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L.
“왜 그러는가?”
마넨 경이 재촉했다. 긴 시간 침묵을 지키는 내 반응이 께름칙한 모양이었다.
“이보게, 왜 계속 말이 없는가. 무슨 일인가?”
“……잠깐만 기다려 보십시오.”
“허허.”
마넨 경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그를 십 년간 상담하면서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으니 긴장할 만도 했다.
울프삭은 에밀렌 건으로 기분이 좋은지 온몸에서 광채가 번쩍번쩍 쏟아졌다. 마넨 경은 울프삭이 최근 밤낮으로 파티를 열며 흥청망청 노느라 정신이 없다고 귀띔했다. 울프삭의 동태에서 별다르게 주목할 점은 없었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따로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우선…… 울프삭은 기분이 퍽 고무된 상태로군요. 호탕한 웃음소리가 계속 터져 나옵니다. 그리고 스펠링이 TER……로 시작되는 숲이 보이는군요. TER, 로 시작되는 장소의 군관 딸을 자신의 친인척에게 긴급 입양시키려는 모양입니다. 아마도 왕세자비 간택을 염두에 둔 짓이겠죠.”
“난 또 뭐라고. 흔한 수법이지. 그럼 어쩌면 좋겠나? 우리 측이 왕세자비 후보로 물색한 아이가…….”
“잠깐만요.”
“응?”
지금 왕세자비는 문제가 아니었다. 마넨 경의 주변에 검은 연무가 흐르고 있었다. 누군가가 마넨 경을 노리고 있다는 의미였다. 구체적인 형상은커녕 사소한 글자조차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는 마넨 경과 직접접촉을 하지 않은 자가 분명했다.
이거 귀찮게 되었는데…….
내 투시주술은 계약상대 마넨 경을 가장 선명하게 읽을 수 있다. 그 다음은 마넨 경과 직접적으로 접촉한 자, 이른바 2차 상대다. 마넨 경과 관련한 사항을 생각하며 집중하면 상대방에게서 그에 관한 글자가 쏟아져 나오거나 흐릿한 그림들이 보였다.
숲을 돌아다니며 특정 곤충을 채집하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래서 나는 투시주술을 ‘채집’으로 즐겨 불렀다. 마넨 경의 심중은 휴대전화로 통화를 시작하는 즉시 읽어 버릴 수 있으나, 2차 상대까지 가면 채집할 수 있는 정보의 범위가 축소된다. 이를테면 나는 마넨 경에 한해서는 그의 유아 시절까지 샅샅이 읽어내지만, 2차 상대는 달랐다. 지나치게 오래된 기억이나 혹은 당사자가 까맣게 잊어버린 경우라면 채집이 불가능했다.
그런데 이번은 3차 상대였다. 마넨 경과 사소한 접촉마저 하지 않은 인물. 이 경우에는 아무리 살펴보아도 대개는 수확 없이 끝났다.
고민 끝에 나는 마음을 정했다.
“죄송합니다만 기다려 주십시오.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눈을 감고 온 정신을 집중했다. 휴대전화를 든 손이 파르르한 떨림을 일으켰다. 전신이 붕 뜨는 감각이 치달았다. 이런 때 나는 흡사 거침없이 창공을 활보하는 독수리로 변한 듯한 착각에 종종 사로잡혔다. 의식이 어딘가로 빠르게, 아주 빠르게 날아갔다.
보인다…….
짙은 암흑 속에서 흐릿한 윤곽이 드러났다. 마넨 경의 긴 로브 자락이 시선에 잡혔다. 차갑고 어두운 기도실. 불길하게 일렁이는 촛불. 십자가 아래에서 기도하는 마넨 경. 그리고 그를 둘러싼 검은 연무.
3차 상대에게서 채집할 수 있는 정보라고는 당사자가 깊이 골몰하는 관심사, 그나마도 단편적인 내용이 고작이었다. 요컨대 실낱같은 단서. 그러나 지금은 그것만이라도 건져야 했다.
나는 검은 연무를 노려보았다. 연무에서 풍기는 잔인한 살기에 숨이 막혔다. 시간이 흐르자 검은 연무 속에서 차츰 흐릿한 형체가 드러났다.
