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 .M─ (14/101)

14 .M─

며칠간 마넨은 잠잠했다. 에밀렌 건으로 이쪽이 만족했으리라고 예상한 듯했다.

어림없는 수작.

나는 코웃음 쳤다. 울프삭 경의 심중이 어떻든 신경 꺼 버렸다. 본부장질 3년째였다. 내 말을 잘 듣지 않는 울프삭 경 몰래 음모를 진행하는 데는 이미 도가 터 있었다. 어차피 울프삭 경은 결과만 좋으면 껄껄 웃었다. 나는 기획한 아이디어를 언제, 어떻게, 누구로 터뜨리느냐, 에만 골몰했다. 정성껏 시나리오를 주물럭거린 다음, 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우선 검사 몇 놈을 불러 울프삭 경의 지시라며 거짓말한 다음, 마넨의 언론사를 쑤셔 보라고 운을 뗐다. 웬만한 업무는 가이거 대원들에게 맡기고 자질구레한 엄호만 해 달라고 했다. 아낌없는 지원을 약속한다는 말도 물론 잊지 않았다. 검찰은 울프삭 경과 한통속이었다. 절차 밟기는 사실상 의미 없는 형식적인 과정일 뿐이었다.

그런 후 대원들에게 신문쟁이 몇 마리를 납치하라고 지시했다. 마넨 소유의 언론사에 다음가는 이스트에덴 신문사 나리들이신데, 며칠 족쳐서 이쪽 사람으로 만들어 버릴 작정이었다. 뇌물을 건네는 따위의 낭비를 하느니 팡팡 패 버려서 푸들로 길들이는 편이 가뜩이나 어려운 나라살림에 이로울 터였다.

이로써 배우 캐스팅 작업은 끝났다. 2주일의 리허설을 거쳐 곧장 영화 상영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보안을 기해 요원들도 철저히 내 사람으로만 골랐고 인원도 최소한만 투입했다. 심지어 부장들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대개의 업무는 내가 일일이 지시하고 결재했다. 며칠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요즘 뭘 기획하고 있냐? 꽤 바쁜가 봐?”

“음.”

울프삭 경의 42번가 방문을 수행한 날, 본부에서 업무를 끝내고 레오파드와 저녁식사를 함께했다.

레오파드가 나에게 넌지시 물어왔다.

“직속부하들에게 들었어. 본부장님 특별지시로 신문쟁이들을 감금 중이라면서 우물쭈물하던데. 냄새가 보통 짙은 게 아닌걸. 솔직히 말해 봐. 요즘 개발 중인 작품이 뭐냐고. 기획의도가 뭐야, 응? 우리 명감독.”

“입이 가벼운 녀석들이군. 인사 조치를 해야겠는걸.”

“너무 탓하진 마. 고문 부장인 내가 일찌감치 낌새를 알아채리라는 정도는 너도 계산했을 텐데. 그렇다는 건 나도 작품에 끼워 주려 염두에 두고 있다는 뜻 아닌가. 그럼 어차피 이야기해야 할 텐데 지금 여기서 털어놓지?”

“있어 봐.”

나는 지그시 웃으며 와인 잔을 들어올렸다. 레오파드가 내 잔에 자신의 잔을 마주쳤다. 쨍, 소리가 났다. 찌르르 울리는 글라스 감촉이 유쾌했다.

제법 괜찮은 하루였다. 군중 속에 섞인 레이에게 잠깐 시선을 준 것이 행운이었다. 레이는 인파에 파묻혀 붉은 꽃을 흔들고 있었다. 강제 동원으로 급히 끌려나온 행색이었다. 사나운 바람에 아마빛 머리카락이 펄펄 나부꼈다. 텅 빈 푸른 눈이 이쪽을 응시했다. 나는 드물게 정신을 팔았다. 펄럭거리는 머리카락 옆에서 낯익은 면상이 문득 눈에 띈 것은 어디까지나 우연이었다.

하하하. 이게 누구야.

프랜 마엔파 아니신가.

