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 .M─ (16/101)

16 .M─

레이가 말끝을 흐리며 손을 멈췄다. 푸른 눈동자가 설핏 흐려졌다. 눈빛에 두려움이 완연했다.

하여튼 나라는 녀석이란…….

반사적으로 뻐근해 오는 아랫도리를 참으며 재촉했다.

“뭡니까, 셋째는.”

“이 눈알이 무섭거든요.”

“무서워요? 하도 많이 만져서 지겨워서요?”

“그런 뜻이 아니에요. 열흘 전인가 울프삭이 이 거리를 방문했어요. 엄청난 행군이었죠. 강제로 동원된 군중들이 추위를 참으며 소리 지르구요. 울프삭은 사신 가면을 쓴 장신의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마이크로 고함을 쳐 대고.”

나는 흥미를 느끼며 “그래서요?” 하고 물었다.

“갑자기 무서운 일이 벌어졌어요. 이쪽을 지나치는 트레일러를 향해 나는 꽃을 던졌어요. 그 꽃이 한 사신의 어깨를 스쳤어요. 그런데 돌연 그가 권총을 꺼내 나를 겨누었어요.”

“저런! 다친 데는 없어요?”

내 넉살을 아랑곳하지 않고 레이가 인형눈알을 혐오스럽게 내려다보았다.

“총구에서 불이 뿜었어요. 순간 총탄이 나를 관통한 느낌에 숨도 쉬기 힘들었어요. 정신을 차려 보니 바로 옆에 한 남자가 쓰러져 있었어요. 가이거 대원들이 소릴 지르며 나를 밀쳤어요. 그들이 시체를 비스듬히 들어 올리는데 얼굴에서 눈알이 주르륵 흘러나오는 거예요. 그날부터 인형눈알을 볼 때마다 주검의 눈알이 떠올랐어요.”

“과연 무서웠겠습니다.”

나는 짐짓 고개를 끄덕거렸다. 속으로는, 내가 당신을 쏘는 실수 따윌 할 리가 없지, 난 명사수거든…… 하며 웃었다.

“그래서 이 일이 아주 끔찍해요. 먹고살아야 하니까 억지로 붙잡고는 있지만 마음 같아선 당장 불사르고 싶어요.”

인형눈알을 든 레이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그 손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불쑥 말했다.

“겁이 많은가 봅니다.”

“예.”

싱거우리만치 깨끗한 수긍이었다. 하하, 이런…… 괜스레 한 방 먹은 기분이었다. 은근히 만만치 않다니까.

그래서 흥미만점이고.

나는 싱긋 웃었다. 레이와 밀고 당기는 일련의 과정이 상당히 즐거웠다. 누가 상상하겠는가. 귀족나리들도 벌벌 떠는 가이거 본부장이 가난뱅이 집에서 인형눈알이나 다는 광경을. 기침이 심한 레이를 보다 못해 하룻밤을 핑계로 자청한 일이었으나 이런 코미디가 없었다. 끝내주게 코미디였다.

룸에 들어선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발 디딜 틈도 없이 가득한 인형상자에 경악해 버리고 말았다. 거기에 레이는 알몸에 달랑 가운만 걸치고 있었다. 방문 목적도 여차저차 하건만 흡사 나를 딱 유혹하고자 기다린 듯한 행색이었다.

그 아랫도리 뻐근한 모습을 하고서, 레이는 나 몰라라 인형눈알을 달았다. 진지하게, 열심히 달았다. 그 꼴을 보고 있노라니 기절할 것 같았다. 미치도록 폭소감이었다.

나쁘지 않았다. 레이와 함께 인형눈알 붙이는 이 상황이 눈물 나게 어이없긴 했지만 나름대로 재미있고 즐거웠다.

투자로 치면 그만이지.

수도승 지망자 레이는 상상도 못하겠지만, 내 가방에는 몇 개의 은밀한 도구가 들어 있었다. 나는 일주일 넘게 작품 준비로 잔뜩 스트레스 받은 상태였다. 오늘은 쌓이고 쌓인 욕구를 후련하게 풀 참이었다.

괜찮아…….

언제나 뇌까리던 말을 소리 안 나게 중얼거렸다.

적어도 초반부는 당신을 위해 노력할 테니까.

나는 재빠르게 손을 움직이며 픽픽 웃었다.

악당 스네이크 성질 많이 죽었다…….

아까부터 레이를 깔아 버리고 싶은 욕구를 겨우겨우 억누르고 있었다. 간만에 만나는 레이는 병색이 짙었다. 그것이 더욱 자극적이었다.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에서는 물기가 흘렀다. 목욕을 마친 몸에서는 비누 향내가 은은하게 풍겼다.

뭐, 좋지.

인형상자를 세 개나 해치워 주는 만큼 그쪽도 쉽게는 안 끝날 거야.

나는 지그시 미소 지었다.