다음 순간 휴대전화를 놓칠 뻔했다. 그새 온몸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벌써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나는 한동안 숨을 몰아쉬다가 휴대전화를 충전기에 끼웠다.
오늘 전화통화는 장시간이 소요될 듯했다.
“경의 언론사에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언론사?”
“경의 언론사 간판이 보입니다. 누군가가 경을 노리고 있습니다.”
“나와 직접접촉을 하지 않은 자인가?”
“예. 한데 울프삭의 사주를 받은 자는 아닙니다. 울프삭에게서 경의 언론사와 관련된 사항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거든요. 아무튼 이거 안 좋은데요. 3차 투시인데도 나한테까지 살의가 또렷하게 전달될 정도면 상대방이 굉장한 악의를 품고 있다고 단정해도 되겠죠. 그가 꾸미는 일이 보통 건수는 아닐 듯합니다.”
큰 충격이 휴대전화 너머에서 일렁거렸다.
“……언론사는 플로레아트 영지와 더불어 내 주요 수입원이야. 거길 어떻게 건드릴 셈일까? 무슨 이유로?”
“3차 투시만으로는 저도 명확하게 알 방도가 없습니다. 어쨌든 해 봅시다. 경께서 사람들과 접촉한 최근 기록을 샅샅이 검토해 봐야겠어요. 경을 노리는 자가 경의 측근을 포섭했을 수도 있으니까요. 쥐새끼부터 차근차근 올라가 보죠. 지금부터 시작할 테니 지루하더라도 기다려 주십시오.”
“알겠네.”
다섯 시간에 걸쳐 마넨 경과 접촉한 모든 자를 살펴보았다. 가족과 친구는 물론이거니와 하다못해 애완견까지 샅샅이 훑었다.
“세 명입니다. Q로 시작하는 이름이 보이는군요. 큰 짐 같은 걸 잔뜩 들고 있어요. 콰……이노코텐. 그리고 세이완, 헤……로. 경에 대한 정보를 팔아야지, 궁리했군요. 꽤 지난 일입니다. 온몸에 숫자 같은 게 보입니다.”
마넨 경이 벌컥 내뱉었다.
“회계사들이야. 언제나 노트북과 서류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다닌다네. 이제 감이 잡히는군.”
“시간이 없습니다. 쥐새끼를 잡았으니 이젠 올라갈 일만 남았습니다. 회계사들부터 조사해 보십시오. 저쪽이 눈치 채지 못하게끔 자연스러운 만남을 시도해 그들과 악수하십시오. 최대한 빨리 하셔야 합니다.”
“알겠네. 오늘밤 안에 연락하지.”
“그리고 이 말은 불쾌하게 생각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막내 따님이 레즈비언이더군요. 알고 계시지요?”
“……대강은.”
“조심하십시오. 경의 막내 따님이 레즈비언이라고 스캔들 나면 기독교 신자들의 표를 잃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럼 전화 기다리겠습니다.”
통화를 끝내고 쓰러지다시피 침대에 드러누웠다. 온몸이 땀투성이에 눈앞까지 어질어질했다. 몇 시간 내리 집중했으니 당연했다. 마침 감기로 머리가 무겁던 터라 피로가 더욱 심했다. 기침이 연신 새어나왔다.
시트를 턱까지 끌어올리며 방에 산더미처럼 쌓인 인형박스를 응시했다.
저걸 언제 다 하나…….
그날 이후 인형눈알만 보면 동공이 흘러나오던 주검이 떠올랐다. 도통 일에 속도가 붙지 않았다. 이런 내가 퍽 한심했다.
그러나 사신이 일말이라도 조준을 잘못했더라면 머리에 총탄이 박혔을 쪽은 분명 나였다. 그 순간을 돌이킬수록 끔찍했다. 이런 때마다 내가 겁이 많다는 사실을 통감했다. 모사를 꾸미는 짓도 마넨 경의 뒤에 숨어 있으니까 가능했다. 저 포악한 울프삭의 정면에 나서서 내가 대립하는 일 따위, 상상만으로도 오싹했다.
