았다.
「십오 분이군요. 이제 욕실로 가죠. 일어설 수 있겠습니까?」
나는 허겁지겁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바닥에 발을 딛는 순간 무릎이 꺾여 버렸다. 남자가 팔짱을 낀 채 웃음을 흘렸다.
「일부러 소형 바이브로 골랐죠. 걸을 때 조심하지 않으면 바로 흘러내릴걸요. 힘 단단히 줘야 합니다. 안 도와줍니다. 자신의 힘으로 기어가세요.」
어쩔 도리 없이 욕실까지 기다시피 해서 갔다. 굴욕감이 전신을 덮쳤다. 남자가 기어가는 나를 느릿느릿 따라오며 뚫어지게 응시했다. ‘눈으로 범한다’는 표현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욕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녹초였다. 아래로 손을 가져가려는 나를 남자가 막았다.
「여기부터는 내가 도와드리겠습니다.」
「피, 필요 없어요. 나, 나가요.」
「나가긴 왜 나가요. 이걸 보려는 게 목적인데. 하하하.」
남자가 유쾌하게 웃으며 나를 엎드리게 했다. 엉덩이 사이를 확 벌렸다. 기구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소름끼쳤다. 그것이 빠지자 무시무시한 배출감이 아래를 직격했다. 필사적으로 힘을 주었다.
「괜찮습니다. 싸세요. 어차피 싸게 되어 있으니 괜한 고집 피우지 말아요.」
남자가 강제로 내 허리를 치켜 올리며 말했다. 그에게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썼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아래가 새 버렸다. 남자는 그것을 빤히 쳐다보았다. 창피함으로 몸을 떠는 이쪽을 샅샅이 훑어보는 그의 낯이 흥분으로 완연했다. 샤워기로 나를 씻어 준 남자가 뒤에서 천천히 들어왔다.
「아, 아, 아, 아, 앗.」
철퍽철퍽 부딪쳐오는 그에게 떠밀려 욕조 가장자리를 잡은 채 간신히 버텼다. 남자가 각도를 교묘히 맞춰 전립선을 귀두로 찔렀다. 오싹한 쾌감이 찌르르 덮쳐 왔다. 눈앞에서 흰 불꽃이 튀었다. 남자가 어떠냐고 쉴 새 없이 질문을 던졌다. 내 머리카락으로 피부를 간질이며 매끄럽게 만졌다.
그리고는 체위를 바꿔서 한 번 더. 참으로 기운 넘치는 사내였다.
기구로 당한 경험이 어제가 처음은 아니었다. 이전부터 남자와 그 친구는 기구를 즐겼다. 그래도 당할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기 일쑤였다. 몸속에서 차가운 기구가 요동칠 때의 감각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불쾌했다. 더 싫은 것은 기구가 삽입된 내 다리 사이를 집요하게 응시하는 눈초리였다.
나는 창문에서 새는 잿빛 일광을 팔로 가려 막았다.
뭐, 인형박스는 다 처리했으니까. 그걸로 됐지.
“벌써 일어났습니까?”
갑자기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와서 화들짝 놀랐다. 황당하다 못해 기가 찼다.
“안 가고 뭐했어요?”
“뭐하긴요. 인형눈알 달았죠. 한 시간 전에야 마쳤거든요. 담배가 다 떨어져서 담배 사러 나갔다가 왔습니다. 인사는 하고 떠나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어서. 어차피 오늘은 일요일이라 남는 게 시간인데요, 뭐.”
남자가 코트를 벗으며 넉살을 떨었다. 나는 그를 노려보다가 시트를 뒤집어썼다. 정말이지 할 일 없는 놈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옆으로 남자가 슬쩍 눕더니 시트 아래로 손을 넣어 내 목덜미를 만졌다. 당당한 행동이 마치 집주인이라도 되는 듯했다. 나를 또 건드릴 속셈이 분명했다.
“화났습니까.”
“어이가 없을 뿐입니다.”
“뭐가요?”
남자가 내 가슴을 만지며 물었다. 유두 부위 살점을 쥐어 올려 끝을 희롱했다.
또 이런다…….
나는 쓰게 웃었다.
예의만 그럴싸하게 차릴 뿐 실상은 요구에 가깝지 않은가. 이곳은 골목마다 환락이 썩어 가는 42번가. 경찰은 어지간한 사고 아니면 접수도 해 주지 않았다. 그리고 저 남자는 악명 자자한 가이거의 대원이었다. 남자의 집요한 성격을 떠나서도 나로서는 그를 거부할 방법이 없었다.
뭐, 인형을 다 처리한 덕분에 시간은 많았다. 구태여 완강히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귀찮았다.