프랜 마엔파는 엑달의 손꼽히는 수하였다. 엑달이 실각하면서 얀 머진과 함께 도주해 지금껏 행적이 묘연하던 참이었다. 피골이 상접한 낯짝을 보아하니 그동안 고생깨나 한 모양이었다. 무전기로 체포를 지시하려다가 멈칫했다.

살기등등한 마엔파의 낯짝이 심상치 않았다. 그의 손이 재킷 안쪽에 푹 들어가 있었다. 바로 직감했다. 암살 기도였다.

망설임 없이 총을 뽑아들어 마엔파를 사살했다. 공포로 질려 가는 레이의 하얀 얼굴이 제법 볼만했다. 선혈이 흘러내리듯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이 폭설 속으로 갈가리 뒤섞였다. 두려움으로 차오르는 푸른 동공이 깊은 밤의 만월 같았다.

그 모습에 반사적으로 아랫도리가 달아올랐다. 대원들에게 떠밀리며 안절부절못하는 레이를 보며 픽픽 웃었다.

하여간에 나라는 녀석이란…….

벌벌 떠는 울프삭 경에게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훈련받은 암살자가 아니라 프랜 마엔파입니다. 얀 머진 일로 나름의 보복을 시도한 것 같습니다.”라고 주의를 준 다음, 다시 레이를 눈으로 찾았다.

그는 이미 흔적이 없었다.

어쨌든 유명인사 한 마리를 골로 보내 줬고, 레이의 겁먹은 얼굴까지 구경했다. 일진이 좋았다. 살인과 공포, 그것은 언제나 내 감정을 붕 띄워 주었다. 내친 김에 레이의 헌책방을 오늘밤 방문할까 고려했다. 아직도 겁에 질려 있으면 더 재미있겠는걸. 하하하.

카섹스를 돌이키면 즐겁기만 했다. 레이의 반응이 끝내줬다. 아주 화끈했다. 정신을 못 차리며 비명을 질러 댔다. 땀범벅의 낯에 아마빛 머리카락이 달라붙은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꼴이 대단히 자극적이었다.

벌써부터 그의 유두가 눈앞에 어른어른했다. 밤새워 그걸 원 없이 빨아 댈 것을 상상하자 재차 아래가 뻐근했다.

“그나저나 레드폭스 말야.”

레오파드의 돌연한 언급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응?”

“네가 쏴 버린 새끼 옆에서 얼핏 보이던걸. 분명히 레드폭스였어. 강제 동원되어서 나온 꼬락서니던데 원래 42번가에 거주했나 봐.”

“그런가 보지.”

레오파드에게 레이의 거처를 털어놓을까 잠깐 고민했다. 내가 그동안 뒤에서 혼자서만 수작을 걸었다는 사실을 알면 대노할 것이 뻔했다. 레이에게 퍽 열중하던 레오파드였다. 진지하게 교제를 신청해 볼까, 하고 내게 털어놓은 적도 있었다. 뒤늦게 슬며시 켕겨 왔다.

레오파드가 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뭘 빼고 그래. 레드폭스 쳐다보고 있다가 마엔파를 발견했잖아.”

“무슨 소리.”

“흥, 누굴 속이려 들어. 너도 은근히 그년 마음에 들어 했잖아. 내가 샤워할 동안 네가 몰래 레드폭스 엉덩일 열심히 박아 댔던 거 모르고 있을 줄 알았어?”

레오파드가 실실 웃으며 이쪽을 살펴보았다. 이런 건방진 자식이 다 있나……. 기분이 확 나빠졌다. 이년, 저년 운운하는 호칭도 거슬렸다.

레오파드가 손을 활짝 펴서 흔들었다.

“알았어, 알았어. 그냥 해 본 소리야. 뭘 그리 정색하고 그래. 내 말은 뭐, 레드폭스가 요즘 바에 안 나타나서 섭섭하던 차에 이 서방님이 무진장 반가웠다, 이거지.”

“수행 중에 별생각을 다 했군.”

“흐흐, 정말이라니깐. 그년 얼굴을 보자마자 아랫도리가 바짝 서는데 죽을 맛이더라고. 어디 사는지 알면 당장 찾아가서 깔아 누워 버릴 텐데 말야. 안 그래? 너도 그렇지 않았어? 그년 엉덩이에 한꺼번에 두 개 꽂아 넣고 확 쑤셔 주면 유난히 크게 신음한다면서 좋아했잖아.”

