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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L. (13/101)

13 ─L.

십 년 전 이맘때도 눈이 몰아쳤다.

당시 나는 열일곱 살이었고, 마넨 경은 공작에 머무르고 있었다.

「정말인가? 내 전속 주술사로 계약을 원한단 말이 진심인가?」

마넨 경이 놀란 낯빛으로 재차 물어왔다.

그날, 마넨 경과 나는 ‘사랑’을 맺었다. 그와 내가 맺은 전속계약 주술의 명칭이 ‘사랑’이었다. 웃기는 명칭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럴싸했다.

‘사랑’을 맺으면, 령은 계약자 외의 타인은 읽을 수 없게 된다. 주술은 단 하나만 사용할 수 있다. 요컨대 자신의 능력을 계약자에게만 한정해서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사용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주술은 투시였다. 계약자의 마음은 물론, 그의 몸에 스친 상대방의 심중까지 보고서 읽듯 샅샅이 감지해 낼 수 있었다. 이런 점도 마음과 마음의 결합인 사랑의 본질에 들어맞는다.

그리고 계약자는 령의 충성을 받는 대신, 몸이 고달파졌다. 내가 마넨 경의 정적들을 투시하려면, 우선 마넨 경이 정적들과 접촉해야 했다. 그 탓에 마넨 경은 정적들과 악수를 나누고자 불철주야 파티에 참석하느라 ‘파티광’이라는 품위 없는 별명을 달게 되었다.

서로 미친 듯이 노력하고 매달리지 않으면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그런 면에서는 사랑의 속성과도 비슷하다. 적절한 명칭인 셈이다.

주술사 집단 령의 시초는, 132대 령인 나도 알지 못했다. 겉으로 보기에 령은 일반 주술사들과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엄청난 금액을 지불하는 고객에게는 일반적인 주술사가 감히 흉내 내지 못하는 진정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대개는 엄청난 금액을 지불하지 않지. 기억해 두렴. 그들이 지불하는 거액의 진정한 의미를 말이다. 그건 곧 우리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뜻이야. 그들은 모래밭에 숨은 진짜 보석을 알아본 거야. 그런 자를 위해서만 우리는 고급 기술을 사용해야 해. 그것이 평범한 주술사와 우리의 차이야.」

스승이자 은인인 마라타는 그렇게 종종 말했다.

내 부모는 어린 시절 병마로 고생하는 나를 감당하다 못해 주변 사람들 몰래 버렸다. 왕국에는, 사람이 죽으면 그 시신을 산기슭이나 황무지에 놓아두고 이엉을 해 두었다가 육탈(肉脫)의 시기에야 좋은 땅을 찾아 무덤을 만들어 주는 풍습이 있었다. 이른바 가매장을 하는 셈인데 그 상태로 버림받은 나를 마라타가 데려갔다. 그때가 일곱 살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오르키투니카’를 갖추었던 나는 일찍이 스승 마라타를 뛰어넘었다. 령의 술법도 내 오르키투니카를 따라오지는 못했다. 그러나 마라타는 내가 훌륭한 령이 될 수 있을지언정, 타고난 병마 때문에 행복한 사람은 될 수는 없으리라고 걱정했다.

「차라리 그때 죽게 내버려두는 편이 너한테 나았을지도 모르겠구나.」

마라타는 한숨을 쉬며 자주 내 뺨을 쓰다듬었다.

본시 마넨 경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주술을 싫어했다. 그러던 그가 주술에 관심을 가진 계기는 마라타의 단골이던 아내 때문이었다. 아내의 조언이 기실 마라타에게서 나온 것임을 알게 된 마넨 경은 반신반의하며 42번가에 있는 마라타의 집을 찾아왔다. 세 시간 후, 그는 령의 신봉자로 탈바꿈하여 마라타의 집을 나섰다.

마넨 경은 운이 좋았다. 전속계약을 맺지 않는 한, 령은 거액을 지불하는 고객 누구에게나 능력을 발휘했다. 그것이 기본원칙이었다. 마라타의 정성들인 대접은 마넨 경이 거액을 지불한 고객이었기 때문일 뿐, 그 고객이 마넨 경이어서는 아니었다.