창문에 비치는 자작나무를 곁눈질했다. 자작나무, White Birch에서 Birch에는 회초리로 때린다는 의미도 있었다. 내가 자작나무의 그런 면모를 이어받았다면 지금쯤 많이 다른 삶을 살았을지도. 나는 쓰게 웃으며 시선을 거두었다.
어쨌든 이대로 물러설 수야 없지.
그들에게 이미 장갑은 던졌고, 나는 마넨 경과 사랑을 맺은 관계 아닌가.
회계사와 언론사라면 유추는 쉽다. 탈세 관련일 것이다. 겨울이 1년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왕국에서 국민들의 큰 오락은 독서와 영상매체였다. 취미가 곧 무취미인 나도 겨울을 나기 위해선 손에 책을 들 수밖에 없었다. 통계자료에는 국민의 45퍼센트가 한 달에 열 권 이상의 잡지를 구독하고 텔레비전 시청은 하루 세 시간을 넘는다고 나왔다. 왕국에서 출판업과 영상산업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마넨 경은 사십여 종의 잡지와 여덟 종의 신문을 쏟아내는 왕국 최대 규모의 언론사를 소유하고 있었다. 광고수입을 제외하고도 팔천오백만 독자들을 상대로 팔아치우는 일간지 한 종의 연간 수익만 엄청난 액수였다.
그 언론사를 탈세로 들쑤시려 한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마넨 경에게 올가미 한번 제대로 씌웠군.
일단 마넨 경의 연락을 기다려 보기로 했다. 나는 인형 박스를 한 번 더 쳐다본 뒤 곯아떨어져버렸다.
밤 열한 시경에 휴대전화가 울렸다.
“회계사들과 저녁식사를 하고 돌아왔네. 악수도 했고. 흥, 갑자기 내가 불러내니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더군.”
“그럼 시작해 보죠. 어느 놈인지 저도 참 궁금하군요.”
감기가 심했지만 도리 없이 채집을 시작했다.
“두 달 전이군요. 두 명의 남자가 회계사들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밝히길 거부하며, 회계사들에게 마넨 경의 치부와 관련된 정보를 사고 싶다면서 거액을 제시했군요. 회계사들은 그들이 제시한 금액의 다섯 배를 불렀습니다. 그만한 거액을 지불하면 마넨 경의 돈세탁 자료를 빼돌려 주겠다고 했습니다.”
잠자코 듣던 마넨 경이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 달 전이면 회계사들이 내게 플로레아트 영지 일부를 떼어달라고 졸랐던 때야. 내가 거절해서 앙심을 품었나 보군. 계속하게.”
나는 숨을 가다듬으며 더욱 집중했다. 자작나무 가지를 든 손에 식은땀이 흥건하게 맺혔다. 눈꺼풀이 경련을 일으켰다. 마넨 경에게서 쏟아지는 영상은 탈색된 필름같이 잿빛 일색이었다. 흡사 검푸른 안개가 서린 숲을 헤치고 걸어가는 기분이었다. 그곳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비틀거리는 유령처럼 음산해 보였다.
“회계사들의 손에 번쩍거리는 가방, 돈 가방이겠죠. 그런 가방이 보이는군요.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이 돈 가방을 건넸습니다. 회계사들은 그들의 덩치에 겁을 먹었던 듯합니다. 그들을 한번 뚫어 봐야겠습니다. 기다려 보세요.”
나는 온 정신을 집중했다. 3차 투시라서 쉽지 않았다.
“남자들이 어딘가로…… 멀리서 뭔가가…….”
영상이 끊겼다.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긴 침묵 끝에 마넨 경이 말했다.
“정리하면 누군가가 내 언론사 돈세탁과 관련된 건수를 준비하는 게로군. 내가 어떻게 대처해야 좋겠는가.”
나는 생각에 잠겼다. 회계사들과 거래한 사내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 한 번에 회계사들과 거래를 성립하리만치 자본력도 탄탄했다. 보안이 철통이고 돈도 많다, 즉 보통 상대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피할 방법은 없다. 그렇다면 맞바람 작전뿐이다.