결국 한마디 던졌다.

“눈이 어찌 됐어? 멀쩡한 사내놈에게 왜 자꾸 년, 년 하고 그래?”

와인을 입으로 가져가던 레오파드가 멈칫했다. 열 받은 눈초리로 이쪽을 잠깐 노려보았다. 내가 “뭐.” 하자, 레오파드가 어깨를 으쓱했다.

“알았습니다. 알았다고요, 본부장님. 놈입니다. 예에! 놈이고 말구요.”

레오파드가 빈정대며 와인을 마셨다. 동료로선 괜찮았지만 가끔은 시건방이 하늘을 찔렀다. 그 탓에 레이의 거처를 알려주지 않기로 깨끗이 결정 내렸다. 어차피 수도승 생활을 갈망하는 레이에게 레오파드가 교제를 신청해 봤자 소용없을 터였다. 엿이나 먹어라. 괜찮았던 하루의 마무리가 엉망이었다.

고문실로 들어서며 장갑을 꼈다. 구석에 웅크린 신문쟁이들 면상이 푸석푸석했다. 사흘간 물 한 모금 주지 않고 잠 한숨 재우지 않았다. 사흘 내리 밀실 형광등을 불규칙적으로 껐다 켜며 신경까지 극도로 예민하게 만들어 놓았다.

이스트에덴 회장이 더듬더듬 말했다.

“도,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섬뜩한 차림새에 채찍까지 든 나에게 완전히 기가 죽어 있었다. 이스트에덴 신문사는 민간 사업체였다. 납치된 신문쟁이들은 이스트에덴 신문사 회장 및 사장, 차장, 부차장, 편집국장 해서 총 다섯 명이었다.

저쪽이 가면으로 숨겨진 내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나는 습관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떨 필요는 없습니다. 사업 이야기나 하자고 신사 분들을 모셔왔을 뿐입니다. 그동안 대접이 마음에 드셨다면 기쁠 것 같은데요.”

체면치례용 인사 후 바로 용건에 들어갔다.

내가 원하는 것은 언론의 제 역할이다. 왕국에서 당신들만 제 역할을 해 주었더라도 부패귀족이 운영하는 신문사가 구독률 1위를 달리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거 아니냐. 얼마 전 자살한 노동투사 멀린의 경우를 보아라. 이스트에덴 신문사의 노동청 출입기자가 멀린이 제출한 진정서를 보도했고, 울프삭 경은 거기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마넨의 언론사에서 멀린의 알코올 중독과 정신병력을 폭로하며 그의 주장을 교묘히 폄하했고, 거기에 기업주까지 가세해 멀린을 탄압하지 않았느냐. 당신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멀린의 자살이라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모든 것이 부패귀족 마넨의 언론 통제력에서 나온 비극이었다. 시장에서 고작 11퍼센트를 차지하는 당신들이 제아무리 목청을 높여 봤자 누가 귀를 기울이겠는가. 우리는 이 일을 계기로 느낀 바가 많았다. 아시다시피 울프삭 경은 노동문제에 관심이 많지 않으냐. 우리 한번 진지하게 이야기 좀 해 보자. 그게 결론이다.

여기까지가 내 공갈이었다.

오들오들 떨며 경청하던 신문쟁이들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 이야기라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별것 아닙니다. 함께 잘해 보자는 이야깁니다. 이쪽은 정책을 펼 기회를 얻고, 그쪽은 구독률 1위의 신문사로 급부상하는 거죠. 우리가 수집한 자료가 있습니다. 누구나 알지만 쉬쉬하는 게, 저쪽 신문사가 마넨의 돈세탁 창구라는 사실 아닙니까. 우리 자료를 검토해 보면 흥미진진할 겁니다. 검찰도 비밀리에 수사 중이고요. 개시일이 2주 뒵니다. 그때 터뜨려 주십시오. 아, 그리고 그동안 우리 대원들이 그쪽 편집국에 상주합니다. 부담 가지지 마십시오. 혹여 발생할 마넨의 테러를 방지하기 위한 조처니까요. 그쪽은 안심하고 언론의 제 역할에만 충실하면 됩니다.”