할 테면 하라지.
괴상한 사람이었다. 왜 자꾸만 내게 섹스를 요구할까. 변태라서 그런가. 나는 왜소한 체구에 용모도 매력 없었다. 나를 꺼려하는 이웃들이며 헌책방에 들르는 손님들 반응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대개 인상을 일그러뜨리기 일쑤였다.
남자가 내 가슴을 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가만히 내리깐 눈빛이 날카로웠다. 예전에도 그는 종종 나를 만지면서 생각에 빠져들고는 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생각에 빠져 있는 걸까. 어쩌면 평범한 가이거 대원이 아닐지도 몰랐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전신으로 한기가 돌았다.
“갑자기 왜 그러죠?”
남자가 손끝으로 내 유두를 꾹 누르며 불쑥 말했다.
“뭐가요?”
“후후후…… 지금 소름끼쳐 했잖아요. 이렇게 만지고 있으면 상대방 반응이 다 보입니다. 몸은 거짓말 안 하거든요. 그쪽 몸에 닭살이 일순 돋았어요. 내가 무서운가 봐요?”
무의식중에 떨어지려는 나를 남자가 꽉 잡아 안았다. 허리에 밀착되는 그의 하복부가 딱딱했다. 남자가 내 귓불을 빨며 말했다.
“왜 그랬냐고 묻잖습니까.”
흡사 취조하는 말투였다. 망설이던 나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냥, 그쪽이 가이거 대원이라는 사실이 떠올랐어요. 그래서 무서웠을 뿐이에요. 순간적으로.”
“가이거 대원이라서 무서웠다라. 흐흠.”
남자가 낮게 코웃음 쳤다.
“가이거가 무섭습니까.”
“……무서울 뿐만 아니라 아주 싫어요.”
“솔직한 대답이군요. 뭐, 안심해도 좋습니다. 저 같은 말단 대원은 길거리에서 시위대나 패는 게 고작이니까요. 그쪽처럼 죄 없는 사람까지 잡아갈 권력은 없어요.”
남자가 더는 캐묻지 않으며 다시 나를 만졌다. 가슴을 쓸던 손이 느리게 아래로 내려가 몸속을 파고들었다. 그때 갑자기 창턱에 놓아둔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마넨 경이다.
반사적으로 남자를 뿌리치고 급히 가운을 걸쳤다. 휴대전화를 들고 욕실로 달려갔다. 긴장감으로 등줄기를 타고 땀이 흘렀다.
“예.”
최대한 소리 낮춰서 말했다.
“그동안 잘 있었나. 새 소식이네. 이스트에덴 신문사 편집부에 가이거 대원들이 상주 중이라고 하더군. 우리를 때리려고 그쪽과 손잡은 듯한데 어쩌면 좋겠는가. 눈감고 모른 척할까, 아니면 살그머니 찔러 보는 편이 좋을까.”
“후자가 좋겠습니다.”
남자를 의식해서 짧게 대답했다.
“역시 그렇지? 과연 자네와 나는 한 몸이라니까……. 저쪽이 이스트에덴을 계속 이용해먹게끔 고이 내버려두지 않는 편이 좋겠지. 내일 울프삭의 파티가 있어. 갔다가 오후에 다시 연락하겠네.”
“기다리겠습니다.”
휴대전화 전원을 껐다. 나는 욕조 턱에 걸터앉은 채 잠깐 소리 죽여 웃었다. 돌이켜보니 모순이었다. 밤에는 가이거 대원과 난잡하게 뒹굴고 낮에는 가이거를 공격할 궁리를 짠다라. 문 밖에 있는 저 남자나, 휴대전화 건너편의 마넨 경이 이런 상황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한참 소리 죽여 웃다가 일어섰다. 방으로 들어서자 남자가 움직임 없이 쳐다보았다. 내가 “왜?” 하고 묻자 남자는 어깨를 으쓱 올렸다.
“아뇨, 별것 아닙니다. 이만 가야겠네요.”
남자가 코트를 걸쳤다. 나는 벽에 몸을 기댄 채 잠자코 있었다. 코트를 걸치다가 말고 남자가 이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회색 눈동자가 기묘하게 빛났다. 뚜벅뚜벅 구둣발 울리는 소리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남자가 양손으로 내 어깨를 잡았다. 그러고는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여 내 입술로 키스했다.
농밀하고 짙은 키스였다. 남자가 내 양 손목을 잡아 자신의 목에 감으며 손을 깍지 끼우도록 했다. 그 바람에 휴대전화가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남자가 내 가운 끈을 천천히 풀었다.
“그대로 있어요…….”
가운이 스르륵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