“정보부터 수집해 보죠. 돈세탁을 터뜨리려면 검찰 측에서 먼저 행동을 개시할 겁니다. 그쪽을 한번 뒤져 보셔야겠습니다. 경을 노리는 자의 정체부터 알아내야 합니다.”
“알겠네. 곧 연락함세.”
마넨 경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모레 새벽에 전화가 걸려왔다.
“검찰 측의 보안이 철통이라 애먹었지만 정보를 얻긴 했네.”
“누구의 사주입니까?”
“울프삭.”
“그럴 리가?”
무심결에도 목소리가 높아졌다. 울프삭에게서 그런 낌새는 추호도 보이지 않았다. 내 채집 결과는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가이거가 검찰 인사들과 비밀리에 추진하는 건수가 하나 있다고 정보통이 말하더군. 그렇다면 울프삭 외에 누가 있겠나. 이거 느낌이 안 좋은데. 회계사들의 두 달 전 기록도 뚫어본 자네가 울프삭의 동태를 놓치다니……. 요즘 부쩍 자네 몸이 안 좋은 낌새였는데 혹시 그 탓인가?”
순간 또렷한 직감이 들어섰다. 검은 기운이다. 처음부터 인상이 나빴다. 울프삭의 뒤에 도사리고 있던 검은 기운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울프삭과 별개로.
“코트비카 후작 사건 때 울프삭의 뒤를 떠돌던 검은 기운을 기억하십니까. 아무래도 그놈 같습니다. 울프삭과는 따로 움직이는 듯한데, 가까운 측근이겠지요.”
“그러니까 그게 누구라는 게야!”
격한 반응을 무시하고 채집을 다시 시작했다.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절대 놓치지 않는다.
분노하는 일이 드문 나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발악하다시피 정신을 집중했다. 울프삭을 둘러싼 검은 기운에서 글자가 희미하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보입니다. 글자가 보여요. S…….”
S……
몇 개의 알파벳이 사지 꺾인 인형처럼 춤추었다. 두서없던 알파벳이 천천히 꿈틀거리며 순서가 배열되기 시작했다.
S…… N…….
SNAKE.
뱀?
일순 한기가 전신을 감쌌다. 단지 네 음절의 저 단어에서 풍겨오는 느낌이 그만큼 으스스했다.
“울프삭의 측근 중에 스네이크라는 자가 혹시 있습니까?”
“스네이크? 귀족 중에 그런 괴상한 이름은 없어. ……잠깐.”
마넨 경이 생각에 잠겼다.
“알려져 있다시피 가이거의 부장들은 이름 대신 맹수 이름에서 따온 닉네임으로 호칭하지. 그리고 스네이크는 전통적으로 가이거 본부장에게 붙는 명칭이라고 얼핏 들었네. 가이거의 독자적인 행동이란 말인가, 그럼? 그 주먹이나 써 대는 왈패들이 설마…….”
그 말에 비로소 기억났다. 스네이크는 울프삭의 심중에서 이따금 눈에 띄던 단어였다. 단박에 확신이 들어섰다. 가이거 본부장의 단독행동이었다.
“아실 텐데요. 제 채집은 틀린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울프삭을 채집할 때 띄엄띄엄 본 적 있습니다. 뱀 대가리, 건방진 놈, 운운 하면서 말입니다. 그게 본부장이었군요.”
“그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스네이크의 꿍꿍이부터 알아내야겠죠. 놈과 접촉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암살은?”
“둘 다 어려워. 온갖 파티에 십 년이나 들락거렸지만 가이거 부장들의 머리카락 한 올 구경하지 못했어. 구경이 뭔가, 그 끔찍한 가면에 펄럭거리는 코트자락만 봐도 겁이 나. 놈의 본명이라도 알았다면 벌써 손쓰고도 남았지.”
“그렇다면 맞바람 쳐 보죠.”
“역시 그렇군.”