여기까지는 내 협박이었다.

당장 회장의 입에서 맹렬한 노성이 터졌다.

“무슨 소릴 하는 게요!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 울프삭의 추잡한 진면목을 오늘 이렇게 보는구려! 우리까지 푸들로 전락할 순 없소! 구독률이 1프로로 떨어져도 알맹이 있는 언론사로 자존심을 지키―”

나는 손가락을 딱 쳤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건장한 사내들이 우르르 들어섰다. 손에 온갖 고문기구가 들려 있었다. 순식간에 핼쑥해진 신문쟁이들의 안색이 제법 볼만했다.

“머리만 빼고 정성껏 다져 놔. 출근할 때 낯이 울긋불긋하면 신사 분들 체면이 말이 아닐 테니까.”

그런 다음 신문쟁이들에게 말했다.

“사흘 뒤에 보죠. 그때까지는 생각이 바뀌었기를 바랍니다.”

밀실을 나서는 내 뒤에서 비명이 터지고 기계음이 웅웅 돌아갔다. 괜찮았다. 요즘 한가한 고문부에게 사흘 정도 소일거리를 던져 줘도 나쁘지는 않을 터였다. 바쁘지만 않았다면 나도 직접 신사들을 혼쭐내 주며 즐겼을 것이다.

나는 뇌물을 믿지 않았다. 뇌물을 받는 놈들은 더 많은 뇌물로 변심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폭력은 달랐다. 길게 떠들 필요 없이 파블로프의 개만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짧은 시간에 목적을 달성하는 경제적 효과도 클뿐더러 피 같은 비용도 축내지 않는다. 사흘 후 내가 방문했을 때, 고귀한 신문쟁이가 얌전한 노예로 변모한 모습을 구경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넥타이를 풀어 내던지고 보드카로 목을 축였다. 울프삭 경의 42번가 방문 후 일주일간 작품 준비로 정신없이 바빴다.

오늘은 신문쟁이들을 방문했다. 사흘 만에 점잖은 신사 분들의 얼굴 아래 모든 살코기가 퍽 보기 좋게 찌그러져 있었다. 육체뿐 아니라 정신도 찌그러져 있었다. 신사들은 똥오줌을 질질 싸며 이쪽 제의를 굽실굽실 수락했다. 나는 그 꼴을 음미하며 비웃음을 흘렸다. 알맹이 있는 신문 좋아하네. 왕국의 글쟁이들은 어차피 문신귀족들과 한통속이었다.

저런 꼴을 볼 때마다 정신의 힘 운운이 말짱 헛소리임을 인식한다. 매 앞에 장사는 없다. 과학으로 측정된 영혼의 무게가 7그램이다. 고작 7그램에 뭔 힘이고 자시고가 있겠는가. 하하하.

디데이가 일주일 뒤였다. 우리가 수집한 정보에는 마넨의 언론사 설립 목적부터가 돈세탁과 탈세라고 나와 있었다. 35년간 언론사를 통해 빠져나간 금액만 7조 탈란텐이었다. 그 정도면 마넨에게 수의를 입히기에 거뜬했다.

나는 보드카를 한 잔 더 마셨다. 이번으로 확실히 뭉개 주지.

기다려라, 이 파티광.

울프삭 경에 대한 충성심으로 기획한 작품만은 아니었다. 이번 일을 성공적으로 해치운 뒤 작위를 달라고 요구할 예정이었다. 육십을 훌쩍 넘은 데다가 자식이라고는 시집간 딸밖에 두지 못한 울프삭 경의 세도도 길어야 십 년이었다. 무엇보다도 최측근으로 대면하면서부터야 깨달은 울프삭 경의 멍청함을 더는 참아 주기 힘들었다. 나는 멍청이를 싫어했다. 그 아래에서 7년이면 나름대로는 인고의 세월이었다.