한참 뒤에야 그 사실을 안 마넨 경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무신귀족들이 주술을 경멸해서 다행이야. 그들은 정신영역을 무시하는 성향이 강해서 눈에 보이지 않으면 믿지를 않는다네. 그들이 조금이라도 똑똑했다면 지금쯤 마라타 자네는 오전에는 나를 대접하고, 오후에는 울프삭을 대접하고 있었겠지?」

「고객이라면 누구에게나 공평히 대접한답니다.」

「앞에 엄청난 금액을 지불하는―이라는 단서는 왜 안 붙이는가. 괜찮네. 내가 자네와 알고 지낸 지가 얼마인가.」

말은 저렇게 했어도, 마넨 경은 울프삭에게 자신과 령의 관계를 자랑한 것을 매우 후회했다. 울프삭은 멍청하되 직감이 뛰어나고 집요한 사내였다. 십수 년 전에 마넨 경이 설핏 흘린 이야기를 잊지 않고 지금껏 령을 추적하리만치 끈질겼다. 고객과 직접접촉이 필요했던 마라타가 아직 생존해 있었다면 일찌감치 체포당해 끌려갔을 것이다.

령의 후계자는 고객에게 철저히 숨기는 것도 원칙이었다. 마넨 경은 마라타가 죽는 날까지 내 존재를 알지 못했다.

「전속계약은 절대 맺지 말거라.」

마라타는 숨을 거두기 직전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나는 마라타의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마넨 경을 불러내 전속계약을 제의했다. 경은 이름조차 밝히기를 거부하는 나를 처음에는 의심했다. 그러나 내가 그의 심중을 백발백중으로 알아맞히자 군말 없이 계약을 받아들였다.

마넨 경은 이게 웬 행운이냐 싶었을 것이다. ‘거액을 지불한다면 누구에게나 공평한 대접’을 하는 령이 혹여 울프삭까지 접대하는 날이 올까 봐 노심초사하던 터였다.

「무엇을 원하는가. 여자? 남자? 보석? 돈? 집? 작위?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말하게.」

마넨 경의 말에 나는 대답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연락은 휴대전화로만 취하십시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상담할 수 있습니다.」

경제적 대가를 거부한 이유는 마라타의 유언을 어긴 죄의식의 발로에 불과했다. 그러나 울프삭의 추적을 받는 지금 돌이키면 천우신조가 아니었나 싶다. 병마로 죽기는 싫지만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최후도 달갑지 않았다.

내가 마넨 경과 ‘사랑’을 맺은 이유는 병마를 조금이라도 약화시키려는 목적이 제일 컸다. 하필 그 시기는 병마가 내게 최악의 고통을 안기던 무렵이었다. 전속계약을 맺으면 내 능력은 계약자에게만 묶이겠지만, 고통은 줄일 수 있으리라고 계산했던 것이다.

더불어서 개인적인 이유도 있었다. 하고많은 상담자 중에 마넨 경을 계약자로 선택한 까닭도 거기에 있었다.

계약의 효과는 나쁘지 않았다. 병마가 완전히 떨어지지는 않았으나, 계약을 맺지 않았다면 나는 미치광이로 전락해 지금쯤 어딘가를 떠돌아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독으로 독을 억누른 셈인가. 뭐, 령은 주술사일 뿐 종교인이 아니다. 죽음에 초연히 대처하는 고행 따위는 령의 주술법에 있지도 않았다. 그리고 나는 죽음의 공포에 태연할 수 없는 한갓 평범한 인간이었다.

어쨌든 그 탓에 나는 극빈자 신세였다. 주술이 묶여 버린 나는 한갓 무능력자일 뿐이었다. 령 수업을 받느라 학교를 다니기는커녕 이렇다 할 기술도 연마하지 못했다. 마넨 경은 내 상담 덕분에 승승장구하여 1년 전 로터스에 올랐다. 그 성공의 가장 큰 밑받침인 나는 정작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다.