“저쪽이 경의 언론사를 뒤지고 있으니 이쪽은 울프삭의 방송국 비리를 건드려 보죠. 울프삭의 방송국에 심어 놓은 사람들을 긴히 활용하셔야겠습니다. 울프삭이 요즘 파티를 자주 연다고 했죠? 최대한 빨리 파티에 참석하셔서 울프삭과 악수하시고 저에게 바로 연락하십시오. 스네이크와 직접접촉을 하는 편이 가장 좋겠지만 접근이 힘들다니 어쩔 수 없지요. 그러나 놈들이 행동을 개시할 날짜만큼은 반드시 알아내야 합니다. 타이밍 맞춰서 놈들에게 같이 죽어 보자고 협박합시다. 그렇게 하면 저쪽도 더는 세게 나오진 못하리라 봅니다.”
“이것 참 정신없구먼. 그럼 곧 연락하겠네.”
이틀 뒤 마넨 경에게서 연락이 왔다. 울프삭을 통해 스네이크의 심중을 살펴보았다. 이번 채집은 순조로웠다. 스네이크가 이번 계획에 어찌나 흥분하고 있는지 3차 투시인데도 디데이 날짜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디데이는 아흐레 뒤였다.
소름이 끼쳤다. 아흐레 뒤라. 내가 그의 계획을 최초로 눈치 챈 날부터 계산해도 고작 2주일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마넨 경을 공략할 계획이었다니 이 얼마나 대담한 놈인가. 심지어 치밀하기까지 했다. 내가 조금만 허술하게 넘겼다면 마넨 경은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것이다. 스네이크가 평소 준비를 철저히 해 놓았다는 증거였다. 기껏 주먹이나 쓰는 왈패는 절대 아니었다.
울프삭은 이런 자를 부하로 부리면서 왜 그토록 무시했을까. 마넨 경과 울프삭의 본격적인 대립이 이제 1년째였다. 그 전에는 울프삭은 나에게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고, 관심을 줄 필요도 없었다. 만약 마넨 경이 울프삭과 야합하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2년 전 사라진 거물 3인방의 전철을 똑같이 밟았을 가능성도 있었다.
어쨌든 지금 우리에게 가이거를 상세히 조사할 시간적 여유는 없었다. 언론사 수습이 먼저였다.
마넨 경은 1주일이면 저쪽에게 반격할 준비는 어렵지 않다고 자신했다. 자신 소유의 언론사에 울프삭의 방송국 비리 정보가 쌓여 있다고 했다. 가이거 측이 치고 들어오기 직전에 마넨 경 소유의 언론사를 이용하여 방송국 비리를 터뜨리겠다고 경고하면 그만이었다.
마넨 경이나 울프삭이나 뼛속까지 썩은 부패관리였고, 그들과 연루되지 않은 귀족이 없었다. 마넨 경과 울프삭의 치부가 바깥으로 드러나는 순간 왕국은 벌집을 건드린 양 발칵 뒤집힐 터였다. 그것을 계산한 맞불작전이었다.
열두 시간에 걸친 통화를 마친 후 나는 완전히 앓아누워 버렸다. 인형 박스에는 손도 대지 못한 채로.
“한심하다, 한심해.”
나는 인형눈알을 달며 자조했다. 마넨 경과 통화를 마친 뒤 밤새 끙끙거린 터였다. 오늘 오후에야 몸을 추스르고 인형눈알을 다시 잡았다. 나는 인형눈알을 달면서 몇 번이고 “한심하다, 한심해.” 하고 입버릇처럼 중얼거렸다.
병마로 시달리는 동안 내가 얻은 것은 허약한 체력과 우울증 그리고 대인공포증뿐이었다. 방에 틀어박혀 조화를 만들거나 혹은 인형눈알을 다는 일 외에 내가 할 만한 일거리는 없었다. 마넨 경은 자신이 의지하는 참모가 기실 이토록 한심한 무능력자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이름 모를 사내들과 문란하게 뒹굴었다는 사실까지 알면 그 독실한 가톨릭 신자는 당장 심장마비를 일으킬지도.
“얌전한 망아지가 부뚜막 위로 올라간다더니.”
나는 혼잣말하며 킥킥 웃었다.