이제 남은 상자는 한 개였다. 나는 레이를 흘끗 곁눈질했다. 그는 이쪽이 해치운 상자와 아직도 많이 남은 자신의 몫을 연신 번갈아보고 있었다.

“몇 상자 더 시킬 걸 그랬다고 생각했지요, 지금?”

슬쩍 묻자 레이의 낯이 벌게졌다.

하하하. 정말 재미있다니까.

뭐, 오늘밤이 만족스러우면 일 끝낸 후 몇 상자 더 도와주지.

나는 기분 좋게 결정을 내렸다. 한 상자는 삽시간에 끝났다. 내가 세 상자를 끝낼 동안 레이는 한 상자 반밖에 채우지 못했다. 이쪽을 못 본 척, 레이는 인형만 잡았다.

“끝났어요. 그쪽도 좀 쉬죠?”

인형을 만지작거리던 레이가 작게 말했다.

“심하게 하면 안 돼요. 나는 일해야 하니깐.”

나는 빙긋 웃었다.

“그걸 걱정했습니까? 하하하. 거부감 들지도 모를 만한 게 하나 있긴 합니다만, 썩 힘들지 않을 겁니다. 어차피 오늘도 저 혼자뿐이잖아요.”

망설이는 레이를 잡아 일으켰다. 비누향내가 여전했다. 아마빛 머리카락에 얼굴을 파묻고서 향기를 즐기다가 그를 들어 안고서 침대로 향했다. 이러고 있자니 삼류 할리우드 영화배우 같군. 나는 고소를 머금었다.

체구가 작은 레이였다. 헐벗고 굶주려서 이 꼴이 되었나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방에 가득한 인형상자가 웃기다 못해 이제는 처참할 지경이었다. 저런 미인에게 이 웬 가난인가 싶었다. 가난도 보통 가난이 아니었다. 이 수준이면 기승을 부리는 궁상이었다.

휑한 방에서 기침을 연신 터뜨리며 인형눈알을 붙이는 레이의 모습이 드물기 짝이 없는 내 동정심을 이끌어냈다. 배즙을 마시는 동안, 돈을 줄 테니 같이 하룻밤을 즐기지 않겠느냐고 레이에게 제의해 볼까 잠시 고민할 만큼.

그러나 42번가에 사는 레이가 매춘을 마음먹었다면 벌써 했을 것이다. 매춘은커녕 수도승 생활을 희망할 만큼 고리타분하고 깐깐한 사람이었다. 매춘을 하지 않은 것은 밑바닥 인생의 마지막 자존심일지도 몰랐다. 게다가 잠깐 품은 동정심은 그새 내팽개치고, 욕구를 해결하고자 기어코 병자를 침대에 눕히는 나도 정말이지 도리 없는 녀석이었다.

그래서 초반부는 레이를 위해 바쳤다. 직설화법에서 익히 드러났듯이 그는 솔직하게 반응할 줄 알았다. 내 손끝이 닿을 때마다 기뻐하는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레이가 내 등을 끌어안으며 달콤하게 신음했다.

참…… 이럴 때마다 씁쓸하다니까.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순진하리만치 즐거워하는 레이의 모습에, 여기서 그쳐도 좋지 않을까 잠깐 갈등하고 말았다. 그러나 결국 내 본능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알코올 중독으로 붓을 잡지 못하자 물감을 바른 손끝으로 캔버스를 칠한 어느 늙은 화가처럼, 쉽사리 꺼질 욕망이 아니었다.

“아…….”

레이가 옆으로 돌아누웠다. 흐트러진 아마빛 머리카락이 만개한 꽃 같았다. 충분히 만족한 기색이었다. 나는 그의 여운이 가실 때까지 기다렸다.

“좋았어요?”

애무를 멈추지 않으며 묻자 레이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나는 그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아마빛 머리카락을 만지면 묘하게 머리가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목전까지 다가온 상영회 생각에 잠겼다.

준비는 순조로웠다. 상상만 해도 즐거웠다. 우선 마넨에게 수의를 입혀 옴짝달싹못하게 만든 후, 의원선출 대회 때 극좌파와의 연계를 핑계 삼아 내란죄까지 뒤집어씌워 문신귀족들을 깡그리 잡아들일 계획이었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줄도 모르고 파티에서 흥청망청 와인이나 홀짝거리는 마넨을 떠올리자 웃음이 나왔다.

나도 모르게 기척을 낸 모양이었다.

“왜 그렇게 웃어요?”

“아. 별것 아닙니다.”

나는 그의 아래로 손가락을 파묻으며 대답했다. 레이를 품은 내 흔적으로 젖어 가는 손가락이 제법 만족스러웠다. 정액투성이로 꿈틀거리며 손가락을 꽉꽉 무는 뜨거운 구멍이 자극적이었다. 안을 더듬으며 천천히 휘저었다. 그의 귓불을 핥으며 말했다.

“이러니까 좋아요?”

“아…….”

레이가 입술을 떨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