모든 준비가 끝나 갔다. 슬슬 아랫도리가 외로워졌다. 오늘은 42번가를 정찰하며 레이의 헌책방을 지나쳤다. 그러나 일주일 넘게 헌책방은 문이 닫혀 있었다. 어딘지 김이 빠졌다. 레오파드가 붙잡았지만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옆 세대의 크룩네가 파티라도 하는지 시끌시끌했다. 나는 보드카를 마시며 생각을 정리한 후 서재로 들어갔다. 컴퓨터로 다시 한번 상황을 검토했다.

문제될 일은 없었다. 마넨에게 대항마로 내세울 언론사는 확보했고 경찰도 우리 편이었다. 울프삭 경은 지상파 방송국의 대주주였으므로 텔레비전 쪽은 처음부터 걱정하지 않았다. 마넨의 애묘 에밀렌은 초저녁에 잡혀갔으니 판사들이 징징거려 봤자였다. 시위대야 때려잡으면 그만이었다. 남은 것은 축배를 들 일뿐이었다.

나는 여유롭게 의자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이놈의 아랫도리만 해결했으면 딱 좋은 하루였는데.

일주일 넘게 닫힌 헌책방이 떠올랐다. 동시에 레이의 휑한 원룸도 함께.

또 아프기라도 한 건가.

흐흠…….

이런 때는 내 지위가 참으로 편리했다. 컴퓨터로 사회안전 네크워크로 접속했다. 말이 사회안전 네크워크지, 국민감시를 목적으로 구축한 자료집이었다. 레이의 집 주소와 이름을 넣고 엔터키를 눌렀다. 삽시간에 모니터 가득히 그가 이제껏 살아온 기록이 주르륵 올라왔다.

죽이는군.

의자에 비스듬히 기댄 채 모니터를 응시하며 픽픽 실소했다. 진정 웃겼다. 고아 출신에 기초교육조차 받지 못했으며 7년 전까지는 국가보조금으로 생계를 연명했다. 그의 헌책방도 옆 룸에 살던 노파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 반반한 얼굴과 몸뚱이만 빼면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쓰레기였다. 심지어 섹스마저 초짜 아니었던가. 42번가에서 그 몸뚱이로 그 나이까지 섹스 초짜이면 뭔가 심각하게 문제가 있는 것이었다. 인생을 무슨 낙으로 살아가는 걸까.

픽픽 웃으며 마우스 휠을 성의 없이 굴리다가 멈칫했다. 진료기록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쇼크성 심장발작.

열두 살 때의 기록이었다. 섬뜩했다. 열두 살부터 열일곱 살까지 병원 출입기록이 매우 화려했다. 우울증, 거식증, 위염, 신경장애……. 저 많은 신경성 질병을 얻기까지 십대가 할 만한 고민이 뭐가 있을지로 나는 잠깐 머리를 굴려야 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이 있었다. 변변한 의료보험 혜택도 받지 못하는 레이가 무슨 경로로 병원비를 납부했는지 의문이었다.

그리고 내가 그를 억지로 병원에 데려간 2주 전을 제외하면, 십 년 전부터 지금까지 병원 출입기록은 씻은 듯이 끊겨 있었다. 흡사 지우개로 지워 버린 양 깨끗했다. 병원은 절대 안 간다고 고집 부리던 레이가 불현듯 떠올랐다.

담배를 뽑아 물어 불을 붙였다. 뭔가 심상치 않았다. 내가 수사관이고 레이가 범죄자였다면 제일 먼저 주목하고도 남을 만치 도드라졌다.

뭐, 내 알 바 아니지.

그 가랑이에 내 좆만 해결하면 그만 아니었던가.

내일은 토요일이었다. 간만에 휴식을 취할 겸 레이를 찾아가 보기로 결심했다. 현관에서 초인종이 요란하게 울렸다. 크룩 씨가 “이봐! 왔으면 왜 당장 달려오지 않구? 오늘이 내 생일이라 지금 파티 중이야!” 하며 요란을 떨었다.

“아, 예. 지금 갑니다.”

웃으며 일어섰다. 나는 인생은 즐기며 살아야 한다는 지론이 확고했다. 오십대의 성실한 가장 크룩 씨는 오늘도 어김없이 내게 결혼타령을 늘어놓을 테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름대로 즐거웠고 크룩 씨에게 보여 주는 쾌활한 모습도 내 본색의 일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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