창밖이 시끌시끌했다. 간만에 폭설이 잦아드니 사내들이 42번가로 몰려온 모양이었다. 커튼을 굳게 친 다음 배즙을 달였다. 감기는 가라앉았지만 기침은 여전했다. 배즙을 마시자 기침이 약간 가셨다.
오늘자 신문이 올해 겨울은 한 달을 더 끌 예정이라는 비보를 전했다. 끔찍하다 정말……. 저 지긋지긋한 눈의 여왕을 한 달이나 더 봐야 한다니.
기분을 전환할 겸 목욕을 했다. 며칠간 꼼짝도 못하고 땀만 흘린 터였다. 목욕을 마친 뒤 알몸으로 침대에 드러누워 머리를 말렸다. 언젠가 남자가 머리 감을 때 불편하지 않느냐고 묻던 것이 기억났다. 불편하지.
불편만 하겠는가. 자르려고 그토록 시도했건만 번번이 실패해 버린 끔찍한 머리카락이었다. 그런 머리카락을 공들여 말려 줄 성의는 없었다. 침대에 드러누워 빨래 널듯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마를 때까지 기다렸다. 난방으로 건조해진 실내에 습도를 가해 주고, 인형눈알 다느라 지친 몸도 쉬고, 일석이조였다. 한심하다를 노래처럼 흥얼흥얼 뇌까렸다. 내가 곧잘 하는 짓이었다. 이러고 있으면 시간도 술술 흘러갔다. 역시 한심했다.
별안간 문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나를 찾아올 사람이라고는 집주인 아니면 가스 검침원뿐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토요일 밤이었다. 집을 잘못 찾아온 사람인가.
노크가 한 번 더 울렸다. 나는 가운을 걸치며 서둘러 일어섰다.
“누구세요?”
문을 여니 남자가 있었다. 어김없이 쾌활한 미소를 짓고서.
말을 잊은 나를 지나쳐 남자가 실내로 들어섰다. 보무도 당당히 척척척 걸어왔다. 기가 막혔다. 반사적으로 “여긴 왜 왔어요?” 하고 묻자 남자가 “왜긴요. 이것 때문이지요.” 하며 가방에서 서류봉투를 꺼내 보였다.
“그게 뭔데요?”
“뭐긴요, 성병검사 결과죠. 친구 따라 병원 갔다가 저를 알아본 간호사에게 받았습니다. 그쪽이 찾아가지 않았더군요.”
얼굴로 피가 몰렸다. 남자에게서 낚아채듯 서류봉투를 확 빼앗았다. 내가 검사결과를 읽는 동안 남자는 방을 둘러보며 픽픽 웃었다.
결과는 이상 없음으로 나왔다. 거시기가 썩어 죽을 일은 면했구나, 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는 자신이 웃겼다.
“그쪽 거 잔뜩 먹고 그쪽 안에 잔뜩 싼 저도 관련 있으니 물어도 실례는 아니겠지요. 어떻습니까, 결과가?”
남자의 태연한 어조에 낯이 확 달아올랐다.
“……이상 없다고 나왔어요.”
“다행이군요. 그런데 이건 뭡니까? 인형놀이에 취미가 있었나 봐요?”
남자가 인형상자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취미 같은 거 없어요. 그냥 일이에요.”
“일이요? 인형 제작도 하고 있었어요? 흐음…….”
느물거리던 남자가 뒤에서 내 허리를 대뜸 끌어안았다. 움직임이 아주 빨랐다.
“그런 거 궁금해 하지 말고 나가기나 하지 그래요?”
팍 떨쳐내자 남자가 나를 안으려던 동작 그대로 씨익 웃었다.
“서류 한 장 전해 주러 두 시간 거리를 온 사람한테 너무한 거 아닙니까? 차 한 잔은 마시고 가야겠습니다.”
남자가 주저 없이 코트를 벗어 식탁의자에 걸쳐놓고 털썩 앉았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식탁을 탁, 탁, 두들기며 이쪽을 빤히 쳐다보았다.
“기가 막혀.”