마라타는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다. 내가 물려받은 것이라고는 령의 주술법과 대대로 내려오는 방울 하나 그리고 오래 묵은 코트 한 벌이 전부였다. 평범한 주술사로 위장했던 마라타는 매춘부 고객을 상대하고자 42번가에 둥지를 틀었지만, 나는 찢어지게 가난한 탓에 이 도시에서 가장 집세가 싼 42번가에 거주했다.

옆 룸에 살던 혈혈단신의 노파가 임종하며 자신의 헌책방을 내게 넘겨줘서 조금이나마 금전 사정이 호전되었으나 빈곤은 변함없었다. 이런 한심한 나날이 벌써 십 년째였다.

창문 틈을 비집고 칼바람이 불어왔다. 겨울이 석 달가량 남은 이맘때가 가장 빈곤했다. 1년 중 최악의 불황을 달리는 시기였다. 가게에 들르는 손님은 일주일에 두어 명이 고작이었다. 한 달 전기세 내기도 벅찰 지경이라 결국 어제부터 책방 문을 닫고 잠정휴업에 들어갔다.

이런 때 나는 극빈자답게 인형눈알이나 달며 생계비를 벌었다. 손재간이라고는 없는 나에게 꽤 어울리는 일감이었다. 비좁은 방에 산더미처럼 쌓인 인형들을 훑어보며 마냥 킥킥 웃었다.

“참 궁상이다, 궁상.”

또 기침이 나왔다. 도통 기침이 멎지 않아 요즘에는 가슴팍이 뻐근할 정도였다. 이놈의 감기.

감기를 얻은 이유를 돌이키면 창피하기만 했다. 전부 남자 때문이었다. 그 변태 때문에 애꿎은 내가 이 고생이었다. 집까지 태워 주더니 또 자동차에서 내게 덤벼들었다. 오럴까지는 나도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칠 줄 알았다. 그러나 남자는 체내삽입까지 기어코 감행하고야 말았다.

오럴로 만족 못하냐고 묻자 “여기까지 왔는데 말이 안 되지요.” 하며 너스레만 돌려주었다.

문도 안 열어 주며 하하하, 웃어 대기만 하니 속수무책이었다. 의자등받이를 뒤로 당겨서는 나를 눕히고 두 번이나 했다. 기절할 뻔했다. 죽는 줄 알았다. 차는 어찌나 흔들리는지 멀미까지 올라왔다. 엄청난 장신에 체구까지 단단한 남자가 위에서 눌러 대니 숨이 콱콱 막혔다. 돌덩이에 깔려 버둥대는 느낌이었다. 발바닥이 차 천장에 부딪히리만치 엉덩이가 높이 들려 꽂혔다.

남자의 등을 필사적으로 붙잡고 매달렸다. 남자가 집요하게 밀어붙이며 내 엉덩이를 철썩철썩 때렸다. 내 전신에서 땀이 나왔다. 아래를 후벼 파는 페니스에 평소와 달리 비명과 신음이 거세게 터졌다. “아! 아! 아!” 하며 소리 질렀다. 고통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쾌감이었다. 남자가 야릇하게 웃으며 내 표정을 즐기는 것을 깨달았지만 정신이 없어서 뭐라 하지도 못했다. 한참을 시달린 후 간신히 옷을 입고 나왔다.

일순간 낯이 화끈거렸다. 길을 어슬렁거리는 경관들이 음흉하게 웃으며 이쪽을 쳐다보았다. 이웃이 혹여 나를 보기라도 한다면, 하는 생각에 창피함이 전신을 덮쳤다.

황급히 골목으로 들어가 시간을 흘려보낸 뒤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날로 감기에 걸려 버렸다.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나쁜 자식 같으니라고.

나는 인형눈알을 달며 “한심하다, 한심해.” 중얼거렸다.

갑자기 창밖에서 찢어지는 고함이 터졌다.

“좀 더 연호하란 말이야! 연호! 연호!”

나는 카디건을 걸치며 창가로 걸어갔다. 불황으로 한동안 썰렁하던 거리가 오늘은 귀가 따가울 만큼 시끄러웠다.