할 수 없이 주전자를 올리고 배즙을 잔에 떠 넣었다. 남자의 심사가 뻔히 짐작 갔다. 아니, 짐작할 필요도 없이 남자는 노골적으로 내게 어필하고 있었다. 또 그걸 하자는 뜻이었다. 그렇다고 집까지 찾아오다니.
이거 귀찮게 되었는데…….
잔에 물을 부으며 생각에 빠졌다. 나는 섹스를 혐오하지는 않았다. 이왕 태어났으니 사람들이 하는 것은 다 하고 살아야지 하는 생각도 자주 했다. 잘해 주다가도 막판에는 기어코 자기 하고픈 대로 해 버리는 저 남자와의 섹스가 아예 싫지만은 않았다. 시간이 남아돌 때 저자가 찾아왔더라면 이쪽도 원나잇스탠드를 즐겼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 나는 인형눈알 달기에도 바빴고 몸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카섹스 때문에 감기로 고생한 나날을 생각하면 화도 났다. 물론 바로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골목을 서성거린 내 탓도 한몫했지만.
“향이 특이한데요. 무슨 찹니까?”
“배즙이에요. 나 같은 가난뱅이가 차 따위의 호사를 어찌 누리나요. 이거나 마시고 빨리 나가요.”
나는 식탁으로 꽝, 소리 나게 잔을 올려놓았다.
남자가 잔을 들며 빙긋 웃었다.
“요즘은 차보다 배가 더 비싸다고 압니다만.”
“할 수 없죠. 병원 가는 것보단 그게 싸니깐……. 기침 멎는 데 즉효예요.”
“그렇군요……. 많이 아픕니까?”
“그쪽이 신경 쓸 일은 아닐 텐데요.”
나는 인형상자를 뒤적거렸다. 사흘 안에는 이 끔찍한 눈알들을 전부 달아서 납품해야 했다. 상자 가득 번쩍거리는 눈알들이 소름끼쳤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에게 굶어 죽을 의향은 한 치도 없었다.
이쪽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남자를 무시하고 내 할 일만 했다. 이 꼴을 보고도 설마 계속 그 짓을 요구할까 싶었다.
남자가 잔을 기울이며 천천히 말했다.
“저 상자들의 인형 하나하나에 전부 달아야 합니까?”
“예.”
“눈 아프지 않아요? 이렇게 건조한 방에서 오래 들여다보면 안구건조증 생기겠어요. 책가게 일이 더 낫겠습니다.”
“어쩔 수 없죠. 나는 가난뱅이고 굶어죽지 않으려면 일해야 하니까요. 가게는 이맘때 언제나 닫아요. 불황이라서 손님이 거의 안 오거든요.”
“예…….”
남자가 잔을 내려놓는 기척이 났다. 인형눈알 달기에 열중하느라 나는 이쪽으로 오는 워커 소리를 잠깐 놓쳤다.
“앗!”
돌연 뒤에서 남자가 내 허리까지 가운을 확 끌어내렸다. 삽시간이었다. 깜짝 놀라고 말았다.
“다 마셨으면 나가라니깐요!”
언성을 높이는 나에게 남자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싫은데요. 이쪽이 차나 마시고 고이 나갈 녀석이 아니라는 정도는 이미 알고 있으리라 봅니다만.”
“난 바빠요. 여기 잔뜩 쌓인 상자 안 보여……아.”
남자가 유두를 건드리는 바람에 신음이 샜다.
“가만히 있어요…… 여기 좋아하죠?”
다 안다는 말투로 남자가 가슴을 애무하며 내 목덜미에 입술을 파묻었다. 역하게 다룰 때는 잔인하고 무자비했지만 애무만큼은 부드럽고 다정했다. 나는 안간힘을 써서 남자를 떠밀었다. 가운을 꽉 잡아 여미고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정말 안 돼요. 사흘 안에 저걸 납품해야 한다구요. 그러니까 제발 그냥 가요. 오려면 사, 사흘 뒤에 오든가 해요.”
“흐음.”
잠깐 생각에 잠기던 남자가 싱긋 웃었다.
“그럼 제가 일을 도와드리죠. 두 상자는 제가 할 테니까 어떻습니까. 그 정도면 제가 그쪽한테서 뺏는 시간 충분히 채울 듯합니다만.”
남자의 온몸에서 넉살이 뚝뚝 떨어졌다. 나는 결국 두 손 들어 버렸다.
참 대단하다, 대단해…….
한숨만 나왔다. 몇 번의 일을 겪으며 남자가 어떤 성격인지 알게 되었다. 성욕이 굉장히 강할뿐더러 인내심도 많았다. 이번에도 남자는 원하는 만큼 욕구를 채울 터였다. 장신에 기운까지 넘치는 저자에게 내가 힘으로 저항한다는 것도 코미디였다. 어떻게 생각해도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거기에다가 마침 나는 저놈의 인형눈알 다는 일에 신물이 나 있었다. 내가 무슨 성모 마리아도 아니고, 남자의 제안을 죽어라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일감을 밀려둔 채 남자에게 시달림을 당하느니, 일감을 줄이고 시달림을 당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나는 잔뜩 쌓인 인형상자를 암담하게 쳐다본 뒤 말했다.
“그럼 한 번만 가르쳐줄 테니 잘 봐요. 대신 세 상자를 해 줘야 해요.”
남자는 요령이 뛰어났다. 몇 번 만에 내 속도를 앞질러 버렸다. 손재주가 뛰어난 사람이었다. 인형 잡아 눈알달기까지 몇 초 만에 척척 해치웠다.
그에 비해 이쪽은 연신 터지는 기침을 막는 데만도 분주했다. 남자가 한 상자를 해치울 동안 나는 스무 개를 마친 것이 고작이었다. 정말이지 한심했다.
남자가 흘끗 곁눈질하더니 내 등을 가볍게 때렸다.
“기침이 심하군요. 괜찮아요?”
“일이나 얼른 해요.”
매몰차게 대꾸하자 남자가 웃었다.
“당연히 얼른 해야지요. 그래야 나도 좋고 그쪽도 좋지 않겠습니까.”
의미심장한 어조였다. 참 할 일 없는 사내다…… 속으로 투덜거리며 일에 열중했다. 남자가 재빠른 솜씨로 인형눈알을 달다가 대뜸 픽픽, 웃었다.
기분이 나빠졌다. 예전부터 남자의 저 묘한 웃음이 싫던 터였다.
“왜 그렇게 웃어요?”
“갑자기 생각나서요.”
“뭐가요?”
“그때 그 고등어 말입니다.”
“고등어?”
“생각 안 납니까? 그때 말입니다. 저에게 고등어 좋아하냐고 물었잖습니까. 그러곤 집에 저를 데려와서는 당신이 저에게 한 말이…… 하하하. 그땐 정말 그쪽이 대담했지요.”
“아아.”
그런 일이 있었지, 참.
이쪽을 살펴보던 남자는 내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어깨를 으쓱했다. 그가 또 불쑥 말했다.
“그런데 의외입니다.”
“의외?”
나는 인형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반문했다.
“뭐가요?”
“솔직히 인형눈알 다는 일 도와주겠다는 제안, 끝까지 거절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순순히 받아들이니 이쪽이 엉뚱한 추측을 하게 되잖아요.”
“엉뚱한 추측이라는 건?”
“뭐, 그렇고 그런 거죠. 인형만 아니었으면 당장 안겨 오지 않았을까 하는 거라든가, 그쪽도 나를 혹시 기다리고 있지 않았나 하는 거라든가. 혹시 내게 마음이 있었나 하는 거라든가. 하하하.”
짓궂은 어투였다. 나는 인형눈알을 붙이며 피식 웃었다.
“착각도 가지가지네.”
“그럼 뭐 때문인데요?”
“뭐 때문이긴요. 첫째, 며칠간 인형 만지느라 피곤하기 짝이 없어요. 얼른얼른 끝내고 싶은 마음밖에 없거든요. 둘째, 그쪽은 목적한 바는 반드시 달성하는 타입이니까요. 첫째와 둘째를 합치면 결국 그쪽 제안을 받아들이는 편이 낫다는 결론이 나오죠. 그리고 셋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