의원선출 대회를 앞두고 울프삭이 42번가를 방문하는 날이었다. 강제로 동원된 사람들이 길목에 가득했다. 멀리서 울프삭의 등장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위협적으로 울려 퍼졌다. 거리 곳곳에서 플랜카드와 깃발들이 나부꼈다. 줄줄이 걸린 깃발들이 으스스했다. 깃발마다 왼손에는 칼을, 오른손에는 피를 뚝뚝 흘리는 자신의 목을 든 성인이 채색되어 있었다. 울프삭 가문의 문장, ‘머리를 손에 든 성인’이었다.

찬바람이 새는 창가에 서 있으니 몸이 으슬으슬했다. 그러나 나는 울프삭의 42번가 방문을 계속 지켜보기로 했다. 이래봤자 무슨 호재가 생기랴만…… 하고 중얼거리며 쓰게 웃었다.

1년간 울프삭을 본격적으로 상대하면서 요즘에는 제법 기력이 딸리던 터였다. 전속계약으로 묶여 버린 내 능력이 아쉬웠다. 령으로서 배운 주술들을 제대로 유지했더라면 울프삭 정도는 오래전에 온몸 구멍구멍에서 검은 피를 흘리며 죽게 했을 것이다. 뭐, 어차피 떠나간 일이다.

멀찍이서 호사스레 치장한 오픈 트레일러가 나타났다. 트레일러 뒤에서 수십 대의 차 행렬이 줄줄이 따라왔다. 선두의 오픈 트레일러에서 손을 흔드는 울프삭이 멀리서도 또렷하게 보였다. 울프삭의 주변에는 장신의 남자들이 빈틈없는 자세로 우뚝 서 있었다. 가이거 부장들이었다.

검붉은 제복코트를 흩날리는 부장들 전원이 무시무시한 가면을 쓰고 있었다. 코트의 등 부분에는 ‘머리를 손에 든 성인’ 문장이 수 놓여 있었다. 잔혹한 눈바람과 들끓는 함성에도 부장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울프삭이 조금만 가까이 다가와도 귀족들이 몸서리친다던 마넨 경의 말이 기억났다. 저런 사내들을 주위에 거느리고 파티장을 활보하면 누구라도 오금이 저릴 만했다.

건너편 주택가에서 가이거 대원들이 사람들을 강제로 끌어내고 있었다. 길목을 메운 군중으로도 성이 안 차는 모양이었다. 저런 패악을 부리면서 어찌 표를 얻을 생각을 할까.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뒤에서 고함이 터졌다.

“문 열어!”

이런.

이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문을 열자마자 가이거 대원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당장 나와!”

한 마디만 하고서는 나를 사납게 끌어냈다. 주택 전체가 강제로 끌려나오는 사람들로 들썩들썩했다. 한겨울 바람이 몰아치는 거리로 사람들과 함께 내쫓기다시피 밀려나왔다. 따뜻한 방에 있다가 갑작스레 맹풍을 온몸으로 받자니 이루 말할 수 없이 추웠다. 코트를 챙길 틈도 없이 끌려나오는 바람에 나는 카디건 한 장만 걸친 차림새였다. 뼈까지 시려 왔다. 사람들에게 떠밀려 엉겁결에 인도 경계선까지 갔다.

“이거 받아! 힘껏 흔들어!”

가이거 대원들이 사람들 손에 붉은 꽃을 쥐여 주었다. 내 손에도 우격다짐으로 꽃을 쥐게 했다. 나는 붉은 꽃을 흔들며 연신 새는 기침을 간신히 참았다.

“재포니카! 재포니카!”

“만세! 울프삭 경 만세! 만세!”

연호하는 가이거들에게 맞추어 사람들도 목청을 높였다. 환호성과 구호, 나팔 소리가 인도를 바르르 진동시킬 만큼 높아졌다.

얼른얼른 끝내고 꺼져 버려, 이 돌대가리야. 바보야. 멍청이 무신 놈아.

나는 마넨 경이 입버릇처럼 해 대는 욕을 속으로 퍼부으며 꽃을 흔들었다. 그러나 오픈 트레일러가 가까이 다가온 순간 무심결에도 찬찬히 울프삭을 살펴보았다. 그의 실물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고령에도 무신귀족답게 풍채가 당당했다. 화려한 제복에 수많은 훈장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여유 있게 손을 흔드는 그는 태생적으로 타고난 잔혹한 인상을 풍겼다. 그 혼자만으로도 위압감이 대단하건만, 옆에 가이거 부장들까지 있으니 마치 맹수 무리 같았다.

나는 울프삭을 둘러싼 가이거 부장들을 훑어보았다. 미동도 없이 우뚝 서 있는 그들이 착용한 가면은 왕국 전설에 등장하는 사신 토고였다.

신령한 물의 왕자였던 토고는 부친의 미움을 사 변방으로 쫓겨난다. 토고는 변방에서 군사를 모아 반역을 일으킨다. 토고와 그 군사들이 지나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피가 바다처럼 흐른다. 끝내 부왕을 살해해 복수한 토고는 아버지의 피를 술잔에 담아 마신다. 그 즈음 토고의 얼굴은 쳐다보기만 해도 사람들이 소스라쳐 죽을 만큼 끔찍하게 변해 버렸다고 한다.

역시 저 부장들이 그 검은 기운과 관련이 있을까.

겉으로는 섬뜩한 차림새로 사람들에게 겁이나 주는 깡패들로만 보일 뿐이었다. 울프삭도 가이거 부장들을 무시하며 경멸하기 일쑤였다. 판단이 서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꽃을 흔들었다.

“재포니카 만세! 재포니카 만세! 만세!”

사람들이 악을 쓰듯 외쳤다. 오픈 트레일러가 지나가는 곳마다 색지가 축포처럼 터졌다. 풍선들이 흰 눈발이 몰아치는 하늘로 우수수 올라갔다. 가이거 대원들이 고함쳤다.

“꽃을 흔들어! 열렬하고 힘차게! 울프삭 경께서 다가오시면 꽃을 던져!”

참 악취미다, 악취미…….

나는 쓰게 웃으며 열렬히 꽃을 흔들었다. 마넨 경이 울프삭을 몹시 싫어하는 이유를 이해했다. 물과 기름이었다. 조용하고 단아하며 품위를 중히 여기는 마넨 경과, 시끄럽고 난폭하며 과시적인 울프삭은 흑과 백처럼 대비가 선명했다.

어차피 둘 모두 국민의 고혈을 빨아먹는 기생충이지…… 나는 냉소하며 울프삭을 향해 붉은 꽃을 던졌다.

바람에 몸을 실은 꽃이 서서히 날아갔다. 달빛에 젖은 형장으로 끌려가는 죄수처럼, 무력하고 위태로운 움직임으로. 붉은 꽃이 울프삭 오른쪽에 서 있는 남자의 어깨를 스쳤다. 그의 가면이 불현듯, 내 시선 속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손짓을 멈추었다. 홀연 묵중한 어둠이 주위를 에워싸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몸 한구석이 지끈거렸다.

미동 없이 서 있던 남자의 손에 어느 틈엔가 권총이 들려 있었다. 총구가 이쪽을 노리듯 향했다. 가면에서 드러난 차가운 눈빛이 내게로 부딪쳤다. 그리고 한 방의 총성.

남자의 권총에서 하얀 연기가 올라왔다.

짧은 시간이 지나갔다. 그동안 거리를 지배한 것은 침묵이었다. 이윽고 고함이 터졌다. 가이거 대원들이 사람들을 거칠게 밀치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멍하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바로 옆에 한 사내가 쓰러져 있었다. 그를 살펴본 가이거 대원들이 소리쳤다.

“권총입니다! 암살잡니다!”

트레일러에서 호위병들이 울프삭을 황급히 감싸며 아우성쳤다. 삽시간에 주변이 난장판으로 변했다. 오로지 권총을 발사한 남자만이 냉정했다. 그가 무전기로 잠깐 교신을 취하더니 울프삭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속삭거렸다. 울프삭이 황급히 옷매무새를 바로잡았다.

사람들에게 떠밀려 나는 계속 뒷걸음질 쳤다. 가이거 대원들이 총살당한 시체를 비스듬히 들어올렸다. 송장의 얼굴, 총탄에 맞아 뻥 뚫린 부위에서 눈알이 흘러나왔다.

나는 입을 움켜쥐었다. 토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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